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승천 아타/ㅇㄹㅅㄷ화된 주인공 로맨스 엔딩 그 이후의 이야기
 *타브/더지의 아이덴티티는 독자분의 가내타브/더지로 상정해주셔도 무방합니다 (편의상 글 내에서 주인공은 '타브'로 호칭합니다)




6개월만에 만난 타브의 촉수는 여전히 탐스럽고, 윤기가 흘렀으며, 어째 길이가 좀 더 길어진 것도 같았다. 게일이 그 점을 지적하자 타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근히 자랑이라도 하듯 돌기의 꾸물럭거림을 선보였다. 그게 의문을 뜻하는 제스쳐임은 조금 후에 모두가 깨달았다.


"그 촉수가 자라기도 하는 거였어?"


의문을 표하던 게일은 학자다운 탄성을 질렀고, 레이젤은 타박했다.


"츠크, 몸뚱이가 게이크가 되었다고 사람말마저 잊은 거냐."


점잖게 뒷짐을 진 타브는 그들의 머릿속에 얕은 파동만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일리시드식으로 따지자면 웃음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레이젤. 너희 모두가 그리웠지.]


자리를 마련한 위더스가 들었다면 뿌듯해 했을 말이었다. 다들 얼추 눈치챈 그 해골의 정체가 정체라면 이 거리에서도 다 듣고도 남았겠지만.


파티 주최자가 정한 드레스 코드는 없었다. 그래도 모두가 암묵적인 합의 하에 가지고 있는 가장 깔끔하고 좋은 옷을 입고 오긴 했다. 타브 또한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가 몸에 두르고 있었던 일리시드 특유의 갑각질 갑주와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그거, 네가 초능력으로 만들어낸 옷이잖아. 따져보면 그냥 벗고 있는 거 아냐?"


살짝 술기운이 오른 섀도우하트가 다소 직설적으로 묻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윌이 재빨리 그 손에 새로 채운 와인잔을 쥐어줌으로써 짧고 어색했던 침묵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우리 전(前) 샤 신도 아가씨도 독실했던 신자치고는 꽤 엉큼한 구석이 있다니까."


전에 그렇게 맛없다며 타박하던 적포도주가 든 잔을 휘휘 돌리며 아스타리온이 던진 말이었다. 그는 힐끔 타브의 인상―두족상?―얼굴을 살폈다.


이목구비가 멀쩡했던 시절이었더라면 타브는 아마 엷은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당연히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살짝 휘어진 검은 눈 정도가 타브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흰자라곤 보이지 않는 새카만 동공에 아스타리온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쾌감을 억눌렀다.


파티에 도착한 후부터 다른 동료들이 위화감을 최대한 느끼지 않도록 타브가 나름 배려해왔음을 누가 눈치채기는 했을까. 오랜 세월 타인들의 비위와 호불호를 맞추며 살아온 아스타리온은 알아챈지 오래였다. 일리시드들이 흔히 부유하는 것과는 달리 타브는 두 발로 땅을 직접 걸어다녔으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대신 지속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방향제마냥 은은하게 방출했다. 주로 기쁨, 즐거움, 호기심 등이 담긴 파동이었다.


물론 신경써서 차려입고 왔다는 것 치곤 맨발이었지만, 그건 일리시드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예외니 넘어가도록 하고.


아스타리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타브가 할신, 섀도우하트, 카를라크 등과 해후의 포옹을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료이자 친우가 아예 타고난 종족에서 탈피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음에도 그들은 타브를 전과 같이 대하는 것에 별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타브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연인이었던 아스타리온보다도 더.


아스타리온은 거기에 드는 감탄, 부러움, 질투, 그리고 죄책감을 삼키려 와인잔을 입술로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타브를 안아주지조차 않았다는 사실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변명을 해보자면 그때는 아스타리온 본인도 난데없이 피부를 태우기 시작한 햇볕을 피해 도망치느라 바빴다지만).


쓸데없는 감상이나 떠올리는 제 뇌를 - 이제는 올챙이도, 카자도어의 제어도 없이, 온전히 저만의 것이 된 뇌였다 - 타박하는 사이, 모두에게 인사 순례를 마친 타브가 마침내 그에게로 다가왔다. 


[언더다크에서 지내고 있다는 얘긴 들었어. 거기 생활은 좀 어때?]

"깜깜하고 음울해. 먹여 살려야 할 입들이 칠천 명이나 된다고. 내가 이 나이 먹고 몸만 큰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며 아스타리온은 드라마틱하게 왼손을 휘저었다. 스폰들을 이끄는 일은 분명 보람있었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주인 잃은 스폰에 불과하다더라도 나름대로의 품위와 존엄은 갖추고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한 세기 넘게 갇혀 있었던 그 불쌍한 목숨들은 그냥 피만 빠는 괴물이 아닌, '뱀파이어'답게 살아가는 길을 차례차례 배워나가고 있었다.


마치 아기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식기를 다루어 흘리지 않고 밥먹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진배 없는 일이었다. 아주 많은 인내심과 주의를 요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흡혈 충동은 단순한 허기와는 달라. 뭐, 배가 주리면 눈에 뵈는 것 없이 뭐든 집어먹는 건 필멸자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네. 고생도 그렇고.]

"말했잖아, 몸만 큰 애들이나 다름없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해, 하다못해 깔끔한 식사 매너까지도. 그나마 짐을 떠맡길 '형제'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스폰들 사이에서도 해결해야 할 갈등이나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해묵은 원한, 증오, 짓눌려 사느라 차마 말 못한 억하심정, 뭐 그런 것들.


게다가 모든 스폰들이 아스타리온과 그 형제들의 가르침을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떨어져나갈 것들은 떨어져나간 후 스폰들의 수는 줄어들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몇 천 단위의 흡혈귀들은 쉬이 관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혹자가 본다면 가히 군대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타브는 아스타리온이 연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모습에 오히려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잘은 몰라도, 다소 연극적인 구석이 있는 그들의 뱀파이어 로그가 이렇게 쉬지 않고 투덜거릴 정도면 상태가 그렇게 나쁘진 않을 테니까. 정말로 문제가 있었다면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지. 아스타리온을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타브는 잔잔하게 말했다.


[괜찮다면, 나중에 내가 언더다크를 방문해도 될까?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스타리온은 타브의 검은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대면했을 때, 아스타리온은 타브에게 그를 아끼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이렇게 변한 타브를 계속 사랑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고 솔직히 고백했었고, 타브는 그에 수긍했었다. 비록 이렇다 할 표정 변화는 당연히 없었지만 그때 아스타리온은 과연 타브가 상처를 받기나 했을지 다소 잔인하게도 궁금했었다.


일리시드가 된다는 것은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스타리온은 어느 정도는 타브를 향한 원망을 완전히 지웠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깟 구원, 그깟 세상이 뭐라고 우리를 포기한 것인지. 그리도 망설임 없이 영웅주의와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그와 저 사이의 사랑은 가벼웠던 것인지.


아마 이제는 영영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얼마든지."


머릿속의 올챙이도 사라진 이상, 속내를 감추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빙긋 웃어보이는 아스타리온에게 타브는 주머니를 뒤져 품에서 뭔가를 내밀었다. 아스타리온은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반지였다. 보통 반지를 선물로 줄 때 내포되는 사회적 맥락이나 의미를 감안하지 않으려 애쓰며, 아스타리온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좀……갑작스러운데. 이건 웬거야?"

[원래 네게 주려던 거였어.]


그러니까, 네더브레인을 대면하러 가기 전에. 아스타리온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창백한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는 타브가 고른 것 치고는 제법 세련된 디자인이었고, 자신이 좋아할 만큼 적당하게 화려했다. 조야하지 않게 큼직한 크기의 보석도 박혀 있었다. 특수한 마법이 걸린 것도 아니고, 상부 도시의 사치스러움에는 못 미친다지만 모험가가 마련할 수 있는 것 중에선 퍽 비싼 축에 속할 물건이었다.


왜 이제 와서 이런 반지를 주는 것인지, 무슨 생각으로 이걸 준비했던 것인지, 왜 그때 진작에 주지 않은 것인지―그 모든 의문을 미처 숨기지 못한 아스타리온의 표정을 읽은 타브가 대답했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고, 우리가 아직 살아 있었으면 네게 주려고 했거든.]


아스타리온은 차마 참지 못하고 살짝 떠보는 기색을 담아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청혼이라도 하려고 하셨나?"

[…….]

"진짜로?"


아스타리온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바뀌자, 타브는 다시 촉수를 찬찬히 흔들었다. 무마하려는 손짓과도 같았다.


[청혼까진 네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그래도, 고려는 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준비한 선물이었어. 나랑 조금 더 같이 있는 걸.]


아스타리온은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 잘난 선물을 그 반질반질한 두족류 면상에 내던지며 뒤늦은 울분을 터뜨리고도 싶었고, 한편으로는……이런, 자칫하면 눈물이 조금 나올 것도 같아 말없이 손바닥의 반지만 노려보았다.


그래도, 그 모든 일을 거치며 조금은 성숙해진 모양이었다. 왜 이제 와서 다 늦은 소리를 하느냐고 비꼬고 싶은 마음 대신 심장이 알싸해지는 것도 성장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마냥 날카롭게 고슴도치처럼 공격적으로 굴지 않고 이렇게 헛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 걸 보니, 그간의 고생이 헛되진 않았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다.


"하……잘도 그런 귀여운 말을 하네."

[너무 늦었다는 건 알아―]

"당연하지!"

[―이걸 준다고 해서 내 선택 때문에 네가 받았을 상처가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도 알고.]


아스타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 빌어먹을 통찰력을 하필 지금같은 순간에 발휘할 게 뭐람.


타브는 마치 희생을 위해 준비된 제물처럼 유순하고 망설임없이 그 길을 택했다. 이 엉망진창에 문제투성이인 유사 가족원들의 고민을 여태까지 차근차근 들어주고, 해결해줬던 태도와 다를 바 없이. 변이한 후에도 그는 자신 또한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피력하거나, 이해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일리시드로 변하며 일체의 감정에 무감각해진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스타리온은 그것이야말로 타브라는 사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직감했다.


영혼이 있든 없든 정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 깨달음이 이 순간 기이한 위로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면 타브가 어떤 의도로 이 선물을 주었든 상관없겠다 싶었다. 관계를 매듭짓는 상징이든, 옛정에의 호소든, 아니면 그저 추억을 기리기 위한 기념품이든.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더 대꾸하는 대신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왼손 약지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너무 뱃심 좋은 행동 같아 검지에 끼웠는데, 조금 조이기는 했으나 얼추 맞기는 했다.


창백한 손마디에 꽤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아마도 밝은 빛 아래서 본다면 더 고울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피식 웃으며 일부러 마음과는 반대로 말했다.


"흐음, 보는 눈 없는 건 여전하군."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도로 가져가도 되는데.]

"아, 아, 아. 줬다 뺐기는 금지야."


면전에 손가락질을 당한 타브에게서 다시 고요한 웃음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코웃음을 치며 아스타리온은 잔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이만 가보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느라 손을 내저을 때마다 횃불에 반지의 보석이 반짝거렸다.


"됐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겠지. 어서 가서 파티를 즐기라고. 위더스가 준비한 성의를 무시해선 안 되잖아?"


타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시드는 뒷짐을 진 채 멀어져갔다. 걸음을 떼느라 맨발에 얇은 잔디가 사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멀어지기 전, 아스타리온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타브."


그리고 일리시드로 변한 이래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며 돌아선 타브를 끌어안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타브의 몸은 전과 같이 부드럽거나 유연하지도, 기분 좋은 살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딱딱한 일리시드 갑주의 표면이 기껏 차려입은 옷 위로 따갑게 파고들었다. 바싹 마른 마인드 플레이어의 몸뚱이는 지나치게 허깨비같아 팔을 다 두르고도 한껏 남을 정도였다. 물컹한 촉수에선 타는 듯한 오존 내음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타브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포기하지 않았고, 이내 타브의 팔 또한 천천히 움직여 뱀파이어의 등을 가벼이 마주안았다.


어색하고, 단단하고, 마냥 따스함만 느껴지는 포옹은 아니었으나 기분 좋은 기시감이 들었다. 아스타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언젠가 건넸던 말을 다시 한 번, 이번에도 같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자기. 전부 다."


그리고 타브는 이번에도, 예상을 배신하지 않았다. 파동 없이도 아스타리온은 그가 웃고 있음을 알았기에, 더는 아쉬워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졌던 연결은 분명 아름다웠고, 분명 존재했었으며,


어떤 사랑의 대단원은 이런 것으로 충분했다.


[언제든지, 아스타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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