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하여간 답답해."

"왜 그러세요?"


조금 늦은 퇴근 후, 침대에 걸터앉아 귀에서 귀걸이를 빼던 가은은 침대헤드에 기대어 누워 발을 구르는 하민을 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탓에 귓가에서 사라락 옆머리가 흘러내렸고 하민은 몸을 일으켜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가은은 간지러운 듯 눈을 휘었고 하민은 내친 김에 귀와 입술에 뽀뽀를 해 주었다. 


"아하하. 간지러워요."

"휴. 속이 좀 풀리네."

"왜 그러세요?"

"순대랑 장 팀장 때문에."


하민의 답에 가은 역시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먹을 때 회사에서 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주곤 하는 하민의 주된 반찬(씹고 뜯는다는 점에서)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장 팀장 이 눈치 없는 새끼는 왜 지가 지 맘도 모르지? 좋아하는데. 백퍼."

"순정 씨가 속 좀 타겠어요."

"걔는 성격이 지랄이야. 나만 볶지 나만."

"그래도 귀엽던데요. 얼마나 답답하면 그러겠어요."


집에도 놀러 왔던 하민의 부사수를 떠올리며 가은은 부드럽게 웃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이 꼭 은주와 하민을 보는 것 같았다. 하민의 취향과는 여러 모로 거리가 있었기에 경계 대상도 아니었고 좀 귀여운 면이 있어서 가은에게도 호감인 순정이었다. 


"아님 이것들 잘 됐는데 입 딱 씻는 거 아니겠지? 네 채널백 뜯어내야 하는데."

"무슨 채널백이요?! 아무리 장수현 팀장님이 부자라고 해도 과하지 않아요?"

"아냐. 내가 그 화상 둘 때문에 고생한 게 얼만데. 억울해서라도 뜯어낼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장 팀장님께 말하시지 그랬어요. 순정 씨가 아니라."

"…그건 싫어. 장수현 도와 주긴 싫거든."


애 같은 태도에 가은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하민을 쳐다보았다. 하민은 정말 연상다운 연상이었고 늘 어른스럽고 쿨했지만, 이런 순간에 보면 아직 어린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의외로 꽤 질투가 있으시단 말이지.

말 그대로였다. 하민은 장수현, 장 팀장을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한다기에는 동고동락한 세월이 있었고 명실공히 장 팀장 라인의 최선봉에 있는 하민이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입사를 했음에도 한참을 앞서가는 직급이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이었고. 더 큰 이유는 장 팀장의 존재 그 자체였다. 

마냥 무능한 낙하산이면 차라리 정신 승리라도 할 텐데, 장수현은 그런 낙하산도 아니었다. 낙하산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비슷하게 과장은 달았을 정도로 유능하기도 했거니와, 하민이 갖지 못한 능력도 있었다. 


[장수현(마케팅 2팀): ㅇㅇ. B가 낫던데요]


역시나.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장 팀장은 보자마자 속전속결이었다. 이 점이었다. 장수현의 결단력과 안목. 매사에 신중한 하민은 자신이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는 능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학연도 혈연도 없는 핫바지 대리인 저를 콕 찝어서 일하자고 한 것도 장수현이었고, 인플루언서고 뭐고 류아람이라는 메인모델만 밀고 나가자고 결정한 것도 장수현이었다. 물론 그 사이 실무는 다 내가 했지만, 결정과 그걸 밀어 주는 힘은 장 팀장에게 있었다.

'그런 주제에 맨날 일 잘해서 좋겠다는 둥 사람 속만 긁고 말이지….'

S대라는 학벌. 그리고 자신의 동생처럼 착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조금 허술해도 주위 사람들의 예쁨을 받고 다니는 것까지. 부러웠다. 


"별로야."

"재밌는 분이시던데요."

"걔 칭찬 하지 마."

"친하시면서 그러시네요."

"안 친해. 그냥 같은 배를 탄 것뿐이지."

"인정하시면서 또 또."

"그 황금 낙하산…. 채널백 내가 꼭 뜯어낸다."



i. 


"나 차였으니까 나가라고요!!!"


발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노트북을 챙기던 순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미친?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자신만 들은 게 아닌지 모든 팀원들이 고개를 빼꼼 든 채 팀장실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차여? 누구한테? 이 미친 장 팀장, 주말 사이에 소개팅이라도 했어?'

실시간으로 차오르는 분노 게이지. 안 그래도 그때 성질머리 못 참고 발가락으로 바위치기를 했다가 전치 2주라는 진단을 받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자기 잘못이었지만), 저런 소리를 들으니 복장이 다 뒤집히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재택 근무 준비하러 그 비싼 택시비 내고 병가인데도 회사에 왔는데. 이 뭐 같은…. 이판사판 공사판이었다. 매사에 신중하고 침착한 김순정 대리는 이 자리에 없었다. 

뭔 일이래 하며 팀장실만 보던 김정훈 대리는 목발이 제 뒤에 내팽개쳐지며 낸 굉음에 엄마를 찾으며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깁스 바람으로 팀장실에 들어가는 순정을 보고 아 오늘 일하기는 글렀구나 팝콘이나 사와야겠다 생각했다. 




수현과 하민은 노크소리도 없이 활짝 열린 팀장실문에 한 번 놀랐고, 그걸 연 사람이 순정이라는 것에 열 번쯤 놀랐다. 두 사람 모두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지만 하민의 의문이 더 구체적이었다. 

'깐 거야? 까인 거야? 뭐야 대체?'

그러나 이윽고 하민의 물음표는 느낌표를 거쳐 경악으로 번져 갔다.


"아아아악!! 김 대리, 김 대리?! 왜, 왜 이래요. 아파요!!!"

"나 울려 놓고! 뭐? 고백?! 누구한테 차였어요?! 진짜…. 죽을래요?!"

"아악. 아파요. 그리고 김 대리 발도 아파요."


깁스 한 발로 대차게 팀장의 쪼인트를 까는 자신의 부사수. 회사 생활에서 쉽사리 볼 수 없고 봐서는 안 될 광경에 하민은 경악하며 순정을 뜯어말렸다. 순정은 분에 차서 씩씩거리면서도 눈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병원 갔다가 짐만 챙기러 온 거라 프리한 행색까지 더해져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 터지던 수현은 순정의 눈물을 보고는 당장에 저를 때리던 깁스한 발을 만지며 온갖 걱정을 쏟아냈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또 박살났나 봐. 산산조각난 거면 어떻게 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으흑. 윽. 아파…."

"거 봐! 아프대잖아. 내가 맞거든요?"

"야. 순 대리. 아파서 우는 거야?"

"아픈 거 맞다니까. 어떻게 해. 119?"

"팀장님 미워……."


'아? 뭐야?'

몰라. 이제 귀찮고 짜증나. 하민은 그냥 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이게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이겠지. 둘 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으니 좋은 짝지였다. 하민은 붙들고 있던 순정을 내팽개치듯 수현에게 떠넘겼다.

수현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순정의 아픈 다리가 땅에 닿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키 큰 두 사람 사이에서 짐짝처럼 옮겨진 순정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수현은 영문을 모르겠긴 했으나 분통하다는 듯 자신의 목을 쥐어뜯으며 우는 순정이 안쓰러워서 차인 것도 잊고 토닥토닥 얼러 주었다. 그런 둘을 본 하민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더니 팀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자신과 팀장실만 바라보는 12개의 눈동자들에 고했다. 팀장에게도 들릴 정도로 아주 큰 목소리로. 


"팀장님이 우리 점심 먹으러 가랍니다. 사비로 쏘신대요. 제가 나중에 청구할 거니까 소고기 먹으러 갑시다."

"네? 와!!!"

"헐 대박. 오늘 무슨 날이래요?"

"아니. 근데 순 대리는 먼 일이래요?"

"팀장님이 순 대리 발 밟아서 으깼대요. 갑시다."


하민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지만 팀원들은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그야 뭐 사내연애 시작하셨답니다 하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일 테니까. 11시에 시작된 소고기 회식은 아마도 입막음 비용일 테니까. 일머리만큼이나 눈치도 좋은 마케팅 2팀 사람들은 "어유 배에 기름칠 좀 해 보실까~?" 스트레칭을 하며 하민을 따라나섰다. 




"……."

"……."


그리고 침묵과 적막만이 남은 팀장실. 순정은 수현의 품에 안겨 분을 삭혔고 분을 삭히고 나니 아찔해졌다. 아무리 열받았다고 한들 자신이 지금 상사인 수현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니 상사이기 이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데이트폭력도 아니고. 

그럼에도 원망스럽고 서운하고, 복합적인 감정에 어떤 말도 순순히 나오지를 않았다. 당장 내려가서 사과하고 대가리라도 박아야 하는데. 내려가기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죄송해요."

"내가 미안하죠. 발은 안 아파요? 이제?"

"네…. 내려 주셔도 돼요."


수현은 조심스레 순정이 발을 디딜 수 있게 내려놓았다. 그러나 처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강한 외부 충격을 준 발이 목발도 없이 멀쩡할 리가 없어서 딛자마자 순정은 미간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수현은 놀라서 도로 안아올렸다. 그러나 짐짝처럼 넘겨받았던 아까와는 달리 마주 보고 안아 올린 거라 두 사람의 얼굴은 아주 아주 가까워졌다. 


"…."


아. 이거 키스각인데. 팀장님은 그딴 분위기 안 읽으시겠지. 수현의 그렁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순정은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입술에 닿은 말랑한 촉감. 


"어?"

"미안해요. 미안. 성희롱으로 신고해도 할말 없는 거 아는데……. 미안해."

"미안하세요?"

"네…."

"그럼 한번만 더 해 주세요."

"뭐를…?"

"아이씨."


순정은 밍숭맹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현의 뺨을 꽉 붙들고 입술을 부볐다. 아까 가벼웠던 입맞춤과는 달리 진득했다. 놀라서 뭐라 말을 하려는 수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파고 들었다. 


"…?!"

"하아."


혀와 혀가 엮이고 서로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수현 역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눈을 살그머니 감고서 입맞춤에 집중했다. 숨이 부족하면 떨어졌다가도 채 한 번 숨을 쉬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맞붙었다. 순정은 어느새 수현의 어깨에 두 팔을 올리고 완전히 목을 그러안고 있었고, 수현의 두 손 역시 순정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한참 그렇게 키스를 하고 수현은 슬슬 힘에 부쳤는지 순정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을 꼭 잡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차였는데 질척거려서 미안해요…. 오늘 일은 김 대리가 저한테 주는 퇴직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꺄악?!"

"차여요? 팀장님이? 누구한테요. 저한테요?"

"지금도 찼잖아요. 아파……."

"아니. 방금 건 놀라서.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왜 차요?! 언제 찼어요? 내가?"

"10분 전…."

"물리적으로 찬 거 말고."

"그때. 집앞에서…. 내가 미안하고 치정극 질색이지만 좋아한다고…."


맙소사. 자신이 흘려 들은 대사가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었다니. 순정은 충격에 빠졌다. 아니. 그럼 그 앞에 문 과장이 시켜서 한 거란 건 뭐고. 왜…? 뭐가 미안한 거야? 늘. 아니. 일단 가장 중요한 사실은.


"팀장님도 저 좋아해요?"

"네. 저도 김 대리 좋아해요."


감격의 고백. 순정은 환희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비록 이어지는 수현의 말에 쏙 들어갔지만. 


"민 과장도………."

"아니. 왜 계속 중요할 때 문하민 과장님 핑계를 대는 거예요?!? 우리 뭐 셋이 연애해요?!"

"저는 이제 그것도 괜찮아요!"

"미쳤나 봐. 폴리아모리예요? 전 싫거든요?!"

"왜애. 나도 껴 줘요……."

"아니. 무슨 소리냐고."


순정은 하민의 멱살을 잡았듯 수현의 멱살을 잡고 다시 한번 진하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어안이 벙벙한 수현의 얼굴을 붙들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둘이만 하는 거예요. 문 과장은 아무 상관 없고."

"어……? 불."

"불가하다는 말은 안 돼요."

"불, 불륜?"

"뭐어?!"

"아니, 아니에요?"

"우리 얘기 좀 해요. 팀장님."


무언가 오해가 많다는 것을 직감한 듯한 순정의 말에 수현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얼굴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도리질을 할 수도 없었지만 수현은 이 믿기지 않는 상황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뭐든 상관이 없었다.



ii. 


수현은 직급에 비례해 넓디넓은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순정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 두 사람이 사귀는 줄 알고 있다(순정은 일단 확신에 가까운 '알고 있다'라는 표현에서 1차로 열이 났다). 
  • 그래서 참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더라(열이 조금 가셨다). 
  • 그래도 불륜은 안 되니까(2차 빡침) 
  • 잘 정리하고 와라(3차 빡침). 
  • 나는 김 대리라면 얼마든 기다릴 수가 있다(그나마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되긴 했다). 

모든 이야기를 하니까 순정은 아무 말이 없이 발만 동동 구르며 괴로워했다. 


"팀장니임……."

"네. 김 대리. 왜요?"

"하아. 일단 팀장님 고백, 제가 못 듣고 오해해서 화내서 진짜 죄송해요. 죄송하긴 한데…."

"죄송한데 거절하는 거면 나 울어요."

"아 좀 제발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안 좋은 쪽으로 해석하지 좀 말고. 저는 팀장님 사람이 되게 낙천적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부정적인지 몰랐어요."

"아 나 긍정왕인데! 그니까 김 대리 포기 안 했죠."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 아니. 아닌 건 아닌데."

"응."


귀티나는 얼굴로 세상 제일 무해한 눈을 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수현을 보니 그간 수현의 착각 때문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한 답답함과 울분이 풀릴 것 같았다. 순정은 수현의 눈을 두 손으로 꼬옥 가리고서 말을 이어갔다. 


"조금만 제 얘기 들어 보세요."

"네. 목소리도 듣기 좋아요. 목소리만 들어도 예쁘다. 워후!"

"아 주접킹……. 들어봐요."

"네."

"일단 죄송해요. 고백도 그렇고 때린 것도. 많이 아프세요?"

"괜찮아요. 징계위원회 열 정도는 아니에요."

"…농담으로 안 들릴 소리 하지 마시고요."

"안 아파요. 마음이 아팠…꺅. 그렇다고 내가 통각이 없단 게 아니에요!"


또 쓸데없이 눈치 없는 소리를 하자 순정은 수현히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수현은 비명을 지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삐쭉 튀어나온 입도 귀여운 거 보면 자신도 참 노답이라고 순정은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요. 죄송한 건 죄송한 건데. 팀장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미안해요. 김 대리 눈치 없는 거 진짜 싫어하죠. 워크샵 때부터 싫댔는데."

"팀장님은 예외예요. 아무튼!! 저 문 과장님 좋아한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아니. 업무적으로 존경하고 좋은 상사시지만, 그런 성애적 감정을 품어본 적? 전혀!! 없어요."

"아?"

"다 팀장님 착각이라고요. 저는 탕비실이랑 복사실에서 팀장님이 다 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제 착각이었고요."

"둘이 사랑싸움한 거 아니에요? 탕비실에서 아까, 저, 그, 나한테 한 것처럼 멱살 잡고 키스 갈긴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문 과장님이 자꾸 깐족거리면서 팀장님 욕해서 멱살 잡은 거예요."

"뭣이? 내 욕을?!"

"앞에서도 많이 하시잖아요."

"그건 그래요."


깔쌈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좀 웃겼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해한지. 순정은 다시금 멱살을 잡고 뽀뽀를 한 번 더 해 주고는 말문이 막고자 뺨을 쭈욱 늘리며 말했다.


"이런 건 팀장님한테밖에 안 해요."

"엉억?"

"뭐라고요?"

"폭력?"

"아니요? 진짜."

"미안. 안 믿겨서. 그렇구나 나니까 이렇게 막 박력쩌는 키스해 주는구나……."

"네. 그리고 복사실에서는…. 진짜 못 들으셨어요? 그럼 뭘 못 들은 척한단 거예요."

"문 과장이 김 대리한테 좋아한다니까!! 하면서 성질냈잖아요."

"아 미친. 그건 문 과장님이 팀장님이 저 좋아한다고 한 거예요."

"뭐라고요?!"


수현은 그건 예측하지 못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나말고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나도 나를 속였는데? 삶은 문어 같다고 하고. 안 귀엽다고 하고? 아니 어떻게? 문 과장 관심법 쓰나?


"어떻게 알았는진 저도 모르겠는데, 제가 팀장님 좋아하는 것도 며칠 안 걸려서 알았으니까. 뭐."

"김 대리 진짜 나 좋아해요?"

"누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 키스를 해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안 믿어지세요? 다시 해 드려요?!"

"믿어요. 근데 키스는 다시 해 줬으면 좋겠어요."

"허. 참. 팀장님. 바라시는 게 너무 많으시네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순정은 다시 목을 그러안고 키스를 해 줬다. 수현은 볼을 붉히고는 욕심쟁이라 미안하다며 배시시 웃었다. 


"면접장에서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정말? 진짜? 나도 그때부터 김 대리 맘에 들었어요. 좋아한 시점은 명확히 모르겠는데……. 아! 사실은 진짜, 진짜는 내가 뽑았어요!! 민 과장은 지는 학연 얽혔다고 노코멘트했어요!!"

"흥분 그만 하세요.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어요. 문 과장님이 사수되고 얼마 안 돼서 다 말해줬어요. 자기는 학연으로 뽑았단 소리 듣기 싫어서 반대했다고. 홍 부장님은 그날도 되게 저 고까워하셨잖아요. 팀장님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와! 어쩜 그렇게 논리적이고 똑똑하죠? 누구 애인인지 모르겠네요."


쌍방 감정을 확인했다고 대뜸 저를 애인이라는 표현하는 수현이 순정은 어이가 없었다. 만나자 사귀자 말도 없어 놓고는? 그렇지만 뭐 이미 멀리 돌고 돌아왔는데 그깟 거 하나 생략한들 어떻나 싶었다. 이미 사귄 첫날 키스까지 나갔는데, 진도가 중요한가. 


"팀장님 애인이요."

"와아…!"

"아무튼…. 오해예요. 진짜 문 과장님은, 뭐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저랑 팀장님 도와 주시려고 한 거예요."

"민 과장이 나를 도울 리는 없는데…. 김 대리를 예뻐하나 봐요. 혹시 민 과장은 김 대리를…?"

"문 과장님 애인 있어요. 되게 예뻐요. 직업도 무지 빵빵하고 학벌도 쩔어요."

"나 문 과장 애인 아닌데."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맹수 눈빛으로 째려보는 순정에 수현은 바로 깨갱하고는 미안하다며 순정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의심은 있었다. 자신과 하민 사이가 그렇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관심이 아니더라도 순정을 예뻐하는 선의에서 비롯했구나 짐작했다. 

'하긴 김 대리는 부하직원으로도 십 점 만점에 오십 점이지.'

수현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정은 간지러운 행동을 하는 수현이 역시 좀 이상하긴 하다며 핀잔을 주었다.


"아니 그러면요. 김 대리."

"네."

"내가 안 싫으면 워크샵 땐 자리 왜 바꿨어요?"

"아."

"내가 자다가 김 대리 어깨에 침 흘렸어요?"

"아뇨?! 뭐 반쯤 정답이긴 한데요."

"깨어 있을 땐 안 흘렸는데………."

"자다가 제 어깨에 기대셨어요. 지금처럼."

"아?"


그게 문제인가 싶어 수현은 잽싸게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올렸다. 그러나 순정은 고개를 젓더니 수현의 얼굴을 다시 제 어깨에 대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소리 들리세요?"

"아뇨?"

"좀 잘 들어보세요."

"김 대리 심장소리밖에 안 들려요. 이거 안 들리면 큰일이잖아요."

"보통 얘 그렇게 세게 안 뛰어요."

"아."

"…그날도 너무 떨리고 심장뛰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못 견디겠다는 말 한 마디에 다시 고개를 쏙 들었던 수현은 아 그게 아니구나 싶었는지 다시 볼을 찰딱, 이번에는 어깨보다 조금 아래, 순정의 맨투맨 로고가 있는 데 정도에 가져다댔다. 콩콩콩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아마 자신의 짐장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수현은 소리내어 웃었다. 



iii.


'이 정도면 거의 선결제 긁어놓은 거 아니야?' 

1시가 훌쩍 넘어서 하민은 팀원들과 자그마치 100만 원에 육박하는 금액의 영수증을 들고 돌아왔고, 수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떡벌어진 입으로 하민과 영수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잘 먹었다며, 뭔지 모르겠지만 팀장님은 소고기도 안 드셨는데 아주 혈색이 좋아 보이신다며 입을 가리고 끼끼 웃는 팀원들의 기름기 좔좔 흐르는 얼굴들을 바라보고 눈을 꾹 감았다. 


"우리 팀원들께서……. 맛있게… 드셨다니. 제 마음에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네요."

"에이 있으실 거면서."

"아유. 거기 맛있더라고요. 나중에 애인이랑 가세요."

"슷!! 김 대리. 입조심!"

"어머. 문 차장님. 그렇게 부르면 우리 팀장님 설레서 일 못하세요."

"어머. 죄송해요. 팀장님. 가뜩이나 하실 일 쌓이셨을 텐데."


차라리 그냥 대놓고 축하한다고 해 주지 그래요? 수현은 새빨간 얼굴로 그 자리에서 하민에게 100만 원을 이체해 줬다. 하민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잘 먹었습니다. 팀장님." 하며 감사를 표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수현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에 새빨간 얼굴을 묻고 창피함을 인내했고 팀원들은 지나다니면서 재물운과 연애운 올려 주는 돌하르방이라며 한 번씩 쓰다듬고 지나갔다. 

진짜 일이나 못 하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서 자르기라도 할 텐데, 자신이 모아놓은 정예인력들이라 월급을 깎기는커녕 올려 줘야 할 판이었다. 

어찌 보면 퀴어프렌들리 지수까지 최고점이니 아주 더할 나위 없는 모범 팀이었다(김 대리와 문 과장을 위해 다양성 지표 향상을 사내문화개선 프로젝트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수현은 그냥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빨간 얼굴로 팀장실로 돌아갔다. 

퇴근 시간이 되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짐을 챙겨 팀장실을 나온 수현을 팀원들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조심해서 들어가시라며 보내 주었다. 수현은 복잡한 심정으로 좋은 하루 보내시라며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칼퇴근하는 민 과장, 하민과 딱 마주치게 되어 버렸다.


"이야."

"아이씨."

"좋은 날에 왜 그러세요."

"다같이 작당해서 나 놀리고, 뜯어먹고…!!"

"에이. 얼마나 좋아요."

"하아."


한숨을 푸욱 내쉬는 모습이 뭔가 고소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하민은 쿡쿡 웃었다. 수현은 그런 하민을 날카롭게 째려 보았지만 타격감은 0였다. 하민은 너무 놀렸다 싶었는지 지하 1층을 누르면서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하세요."

"김 대리랑요?"

"누구랑이냐고는 안 물어 봤는데."

"아이씨."

"입이 험하시네."

"영화 볼 거예요."

"재미없는 멜로 영화?"


한 번 더 긁어보았지만, 수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전혀 타격감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문하민 과장은 재미없어하는 영화요."




"<무지개>를 저랑 과장님이랑 같이 봤다고요? 그럴리가요. 문 과장님은 그냥 류아람이 나온 거라 의리로 본 거예요. 그리고 거기도 애인이 멜로 영화 좋아한대요."

"아. 그래요? 따로 본 거였군요. 우연이었네."

"아……. 사실 고백할 게 있는데요."

"사랑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고해성사류요."

"뭔지 몰라도 김 대리의 죄를 사해 줄게요."

"사실 저 <무지개> 제대로 안 봤어요."

"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는 수현에 순정이 오히려 더 놀랐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게? 아까 내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놀라세요?!"

"아니…."

"죄송해요. 거짓말해서."

"화 안 났고 죄송할 일은 아닌데, 왜 거짓말 했어요?"

"사실 팀장님이 그 영화 좋아하실 것 같아서 예매해 놨는데, 팀장실 갔더니 이미 보고 오셔서는 팜플렛 들고 꺄꺄거리셔서 말을 못 했어요."

"허얼."

"말이나 해볼걸……."


그때 기억에 의기소침해진 순정이 귀여워서 수현은 빙그레 웃었다. 순정이 보자고 했으면 그게 100번도 더 본 핵똥망 쓰레기 영화라 한들 웃으며 가자고 했을 게 분명했다. 여러 모로 엇갈린 운명이 자신이 빼액 지른 소리로 비로소 교차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럼 그때 내가 <무지개> 얘기 막 장황하게 했을 때 잘 이해 안 갔겠다."

"그때도 좀 흘려 들어서…."

"아니. 사람 말을 왜 이렇게 흘려 들어요?!"

"…죄송해요. 팀장님 얼굴 보느라 그랬어요."

"김 대리의 죄를 사하노라-"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수현은 순정의 머리통 위에 손을 얹고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정은 도대체 언제 적 드라마라며 핀잔을 주고는 마주 웃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는 두 사람이 한참 키득거리고는 수현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40분. 아마 곧 팀원들이 돌아오고 돌아오면 분명 아까 그 일에 대해 캐물을 게 분명했다. 수현은 조심스레 순정의 깁스한 발을 들었다.


"아야야."

"많이 아파요? 병원 다시 가야겠다."

"아니에요. 마취가 풀린 거 같아요. 그냥. 뭐 고정된 게 흐트러진 건 아니니까 목발 짚고 걸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요. 한동안…. 음."

"며칠만 재택하려고요. VPN 진짜 귀찮고…. 우리 회사 재택시스템 진짜 구리긴 한데. 미팅은 문 과장님이랑 소연 씨한테 부탁 좀 하려고요."

"며칠? 그뒤엔 어쩌려고요. 나오려고요?"

"다리 박살난 걸로 퇴사하긴 싫거든요. 기껏 팀장님도 꼬셨는데."

"와 계획범죄…. 아, 아무튼. 내가 데리러갈게요."

"에? 진짜요? 팀장님 댁은 엄청 가깝잖아요. 거기까지 어떻게 오세요. 그 아침에. 안 돼요."

"김 대리를 위한 건데, 뭘 못하겠어요. 하루종일 보고 좋죠. 뭐."


싱긋 웃는 수현에 순정은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는 같이 출퇴근? 하니 다른, 조금 더 급진적인(?) 방식이 떠올랐지만 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오늘 처음 사귀기 시작했는데, 같은 집에서 출퇴근 하자는 건 조금 그렇지. 너무 문란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정은 잠시 잊었다. 아무리 눈치 없고 무해해 보이는 주접킹 장수현이라 한들, 능구렁이 문하민과 동갑이며, 나이로 인한 짬이 아주 없지는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또 수현의 업무 추진력이 상당히 빠른 편이라는 것을. 


"김 대리. <무지개> 제대로 안 봤댔죠?"

"아. 네."

"같이 봐요. 나 그 영화 좋아서 다시 봐도 돼요."

"좋아요! 언제 볼까요?"

"오늘 어때요."

"…오늘이요?"

"응. 우리 집에서요."


이게. 그 시그널인가? 일반적인 연애였다면 바로 알아차릴 만한 그린라이트이자 과속신호(?)였지만 상대는 눈새 of 눈새 장 팀장이었다. 순정은 의심 90 기대 10으로 되물었다.


"팀장님 집에서 밤에 영화 보자고요?"

"영화만 보는 거 아니면 더 좋죠?"

"………."

"자고 가요. 내가 내일 출근하면서 정형외과도 데려다 줄 테니까, 검사도 다시 받아보고. 며칠 재택하고 안 되겠으면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나랑 같이 출근해요."

"그, 어."

"아. 너무 내가 급했어요? 내가 눈치가 없어서……."


순정은 태어나 처음, 특히 장 팀장을 짝사랑한 이래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눈새. 나쁘지 않을지도?'

그리고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수현은 환하게 웃으면서 "다리에 무리 안 가게 조심히 할게요!"라며 대낮의 공공장소에서 하기 몹시 부적절한 말을 했다.

근처 카페에 있다가 퇴근하고 같이 가자며 짐을 챙겨 주는 수현을 보며, 순정은 저런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생생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쓸까 싶어 다시 의심을 했다. 

'한단 게 마사지 얘기하는 거 아냐? 장 팀장님이라면 충분히 그럼직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온 수현에게 결국 순정은 다이렉트하게 묻기로 작정을 했다. 애초에 인다이렉트한 접근을 해 왔기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였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오해가 있다면 푸는 게 중요했다.


"그, 한다는 건 마사지……?"

"마사지? 아."


새빨개진 얼굴. 불타는 고구마 같아진 수현의 얼굴에 순정은 이번에는 제 짐작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거 맞구나. 아니 근데 아까 한 말이 훨씬 창피한 것 같은데. 역시 기준이 좀 이상하긴 했다.


"………아니구나. 마사지."

"………가요. 김 대리. 그, 어. 그. 지금 상상한 거 맞고. 그. 어……. 네. 마사지 비슷은 한데 아니에요. 그. 어. 네."

"………네. 저 그럼 갈게요. 팀장님."

"……응."


빨간 얼굴로 다시 배시시 웃으면서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러 주는 얼굴에서는 미운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정은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꾸준히 흔들어 주는 수현에게 들리도록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이따 봬요."

"어, 어?! 김 대리--"


나도!!! 엘리베이터 철제문을 뚫고도 울려퍼지는 크나큰 고백의 대답. 순정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발을 짚고 섰다. 



[아마도...? 다음화가 마지막입니다. 에필로그 형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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