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함께 몰고 들어온 응급차에 하나는 휠체어가 가는 방향을 옆으로 틀도록 레버를 밀었다. 금세 다급한 발소리와 상황보고가 이어진다. 요즘 들어서 응급환자가 잦다. 이 근방 유일한 의료시설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 

주차장으로 주 대위를 마중 나가던 하나는 멀리 보이는 주 대위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 대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 네 방에 있던 속옷. 이건 한국에서 보낸 물건."

"응, 응. 대신 받아줘서 고마워요. 그 꽃은 뭐에요?"

"그래도 병문안인데 빈손으로 오기 좀 뭐하길래. 야생화야. 숙소 앞에 피어있던 거.”


주 대위의 말에 하나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음. 그. 언니. 어디 아파요?"

"걱정해줘도 난리니, 너는."


하나가 싱겁게 웃었다. 그래도 멀리 있는 타지에서 죽다 살아났다고 주는 선물인가. 병실에 들를 틈도 없이 다시 가 봐야 한다며 고개를 젓지만, 이것저것 상황을 설명하는 주 대위도 떠나기를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하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에서 보냈다는 물건을 뜯었다. 플라스틱 통 겉면에는 비타민이라 적혀있었다. 친절하게도 평소에 먹는다 둘러댄 브랜드가 아닌 다른 포장지에, 보낸 이의 주소는 '집'. 하나는 성의 없이 포장지를 마저 찢었다.

어찌나 컨셉에 충실한지, 이쪽 우편실로 바로 보내면 되는 것을 굳이 기지로 보냈다. 수술 후 집이랑 연락한 적이 없으니까.


"…비타민 바꿨니?"

"엉. 약도 돌아가면서 먹어줘야 잘 듣는다길래."


천천히 통에서 3알을 꺼내다가, 통을 한번더 털어 한 알을 더 꺼낸다. 지난 며칠 동안 약을 먹지 못해서 불안한 탓이었다. 어제만 해도 밤에 갑자기 오르는 열감 때문에 놀랐었다. 금세 가라앉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왜 그랬지? 하도 오래 먹은 약 때문에 뭔가 이상이라도 생겼나? 하나는 정기 건강검진을 받은 게 언제인지 날을 헤아리다가, 주 대위의 말을 놓쳤다.


"어? 뭐라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냐고."

"괜찮아-. 이게 적정량이랬어."


물도 없이 삼켜버리는 모습에 주 대위가 고개를 젓는다. 그냥 약을 좀 쉬어, 하는 말에 하나는 수도 없이 연습한 미소를 짓는다. 주 대위도 별말을 하지 않는다.

잠시 다른 곳을 멍하니 보던 그녀가 돌연 건물 위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저 사람이지? 너 담당의라는 사람."

"누구? 아. 치글러 선생님."


바쁘게 어디론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창 너머로 사라진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가 흔들리며 마지막 잔상을 남겼다.


"유명하긴 한가보다. 언니가 알 정도면."

“어제도 신문에 났던데.”


주 대위가 몸을 살짝 돌렸다. 하나의 휠체어 뒤로 돌아간 그녀가 하나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오래 있을 거면 병실로 오지 그랬나 싶다가도 오랜만에 밖을 산책하는 터라 하나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한국과는 다르게 화사한 날씨에 바람이 선선했다.


“무슨 논문을 첨삭했는데, 그걸로.”

“맨날 하는 일 아냐? 신문까지 나나.”

“억제제 연구에 유명한 사람이 참가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순간 긴장으로 굳은 몸에 애써 힘을 풀었다. 그래?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는지 되짚어본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은 단어에 신경이 곤두섰다.


“게다가 평상시에 그쪽으론 연구를 안 하던 사람이라서 더 이슈된거 같아.”

“원랜 신경…어쩌고였지.”

“논문 통과는 못 될 거라고 하더라. 안 될 거 알아서 그냥 의리상 해준 거 아니냐는 말도 있긴 해.”

“그래?”


그리고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은 하나는, 단지 헤어지기 직전에 이렇게 말을 흘렸을 뿐이다.


“아까 그 신문, 어디 거라고?”




***



2층인 병실에서 1층 로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리고 도착한 1층에서 로비까지. 하나의 머릿속엔 온통 앙겔라 치글러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역대 기록과 생애까지 거슬러 읽어본 하나는 어딘가 남는 찝찝함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주 대위의 말이 맞았다. 어제 났다던 기사 외엔 억제제 연구로는 지나가는 말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월성 짙은 발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잘 숨긴 것인지, 아니면 정말 관심도 없는 것인지. 두고 보아야 알 일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하나는 사물함 위에서 챙긴 사탕을 까먹었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제 막 35살이 되었다는데 옛적에 딴 박사 타이틀에 논문만 수십 편. 최근까지도 전장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활동한 사람. 심지어 오버워치에 적을 두게 된 이유도 정의로워서,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지 의심까지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


좋은 사람이면 좋겠지. 이제야 ‘또 다른 불공평’의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지면의 활자 상으로는 세상의 불공평함과 지나친 잔혹성을 꺼리는 듯한 사람이었다. 실제로는 그어버리는 선이 뚜렷했다. 그러면서도 잔정이 많은 듯했다. 새삼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본다.


“고생 많이 했겠어요.”


말투가 그게 뭐였담. 무심한 어조였다. 그러면서도 후에 하나가 느리게 답하는 것을 신경 쓰는 듯했다. 병실에서 나가기 전, 평소처럼 곧장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던 게 눈에 보였으니까.


“하나?”


순간적으로 펄쩍 뛴 하나가 고개를 꺾었다. 양반은 못 되겠다. 아니, 양반이라는 단어는 알까. 실없는 생각을 한 하나가 머쓱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뒷조사 아닌 뒷조사를 해버린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안녕하세요, 치글러 선생님.”

“어디까지 가요?”


퇴근하려던 모양인지 코트까지 챙겨입은 앙겔라가 하나를 밀어줄 셈인지 휠체어 뒤로 섰다. 음, 좋은 사람? 다시 머릿속에서 저울질한다. 아니면?


“우편실이요. 집으로 보낼 게 있어서.”

“한국?”

“네.”


한동안 뜸했던 편지를 부쳐보려 내려온 참이었다. 앙겔라가 쉽게 휠체어를 민다.
전장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 아, 전용 슈트도 있는 사람이다.


…야단났네. 한동안 조사한 내용이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계속 의심, 또 저울질. 접근은 조심스-


“하늘이 밝을 때 가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많이 바쁘시죠?”

“조금?”

“바-.”


바쁘신 이유에 혹시 논문 첨삭도 있나요?


-럽게…….


하나는 캑, 하고 목소리를 삼켰다. 굳이 위를 보지 않아도 의아한 눈동자가 저에게 붙었다 떨어졌을 것이다. 요즘 좀 힘들긴 했나. 왜 이렇게 급하냐, 송하나. 


예상치도 못한 이에게, 예상치도 못한 단어를 듣고, 또 알게 모르게 제게 호의적이던 사람이어서.


하나가 손바닥을 허벅지에 대고 문질렀다. 진정하자. 고등학교 때 친구를 생각한다. 한순간에 뒤집힌 태도를 생각했다. 이 게임을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한순간의 악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순 없었다.

우편실에 도착해 하나를 안까지 들인 앙겔라는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좋은 사, 에서 눈을 질끈 감은 하나가 다시 손바닥을 문질렀다.


“치글러 박사님! 마침 잘됐네요. 박사님께 온 택배가 있는데.”

“저한테요? 기지로 안가고 여기로?”

“주소가 이쪽이더라고요.”


창구에 편지를 건네면서 뒤로 들리는 대화를 들었다. 형식적인 미소를 접수처에 띄우고는 휠체어를 뒤로 바꾸려는데, 이번에는 직원이 나서서 문 쪽으로 돌려준다.

좋은 사람 천지네, 여기. 하나가 픽 웃었다. 이쯤 되면 기계 휠체어를 쓰는 이유가 없지 않나.


“여기 사인이랑. 네,거기도요. 됐습니다.”

“이게 뭐지…….”


앙겔라가 작은 소포를 든 채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기지로 돌아가서 뜯어볼 생각인지 가방에 넣는다.



-넣으려고 했다.



“…치글러 선생님!”



순간 다친 다리도 잊고 벌떡 일어난 하나는 통증도 무시한 채 앙겔라의 손목을 잡아챘다. 놀란 앙겔라가 얼결에 뿌리치려는 것을 악력으로 억눌렀다. 다른 손으로 소포를 뺏은 하나는, 손이 모자라 포장지를 입으로 찢었다. 종이 재질의 포장지가 찢긴 채 허공에 흐트러졌다.



붉은 등이었다. 점멸하는.



반사적으로 밖을 본다. 팔에 힘을 주었다. 



삑.



기체 안에 있을 때는 듣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삑.



피하라는 말이 느리다. 



삐-






-그리고 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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