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9일 월요일 PM 8:12



" 여어, 첫사랑. "

" 진짜 너 정떨어져. "

" 하나두 상처 안 받아요~ "



여림의 말에 태일이 질색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여림은 웃으면서 태일의 앞에 앉았다. 저 시험 끝나서 자유라서 너무너무 신나니까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태일이 미리 시켜둔 안줏거리를 여림의 쪽으로 밀자 여림은 감자튀김을 한 개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어 오물거렸다. 드디어 한 학기 남았다... 시험이 끝난 탓인지 곡이 통과되어서 인지 한껏 들뜬 여림이 웃으며 의자에 기대 앉자 태일은 턱을 괴고는 여림을 쳐다봤다. 왜요.



" 그렇게 좋아? "

" 완전. 오빠도 알지. 나 시험 기간마다 김도영한테 질질 끌려다닌 거. "

" 나는 그때 너희가 사귀는 줄 알았어. "

" 내가 그걸 4년 내내 듣고 있어. 어휴. 근데 노래 진짜 죽이더라. 편곡도 쩔고. "

" 내가 능력이 좀 되지. "



아, 진짜. 태일의 잘난 체에 여림이 핀잔을 주고는 감자튀김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근데 재현이나 도영이는? 정우도 시험 끝났다던데. 당연히 여림의 옆에 붙어있어야 여러 인물들은 언급하는 태일에 여림은 감자튀김을 씹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셋이 술 마신다던데.



" 넌 왜 거기 안 가고. "

" 당연히 선약이 우선이지. "

" 나는 미뤄도 되는데? "

" 제가 첫사랑이 보고 싶어서요. "



진짜... 태일이 여림에 핀잔을 주듯 슬쩍 째려보자 여림은 웃으면서 태일이 미리 주문해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여기 알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에 여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왔었어. 서영호랑? 응.

간단한 안부 묻기가 끝나자 태일은 핸드폰을 들어 캘린더를 확인하더니 곧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지금 확실히 통과는 맞고. 내가 편곡 더 해서 내 작업실 와서 애들이 녹음 할 거야. 예상은 8월 발매인데... "

" 나 녹음실 오라고? "

" 어. 너도 옆에서 보면서 경험 쌓으면 좋으니까. "

" 근데 솔직히, 혁이 목소리 아니었으면 통과 못 했을 것 같아. "



왜? 태일이 여림의 말에 질문을 던지자 여림은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태일이 미리 만들어놓은 곡의 초안도, 여림과 태일이 함께 수정해나간 가사도 물론 좋았지만 그 곡을 살린 것은 동혁이라는 것이었다. 동혁의 음색이 아니었으면 절대 통과를 못 했을 거라고.

여림이 구구절절 그 이유를 읊어대자 가만히 여림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던 태일은 웃으면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 내 곡은 별로다? "

" 아니아니아니아니. 오빠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죠? 당연히 오빠가 처음에 만든 게 개쩔었으니까 그렇지. "

" 그래도 동혁이 목소리가 좋기는 해. "

" 나는 맨날 약간 날 것의 혁이 목소리를 듣잖아. 아니면 반주나 조화 위주로 듣고, 밴드니까. "

" 응. "

" 근데 그렇게 정제된 목소리를 들으니까 왜 오빠가 탐냈는지 알겠더라고. "

" 이해가 돼? "



완-전. 여림이 키득거리며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시자 태일은 웃으면서 포크를 쥐어 여림의 손에 쥐였다. 먹으면서 마셔, 먹으면서. 이러니까 내가 문태일을 좋아했지. 의미 없이 다정하게 구는 태일에 여림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소시지를 푹 찍어 입 안에 넣었다. 저, 유죄남 어쩔 거야...

여림이 푸드파이터마냥 안주를 하나하나 부시고 있을 동안 태일은 영호도 알고 있는 그 사장에게 인사를 하러 잠시 테이블을 떠났다. 저 인간 다정하게 굴면서 왜 사귀어주지는 않고. 물론 여림은 현재 태일에게 남아있는 연애 감정이 단 하나도 없었지만 저렇게 구는 것이 약간 괘씸했다. 오늘 문태일 지갑을 털어주마.


여림이 감자튀김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씹어 삼키고 있자 어느새 돌아온 태일이 두 손에 칵테일을 쥐고 다시 여림의 앞에 앉았다. 뭐야?



" 형이 서비스래. "

" 나는 저 선배 모르는데? "

" 그래도 후배잖아. "



이럴 땐 어린 게 좋아. 여림이 웃으면서 칵테일을 받아서 들자 태일은 자신의 몫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 너 동혁이랑 언제 사귈 거야? "



뱉을 뻔했다.

여림은 가까스로 입 안에 있는 칵테일을 삼키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태일을 쳐다봤다. 오빠.



" 내가? 내가요? 내가 혁이랑? "

" 다정하게 혁이라고 말하는 것 좀 봐. "

" 아니 오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너도 알잖아, 걔가 너 좋아하는 거. 태일이 아무 표정 없이 칵테일을 마시며 입을 열자 포크로 감자튀김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던 여림은 피식 웃으면서 한숨을 뱉었다. 그러면 뭐 하는데. 태일은 그런 여림의 반응에 다시 턱을 괴고는 여림을 심문하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 너 솔직히 알았잖아. 동혁이가 너 좋아하는 거. 나 오늘 동혁이도 불렀는데. "

" 혁이 내일 시험 있어서 못 올걸? 내가 족보 준 수업 내일이거든. "

" 아아. "

" 오빠도 나빴다, 시험 있는 애한테. "



그런가? 태일의 질문에 여림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동혁은 내일 발표까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회장이다 보니 쓸데없는 걸 다 알게 됐네. 여림이 감자튀김을 하나 푹 찍고 태일을 쳐다봤다. 저, 저 궁금한 표정. 대답 안 해줄 수가 없는 표정. 여림은 감자튀김을 한 입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 솔직히 봐. 오빠 나 스물하나 때 처음 봤지. "

" 응. "

" 내가 여자로 보였어? "

" 아니. "

" 어...? 약간 상처. 그치만 내가 그거야. 어떻게 혁이가 남자로 보여. 걔 스무살 때 처음 봤는데. "



여림은 포크에 꽂혀 있던 감자튀김을 입 안에 넣어 삼키고는 마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태일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여림을 빤히 쳐다봤다.



" 그러니까 여주가 혁이를 좋아했다? "

" 아, 그건 나도 눈치챘어. "

" 그치. 여주가 동혁이 좋아하는 걸 뻔히 아는데 내가 동혁이를 받아줘? 그러면 나는 여주한테 완전 나쁜 언니가 되는 거잖아. 내가 연애에 막 목숨 건 인간도 아니고. "

" 그러면 너는 연애나 결혼, 이런 건 아예 생각이 없어? "

" 솔직하게 얘기해? "

" 응. "

" 서영호나 정재현 보면 결혼이 탐나긴 해. 그들이랑 사귀고 싶다기 보다는 그들의 집안이 탐나는 거지. "

" 너 속물이다. "



여림은 태일의 말에 빵 터져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쳤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치만 결혼은 너무 현실인걸, 연애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섹... 스는 잘 모르겠고. 여림은 자신의 허벅지를 위아래로 쓸어내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빠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 모르지. "

" 내가, 내가... 진짜! 그 눈빛을 얼마나 피하느라, 어휴. "

" 그 정도였어? "

" 오빠는 혁이 자주 안 보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보잖아. 게다가... 아오, 전남친까지 들켜버렸어. "

" 고생했네. "

" 근데 오빠, 가장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



여림은 묘하게 사람을 당기는 화법을 사용했다. 태일이 칵테일을 마시다 멈추자 여림은 씩 웃으면서 포크를 탁 내려놨다.



" 동혁이는 남자로 안 보여. 그냥 애지. 애랑 뭘 해- "



태일은 여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림의 입에 소시지를 집어넣었다. 뭐야. 여림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시지를 문 채로 태일을 쳐다보자 태일은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저 오빠가 저렇게 반갑게 맞이할 사람이 없는데? 여림이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고개를 돌리자


" 형, 안녕하세요. 저 늦었죠. "



그 애가 나타났다.









2023년 6월 19일 월요일 PM 9:23



이 미친... 문태일 이제 첫사랑이란 말 취소야. 여림은 술집 옆에 주저앉아 태일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 오빠 그래도 눈치 있으니까 동혁이 몰래 대답하는 거겠지? 3년을 평안하게 지냈는데 묘하게 엉망이 되는 4학년이었다. 나만 그런건가... 그치만 여자친구한테 차인 도영을 생각하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림은 애꿎은 담배 끝만 씹어댔다. 자꾸만 올라오는 술기운에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가 말한 것에 대한 기억도, 지금 상황도 전부.



혁이한테 안 들켰겠지?

16작곡 문태일

안 들켰어 ㅋㅋㅋㅋ 안들려안들려

얼마나 시끄러운데

진짜 오빠 개짜증나ㅠㅠㅠ

16작곡 문태일

그래서 급하게 소시지 먹였잖아 이놈아

첫사랑 취소야ㅠㅠㅠ



여림은 울리는 핸드폰에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어어. 정재현.



[ 술자리 끝남? ]

" 노노. 나 혼자 잠깐 담배. 너네는? "

[ 아직. 김정우 김여주 좋아했었어? ]

" 갑자기 왜? "

[ 뭐, 서영호 어쩌고 하길래. 영호 형이랑 관련된 여자애는 지금 김여주 말고 없잖아. ]

" 난 모르지. "



김정우 대체 술 취해서 뭘 하는 거지? 여림이 수화기 너머에 귀를 기울이자 도영이 정우를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뭔진 몰라도 엄청 혼나고 있구만... 여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핸드폰 속 재현이 여림을 데리러 가냐 묻자 여림은 단호하게 아니, 라는 답변을 했다. 지금 좀 어지럽긴 한데...



[ 말투가 취했는데? 지금 내가 갈게. ]

" 노노. 정 안되면 진짜 전화할게. 아직은 괜찮은 듯? "



사실 안 괜찮았다. 동혁이 왔다는 사실에 칵테일이고 맥주고 소주고 그냥 되는 대로 입에 넣었다. 진짜 10초 전까지 태일과 동혁이랑 사귈 정도는 아니다, 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 당사자가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태일... 알고보면 동혁이 마음 접게 하려고 일부러 수 쓴 거 아니야? 아니 그리고 쟤는 왜 내일 수업이 있는데 술자리에 오고 난리지? 여주한테 듣기로는 동혁이 건축학과 수석이라고 했다. 아니 그래도 교양도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2학년... 이면?

여림이 끝도 없이 생각을 이어가다 결국 포기하고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다시 하나 꺼내 물었다.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짧아진 담배, 그리고 끝없는 흡연 욕구에 머리가 아팠다. 시험공부 하느라 김도영한테 시달릴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담배가 피고 싶진 않았는데... 여림은 골목길에 머리를 기댔다. 문태일 내가 꼭 복수한다.



" 누나. "

" 아, 깜짝아... "

" 누나 진짜 잘 놀라는 것 같아요. "



너는 왜 소리도 없이 오니... 여림이 아직 기다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자 동혁이 여림을 빤히 쳐다봤다. 왜 꺼요? 동혁의 질문에 여림은 담배를 대충 재떨이 위로 던져놓고는 벽에 기대 입을 열었다.



" 너 담배 안 피는데 앞에서 피면 안되지. "



... 근데 묘하게 얘가 무섭다. 여림은 자신의 볼을 느릿하게 쓸어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시험 아냐?



" 아, 근데 공부 다 해서. 밥도 먹을 겸 겸사겸사요. "

" 나는 성의 과학 시험 볼 때 진짜 고생했는데... "



동혁과 동방에 둘이 있다고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각자 서로의 할 일을 했고 시티캣의 회식 때도 매한가지. 애초에 여림은 다른 사람들을 챙기느라 바빴고 동혁은 그 사이에서 자유롭게 술자리를 즐겼었다. 어. 생각해보니 술자리에서도 동혁이랑 그렇게 얘기를 안 하네? 여림이 생각을 하느라 골똘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자 동혁이 고개를 꺾어 여림을 쳐다봤다.



" 누나 무슨 생각 해요? "

" 어? 아? 나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그냥 정우? "

" 정우 형이요? "

" 아, 지금 취했다고 해서. "

" 아... 정우 형은 시험 끝났구나. "



여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할 말이 없다. 빨리 도망치고 싶다. 이제 들어갈까? 어색한 듯 웃으며 동혁의 옷을 쥐어 당기는 여림에 동혁은 여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누나. 제가 애예요? "



시발. 얘 들었다. 술기운이 머리 끝까지 오르는 기분이었다. 여림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동혁을 빤히 올려다보자 동혁은 마저 입을 열었다. 제발 얘기 좀 하지마, 얘기 좀 하지마... 여림의 마음 깊은 속 간절한 외침은 동혁에게 들리지 않았다.



"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

" ... "

" 저는 누나가 제가 누나를 좋아하는 걸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누나는 누구한테나 다정한 사람이니까 제가 누나를 좋아하니까 과민반응 했다고 생각했죠. "

" 어... 어어. "

" 근데 누나는 그냥 내가 애같아서 내가 안 좋은 건가. "



그, 틀린 말은 아닌데. 여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뜩이나 술에 취해 있는 상태인데 지금 입을 열면 어떤 식으로든 동혁을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여전히 여림은 동혁의 옷자락을 쥐고 있었고. 여림이 슥 동혁의 옷자락을 놓자 동혁은 마저 입을 열었다.



" 나는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누나 곡도 제가 가이드 딴 건데. "

" ... "

" 제 노력이 갑자기 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네요. "



여림은 여전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 노력은 내가 다 알지만... 최대한 희망 고문하려 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동혁에게 상처가 되었다. 차라리 그 노력을 내가 받아줘야 했었던 것이었나? 명확하게 정답이 존재하는 시험지와 다르게 인간관계에는 확실한 정답이 없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얘한테 상처일 텐데.

여림이 자리를 벗어나려 움직이자 순간적으로 울리는 머리에 휘청거렸다. 자연스럽게 여림을 잡는 동혁에 여림은 동혁을 빤히 올려다봤다. 아. 나쁜 마음이 드네.



" 혁아. "

" 네. "

" 네가 애로 보이는 건 당연한 거야. 내가 너 스무살 때부터 봤는데 어떻게 네가 어른으로 보여. "



동혁의 눈가가 묘하게 찌푸려졌다. 아, 양심 찔려. 그러나 여림은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숨겨둔 본심이 술기운이라는 바람에 날려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네가 나한테 뭐 어른으로 보일 짓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누나가 어떻게 너를 남자로 보니. "

" 아... "



동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렇게까지 얼굴 관찰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여림은 동혁의 이마부터 눈, 코, 그리고 입술까지 가만히 내려다봤다.



" 네가 나한테 뭐 입술 박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너를 남자로 보니... 나는 연상 취향이란 말이야... "



여림의 말소리는 끝으로 갈 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여림이 뱉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여림이 연상 취향인 것도 사실이었고 동혁을 남자로 볼 계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여림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 좋다는 애한테 이런 말을 하면 어떡해... 본능적으로 여림이 고개를 툭 떨군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진짜 못된 년이다. 정재현이랑 사건 있을 때는 쪽팔렸는데 동혁에게는 그냥 미안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여림은 동혁과 무엇을 해볼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마음을 놓게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여림은 동혁에 대해서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여림이 모르는 사이에 여림의 시야에 동혁이 가득 찼다. 이게 뭐지? 알딸딸한 얼굴로 여림은 이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동혁이가 내 얼굴을 잡아서 위로 올린 거고. ... 뭐야?



" 제가 키스라도 해야 누나가 저를 남자로 볼까요? "



... 여림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이 원망스러웠다. 이 분위기 때문인지 취해서인지.



" 근데 너 못할 거잖아. "

" 왜요? "

" 내가 싫다고 하면 못하잖아. 너 그렇게 나쁜 애 아니잖아. "



여림의 눈이 감겼다.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동혁이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생길 만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여림이 봐온 동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 볼 사이에 상처를 주고 스스로 자책감에 시달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저 나쁜 애 할게요, 그냥. "



동혁의 입술이 여림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뭐지? 여림이 순간적으로 눈을 번쩍 뜨자 바로 눈앞에 동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얘가 나한테 뽀뽀... 미친. 이마크한테 뽀뽀 당했을 때랑 느낌이 다르네. 여림이 눈을 가만히 깜빡이고 있자 어느새 동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 뭐지?



" 에? "

" 네? "

" 이, 이게 나쁜 애야? "

" 네? "



여림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동혁을 쳐다봤다. 나쁜 애라기엔 너무 건전한 거 아닌가... 나는 마크랑도 뽀뽀할 수 있는데. 동혁이 당황한 얼굴로 여림을 내려다보자 여림은 결국 웃음이 터져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아. 진짜. 얘 나쁜 애는 평생 못 되겠다. 키스 이래 놓고 고작 뽀뽀를 하네. 여림이 웃음을 참지 못해 얼굴을 계속 가리고 있자 동혁이 한 손으로 여림의 손목을 쥐고는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 아니... 그렇다고 제가 키스라도 하면 누나가 싫어하면 어떡해요. "

" 아, 진짜 웃겨... 엄청 비장하게 얘기하더니 야, 이러니까 내가 너를 애로밖에 안 보지. "

" 와, 누나 방금. 와. 상처. "

" 방금 혁아, 조금 귀여웠다. 진짜. 너 애로 본다는 거 취소할게, 누나가 미안해. "



이번엔 상황이 역전되었다. 여림이 손을 내리고 동혁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살 꼬집었다. 어두운 데도 붉어진 동혁의 귀는 눈에 띄었다. 귀엽다. 여전히 동혁이 애로 보였다. 그렇지만 생각은 달라졌다. 애랑 뭘 해볼 생각이 들었다.



" 이번엔 키스해. "

" 네? "

" 싫음 말구. "



여림은 동혁 볼을 꼬집던 손으로 동혁의 볼을 감쌌다. 동혁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애는 앤데... 여림은 호기심이 들었다. 다시 가까워지는 동혁의 얼굴에 여림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동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동혁의 입술이 닿자 여림은 웃으면서 동혁의 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 귀여워.

그러나 역시 입술을 쉬이 벌려지질 않았다. 오히려 동혁은 안절부절못한 채로 여림의 허리를 끌어안기만 했다. 얘 키스 처음은 아닐 텐데. 여림은 동혁이 분명 1학년 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귀엽게 군다고? 여림은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 동혁에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하고 떼어내곤 동혁을 쳐다봤다.



" 이동혁. "

" 네? 네? "

" 내가 마지막 기회 줄게. 너 이번에 혀 안 쓰면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어. 누나는 이제 너 앞으로 평생 애로 볼 거야. "

" ... 아, 아니... 누나아... "

" 알겠어? "

" 알겠다구요... "



여림은 동혁의 대답을 얻어내고는 동혁의 얼굴을 당겼다. 힘없이 따라오는 동혁의 얼굴에 이번에는 여림이 먼저 입술을 맞추고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여림의 허락, 아니 핀잔을 받기를 바랐는지 금세 느껴지는 살덩이에 여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연스럽게 감겨 엉켜지는 혀, 허리에서 느껴지는 동혁의 손. 이미 술기운은 다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여림은 순간적으로 당겨지는 몸에 숨을 참았다. 갑자기? 아까만 해도 키스가 뭐야 뽀뽀도 제대로 하지도 못해서 맥을 못 추던 애가 이동혁이었다. 자기 앞에서 나쁜 척 굴면서도 금세 순한 양처럼 자신에게 혼나던 애가 이동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림이 아는 동혁이 아닌 것 같았다. 여림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먼저 입술을 떼고 동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를 않았다. 여림이 상황 파악을 하려 눈을 깜빡이고 있자 동혁이 여림의 귀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뗐다.



" 또 하면 안 돼요? "

" 미친, 아니. 절대 안 돼. "

" 왜요... 저 못해요? "



나 또 했다간 너 좋아할 것 같아. 여림은 마지막 말을 꾹 삼킨 채 동혁을 밀어내고는 먼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볼이 붉어진 게 너무 느껴졌다. 너무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그리고 또 생각날 것 같아서 괴로웠다. 죄책감이 한 겹 더 쌓였다. 동혁이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여림이 성큼성큼 술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동혁은 말없이 여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넘긴 머리로 보이는 붉은 귀. 가만 보면 저 누나도 참 솔직했다.















2023년 6월 20일 화요일 PM 9:04



" 아, 깜짝아. "



재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건축관 앞에 앉아있는 긴 머리의 처녀 귀신, 아니 김여주... 지나가는 애들 다 놀랐겠는데. 재민이 여주의 앞에 가만히 앉자 재민을 기다렸는지 그제야 고개를 쓱 들었다. 나재민, 하이.



" 하이. "

" 이동혁은? "

" 자기 가야 할 데 있다고 빨리 나갔어. 못 봤어? "

" 어... 못 본 것 같은데. "



여주는 멍한 눈으로 재민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뭐지? 재민이 상황을 파악하려 주위를 둘러보는데도 조용한 학교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이면 학교에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하는 강의는 별로 없으니까. 재민은 우선 여주를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주가 가볍게 재민의 손에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재민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 이 새끼 잘생겨서 열받아.



" 왜? 할 말 있으면 해. 그러려고 기다린 거 아냐? "

" ... 나재민. "

" 응. "

" 너 왜 나랑 안 사귀어...? "

" 어? "

" 너 나 먹버... "



여주가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재민이 입을 가려버렸다. 얘가 지금 학교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재민이 미간을 팍 찌푸리고는 여주를 내려다보자 여주는 시무룩한 듯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여기서 얘기하기 싫음 가서 하든가... 여주가 재민의 옷자락을 쥐고 정문 쪽으로 질질 끌고 가자 재민은 여주의 어깨에 걸려있던 백팩을 집어 들고는 여주의 손에 고분고분 따라갔다.

말이 없는 여주를 보며 재민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종강이라며 좋다고 날뛸 김여주가 분명했는데 너무 차분하다. 재민이 여주의 뒤를 쫓으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여주는 정문의 앞에서 몸을 뒤로 하고는 재민을 빤히 쳐다봤다. 나재민!



"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

" ... 너... 너어... "

" 어. "

" 그 여자애랑 사귀기로 했어...? 백퍼 고백 받았을 거 아냐... "



재민이 모르는 사이 여주의 머릿속 상상은 이미 재민이 그 공주 아이디를 한 여자애랑 결혼식을 올리고 애까지 셋을 낳았다. 심지어 손자들은 한 다섯명이고. 반면 여주의 상상을 모르는 재민은 그저 가만히 여주를 바라봤다. 얘가 궁금해하는 게 그게 다인가? 재민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여주의 백팩을 어깨에 걸치곤 입을 열었다.



" 고백 받았지. "

" ... 그거 받아줬어...? "



여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재민은 희열감을 느꼈다.



" 아니? "

" 왜? 걔 되게 예쁘던데. "

" ... 내가 걔를 안 좋아하는데 걔랑 사귀어봤자 뭐해. 나는 걔랑 못 자. "



재민의 말에 여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재민은 크게 웃고 싶은 욕구를 꾹 삼켜냈다. 이렇게 얼굴로 모든 것이 드러나면서 어떻게 이동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겼다고 생각하는 거지? 재민은 과거 동혁과 술자리를 떠올렸다. 여주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안다고 얘기한 동혁, 그리고 자신은 여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주랑 사귈 생각이 단 1퍼센트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했던 이동혁.

반면에 여주는 들뜬 마음을 숨기기가 힘들어 재민의 시선을 피했다. 적어도 나재민이 걔랑은 사귀어서는 안됐다. 왠지 괘씸한 마음이었다. 나랑 자놓고 다른 여자애랑 사귄다고? 절대 참아줄 수가 없었다. 이제노를 들들 볶아 어떻게든 비밀번호를 알아내 걔 방 앞에서 대기하고 싶던 마음을 꾹 삼키고 기다렸던 게 건축관 앞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들리는 희소식이라니. 어떡해. 숨기기가 힘드네.


결국 여주가 자신의 입술을 막으려 손을 올리자 재민은 가만히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게 다야? 재민은 마치 여주의 입에서 고백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듯 여주를 내려다봤다. 묘하게... 압박이 느껴지는데. 여주는 자신의 입을 막은 채로 침을 꼴깍 삼켰다.



" 그게 다야? "

" 어? "

" 아니. 그거 물어보려고 기다렸나 해서. "

" 아니... 그건 아니지... "



사실 여주가 재민을 기다린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당연히! 나재민한테 사귀자고 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여주는 재민과 이렇게 애매하고도 껄끄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사귀고 대판 싸우고 헤어지든 아니면 몸을 더 맞대든 해서 어떻게든 결말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주를 돕지 않았다. 가장 첫 번째 상황은 시험 기간. 그 덕에 영호와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건축학과 4학년이니까 당연히 바쁜 게 맞았다... 게다가 내년에 졸작 준비까지 하려면 시간이 없으니 영호는 절대 시험 기간에 만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여주가 양심이 없어도 그 정도 양심까지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나재민이랑 사귀고 오빠한테 잘 설명하고 그러면 좋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재민한테는 서영호랑 사귄다는 말은 못해도 서영호한테 나재민이랑 사귄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주가 말도 없이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자 결국 재민은 한숨을 쉬고는 먼저 앞서 나갔다. 야아, 나재민! 어디가! 여주가 뒤에서 재민을 부르는데도 재민은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그리고 재민은 앞으로 상황을 예상했다. 분명 김여주가 뒤에서 잡을거고. 아니나 다를까 여주는 재민의 가디건 자락을 쥐어 재민이 멈추게 만들었다. 재민이 웃음을 삼키고 여주를 향해 뒤돌자 여주는 고개를 팍 들고 입을 열었다.



" 야! 나재민! "

" 야? "

" 솔직히 너도 진짜 진짜 껄끄럽잖아! "

" 난 괜찮은데. "

" 아악! 존나 답답해! "



여주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답답하다는 명백하게 재민을 향한 마음이 아닌 자신을 향한 마음이었다. 아니, 이게 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질 못해? 나재민은 저렇게 멀쩡한데? 여주가 씩씩대며 재민을 노려보자 재민은 웃으면서 엉망이 된 여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천천히 얘기해. 씨발. 저 새끼 졸라 다정해. 개빡쳐. 여주는 결국 빼액 소리를 질렀다.



" 나는 답답하니까 우리 쫌 사귀어보자고! 우리가 지금 10년 동안 사귀는 거 빼고 다 했잖아! "

" 그래. "

" 에? "

" 사귀자고. "

" ... 그게 다? "

" 그럼 뭘 더 해? 가자, 여친. "



재민은 그대로 여주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팔 사이로 끼게 만들었다. 이게 뭐야? 얼결에 재민의 팔에 팔짱을 낀 여주가 재민을 올려다보자 재민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앞으로 걷고만 있었다. 간혹가다 햄버거 먹을래? 라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을 하고. 뭐지? 뭐지? 이게 맞나?

여주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재민이 여주의 집 앞에 데려다줄 때도. 방 안에 들어와 화장을 지울 때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내 남친 나재민이라고? 여주는 뽀송하게 얼굴을 씻은 채로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 집 가는 중. ]

" 아... "

[ 왜 전화했어? ]

" 아... 그냥? 좀 적응이 안돼서. "

[ 내가 키스라도 하면서 너 덮쳐야 그게 커플이야? ]



여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분명 나재민은 생각 없이 얘기했던 게 분명했다. 딱히 능글거리는 말투도 아니었고 평소에 밥 먹었어? 하는 말투랑 똑같았으니까. 아니, 근데 이게 맞나? 분명 재민과 특별하게 설렌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설레는 건 영호랑 있을 때 더 설렌 게 맞지... 그냥 나재민은 소유욕, 이런 거였나. 여주가 생각을 하느라 입술을 꾹 다문 채로 핸드폰만 쥐고 있자 수화기 너머의 재민이 입을 열었다.



[ 각오해. ]

" 엥? 뭘? "

[ 뭐든. ]



여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민은 전화를 끊었다. 뚜, 뚜, 울리는 핸드폰에 여주는 현실감을 체감했다. 그러니까 나재민이랑 나랑 사귀고... 나재민이 각오하라고 했고... 설마. 여주는 금세 빨개진 얼굴에 침대에 얼굴을 폭 박았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나재민이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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