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글자는 모두 영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이런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보자마자 잘생겼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 일련의 생각을 꾹꾹 밀어넣고 얌전히 하은이의 안내를 기다렸다. 하은이 영어로 대충 겉치례로 인사를 하다가 나를 소개해주는데 발음하며 어투하며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이쪽은 테이얀인데 중국 협회장이 소개해 준 관찰자 중 한 명이야. 능력은 파동이고 뭐 파동을 흘려보내서 그 사람 고유의 뭐시기를 찾아낸다나 뭐라나 암튼 사람찾는 거 잘한대."

"그래서 찾는데 어느 정도 걸리는데?"

하은이 영어로 대충 시간 얼마나 걸리냐고 묻자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가족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도움 받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좀 신뢰가 깎이는데? 가족이 왜 필요한건데..?

"특정 사람 파동을 알아내려면 직접 만나봐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니 대신 비슷한 파동을 가진 가족을 만나봐야겠대."

어차피 람이네 부모님한테 가봐야 하긴 하니 가려는데 갑자기 교실문이 벌컥 열였다. 람이네 어머님이었다. 그에 뒤따라 담임쌤이 들어왔다. 진정하라는 쌤의 말을 무시하고 테이얀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자식입니다. 찾는데 도와주신다면 사례금은 최대한 원하시는 만큼 준비하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신의 자식은 찾을겁니다. 저도 요즘 마나르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테이얀이 어머님에게 손을 얹고 지그시 눈을 감더니 그대로 한참을 멈춰섰다. 선채로 기절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에 눈을 떴다.

"파동은 얼추 파악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파악 가능한 범위는 반경 100km 정도라 하다못해 국가 정도는 특정해야 찾을 수 있습니다."

대충 나라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소린가? 100km면 탐색범위가 대충 그 정도라는 소리겠지? 일단 보담이한테 연락하자. 일단은 우리나라 초능력자가 유출됐으니 협회도 움직일만한 명분이 충분할거다. 찾을 수 있다.


*


"으아! 힘들어! 안 해! 못 해! 인간적으로 쉴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그 놈의 체력증진때문에 하루 종일 뛰었더니 죽을 거 같다. 목에서 피나올 거 같다. 아무래도 주변에 A급이며 S급이며 너무 쉽게 봤더니 내가 내 주제를 몰랐던거 같다. 하긴 괜히 A급한테 돈을 쏟아붇는게 아니지. 새삼 보담이가 대단해보인다.

"쉴 시간은 주고 있잖니."

"잠깐 숨고르는 시간 말고! 진짜 쉬는 시간!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눈뜨고 밤 10시에 눈 감을 때까지 훈련만 어떻게 해! 아무리 그쪽이 마나르라도 더이상은 못 해! 그냥 차라리 죽여!"

마나르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이 기울이다 오늘은 이만 쉬라며 다시 방에 들어갔다. 너무 억울하다. 내가 이상한거야? 진짜 말 그대로 눈뜨고 중간중간 토할것 같을 때만 잠깐 쉬고 계속 훈련만 하는 게 버틸만한 일정이야? 내가 연약한거야?

진짜 미치겠는게 마나르는 정말 순수하게 그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 정도도 못해?'같은 그런 한심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정말 '손도 있고 움직일 줄도 아는데 왜 자꾸 손을 못 움직이지?'와 같은 정말 말 그대로 이해를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마다 내 자존감이 푹푹 떨어진다는 거 알려나 모르겠다. 엄마 보고 싶다. 아빠랑 은이도 보고 싶고 아란이랑 애들도 보고 싶다. 하다 못해 스페인이나 우리 협회장한테 끌려갔으면 평범한 커리큘럼을 밟고 있을텐데. 하, 이 양반이 빌어먹게도 온갖 미디어기기를 제한하는 바람에 날짜감각도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여기 온지도 꽤 된 거 같은데... 보담이는 어디서 뭐하고 있으려나. 아마 나 열심히 찾고 있겠지? 진짜 초능력 억제 팔찌에 위치추적기 있으면 뭐해 어차피 협회장놈들 손에는 종이쪼가리일 뿐인데.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걸 어떻게 찾아주려나. 몇달, 아니 몇년은 걸리려나?

몇년안에라도 찾으면 다행이지. 그냥 사막에서 건물 찾는 것도 어려운데 초능력으로 각잡고 숨기면 정말 찾기 어렵겠지. 다른 애들도 애들인데 엄마 아빠도 나 하나 찾겠다고 자기 인생 전부 집어 던지면 어떡하지. 나야 남는게 시간이지만 엄마랑 아빠, 특히 은이는 아닌데.

아냐 그런 의미없는거 생각하지 말고 탈출 방법이나 생각해보자. 솔직히 집 몇 번 둘러보니까 얼추 취약한 부분이 보여서 탈출 자체는 가능할 거 같은데 문제는 그 이후란 말이지. 사막 한 가운데서 어떻게 길을 찾고 살아남지?

유일한 외부인력인 물자조달 라인은 감시가 너무 철저해서 지금 내 실력으론 불가능하고 식량을 들고 튀자니 식량이 너무 짐이 되서 탈출이 힘들고. 어쩌면 좋을까. 그냥 못 하겠다고 배째고 보담이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내가 어제 훈련 방법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봤단다."

"그 얘기를 꼭 새벽 3시에 해야 합니까?"

"그래도 훈련 전에는 얘기해야 하지 않겠니."

"아니 지금... 하. 아닙니다. 일단 말해보세요."

이미 잠도 다 날아갔으니 들어나 보자 싶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날부터 바로 초능력 훈련 들어가면 훈련 시간이 좀 줄어들 거 같은데 어떻니."

나는 뭣도 모르고 그 지옥같은 훈련이 끝난다는 말에 너무 신나서 고개까지 격하게 흔들며 동의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채.


쿨럭!

입을 가린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자 끈적한 붉은 액체가 흥건했다.

하... 이게 몇 번째 각혈이지... 보통 3번 정도 하면 눈앞이 흐려지던데... 아, 지금이 3번째구나.

눈앞의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면서 기억이 끊겼다. 그렇게 피토하며 쓰러지고 눈뜨고를 반복한지도 벌써 1주일째. 정정하겠다. 위에서 죽을거같다를 너무 쉽게 입에 담은 거 같다. 정말 죽을 거 같을 때는 그런 말조차 나오지 않게 되는군. 게다가 처음에는 주마등 비슷한 걸 본 거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안 보인다.

처음에는 엄청난 공포가 나를 덮쳤다. 목구멍에서 위액이나 토사물이 나와도 식겁할텐데 묽은 핏물이 나오니 누구나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일 것이다.

그런 느낌은 몇 번이고 겪어서 이제는 익숙한데 더 무서운 것은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 더더욱 나오지 말아야 할 곳에서 나오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10분 쉬자고 말하는 담담한 마나르의 태도였다. 비유가 아니었다. 근육통에 온몸이 비명을 저지르는 수준이 아니다.

내 수년 간의 경험으로 장담컨데 온 몸이 이대로면 정말 죽는다고 알려주는 듯 했다. '이대로면 죽을 것 같은데.' 가 아니다. '이대로면 무조건 죽는다.' 였다. 그렇다보니 10분 뒤에 진심으로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에 이건 진짜 못 하겠다고 말하자 알겠다며 갑자기 대뜸 화형 선고를 했다.

"30분 주마. 작은 연못을 만들어 보렴. 성공하지 못 하면 너의 옷을 태우마."

"농담... 이죠? 이제 진짜 능력 못 쓰겠다니까요..?"

아닌걸 알면서도 던진 질문에  마나르는 그저 말없이 빛으로 옷끝을 살짝 그을리게 만들었다. 그걸 본 순간 아무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되는대로 최대한 큰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지금 당장 기절할 거 같은 상태로 습기 하나 없는 공간에서 물을 소환하는 것도 눈앞이 깜깜했지만 물을 조금씩이라도 소환해서 연못을 채워보려다가도 모래에 전부 흡수되서 여간 미치겠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씩 물을 쥐어짜내 어떻게든 조금 큰 물웅덩이를 만들자 30분이 전부 지나가 버렸다.

"생각보다는 꽤 크구나. 그럼 최대한 크기를 확장시켜보렴."

속으로 오만 생각 다 들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최선을 다해 물웅덩이 크기를 확장시켰고 중간에 각혈을 한 번 더 해도 쉬는 시간만 줄 뿐 계속 하라며 눈으로 압박을 하는 바람에 정말로 연못이라 부를 만한 물웅덩이가 완성되자 그대로 각혈하고 정신을 잃었다.

물론 능력을 무식할 정도로 때려박는 덕분에 시간 자체는 3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매일 정신을 잃고 차리고를 반복하니 그때 스페인 협회장 자신이 신사적이라더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였구나를 깨달았다. 이 정도로 강압적으로 나오니 훈련 외에는 그리 강압적인 태도가 아님에도 전 처럼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곳을 탈출해야겠다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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