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목동재] 이것이 바로?! 3-4


누군가가 저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지던 정신은 얕은 수면위로 떠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계속 잠에 취해있던 동재는 문득 누군가 굉장히 낯선 방식으로 자신을 깨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였다면 이름을 불렀을 것이고, 누나였다면 정신이 번쩍 드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었을 테니. 인지하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제 앞에서 저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있던 시목이 티가 나게 움찔-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 미안.”


시목은 빠르게 물러섰다. 머쓱해진 동재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온 탓에 방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가방을 들고 문을 열었다.


“오늘 고마웠다. 그럼 갈게.”


동재는 빠르게 시목의 집을 벗어나려 했다. 제가 오늘 저지른 여러 가지 쪽팔린 일이 머릿속에 휙휙 지나갔다. 마구잡이로 신발을 신는데 서동재, 하며 이름을 불러왔다. 순간 움직임이 멈추었다.


“밥 먹고 가.”

“어?”


시목은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 그저 동재가 처음 집에 왔던 날처럼 조용히 반찬을 꺼내고 밥을 푸고 자리에 앉았다. 밥을 먹고 가라고 했지 같이 먹자고 한 건 아닌지 시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던 동재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식사를 시작했다. 동재는 시목이 밥을 먹기 시작하자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염치없는 짓이지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그나마 낫지 않은가. 슬그머니 앞으로 가 수저를 들었다. 딱히 대화를 할 거리도 찾지 못해 동재는 저답지 않게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시목이었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냐. 오늘, 말해주고 싶었던 건 맞지만 오늘 일은 나도 놀랐으니까.”


목이 콱 메는 것 같았다. 그렇다. 동재는 오늘 실연을 당했다. 그것도 짝사랑하던 동성의 남자 선배에게. 고백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재단 이사장 딸 이연재였으니 더는 마음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는 일이겠지. 동재는 억지로 밥을 밀어 넣다 흡- 울음을 삼켰다. 입술이 비죽비죽 황시목의 앞에서 우는 건 더는 사양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없으니 마음이 조금 편하긴 했지만, 저와 황시목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약점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목은 행동을 멈춘 채로 동재의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혼자 훌쩍거리던 동재가 숨을 가다듬었다.


“야, 이거 오늘만 이런 거야. 어디 가서 약점이랍시고 들먹일 생각 하지 마.”

“너는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마음대로 생각해서 하는 경향이….”

“고맙다.”


시목은 동재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오류를 지적하거나 상대방의 말에 되받아치는 말솜씨는 대단했으나 저렇게 숙이고 들어오거나 감정을 건드리는 말에 대한 면역은 적었다. 동재 또한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남은 밥을 크게 퍼 입에 밀어 넣고 씹었다. 그 이후도 조용한 식사 시간이 계속되었다. 동재는 지난번과 같이 밥을 다 먹자마자 설거지하겠다고 했지만, 시목이 괜찮다며 동재를 말렸다.


“기분이 우울할 때 몸을 움직이면 좀 나아지거든.”


하지만 동재가 덧붙인 말에 시목은 더 말릴 이유가 없어져 동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두었다. 한참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끝낸 동재가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야, 황시목. 이제 우리 친구 할래? 연애 사업은 너도 망했고 오늘로 나도 망했고. 어때? 싫으면 말,”

“그래.”

“오?”


동재는 시목의 대답에 의외란 표정을 했다. “왜?” 질문을 한 건 동재였다. 시목은 기가 차는지 하- 짧은 한숨을 뱉었다. 에이- 장난이야. 오늘 진짜 고맙고 나는 이만 갈게. 동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듯 부산을 떨며 시목의 집을 나왔다. 저도 제어하지 못하게 감정이 날뛰어 남이 보기엔 제가 제멋대로 보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준에겐 그런 모습은 최대한 보이지 않으려 노력한 것도 있었는데. 인제 와서 이런 걸 따져봐야 소용이 없었다. 속으론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마음에 담고 진지하게 바랄 만큼 본격적이진 않았다. 이연재라니. 이연재 정도는 되어야 창준 선배와 사귈 수 있구나. 제 한계만 깨달은 꼴이었다. 마음이 한꺼번에 접히진 않겠지만 선배를 좋아하는 만큼 동경했던 건 맞으니 그 마음은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동재는 의식적으로 제 끝난 짝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동재의 연애사를 모르는 친구들은 요즘 좀 감정 기복이 심하네, 정도로 넘어갔다. 달라진 건 시목과의 관계였다. 시목은 언젠가부터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땀 흘리며 들어오는 동재에게 음료를 하나씩 건네기 시작했다. 처음엔 종류도 다양했지만, 동재의 취향을 알아챈 후론 거의 매일 같은 음료를 내밀었다. 대화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일방적으로 동재가 떠드는 말이었고, 대화하는 시간도 거의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남짓 정도였지만 동재는 그 시간이 참 편안하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은 동재가 시목을 찾아갔다. 그날은 운동장에서 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답하듯 과자나 빵을 사서 시목의 반으로 가 그걸 나누어 먹는 거다. 동재는 시목의 반에 들락날락하며 시목의 반 친구들과도 매우 친해졌다. 쟨 누구고, 성적이 어느 정도고 우리 반 누구랑 친하고, 동재의 입에선 시목은 알지 못하는, 아니 알 생각도 없었던 말이 자주 튀어나왔다.


“나는 별 관심 없는데.”

“뭐?”

“네가 말하는 걔들.”

“아, 그러냐?”


동재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네들 반 친구니까 이런저런 정보를 알고 친해지라고 말해준 것이었는데 관심 없다 딱 잘라 말하니 조금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 말해달래도 해주나 봐라. 동재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알려달래도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시목은 정말 다른 친구들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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