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드리우는 그림자





날씨가 서늘해져 왔다.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오늘은 다른날보다 한가해서 사무실안에 앉아 혼자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간만에 여유로움을 찾으니 온갖 생각이 났다. 잠들어있는 성우의 조금 부풀어오른 배를 밤새 쳐다보다 아침에 지각할 뻔 했던 그 신혼같았던 그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부장님 회의 30분 남았습니다. 그전에 총무과에 다녀오셔야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회의자료 줄테니 준비 좀 해줄래요? 여기 있을 텐데... 아 맞다. 어제 자료 준비하고는 집에 두고 왔네. 혹시 총무과 다녀오는 거 나중으로 미루면 안될까요? 아님 회의 시간이라도 늦추거나"

“오늘 회의 주제가 총무과에 대한 것이라 꼭 다녀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회의시간은 회장님께서 정하셔서 회장님 스케줄 때문에 변경은 어렵습니다”




아들이라고 부장자리에 떡하니 앉혀놓고는 못 미더웠는지 강회장이 붙여놓은 비서였다. 디니엘과 비슷한 나이 또래이지만  그는 비서고 다니엘은 금수저 물고 태어나 오자마자 부장이니 아니꼬운 것인지 너무 갑갑하게 굴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준비된 자료가 없으면 회의고 뭐고 임원진들 앞에서 망신만 당할 것이 분명한데 총무과와 집까지 다녀오는 두가지 일을 다 할수가 없어 난감한 다니엘이었다.




- 응.. 이 시간에 웬일 이야?

"형 정말 미안한데 부탁하나만 하자. 내가 30분 후에 회의거든? 회의 자료를 놓고왔어. 지금 일이 있어서 집에 갈 시간은 안 되고 미안해 좀 갖다 줄래? 컴퓨터에 USB꽂혀 있을 꺼야. 그거 갖다 주면 되”

-알았어. 30분? 시간이 좀 촉박하네

“미안해. 택시 타고와. 참, 나 지금 어디 가야 하니까 혹시 와서 나 없으면 여직원한테 맡겨놓고 가면 되. 미안해. 빨리 좀 와줘”




안그래도 제 몸 하나 간추리기 힘든 아이인데 이런 것 까지 부탁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에게 남은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재환도 밖에 나가있을테고 자신이 다녀올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집으로 보내자니 갔다가 오는 시간까지 계산해야하고 어쩔 수 없이 성우를 불렀지만 시간에 맞춰서 올지 총무과에 있는 내내 안절부절이었다. 

 



“강부장님... 부장님?”

“네? 아 죄송합니다. 계속하시죠.”




총무과장이 다니엘을 몇 번이나 부를 정도로 다니엘은 집중을 못하고 성우가 잘 오고 있는 것인지 도착은 했는지 온통 성우에게 신경이 쓰여서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회의 자료 때문이 아니라 성우에게 이런 일을 시켰다는 자체가 너무 미안하고 불안해서 정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분명 성우도 이런 일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만 그냥 오늘은 왠지 불안했다. 



다니엘이 급하다고 하도 재촉을 하는 바람에 성우는 핸드폰도 깜박하고 나왔다. 옷만 대충 걸치고 USB와 택시비만 챙겨서 나왔는데 늦지나 않을지 다니엘 뿐  아니라 성우까지도 안절부절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급하니 빨리 좀 가달라고 택시 운전기사에게 여러 번 재촉했더니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 오기는 왔는데 인사부장실이 어디인지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높다
엘리베이터를 타고서도 한참을 올라갔다.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보다는 빨리 도착한 것 같은데 정문에서 경비원에게 한번 잡히고 다니엘의 사무실을 찾느라 또 시간을 허비하고 겨우겨우 도착은 했는데 조금 늦은 것 같아 뜨끔해 진 성우다. 

성우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막 시작이 된 터고 성우는 괜히 사무실 앞에서 어중간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오셨죠?”

“다니엘 아니, 강다니엘 부장님 뵈러”

“부장님 지금 회의 들어가셨는데 약속은 하고 오셨나요? 약속이 되어있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고급스러운 외관에 세상사랑들이 다 아는 얼마나 대단회사인데 그것도 인사부장 사무실 앞에서 허름한 홈웨어 차림으로 기웃 거리는 낯선남자가 여직원의 눈에는 별볼일없는 사람으로 보인듯 했다.


약속을 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에 성우는 괜히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자신과 다니엘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의 상황은 너무나도 달랐다.

 아래위로 훑어보는 여직원이며 지나가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성우는 빨리 이 공간을 빠져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저 기억 안나세요? 저 서은하에요. ”

“아. 네 안녕하세요.”

“맞죠? 강 부장님 아는 형... 맞구나. 내가 잘못본 게 아니네 근데 어쩐 일이에요?”




은하는 성우의 앞에서 마치 아는 형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아는 형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내 뱉았다. 그 말에 성우는 기분이 언짢아져 버렸지만 아무표현도 할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집에 회의 자료를 두고가서요.”

“주세요. 저도 마침 회의 들어갈려던 참이에요. 전해 드릴께요.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너무 반갑네요. 지금은 제가 회의에 쬐금 늦었구요. 이따가 저녁에 밥이나 먹어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아니..  저는...”

“여기 비서도 옆에서 다 듣고 있는데 거절 하실꺼에요? 그러시면 저 무척 창피한데. 알았죠? 이따가 저녁에 다니엘 통해서 연락 할께요. 참, 저 오늘 여기서 본거 비밀로 해줘요. 회의까지 늦었는데 여기서 이야기 하면서 늦장부린거 들키면 저 정말 혼나거든요. 그럼 전 늦어서 이만, 이따뵈요”




은하는 늦었다면서 쉴새 없이 재잘거리고 들어갔다. 그녀의 말 재주는 성우의 혼을 쏙 빼 놓기에 충분했다. 

바보같게도 늦었지만 회의자료를 전해줬다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성우였다. 다니엘이 난감한 상황은 면했다고 안심하고 회사를 나서는데 아차, 차비가모자라서 집에 갈 택시비가 없었다.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딱 버스비 만큼만 있어 그래도 이게 어디냐고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버스를 탔는데 머리속은 은하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 고민이었다. 


예전에 은하 때문에 아파봤던 적이 있어서 아직까지 그녀가 경계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성우 자신도 서은하라는 여자에 대해서 궁금했지만 그냥 친구려니 생각하고 묻어 둘려고 했었는데 또다시 나타난 은하의 존재는 다시 성우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같은데서 일하나? 그러니까 회의 들어가겠지 그럼 다니엘을 자주 보겠지?



저녁약속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잡힌 것이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니엘과 같이 만난다는 생각에
그나마 안심이 되는 성우였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옆자리 할머니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색시 색시?”

“예에?”

“얼마나 됐어? 한4개월 쫌 넘었나? 4개월 정도 됐겠네?”

“티 나요?”

“보통사람들은 잘 모르지. 근데 나 같은 늙은이는 그동안 많이 봐 왔으니까 척 보면 알지. 색시 너무 이쁘게 생겨서 그렇게 멍하게 있으면 누가 잡아가. 그렇게 있지 말어. 너무 착해 보이네 사람들 때문에 속 많이 썪겠어. 쯧쯧.. 독하게 살아야 되. 안 그러면 애기 키우면서 못살아. 아이고 다 왔네 이 할미는 내려야겠수. 조심히 가”




오랜 연륜이 임산부인 것은 알아 차려도 성우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할머니가 뭐라고 하신 건지 기억도 나지않고 집에 오는 내내 성우의 머릿속에는 서은하 그녀만 맴돌았다. 

조금 있으면 연락이 올 텐데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집에 와서도 고민만 하고 있었다. 나가자니 그녀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고 다니엘도 나온다는데 안 나가면 다니엘의 입장이 난처해 질것 같고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한편 은하는 주인도 없는 다니엘의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면서 다니엘의 흔적을 하나하나 느끼고있는 중이었다. 다니엘의 사무실은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사람들앞에서 보여지는 상냥한 아가씨의 이미지, 지금 은하의 얼굴에서는 그런 이미지가 사라진지 오래다. 오히려 더 표독하면 포독했지 부드러운 이미지는 찾을 수가 없다. 




드르륵~~~

핸드폰 진동 소리다. 회의 때문에 핸드폰을 두고 갔는지 핸드폰은 다니엘의 책상 서랍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론 그러면 안되겠지만 다니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고 싶어 하는 은하였기에 아니, 알고 싶은 걸 넘어서서 가지고 싶은 그녀라 은하는 늘 있었던 일인 듯 다니엘의 서랍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세지를 확인했다. 

 


[다니엘 나야. 오늘 저녁 은하씨가 만나자고 했는데 나도 가야해?]

[응. 얘기 들었어 이따가 7시까지 로젠으로 나와. 소개시켜줄게]



분명 자신을 만난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그것 때문이라도 은하는 더 매서운 눈초리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다니엘이 아닌데도 다니엘인 척 답장을 보낸 후 받은 메시지, 보낸 메시지를 모두 지워버리고는 입꼬리를 흘리며 웃는 그녀였다. 은하로 인해 다니엘의 사무실은 한층 더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소개를 시켜준다는 말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듯 했다. 껄끄러운 사이라면 소개 따위는 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성우는 7시가 다가오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아차 싶어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섰다. 거의 도착할 때 쯤 다니엘에게 걸려온 전화, 또 늦는다고 잔소리를 할까봐 한층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형 어디야

“응 다와가 조금만.”




갑자기 건너편에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원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켜지지 않는것이 배터리가 다된 모양이다. 아까 회사에 들렀을 때만이라도 핸드폰을 가지고 나왔다면 배터리가 다 된 것을 알아 차렸을 텐데 그래도 늦지 않게 오라는 다니엘의 전화 인 줄로만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로젠으로 들어섰다.



그게 대단한 결투의 시작일줄... 

성우를 더더욱 힘들게 할 사건의 시작 일 줄은 성우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선물 Beautiful Never 약속해요 애인(愛人) 그냥 너라서 감기 밤의 가스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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