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Zak Abel - Still Want UUU




Medic Travel Log 

#9_주제파악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오갈 곳 없어 골목 구석에 쪼그려 앉아 대마초나 피워대는 사람들일 게 분명했다. 총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걸로 보아 따돌리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어, 어, 어떡해요.”

 

라일리가 말을 더듬었다. 돈 몇 푼으로 해결이 되는 건가. 한국에서는 겪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 정국 씨.”

“라일리가 나 지켜줄 거죠?”

 

농담을 던질 상황은 아닌데 그를 보며 물으니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슬슬 뒷걸음질 쳐도 여차하면 잡힐 거리였다.

 

“도, 도, 돈 꺼낼까요.”

“나 돈 다 썼는데.”

“지금 농담이 나와요?”

 

라일리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무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손을 까딱였다.

 

“라일리 와 보래요. 가 봐요.”

 

등을 살짝 떠미니 그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곤 내 팔을 꽉 잡는다. 이 와중에도 귀엽다. ‘싸움 잘하죠? 저는 먼저 도망갈 테니 해치워줘요.’ 그에게 속삭였다. 내 팔을 붙잡은 라일리의 손이 덜덜 떨린다. 네 명의 덩치가 앞에서 온갖 폼을 다 잡으며 비실비실 웃는다. 완전히 대마에 절었다.

 

“정국 씨, 첫눈에 반했어요.”

“갑자기요? 농담할 여유도 있네.”

“농담 아니에요. 이거 유언이에요. 제가 해치울 테니 도망가세요.”

 

이윽고 나를 자기 뒤에 숨긴 라일리가 다리를 벌벌 떤다. 돌돌 말린 대마초를 피우던 흑인들이 다 태운 종이를 땅이 비벼 끈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그들이 위협적인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곧 멱살이라도 잡힐 거리다.

 

첫눈에 반했다는 귀여운 유언을 남긴 그를 죽게 할 순 없었다. 라일리의 옆으로 가서 섰다.

 

“라일리.”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진짜 죽을 결심이라도 한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아, 이 와중에 웃으면 안 되는데. 옷은 쫙 빼입고 얼굴은 연예인 같이 화려하게 생겨선, 표정은 귀엽고.

 

“잘 들어요, 라일리.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곧장 뒤돌아 뛰는 거예요.”

“바, 발이 안 움직여요.”

 

잡힌 그의 손이 떨렸다. 해치운다는 건 허풍이었나 보다. 흑인 남자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멱살이 잡히려는 찰나였다.

 

“하나….”

“…후우.”

“뛰어!”

“으악!”

 

라일리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뒤돌아 냅다 뛰었다. 뒤에서 지껄이는 욕설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확인할 새도 없었다. 그저 달렸다. 나보다 달리기가 조금 느린 그가 용케 따라왔다. 헉헉- 하고 숨 차는 소리가 들렸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간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라일리가 천진하게 모델 포즈를 지어 보였던 골목을 지나, 사진을 보여달라며 카메라를 잡고 티격태격하던 길도 지났다. 몇 분 전 우리의 모습이 환영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급박한 상황인데 자꾸만 웃음이 난다.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줬다.

 

조금만 더 가면 큰길이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달리며 라일리를 쳐다봤다. 이미 우리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놓지 않고 뛰었다. 그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고 둘 다 웃었다. 라일리 뒤로 뉴올리언즈 어느 골목이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영상처럼 흩뿌려진다.

 

귓가에 희미하게 들리던 노랫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사람들의 모습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라일리가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나도 그를 따라 뛰었던 길을 봤다. 역시 마약쟁이들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헉, 헉, 헉...”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 그의 옆에서 나도 허리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재밌다. 오만 일을 다 겪는 이 여행이 재밌다.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라일리의 굽은 등을 쳐다봤다. 지켜달라는 내 농담에 자기가 해치우겠다며 벌벌 떨며 내 앞에 섰던 그였다.

 

첫눈에 반했다는 유언도 남겼다. 그 순간에 죽을 각오를 했다는 순진한 마음이 웃기고, 유언이랍시고 한 첫눈에 반했다는 말엔 좀 설레고.

 

“라일리.”

“하, 하아. 네. 네.”

 

숨찬 듯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나보다 훨씬 작은 몸으로 나를 가로막으며 앞에 섰던 그의 모습이 겹쳤다.

 

“괜찮아요?”

“하아, 하아, 네. 진짜 우리 큰일 날 뻔, 하아, 했어요.”

 

그들이 마약에 취해 있어서 다행이었지 여차하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상황이긴 했다.

 

“유언 잘 들었습니다.”

 

그의 숨이 뚝 그쳤다. 숙인 뒤통수 옆으로 솟은 양쪽 귀가 새빨갰다. 더워서 빨개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미동 없이 멈췄다.

 

“하, 첫눈에 반했다니. 뉴욕에서 병원에 딱 들어오자마자 나 보고 무슨 생각 했어요?”

“….”

“와, 미쳤다. 저 사람이 전정국이야? 퍽킹 핸섬이다. 이런 생각?”

“….”

“아니면, 인생의 모든 운이 여기에 몰빵 됐나? 저렇게 초미남과 일하다니…. 뭐 이런 건가?”

“….”

“그것도 아니면….”

“정국 씨.”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막는다. 오늘 도대체 고백을 몇 번이나 듣는 거지. 재즈바에서 노래로도 들었고, 아까 유언으로도. 그리고 지금 라일리의 어찌할 줄 모르는 그의 표정도 고백이다.

 

“알겠어요. 가요. 근데 자꾸 반하면 곤란한데, 얼굴 밝히는 타입…윽.”

 

결국 그에게 가볍게 명치를 맞았다. 자연스레 라일리의 어깨를 감쌌다. 시끌벅적한 거리를 딱 붙어 걸었다. 둘 다 방금까지 전력 질주를 한 탓에 몸의 열기가 대단했다. 별일이 다 있다며 웃었다. 겨우 진정된 라일리가 ‘저 아까 정국씨 지키려는 거 보셨죠.’ 하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의 말에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라일리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숙소로 바로 가긴 아쉬웠다. 뭘 하면 좋을지 물으려는데 라일리가 아까부터 계속 어정쩡하게 걷는다. 붙어 있는 게 쑥스럽나 싶어 놀리려는데 표정도 불편해 보인다.

 

“라일리, 어디 안 좋아요?”

 

내 질문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뭔가 있는데.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깨에서 손을 거두고 그를 앞질러 걸어 라일리의 열 걸음 정도 앞에 섰다. 내가 멈추자 그도 걸음을 멈춘다.

 

“나한테 와 봐요.”

 

대체 왜 뒤뚱거리나 싶어 그를 살폈다. 내 눈치를 쓱 본 라일리가 내게 천천히 걸어온다. 제대로 걷긴 하는데 어딘가, 어딘가가….

 

다섯 걸음 정도를 걷던 그가 멈췄다.

 

“정국 씨.”

 

그의 부름에 얼른 달려가 앞에 섰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의 볼을 타고 흘렀다. 엄지로 이마와 볼을 쓸었다. 미끄러운 물방울이 손가락 끝에 스몄다.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은 땀에서도 향이 난다.

 

“정국 씨, 일단… 어, 음…. 죄송해요.”

“뭐가요.”

“진짜 죄송해요. 미리 사과드려요.”

“왜요.”

“제 월급에서 다 까셔도 돼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가 뜸 들이며 선뜻 말하지 못한다. 어정쩡하게 선 라일리를 샅샅이 뜯어봤다. 아까처럼 눈치 없는 놈이 되긴 싫었다. 땀에 젖은 얼굴도, 조금 흐트러진 옷도 여전히 완벽하다. 내가 먼저 알아차리고 싶은데 도무지 모르겠다. 예뻐요, 배고파요?, 말고 또 뭐가 있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그의 구두 앞 코 가죽이 살짝 들렸다. 아까 정신없이 뛰면서 바닥이나 돌부리에 쓸렸나 보다. 설마 이 구두 때문에 미안해서 그런 건가? 그나저나 가죽이 들릴 정도면 얼마나 세게…. 아… 설마.

.

.

.

“..저 발목을 좀 다친 거 같아요.”

 

 


*

 

 

 

한사코 사양하는 그에게 화난 표정을 짓고 등에 업었다. 택시에서 내려 호텔에 들어가서도 그를 땅에 내려놓지 않았다. 프런트에서 내일을 위해 휠체어 서비스도 요청했다. 그가 내 등에 업힌 채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만류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 그를 조심스레 소파에 앉혔다. 그보다 내가 더 안절부절못한다. 그의 앞을 서성였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누군갈 보살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많이 아파요?”

 

그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위에서 나를 내려 본 그가 얼른 엉덩이를 일으키다 발목이 아픈지 ‘아윽.’ 소리를 내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신발 벗길게요.”

 

가는 발목을 잡고 조심스레 구두를 벗겼다. 아무리 조심스레 만져도 발목이 안 움직일 순 없었다. 라일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아픔을 참았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라일리 손 붙들고 냅다 뛴 건 난데.”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 퉁명하게 말이 나갔다. 하, 차라리 들고 뛸걸. 언제 삐끗한 건지 감도 안 온다.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겼다. 하얀 발이 드러났다. 오른쪽 복숭아뼈가 조금 부었다. 살며시 그 곳을 만지자 앓는 소리를 내며 발을 비튼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하루만 쉬어도 나을 거 같아요. 괜찮아요, 저.”

“….”

“…내일은 여행 혼자 다니셔야 할 거 같아요. 일하지 않은 만큼은….”

“라일리.”

“죄송해요.”

 

자꾸만 돈과 여행을 연관시키는 그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애초의 우리 만남은 공적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말하기 애매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그 얘기는 차 비서가 알아서 해주길 바랐다.

 

“일단 빨리 쉬어야죠.”

 

그를 마음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부러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은 그의 발목을 살살 만졌다. 내 반응이 의외라는 듯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몸을 일으켜 이제야 에어컨의 온도를 낮췄다. 그도 나도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일단 씻고 누워요.”

“네. 정국씨도 쉬세요.”

“씻자구요.”

“네. 저 천천히 씻을게….”

 

말을 멈춘 그가 나를 쳐다봤다. 그 앞에 섰다. 씻겨준다는 말이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데 혼자서 어떻게 씻는다는 거지.

 

“일단 기다려요. 욕조에 물 좀 받게.”

“네? 아니, 제가 혼자 씻을 수….”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라일리가 입을 합 다문다. 그를 위해서다. 내 만족이 아니라 라일리 아프니까, 그의 발목을, 또 내 여행을 위해서다. 절대, 결코, 내가 라일리를 씻기고 싶어, 거는 수작이 아니었다. 아, 근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지.

 

“라일리가 빨리 나아야 나랑 같이 여행 하죠. 최대한 발목을 안 써야 한다고요. 의사니까 그 정도는 알죠?”

“….”

 

괜히 변명을 덧붙이며 욕실로 향했다. ‘후우-’. 그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욕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소파에 그를 오도카니 앉혀두곤 나만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욕조에 물을 받고 프런트에 전화해 찜질 팩을 준비했다. 라일리의 가방을 거실로 가져와 그의 앞에 펼쳤다. 지퍼를 열자마자 퍼지는 익숙한 냄새에 가슴이 뛰었다. 라일리처럼 가방 안이 단정했다. 갈아입힐 파자마와 속옷을 꺼냈다. 속옷을 고를 때 일부러 무슨 색이 좋을까, 하며 고민하니 그가 제발 그런 말을 안 할 수 없겠냐며 민망해했다. 하얀 속옷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며 ‘이거 입을까요?’ 하고 물으니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내 말을 무시한다. 얼굴부터 목까지 붉게 달아오르는 건 이제 익숙해진 일이다.

 

욕조의 물 온도를 확인했다. 딱 알맞았다. 너무 많이 물을 채우면 넘칠 수 있다. 물론 라일리 혼자 들어가기엔 괜찮지만 어쩌면 나도 들어가게 될 수 있으니까.

 

“옷부터 벗길게요.”

 

맨정신, 분위기 또한 무드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기에 그가 민망해 죽으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나라곤 다를 바 없지만, 그보단 내가 나았다. 셔츠 단추를 잡는데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긴장했다, 전정국.

 

“저 아파서 씻겨주시려고 하는 거잖아요, 정국씨.”

“네.”

“…근데 입맛은 왜 다셔요…?”

 

침을 넘기는 소리가 꽤 크긴 했다. 그의 말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으악.’ 하며 고개를 휙 돌리는 라일리를 보고 크게 웃었다.

 

셔츠를 벗겨 바닥에 던지고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 둘 다 말이 급격히 줄었다. 흠, 하며 라일리가 헛기침했다. 벨트 또한 바닥에 던지고 이번엔 바지 버클이었다.

 

“정국 씨.”

 

그가 내 손을 잡아 행동을 멈췄다. 라일리를 쳐다보니 작게 웅얼거린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며 다시 물으니 ‘수건 좀….’ 하고 대답했다.

 

“수건은 왜요?”

 

알면서 물었다. 맨눈으로 보기에도 팽팽해진 그의 앞섶이었다. 일찌감치 셔츠를 밖으로 빼입어 밑은 가린 나는 그에게 아래의 상태를 들킬 일이 없었다.

 

“부탁드려요, 수건….”

“왜요. 남자끼리 뭐 어때요. 어제 다 봤는데.”

“…아니 좀….”

“왜, 왜요. 설마 라일리 발 다쳐서 지금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와중에 발기했을 리도 없고.”

“….”

“그렇죠? 지금 라일리가 다쳐서 굉.장.히. 심각한 상황인데, 이 상황에 변태같이 흥분했을 리는 없잖아요.”

“흥분 안 했거든요?”

 

몸을 움찔거린 그가 발목에 힘을 줬는지 ‘아야,’ 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의 찡그린 미간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당연히 수건을 가져다줄 생각은 없었다. 미간을 살살 문지르던 손가락이 콧대를 타고 미끄러졌다. 도톰한 입술을 매만지니 그가 손가락을 앙 물었다,

 

“아!”

“스근 가어와어. (수건 가져와요.)”

“싫어요.”

 

손가락을 빼내고 바로 그의 바지에 손을 올렸다. 제지하려는 그에게 ‘씁.’ 하고 말하니 이내 행동을 멈춘다. 힘으로 이길 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포기가 빨랐다.

 

바지를 벗기니 선명히 윤곽을 드러낸 드로즈가 나온다. 굳이 벗기지 않아도 그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흐흥’하고 웃으니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속옷 밴드를 내렸다. 슬금슬금 제 손을 가져와 밑을 가리는 그가 웃겨 크게 웃었다.

 

“우와.”

 

그를 놀리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라일리.”

“원, 원래 크기 거든요.”

“와. 역시. 미국인.”

 

귀엽게 허풍떠는 그의 겨드랑이와 무릎 사이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자연스레 내 목에 팔을 두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입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췄다. 연인은 아니지만 그런 사이인 것처럼 굴기로 작정했다. 지금부터.

 

“왜 뽀뽀하세요.”

“싫으면 피하던가.”

 

한 번 더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역시나 피하지 않는다. 욕실로 이동하는 내내 쪽쪽 소리 내어 입 맞췄다. 그도, 나도 입을 맞댄 채로 웃었다.

 

따듯한 욕조 안에 라일리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거품 하나 떠다니지 않는 맹물이었다. 투명한 물 안으로 그의 몸이 흔들리듯 비췄다. 욕조 밖에 무릎을 대고 앉아 얼굴부터 물로 씻겼다.

 

“저 손 다친 거 아닌데. 발 다쳤는데….”

“그래서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조심스레 얼굴을 매만졌다. 닿는 손길이 좋은 듯 라일리의 눈이 감겼다. 샤워기를 틀어 머리를 적셨다. 이마를 드러낸 머리에 따듯한 물이 닿으니 이내 머리카락이 축 늘어진다. 그의 머리가 이마를 덮었다. 헤어 살롱에서 봤던 화려한 라일리말고 다시 귀여운 라일리가 됐다. 손에 짜낸 샴푸로 거품을 만들어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머리를 감겨준 적이 없었다.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거품이 얼굴로 다 흘렀다. 눈이 따가운지 어푸어푸 세수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에 얼른 샤워기를 틀었다.

 

“아!”

“어어!”

 

물을 너무 차갑게 틀어 그가 몸을 움츠렸다. 당황한 내가 손을 헛디뎌 입고 있던 셔츠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에 흠뻑 젖었다.

 

“미안해요, 차갑죠.”

“괜찮아요.”

 

그가 얼른 따듯한 욕조 물 안으로 몸을 깊게 담갔다. 이 모습이 웃겨 또 둘 다 웃었다. 분위기없이 거품 하나 띄워지지 않은 맹물에 몸만 빼놓은 그도 웃기고 미처 샴푸 거품이 닦이지 않아 머리에 비눗방울 뿔을 만든 그의 얼굴도 웃기고 엉망으로 젖어 저린 다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도 웃겼다.

 

“정국 씨, 잠시만….”

 

라일리가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어디가 불편한가 싶어 얼른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내 옷깃을 잡고 끌어당긴다. 얼굴이 그 가까이 붙었다. 뭘 하려나 싶어 기다리니 찰랑이는 물속에서 나머지 손을 꺼내 내가 입은 셔츠 단추를 매만진다.

 

“다 젖었잖아요…. 이것만이라도 벗고….”

“변태다.”

“아니... 비싼 옷인데...”

 

애써 둘러댄 그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셔츠를 벗기려는 듯 낑낑대기에 내가 스스로 옷을 벗어 던졌다. 모르겠다, 같이 씻지 뭐. 애초에 이걸 기대한.. 건 전혀 아니지만 라일 리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구실이 생긴다.

 

“바지는 왜 벗으세요?”

“욕조도 넓은데 같이 씻어요.”

“아니...”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속옷까지 모두 벗어 던졌다. 그가 내 몸을 보곤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킨다.

 

“나한테 뭐라고 하더니, 라일리 완전 입맛 다시네.”

“아니거든요? 그러는 정국 씨는 저한테 뭐라고 하시더니 그, 그거 커졌거든요?”

“원래 크기에요.”

 

웃으며 말하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물이 찰박이며 밖으로 넘쳤다. 따듯한 물 아래로 맨다리가 맞닿았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다. 뻔뻔하게 샴푸 통을 건넸다. ‘머리 감겨줘요.’ 애처럼 말하니 그가 웃으며 샴푸 통을 받아 들었다.

 

이윽고 작은 손이 머리 위를 오갔다. 조심조심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감긴다. 헤어샵에선 머리를 감겨주면 보통 잠이 오던데 지금은 잠이 홀딱 깬다.

 

샤워기의 온도와 수압을 맞춘 그가 머리를 헹궜다. 등지고 있어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라일리의 손길이 민감하게 와닿았다.

 

“정국 씨.”

“네.”

“..몸도 닦아 드릴까요.”

 

유혹이고 도발이었다. 나답지 않게 부끄러웠다. 고개를 끄덕이니 라일리의 손이 내 어깨를 매만진다. 따듯한 물이 어깨에 닿았다 떨어졌다.

 

“샤, 샤워볼...”

 

그의 말에 일회용 샤워볼에 바디 워시를 듬뿍 짜서 건넸다. 서걱이며 거품을 만들어낸 그가 부드럽게 내 팔을 문질렀다.

 

“손으로 해줘요. 이거 따가운데.”

 

따갑기는커녕 부드럽기만 한데 일부러 투정 부리듯 말하니 그가 피식 웃는다. 물이 찰랑 거리며 작은 물살을 만들어 낸다. 라일리가 낑낑대며 움직인다. 뭘 하려나 싶어 돌아보려는데 이내 내 등에 라일리의 가슴팍이 닿았다. 다리를 벌려 내 허리를 감싸듯 말았다. 물 속이어서 움직임이 편한 듯하다. 라일리의 말랑한 볼이 내 어깨에 닿았다. 팔은 가슴 아래를 감쌌다. 코알라처럼 내 등에 매달린 모양새였다. 골반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정국 씨 등 넓어요.”

 

작은 그의 품 안에 안긴 느낌이 이상했다. 형이어서 그런가.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뭐에 위로를 받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괜찮다고. 우리 괜찮을 거라고 라일리가 말하는 것 같다.

 

내 허벅지 위에 올려진 라일리의 발목을 아프지 않게 문질렀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샤워볼을 매만진 그가 미끄러운 손으로 내 가슴팍을 만졌다. 거품 섞인 물이 부드럽게 와 닿았다. 손이 가슴을 지나 배로 내려갔다. 복근 하나하나를 조각내듯 천천히 훑은 그가 다시 샤워 볼을 만졌다. 이번엔 손이 치골로 왔다. 나도 모르게 다음 행동을 기대했다. 치골 부근을 살살 쓸던 그가 손을 더 밑으로 내렸다.

 

“하아...”

 

대담한 행동에 흥분됐다. 작은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서툴러서 더 미칠 것 같다. 그가 내뱉는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그르렁거리는 낮은 신음이 나왔다. 

몸을 돌려 라일리를 마주봤다. 겹쳐 잡은 두 손이 움직이기 바빴다. 이내 그와 내가 동시에 서로의 어깨로 고개를 떨궜다. 

 

“물 다시 받아야겠네요.”

 

그의 어깨에 젖은 이마를 대고 말했다. 그는 부끄러운 듯 내 등을 꽉 감싸 안았다.

 

 

 

*

 

 

 

둘 다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손을 다친 것도 아닌데 양치까지 시켜주곤 가운을 입혀 그를 살며시 들어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방이 아닌 내 방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침대 맡에 두니 자기가 입으려고 하기에 냉큼 속옷을 들었다.

 

“입혀 줄게요.”

“제가 입게 해주세요...”

“가만히 누워 있어요. 라일리가 나아야 내가 여행을 하죠. 나 혼자 돌아다녀요? 오늘 봤죠? 여기 엄청 위험한 거. 나 혼자 못 다녀.”

“..하, 진짜.”

“누워요.”

 

속옷을 펼쳐 발목에 끼웠다. 민망한 듯 팔로 눈을 가리고 눕는다.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를 타고 고간에 시선이 멈췄다. 덮인 가운을 살짝 거뒀다. 그의 몸에 시선을 홀랑 빼앗겼다.

 

“이, 입혀주세요. 그만 보세요, 제발...”

 

아, 너무 변태 같았다. 흠흠, 헛기침하며 속옷을 입혔다. 속옷을 입으니 이제 부끄러움이 가신 듯 눈을 가렸던 팔을 거두고 나를 쳐다본다. 파자마 바지와 상의까지 입히곤 그의 앞에서 가운을 훌렁 벗어 나도 옷을 갈아입었다.

 

“정국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사정하는 것도 본 사이에 뭐가 부끄러운데요.”

“와, 진짜...”

 

그가 고개를 저었다. 프런트에 부탁했던 찜질 팩을 가져와 그의 다리 맡에 앉았다. 상체를 일으켜 앉는 그가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 보는 표정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고, 음. 미안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살짝 웃고 다시 찜질 팩으로 발목을 천천히 문질렀다. 차가운 얼음팩이라 내 손도 시렸다.

 

“하루 정도는 냉찜질하고 그다음에 온찜질 하라는데 맞죠?”

“..네.”

“기분 안 좋아 보여요. 나 또 눈치 없어요?”

“..아뇨.”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제 손을 만지작거린다. 뉴올리언즈의 엔틱한 호텔과 라일리는 퍽 어울렸다. 생각해보면 모던했던 뉴욕의 호텔도, 화려했던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도 모두 다 어울렸다.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웠나보다.

 

“정국 씨. 제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이상해요.”

 

역시.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다. 나는 그와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오늘로 이 얘기는 종지부를 찍어야겠다.

 

“라일리,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네? 그럼요. 뭐든지요.”

“일에 관련된 거, 돈이든 뭐든 그런 얘긴 나중에 차 비서님이랑 하세요.”

“...”

“이 순간부터 나랑 있을 때는...”

“...”

“마음 가는 대로 해줘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그대로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저, 계속 마음 가는 대로 했는데, 자꾸 이래도 되나 싶어서, 그래서 좀... 그랬어요.”

“알아요. 라일리가 무슨 말 하는지.”

“우습잖아요. 제 주제에 정국 씨한테 이런 대접 받는 거요.”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피곤한 하루였다. 그를 재워야겠다. 찜질 팩을 협탁에 두고 그의 옆에 누웠다. 내가 눕자 얼떨결에 따라 누운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한다.

 

“라일리 주제 파악이라는 말 알아요?”

“알아요.”

“잘해요? 주제 파악?”

“..아주 못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도...”

“라일리.”

 

그의 말을 끊고 팔을 옆으로 뻗었다. 내 품 안에 그가 들어올 공간이 생겼다. 손으로 침대를 팡팡 쳤다. 그래도 미동이 없기에 몸을 그쪽으로 옮겨 라일리의 목 뒤로 팔을 끼워 넣었다. 조금 어색한 팔 베개 였다.

 

“밤이 되면 내 팔을 베개 삼아 눕는 게 라일리의 주제고,”

“...”

 

팔을 구부려 나를 돌아누워 볼 수 있게끔 했다. 라일리가 고개를 살짝 들곤 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누우니 퍽 연인 같았다. 그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었다. 졸린 듯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잠이 들 때까지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게 라일리의 주제고.”

“...”

 

그와 몸을 조금 더 붙였다. 우리에게 나는 같은 향이 좋았다. 어정쩡한 그의 팔을 들어, 내 허리 위에 올렸다. 붙은 두 몸이 따듯했다.

 

“내 허리를 껴안고 편안히 자는 게 라일리의 주제에요.”

“...”

“그러니까 주제 파악 잘해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진다. 라일리가 내 허리를 조금 더 세게 안아왔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쓸었다. 그의 호흡이 일정해질 때까지 오래, 오랜 시간 그를 다독였다.

 

 

 

“자요?”

 

완연해진 어둠 속에서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깨울 생각은 없었다. 내일은 뉴올리언즈를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하루만 있기엔 짧은 감이 있지만, 자기 때문에 관광도 하지 못하고 호텔에만 있겠다고 하면 분명 내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를 게 뻔했다.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내 물음에 대답 없는 라일리를 톡톡 건드렸지만 역시나 미동 없이 잔다. 얕은 숨을 내쉬고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팔을 뻗어 핸드폰을 들었다.

 

당장 몇 시간 후면 해가 밝은 테니 시간이 없었다. 나도 초능력을 가진 인간은 아닌지라 피로가 밀려왔다. 망설임 없이 차 비서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대답이 들렸다.

 

-네, 도련님.

-들려요?

-어디 불편하십니까?

 

속삭이듯 말하니 그가 재빨리 묻는다. 통화 음량을 최소로 줄렸다.

 

-점심 시간대쯤으로 뉴올리언즈에서 마이애미로 가는 항공권 좀 예매해줘요. 두 자리.

-네?

-호텔은 오션 뷰 객실로. 아, 스위트 룸 안 돼요. 무조건 방 하나짜리. 침대도 하나요.

-도련님?

-차 비서님 찬스 좀 쓸게요. 이 통화 내용 할배한테 보고 할거죠? 하는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더. 차도 좀 렌트해 주세요. 마이애미에서 타고 다닐 차. 삼 일 정도 머무를 생각입니다. 차 비서님 찬스 안 쓰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연애하느라 바빴다. 차 비서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혹시 통화 소리에 라일리가 깼을까 봐 얼른 얼굴을 살폈다. 그가 ‘우음.’ 하고 입술을 움직이며 내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마이애미에선 라일리를 업고 바다를 거닐고, 지는 노을을 보고 맛있는 밥이나 먹이고. 최대한 쉴 생각이었다. 제 발목이 아픈 걸 미안해할 새도 없이 바쁘게 쉴 예정이었다. 아주 바쁘지만 천천히. 소란스럽지만 느리게, 그렇게 쉬게 해야지.

 

전화를 끊은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차 비서에게 문자가 왔다. 얄밉긴 해도 일 처리 하나는 괜찮게 하는 그였다.

 

[항공권입니다.]

 

짧막한 문자와 모바일 항공권이 함께 왔다. 내일 열한 시 비행기였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면 딱 좋을 시간이었다. 역시 센스가 남달랐다.

 

[호텔입니다.]

 

바우처 룸컨디션에 쓰인 Ocean view 와 One king bed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바다가 보이는 룸이었다. 귀국할 때 차비서 선물을 꼭 챙겨가야겠다.

 

[렌트카입니다.]

 

하얀색의 포르쉐 카브리올레였다. 라일리랑 잘 어울린다. 그가 좋아할 것 같았다. 라일리를 옆에 태우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이며 좋은 노래와 함께 드라이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회장님께는 보고드렸습니다.]

 

알고있던 바이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미국까지 쫓아올 할배도 아니었고 그저 혼자 다 하겠다더니 제 버릇 못 고치고 차 비서를 시켜 먹은 놈이라고 잔소리나 할 게 뻔했다.

 

예상처럼 바로 핸드폰 알림창에 할배 이름이 떴다. 차 비서와의 메시지 창을 나가 할배의 문자를 확인했다.

 

[보고 받았다. 경험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구나.]

 

할배답지 않은 문자였다. 경험하며 잘 지낸다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귀국하면 바로 선 볼 수 있게 약속 잡았다. 호림 그룹 차녀다.]

[적당히 여행객 흉내 내고 오려무나.]

 

연달아 오는 문자에 몸이 굳었다. 못 볼 거라도 본 듯 핸드폰을 재빨리 내려놨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걱정이 앞섰다. 당연한 감정이었다.

 

...무섭다.

 

“우음. 움...”

 

라일리가 뒤척이며 품에 파고들었다. 

괜찮다고, 우리,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키듯 라일리가 나를 꽉 안는다.



주제. 건방지게 라일리에게 주제를 나열한 나에게도 내 주제라는 게 있었다.

‘여행객 흉내’ 정도만 낼 수 있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연애는 꿈도 못 꾸는 내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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