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 사해팔황이 평화를 되찾고 모든 일이 흐르는 물처럼 순조롭고 바람을 품은 배처럼 쾌활하게 흘러가리라 만인이 의심치 않을 무렵, 십리도림의 주인이자 최초의 봉황인 절안상신은 오랜만의 육아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청구 호제의 넷째 백진에 이어, 막내 백천까지 거의 절안의 술창고를 털어가며 자랐기야 했지만 이번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봉황이었다. 그것도 여아(女兒)인 황. 부신!!  절안은 한탄하며 하늘을 보았으나 떠나신 선인께서는 말이 없으셨다. 


하여간 진실로, 아이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후에 들으니 저 높은 곳에서 천둥과 번개가 번쩍이며 지극한 하늘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던가. 절안이 꽃비와 함께 제 품에 내린 알을 받고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부신을 부르며 허둥거렸다. 둥지를 만들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 방 온도를 높여야 하나?! 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새를 보다못한 백진이 급히 부모님을 모셔왔다.


호제 부부가 도착했을 무렵 절안은 온갖 푹신하고 포근한 것들을 모아 둥지를 만든다 집 안을 따뜻하게 한다 난리였다. 연단실마냥 뜨거운 방안의 온도에 땀을 닦으며 호제는 절안을 안심시켰다.


“그대도 태어났을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태어났지 않았나. 저 아이도 마찬가지일세.”

“그래도, 그래도! 봉황이란 말일세!”


하늘과 땅, 사해팔황 모두 통틀어 봉황이란 산삼보다 귀하고 신지초만큼 희귀한 존재였다. 아니, 신지초는 있는 게 확실하니 천지의 지극한 기운이 만나 태어난 어린 봉황이란 말 그대로 전설에나 나올법한 존재였다.


“황이라니! 황이라니! 이게 몇만년만인지!”


기쁨과 당황에 제 정신을 못 차리는 듯한 노봉황을 보다 못한 호제 부부는 아이가 알을 깨고 나올 때까지 십리도림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절안상신의 야단법석과 구미백호족들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알은 칠일밤 칠일낮 동안 꿈쩍을 안하며 상신들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갑자기 금을 내더니 뾱! 하고 귀여운 발이 나왔다. 그리고는 남은 알껍질을 팍팍 깨부시고 세상에 그 귀여운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아직 모습을 바꿀 줄 모르는 어린애를 부여잡고 절안이 히죽거리는 입매를 애써 내리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네 이름을 서담(徐炎)이라 하겠다.”


이것이 십만년하고도 몇만년 만에 찾아온 봉황족의 경사였다.



서담은 무럭무럭 자라 십리도림을 평정해나갔다. 절안과 백진의 보살핌 아래 자란 서담은 무서운 것 하나 없는 아이로 자랐다. 워낙에 귀한 아이라 절안도 백진도 아이를 오냐오냐 키웠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어느정도 자란 일만년만에 일어났다. 오랜만에 외유를 나갔다 온 백진이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장난기가 돌아 서담에게 미혼술을 쓴 것이다. 면역이 전혀 없는 서담은 맹한 얼굴로 날개 한짝을 내줄 뻔 했고 장난을 건 사람도 옆에서 방임했던 사람도 기겁을 한 것이다. 


“이를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잠든 아이 옆에서 한탄하며 머리를 부여잡는 절안에게 백진이 곰곰히 생각하다가 부채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곤륜허가 있잖은가! 우리 천둥벌거숭이 막내도 잘 키워내주시지 않았던가. 서담도 잘 키워주실걸세.”

“아, 묵연 그 친구가 있었지!”


어느덧 의형제의 머릿속에 ‘말썽꾸러기를 잘 키워낸 선생님’으로 자리잡은 전쟁신 묵연은 동황종 사건 이후 곤륜허를 재건하여 제자들을 돌보는 중이었다. 열성 학부모 둘은 이미 선례도 있는데 굳이 남장할 것도 없겠다 싶다며 서담이 잠에서 깨자마자 데리고 곤륜허로 향했다.


그렇게 곤륜허에 여차저차 눌러앉은 서담은 사형들의 보살핌과 묵연의 통제 아래 사음상선만큼 사고를 치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구중천의 천족 태자 부부가 곤륜허에 방문하게 되었다. 서담은 이름만 듣던 바로 위 사형, 아니 사매를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손님들은 오시자마자 먼저 스승님의 방에 들어 인사를 올리고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음, 아니 백천도 널 보면 감탄할거다. 나만큼이나 장난의 귀재라고 말이야.”


자란이 이죽거렸지만 서담은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첩풍이 헛기침을 하자 자란도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손님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서담의 눈에 무슨 찹쌀경단 같은 아이가 눈에 들어온 것은. 곤륜허에 아이? 호기심이 생긴 서담이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예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서담은 배운대로 예의바르게 물었다. 아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아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이예요!”


그 답에 자란이 어이없어했으나 서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는 서담! 어머니랑 아버지는 없어요!”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어떻게 태어났어요?”

“하늘과 땅의 지극한 기운이 만나서 내가 만들어졌대요! 절안이 그랬으니까 맞을걸요?”

“그렇구나. 서담은 굉장하군요. 아리는 부모님이 없는 사람을 처음 봤어요.”

“그렇죠? 아마 이런 존재는 몇 없을 거예요. 아, 구중천의 동화제군도 나랑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정말이요? 아리는 몰랐어요. 서담은 똑똑하군요.”


그렇게 어딘가 맥락이 이상한 대화가 이어졌다. 옆에서 듣는 첩풍과 자란은 따라갈 수 없는 대화에 아연질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서담. 모르겠지만 이 분은 구중천의 소천손으로 성함을 아리라고 한단다.”

“구중천의 소천손이요? 와, 저 천족 처음 봐요.”


서담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첩풍은 괜히 이야기해줬다 싶었다. 서담과 아리는 이제 보호자에게 허락만 받으면 서로의 진신을 보여주자고 약속까지 하고 있었다. 첩풍은 나오지 않는 사부님과 사제 부부가 원망스러워졌다. 사음, 아니 백전상신. 빨리 나와주십시오. 왠지 예감이 안 좋습니다. 


첩풍의 애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맥락없는 대화 중에 폭탄선언이 터졌다.


“아리는 서담이 좋아요! 아리는 서담과 결혼할 거예요!”


뭐?? 지금 뭐라고??? 첩풍과 자란은 정신히 혼미해졌다. 다행히 곤륜허의 막내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서담은 아리랑 결혼 안해요.”


아리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설마… 설마…!

“서담은 아리가 싫어요?”


울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구중천부터 범계와 익계에 이르기까지 감히 이 아이를 싫다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하여 서담은 어쩔 수 없이 귀여움에 항복하여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요.”


찹쌀경단의 하얀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럼 아리랑 결혼해요!”

“싫어요!”


그거랑 이건 다르지! 서담이 정색했다. 아리가 서담의 옷자락을 잡고 항의했다.


“왜요!”

“천족은 일부다처제잖아요! 저는 낭군님 한분이랑 알콩달콩 살고 싶어요!”


결국 그날 소천손은 울고 말았다.






아리의 울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뛰어나온 야화군을 보자마자 아리가 소리쳤다.


“아버지 미워요! 왜 아리를 천족으로 태어나게 만들어서 서담이랑 결혼 못하게 해요!”


아리의 기세가 맹렬하여 야화군이 어찌 달래지도 못하는 와중 결국 백천상신이 나오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


“아리야, 아버지한테는 어머니만 있고 어머니한테는 아버지만 있지?”


아리는 어머니가 내어 준 비단 손수건에 코를 흥, 하고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한테 물어보렴,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을 처로 들일건지.”


갑자기 화살이 야화군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부신의 신력 절반을 가진 사두흉수를 쓰러뜨린 무용이 무색치 않게 야화군은 잽싸게 화살을 잡아챘다.


“그럴 일 없다.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네 어머니 뿐이다.”


그 대답에 백천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리에게 말했다.


“천족이어도 일부일처제 할 수 있단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러려면 신의를 쌓아야하는 거고.”

“신의는 어떻게 쌓아요.”


백천상신이 잠시 생각하다가 현명하게 답했다.


“음… 성의를 보여야겠지?”


그렇게, 소천손의 물량공세가 시작되었다.







“서담! 아리가 뭐 가져왔는지 보세요. 오늘 수라상에 천도가 올라왔는데 맛있어서 제일 맛있는 걸로 챙겨왔어요.”


그러나 서담은 십리도림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제일 맛있는 복숭아는 십리도림에 있지 않겠는가? 서담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기묘한 얼굴로 소천손 앞에서 천도를 까먹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도림 밖의 복숭아도 그럭저럭 맛있었다.


“서담! 아리가 사탕수수를 가져왔어요!”

“소천손께서 직접 구해오신 거랍니다~”


옆에서 소천손이 얼마나 큰 공을 들여 사탕수수를 사냥해왔는지 업적을 낭랑하게 읊는 성옥원군은 덤이었다. 성옥원군은 웃는 얼굴에는 욕을 못한다는 말을 신선으로 빚은 듯한 이라, 서담은 차마 쫓아내지도 못하고 사탕수수로 차를 만들어 내야했다. 


“서담! 아리가요~ 오늘 서해용궁에 갔는데 거기 반짝이는게 많아서 주워왔어요!”

“히익! 그거 서해 용궁의 야광주!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으세요!”


“서담! 아리가 왔어요. 아리가 뭘 가져왔게요!”

“아, 십리도림의 도화주군요. 이건 괜찮아요.”


언제는 엉망인 꼴로 오골계를 잡아오질 않나, 언제는 또 물에 푹 빠진 꼴로 제 몸만한 잉어를 가져오질 않나. 서담은 아리 옆에 선 성옥선군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소천손.”

“네, 서담!”

“앞으로는 어딜 가시든지 저와 가시지요.”


아리의 까만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좋아요! 서담과 함께 하는 거라면 아리는 뭐든지 좋아요!”


서담의 한숨만이 깊어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누구도 몰랐다. 이것이 사해팔황을 통틀어 가장 곤란한 말썽꾸러기 조합이 탄생한 순간이라는 것을…!






십리도화 팬이라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냥냥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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