티스토리에 올렸던 쪽글입니다.

inspired by 初音ミク - glow




0.

  소꿉친구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다.



1.

  네가 수족냉증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네 손에 내 손을 깍지 끼진 않았을 거다. 너는 그 동그란 눈으로 조금 놀라더니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깜빡, 깜, 빡 하고 움직이는 길고 숱 많은 속눈썹만 아니었어도 네 이마에 키스하진 않았을 거다. 너는, 뭐랄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름다웠다. 너는 소꿉친구 치곤 특이했다. 나는 소꿉친구 치곤 너를 너무 많이 생각했다.



2.

  초콜릿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하다 못해 내가 피는 담배 냄새를 들이마셔도, 너에게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연분홍빛 향기가 났다. 그 내음은 샐쭉 올라간 네 입꼬리와 신기하게 닮아 있어서 난 정말이지 동그라미 두어 개와 작대기들로 이루어진 그 딱딱한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온몸에서 무언가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복사꽃 향기도 널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달진 않을 것이며 복숭아를 베어 물어도 네 이름을 외는 것만큼 혀끝이 아리진 않을 것이다.



3.

  네 입술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허물어지듯 떨어지는 순간 나는 펑펑 울었다. 붙잡아야만 하는 무언가를 저 멀리 뵈지 않는 곳까지 떠내려보낼 기세로 펑펑 울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너는 바보같이 그럴 줄 알았다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네 웃음을 울음으로 삼켜댔다. 네 연분홍빛 향기가 내 몸에 무시로 피어난 그것들을 똑, 또독 하고 꺾는 그 못된 쾌감이 너무나도 커서 나는 너를 내 체중으로 짓뭉개며 아, 아아, 하고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신음을 질러댔다.



4.

  소꿉친구를 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어려운 거였다.



5.

  바람에 낙엽 떨어지듯이 너는 쉽게 스러졌다. 내가 몇날 며칠을 애무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연분홍빛 향기는 네 별거 아닌 육신과 함께 허망하게 연소하며 일말의 무게감도 남기지 않은 채 날아가 버렸다. 믿을 수가 없어서 너를 몇번이고 다시 만나러 갔다. 손바닥만한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는 너를 보고 있노라니 속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아서 나는 꺼이꺼이 보기 싫게 울었다. 무색무취의 세상은 보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그 무색무취의 세상 속에서 너의 아름답다 못해 생각만 해도 그립고 그리워 손끝과 입술이 파들파들 떨릴 지경의 연분홍빛 향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기에, 나는 당장에라도 던지든 매달리든 빠지든 하고 싶은 마음을 힘들게 억눌렀다.



6.

  평생에, 네 향기를 딱 절반만큼이라도, 아니 네 속눈썹 끝에 맺혔던 그만큼이라도 닮은 사람을 나는 보질 못했어. 네가 보고싶다. 네가 보고싶어. 이럴 거면 널 곁눈질로 바라보지 말걸. 두눈 똑바로 뜨고 널 차고 넘치게 눈에 담을걸. 손가락 두어 개만 겨우겨우 걸치지 말걸. 네가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할만큼 네 손을 꽉 잡을걸. 나는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그게 그렇게나 두려웠던 걸까. 결국 정말로 두려운 걸 맞이해버린 주제에.



7.

  미안해. 나는 몰랐나봐. 그 연분홍빛 향기에 안 그래도 감각 중에서 가장 해이하다는 후각이 정신을 차리질 못해서, 아, 이건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내 일상이, 내 삶이, 내 일부가, 어쩌면 내 전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오만한 판단을 해버려서 너를 소중하게 여기질 못하고 그저 늘 곁에 있을 그정도의 소꿉친구로 생각했나봐. 벌이다. 몸에서 살점을 쥐어뜯어내는 것처럼 너를 뜯어내고 발라내도 그 향이 나도 모르는 내 몸 어딘가에 배어 있어. 고마워. 좀 더 악착같이 버텨줘. 악착같이 내 안에 있어줘. 나도 너를 악착같이 기억할게. 이번엔 정말로, 약속할게.



0.

  소꿉친구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다.



8.

  그래서 너를 너무 안일하게 좋아했나보다. 사생(死生)의 심정으로 널 대할 생각에 미처 이르지 못했나보다.



2.

  초콜릿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하다 못해 내가 피는 담배 냄새를 들이마셔도, 너에게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연분홍빛 향기가 났다. 그 내음은 샐쭉 올라간 네 입꼬리와 신기하게 닮아 있어서 난 정말이지 동그라미 두어 개와 작대기들로 이루어진 그 딱딱한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온몸에서 무언가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복사꽃 향기도 널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달진 않을 것이며 복숭아를 베어 물어도 네 이름을 외는 것만큼 혀끝이 아리진 않을 것이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했다.



10.

  지금도.



2차창작 위주: 신세기 에반게리온, 동급생

머더래빗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