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비슷한 시간, 같은 버스를 타고 아마 일주일 전에 입었을 지도 모르는 셔츠를 끼워 입고 나서는 길은 똑같은 모양 그대로였다. 어제도 그랬고, 어제의 어제도 그랬을 날. 달라진 것은 날씨 정도가 전부였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것이 착각이었다는 건 그 사랑이 끝나며 깨달았다. 나는 죽을 것 같이 괴로운데 세상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이럴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공기의 흐름을 보며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은 내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가슴이 설레고 좋았지만 세상이 핑크빛은 아니었다. 그 사랑이 끝났을 때, 다시 괴롭긴 했지만 세상에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렘이 의무감처럼 느껴지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아무렇게나 휘둘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

“평소엔 늦게 온 것처럼 말하시네요.”

“그냥 인사다, 인사. 인마.”


하여튼 하나하나 다 시비라며 구시렁거리는 주석 선배를 향해 편하게 웃어버린 나는 곧 익숙하게 꺼져있는 컴퓨터의 전원을 꾹 눌렀다. 사랑이 대단하면 좋은 거였다. 변만식과 연애를 시작할 때의 나도 여전히 사랑을 중요하다 생각했었다. 비록 그것은 눈이 뒤집혀 시작했던 지난 연애들과 달랐을지언정, 계산적이고 사무적인 연애였다고 해도 나는 변만식을 만나는 동안에는 그를 사랑했다. 그것이 비록 이성에서 비롯된 사랑이라는 역설이라 할지라도.


“그런 인사 할 정신이 있나봐요, 선배는.”

“정신이 나가버려서라는 생각은 못하지.”

“아, 인정.”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랑이 이성에 가까워졌으니, 나는 시작하는 것보다 끝이 더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좋아하던 사람을 잃고 엉엉 울고불고 하며 아무렇게나 내 안의 것에 휘둘리던 때는 그것이 다른 무엇에 의해 정리가 되면 곧 괜찮아졌다. 그러나 사랑에 이성이 끼어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감정이 정리가 되어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사랑이 실패했다는 것이, 나는 그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어제 부탁했던 거 보내놨어, 확인 해봐.”

“네, 감사해요.”


나는 절대 사랑에 실패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나라는 사람의 사랑이 사랑에 실패하는 것이 굉장히 억울한 일 인 것처럼, 나는 끝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니 근데 도대체 김 전무는 왜 갑자기 이렇게 달리는 건데?”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그 양반이 자기 손해 날 짓 하는 거 봤어?”

“그니까요. 그 믿는 구석이 도대체 뭐냐 이거죠. 돌아가는 머리는 그냥 봐도 곽 본보다 딸리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 끝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번엔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욱 달라질 것이 없는 하루였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갑자기 속도가 붙어 버린 프로젝트 정도가 전부였다. 내가 곽아론을 좋아하게 됐다는 그런 여운에 젖을 틈도 없이 불어 닥친 역풍에 사무실은 눈 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 전무가 중국 쪽하고 협상 중이라는데? 룰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김 전무도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프로젝트를 성공 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생각하면 그 뿐이었다.


“뭐 돈 나올 구멍 하나를 제대로 발견했던가, 아니면.”

“.....”

“곽 본이 떨어져 나갈 만한 일이 생겼다던가. 둘 중 하나 아니겠어?”

“.....”


막말로 이번 일 잘못되면 자기 자리도 위태로울 판에 그 사람이 그 정도 계산도 안했을 리가 없다는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막 전원을 켜고 앉은 모니터를 빤하게 바라만 보았다.


“.....”


김 전무가 자신이 유리한 무언가를 쥐었다는 거엔 이견이 없었다. 단지, 그것이 전자인지 후자인지가 문제였다. 만약 김 전무가 곽 본의 무언가를 쥐고 있다면, 그래서 이렇게 속도를 내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 뭔지 알아야 했다.


“잠깐 나 좀 봐.”


그 사람이 다치지 않을 일이라고 한다 해도, 그 사람이 상처 받을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


또 뭐냐는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멋대로 전화를 끊은 나는 곧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페어플레이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었다. 곽아론을 지키겠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변만식이 입을 벌리지 않을 이상 퍼져 나가지 않을 소문이 아니라면 나는 곽아론을 지킬 명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내가 그럼에도 변만식을 만나야 하는 건, 알아야 하는 건 단 하나 나를 위해서였다.


“사람 오라가라 진짜 귀찮게.”

“그래서 내가 왔잖아.”

“뭐, 할 말이 뭔데.”

“.....”

“아, 뭐.”


휴게실 자판기에서 밀크커피 두 잔을 뽑아 낸 녀석이 곧 그것 하나를 내게 내밀며 다분히 마뜩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커피를 미심쩍게 바라보자 아, 그냥 좀 마시라며 테이블을 툭 치는 손길을 보다 슬쩍 시선을 푸른 하늘로 돌렸다.


“김 전무한테 뭐 들은 거 없어?”

“뭘.”

“곽 본에 대해서.”

“곽 본에 대해.. 야, 너.”

“....”


변한 건 고작해야 어제와 다른 날씨 뿐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굳이 달라진 걸 찾자면 일의 속도와 곽 본을 향한 내 마음 정도였다. 세상은 바뀌지 않아도, 내 마음은 완전히 뒤집힐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완전히 뒤섞여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 달라진 마음으로 변만식 앞에 앉아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너 진짜 내가 까발리기라도 했을 까봐 그러냐? 어?”

“아니, 너 안 그랬을 거 알아.”

“....”

“안 그래야 하고.”

“....”

“나도 그래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엉망진창인건 싫으니까.”

“....”


사람을 못 믿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하다는 듯 눈을 부라리던 녀석이 곧 머쓱하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는 곧 슬쩍 시선만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변만식을 바라보다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김 전무가 갑자기 일을 서두르는데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

“그 이유가 혹시 그 사람이랑 관련된거면 알려줘.”

“너 바보야? 그걸 나한테 묻게?”

“....”

“막말로 김 전무 일 잘되면 제일 좋은게 난데, 내가 그걸 너한테 알려주겠어?”


생각이라는 걸 좀 하라는 듯 답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곧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곧 살짝 미간을 구기고 있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알지.”

“....”

“그래서 알고 싶어, 김 전무가 그 사람의 약점을 잡은 건지. 그래서 속도를 내는 건지.”

“그럼 나는 더더욱 알려줄 이유가 없네. 네가 좋아하는 사람 위해서 내가 그런 것 까지 왜 알려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변만식과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이상하다 느껴본 적 없던 그 냄새가 순간 코 끝을 아프게 스치고 지났다. 아니, 어쩌면 그때도 충분히 싫었지만 마음이 좋아한다에 기울어 몰랐을지도 모르는 그 냄새를 억지로 참아내며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알고 싶어.”

“....”

“우리는 어차피 헤어져야 해, 반드시.”

“....”


곽아론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럼 우린 기약없는 기다림으로 서로를 그리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을 연애만 빼고 시작한 나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는 변만식을 향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늦추고 싶어.”

“....”

“조금이라도, 단 하루라도 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어.”

“....”

“만약 김 전무가 일에 속도를 내는 이유가 곽 본 때문이라면, 그래서 곽 본이 당장 돌아가게 되면.”

“.....”

“그럼 나는 어떡해.”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그래도 괜찮았다. 예정된 이별은 얼마든지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이별은 아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못해본 것이 너무 많았다. 좋아 하는 것으로 끝내자는 곽아론과 나는 아직, 제대로 좋아해보지도 못했다.


“너 진짜 바보냐, 끝을 알면서 시작은 왜 했냐.”

“.....”

“애초에 시작을 말지 그럼.”

“.....”

“어차피 돌아갈 사람인거 알면서..”

“너랑도 영원할 생각으로 시작한 거 아니야.”


끝은, 당연히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장난이라는 것도 안다. 연애는 됐고, 좋아하기만 하자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궤변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도 시작과 끝의 경계를 만들고 싶지 않고 싶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사랑을 시작했고, 언제 이 사랑이 끝났는지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정해놓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사랑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으면 해서,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결말을 원해서. 그게 전부였다.


“곽 본이 아니야.”

“....”

“나도 잘은 몰라. 단지 곽 본보다 더 큰 뭘 물었다는 것 밖에는.”

“....”

“곽 본을 쳐내진 않을 거다. 그럼 오히려 그 양반이 의심을 받을 테니까.”

“....”

“남은 시간은 네가 알아서 잘 해라.”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변만식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500원을 꺼내 놈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보며 나는 곧 느리게 입을 열었다.


“커피 잘 마셨어.”

“.....”


그 말에 살짝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뱉어 낸 놈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놓인 500원을 쥐고 돌아섰다. 일 해라, 수고하고. 깔끔하게 진 빚 없이 정리를 하는 내게서 돌아서는 옛 인연의 뒷모습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더 이상 변만식과의 끝이 괴롭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 때를 생각하는 것도.


“....”

“....”


정확히는 그때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게 맞았다. 더 이상 그때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아파할 시간이 없었다. 내겐 곽아론이라는 현재가 있었고, 그 현재가 미래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디 갔다 와요.”

“..그게, 잠깐.”


곽아론만 생각하며, 곽아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나는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쩍 열리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가 너무 이 사람 생각을 많이 한 건 아닐까, 그래서 갑자기 이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닐까. 질끈 감았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네모난 상자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곽아론이었다.


“여기서 누구 만났어요?”

“...네.”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


굳이 이유가 없으면 내려오지 않을 곳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내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궁금함이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선뜻 변만식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던 나는 곧 머뭇거리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

“근데 기분이 좋지는 않네.”

“.....”

“변 대리 만나는 거.”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말을 잇는 곽아론 덕분에 입이 막힌 나는 순간 그 입에서 튀어나온 변만식의 이름에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곽아론은 곧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곧 내 재킷을 살며시 고쳐주었다.


“당신 냄새 아니야, 이거.”

“...,”

“그래서 알아요.”

“....”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는 듯 빙긋 웃어버리는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곧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있다 곧 느리게 내 손을 잡아 오는 곽아론의 손길에 조심스럽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슨 일로 만났냐고 묻지 않을게.”

“....”

“내가 그럴 자격까지는 없다는 거 알아요.”

“....”

“그렇지만 화는 낼 거예요, 당신한테 말고 나 혼자서.”

“....”

“최민기씨는 믿는데, 아직 내가 자신이 없어요.”


손을 잡고는 있지만, 그것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단지 잡고만 있는 것에서 끝이 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곧 먼저 나를 잡고 있는 곽아론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해버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곧 그 소리에 잡고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먼저 내려요. 변명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듣기 좋은 소리 하나도 해주지 못하고 곽아론을 바라만 보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나는 곧 나보다 조금 늦게 내 뒤를 따라 걷는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


나는 믿지만 자신이 없다는 말이 걸음을 걷는 내내 발목을 붙잡고 질질 끌려왔다. 의문은 하나였다. 곽아론은 왜 나를 믿고 있는지. 좋아하기만 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없는 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멍하니 앉은 채로 생각하고 있던 나는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착한 네트워크 메시지 함을 열었다.


“....”


업무 지원 관계로 도착한 메시지에 익숙하게 답을 하고 창을 끄려던 나는 아직 확인 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표시에 상체를 세워 앉으며 다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


그때그때 알림을 듣지 않으면 확인하지 않아 모르고 지나쳤던 메시지가 벌써 몇 통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하나하나 눌러보던 나는 마우스를 쥐지 않은 손으로 가만히 입을 틀어막은 채 바라보다 곧 오늘 도착한 메시지에 느리게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출근했어요. 최민기씨는 이제 골목을 걸어 나오고 있겠지. 벌써 보고 싶다.」


그 메시지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자, 실체였다. 나를 믿는 다는 것, 그것은 곧 나에게 대한 제 마음을 믿는 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좋아만 하자는 내 말에 조금의 다른 생각 없이 좋아만 하기로 한 곽아론의 순수한 마음 그 자체였다.


“.....”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소소하게 달라진 것 외에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나는 여전히 해피엔딩을 꿈꾸며 시작도 하지 않는 겁쟁이였다.


「보고 싶어서 메시지 남겨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요.」


누구의 사랑이든 끝은 있다. 영원하다는 건 유한한 인간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끝이 두려워 시작하지 못한 나를 향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욕심 없는 사람은 나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정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은 어느 날 아침 7시 50분. 곽아론의 하루는 나로 시작되고 있었다.





-





진짜 말도 안 되게 바쁘다, 와. 누군가 터트린 목소리는 하나였지만 그 내용에 딱히 반박을 하고 싶은 이는 없는 듯 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일거리에 이러다 우리 중 누구 하나가 실려가나겠다는 말에 주석 선배는 아서라는 듯 말을 막았다. 누가 쓰러지면 그 일이 누구한테 갈 것 같으냐고, 이 정글 같은 곳에 남의 안위를 걱정할 시간은 있을 것 같으냐며 각자 건강관리 잘하라는 말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우적우적 사탕을 깨물어 먹으며 거의 반은 정신이 나간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더 이상 수정할 것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재빠르게 그것의 창을 꺼버렸다.


“와, 죽을 것 같아.”

“죽지마라, 너 죽어도 울어줄 시간도 없다.”

“걱정 마요, 나 죽을 때 선배 데려갈 거니까.”

“저 자식이.”


근데 너 진짜 괜찮냐? 주먹을 휙 치켜들었던 주석 선배의 목소리가 그래도 제법 다정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 목소리에 힐끗 눈만 치켜뜨자 곧 선배의 고개가 절레절레 움직인다.


“뭐, 왜요.”

“네가 피곤하긴 하구나.”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데요.”

“네 얼굴 썩었어.”


아, 진짜.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조금도 아끼지 않고 기가 찬 얼굴을 하자 선배는 곧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잔뜩 거만을 떤다. 이 얼굴 정도는 되어야 살아남지, 이 피로들 앞에서. 어? 안 그래?


“보고하러 갑니다.”

“야, 내 말 다 듣고 가야지.”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을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겠단 생각에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곧 어디 가! 하며 소리를 지르는 선배의 목소리 뒤에 조용히 하라는 몇몇의 음성이 따라 붙는 걸 느끼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 네모난 공간 안에 소속된 모두가 정신없이 제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분주함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 나는 곧 내가 도달해야할 곧을 앞에 두고 괜스레 조심스레 발끝으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춘 나는 곧 언제나처럼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


네, 들어와요. 누군지도 모르면서 늘 다정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던 나는 그러나 평소와 달리 아무런 기척도 없는 것에 반사적으로 문에 바짝 귀를 가져다 대고 다시 두어 번 문을 두드렸다.


“...없나.”


여전히 잔잔한 고요만이 가득했다. 살며시 몸을 떼고,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던 나는 곧 별 수 없다는 듯 돌아서려다 곧 다시 고개를 틀어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보고를 한다는 말은 절반 즈음은 핑계였다. 중요한 자료는 이미 네트워크로 전달을 한 뒤였고, 곽아론이 나를 찾지 않는다면 꼭 먼저 찾아와 보고할 것은 없었다.


“..본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길을 찾아 온 것은 보고라는 절반의 핑계와, 보고 싶다는 절반의 진심 때문이었다.


“.....”


곽아론의 아침 메시지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5분씩, 10분씩 빨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고 있었다. 그만큼 곽아론의 하루가 일찍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곽아론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맡은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사람, 늘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


그래서 그 바쁜 속에서도 단 하루도 아침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는 곽아론과 막상 무엇을 한 적은 없었다. 요란한 타이밍이었다. 하필 때를 맞춰 정신없이 프로젝트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변만식이 말한 대로 김 전무가 무언가 대어를 잡긴 잡은 모양인지 곧 결론이 날 것 같다고 누군가 지나가듯 말하던 목소리를 가만히 떠올리던 나는 곧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불편하게 안경을 쓰고..”


잠이 든 모습은 처음이었다. 회사에서 이럴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 하는 생각에 얼이 빠진 채 넋을 놓고 바라보던 나는 이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잠이 든 곽아론의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당신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동요하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곧 쓰고 있는 안경을 벗겨주려다 곧 그대로 멈추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


바쁘다는 것이 핑계는 아니었다. 정말 틈도 없이 바쁜 시간 속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얼마만지 정확히 헤아림도 할 수 없었다. 변만식을 만난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흘러버린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전화를 주고받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그 정도였다.


“잘 거면 제대로 자지..”

“....”

“아, 깜짝이야!”

“....”


아무래도 말이 씨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는 하지 말자고, 그냥 좋아만 하자고 뱉어 낸 말의 대가를 고스란히 되받고 있었다. 연애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연애를 하는 중인지 모를 만큼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들이었다. 그 속에서 나보다 몇 배는 바쁘게 움직였을 곽아론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안경이라도 벗겨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뭐예요, 안 잤어요?”

“잤는데, 깼어. 문소리에.”

“근데 왜 자는 척 했어요?”

“최민기씨가 잘생겼다고 감탄을 하길래.”


내가 무슨 언제 감탄을 했다고.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내려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잠든 줄 알았던 곽아론의 손이 내 팔을 붙잡은 것은. 그 손보다 한 박자 느리게 밀려 올라간 눈이 곧 한 번에 나를 바라보았다.


“노크 소리에 깼으면 대답을 하지 그랬어요.”

“대답 안 해도 최민기씨가 들어올 거 알았으니까.”

“나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

“이 문을 내 허락 없이 열고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잖아.”


최민기씨 아니면 당연히 그냥 돌아 갈 테니까. 곽아론의 목소리에 나는 곧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리며 살며시 곽아론의 책상에 기대섰다. 그리고는 곧 여전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곽아론을 향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냥 갈까 하다가.”

“하다가.”

“보고 싶어서요.”

“....”

“못 보고 가더라도, 잠깐이라도 여기 있다 갈까 싶어서.”

“....”


조금, 이상한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고스란히 뱉어내며 어색하게 웃어버리자 곽아론은 싫지 않으면서도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좋아만 하기로 했다. 연애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기에 나는 밀고 당기는 감정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사랑이 아니라 나는 그저 온전히 좋아만 하면 됐다. 오롯이 내 안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내가 손해 볼 것을 계산할 필요 없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좋아하는 만큼만 좋아하면 된다는 걸 느리게 조금씩 깨닫고 있는 얼굴을 향해 나는 작게 웃어보였다.


“나보다 바쁜 사람한테 얼굴 보고 싶다고 보채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

“볼 수 있으면 보고, 버티다 안 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

“횡재했네.”

“....”


나 오늘 운 되게 좋은 것 같아, 로또 살까봐.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리자 곧 기대고 앉아있던 상체를 살짝 일으킨 곽아론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확실히 피곤해보였다. 붉은 핏줄이 바짝 선 큰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곧 빙그레 웃어보였다.


“뭐해요.”

“나는 뭘 사야할까 고민 중이었어요.”

“네?”

“내가 보고 싶다는 말도 하기 전에 최민기씨가 와줬으니까.”

“....”

“나도 엄청 운이 좋은 것 같아서.”

“.....”

“되게 좋은 걸 사야 할 것 같은데.”


뭘 사면될까, 고민 중이었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얼굴을 보다 나는 곧 조심스럽게 곽아론이 쓰고 있는 안경의 얇은 테를 살짝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아직 못 본 모습이 많아요.”

“....”

“안경 쓴 것도 처음 봤고, 이렇게 내가 내려다 본 것도 처음이고.”

“....”

“이렇게 서로만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

“나랑 있을 땐, 내 생각만 해요. 돈 안 받을 테니까.”

“....”


뭘 되게 좋은 걸 사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게 이득일거라는 듯 중얼거리자, 곽아론이 이번엔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거 되게 멋있는 말이었는데 못 알아들으면 안 된다는 듯 다시 물어도 곽 본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변만식 만났던 건.”

“....”

“당신 불안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프로젝트 때문에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러 갔던 것뿐이고.”

“....”

“본부장님이 날 좋아하는 만큼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도 본부장님 좋아해요.”

“....”

“그러니까 날 좀 더 믿어줘요.”


날 믿는 것이 곧 당신의 마음을 믿는 것이라고, 돌려 말한 내 말을 곽아론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만 듣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김 전무가 굳이 우리의 시간을 재촉하지 않아도, 우리는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도 그리고 이 사람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간 속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나는 바쁨 속에 곽아론을 보지 못하는 시간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최선을 다해, 이 사람을 좋아해야지만 우리의 시간이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완전히 해피엔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8시.”

“....”

“무조건 8시에는 퇴근 할 테니까.”

“....”

“그 뒤에 시간은 나한테 줘요.”

“....”


생각보다 훨씬 직진으로 다가서는 내가 어색한 것 뿐, 이해는 충분히 하고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곽아론을 빤히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뜨자 곽아론이 곧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최민기 뿐이라서.”

“....”

“내가 살게요, 당신 시간.”

“.....”


정중한 부탁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절을 할 이유가 없었고, 또 허락을 할 처지도 되지 못해서였다. 우리는 그저 좋아하기만 하기로 했다. 마음이 가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러니까 오늘 나랑 같이 있어요.”

“....”


그 말에 가만히 곽아론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곧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곽아론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다른 건 지금 줄 테니까 받을래요?”

“.....”


그게 뭐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안경 너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곧 천천히 고개를 숙여 곽아론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예고 없는 입맞춤에 머뭇거리던 곽아론의 팔이 늦지 않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당신이 뭘 하지는 않아도 돼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매일 아침 나로 하루를 시작하는 곽아론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마다 늘 주문처럼 달려 있는 말 하나.


「좋아해요, 최민기씨.」


그 마음 앞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더 이상 이 사람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달라졌다. 우리는 서로를 허락된 시간 동안 좋아만 하기로 했다. 끝이 없는 해피엔딩을 위해서.




꿀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