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거짓 없이 고하라니,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반의 이야기도, 레일 왕국의 이야기도 그에게 꺼낼 수는 없으니까. 어서 빨리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의 시선이, 허리를 꽉 감아 안은 팔이, 그래서 맞닿은 가슴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소리가 평정심을 자꾸만 깨뜨린다.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씩 맞혀 볼까? 너는 여기에서 검술 훈련을 했지."

"..."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검술 훈련을 한다는 건 란과 반, 그리고 피젠 밖에 모르는 일인데. 설마 피젠이...? 아니, 아니다. 그랬다면 황태자가 내가 레일 왕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게 자연스러운데, 지금 그의 태도를 보았을 때 거기까지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럼,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어디까지인가. 나는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반응을 보니 맞나 보군."


황태자가 허리를 감지 않은 손을 들어, 내 입술을 문질렀다. 그제야 내가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랬지? 아니, 왜 그럴 필요가 있었지?"

"..."

"내게 말했다면, 좋은 선생을 붙여 주었을 텐데, 왜 이런 곳에서 혼자 훈련을 했느냔 말이야."

"아..."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긴장이 풀려 안도의 한숨이 살짝 새어 나왔다. 그는 내가 여기서 혼자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별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내 말을 들은 황태자는 그제야 팔을 풀고 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체력을 기르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예쁜 손에 이게 무엇이냐."


그는 굳은살이 박힌 내 손을, 손가락을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쓰다듬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잊고 있었던 간지러움이 피어올랐다. 마음의 간지러움은 전염이 되듯 손가락 끝으로 옮겨갔다. 더는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손을 슬쩍 뺐다. 황태자는 떨어져 나가는 내 손을 그대로 놓아주었다.


"흉이 지지 않는 안전한 운동을 찾아보라 이르겠다. 옆에서 도움을 줄 선생도 구하고."

"... 예."


이제 운동은 안 하기로 했지만, 지금 분위기에 거절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꽈 꽝


침묵을 깬 건 갑작스레 울린 천둥소리였다.


"어서 돌아가야겠구나. 곧 비가 쏟아지겠어."


-툭, 투둑


곧 비가 쏟아지겠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가 오기 시작했다.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히 따라 오거라."

"예."


황태자가 앞장을 섰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비는 그칠 생각을 안 하고, 점점 거세졌다. 옷은 점점 무거워졌고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어두웠다. 매일 같이 다니던 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길이 낯설었다. 그리고 마주한 내리막길.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 내가 간 길을 그대로 밟고 오거라."

"예..."


위험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계속 나를 배려해주었다. 가장 안전한 길을 찾으면서 중간중간 돌아보며 내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눈에 빗물이 들어갔다.


"으앗,"


눈을 감고 디딘 다음 걸음은 제대로 안착할 수 없었고, 나는 그대로 미끄러운 나뭇잎을 밟고 굴러떨어졌다.


"하임!"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구르고 또 굴렀다. 그러다 등에 충격이 느껴지고, 비로소 나는 멈출 수 있었다.


"윽.."


떨어진 곳이 어딘지 확인하려 눈을 떴지만, 비는 계속 거세져 이제는 눈에 들어간 빗방울이 아니더라도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나무 밑에서 멈춰 내가 있는 곳에는 비가 덜 들이친다는 사실이었다.


"들리면 대답해라. 하임, 어디 있지?"


겨우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아내고 상황 파악을 하는데, 황태자의 목소리가 빗소리 너머로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법 작았다. 빗소리의 탓인지, 내가 멀리 온 것인지 그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전하, 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를 내며 황태자를 불렀다. 나도 그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가만히 있는데도 통증이 느껴지는 오른 발목이 심상치 않았다.


"계속 목소리를 내 보거라."

"여기, 여기요!"


목소리를 듣고 내가 있는 곳을 찾은 황태자는 이내 모습을 보였다.


"하.. 다행이구나. 조금만 더 멀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어.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발목이 조금 아픈 것 말고는 없습니다."

"발목, 이리 내 보거라."


나는 바지를 살짝 올려 오른쪽 발목을 황태자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아무래도 많이 부은 것 같구나. 신발도 한 번 벗어 보거라."

"예."


나는 군말 없이 신발을 벗었다. 빗물 탓에 딱 달라붙은 신발은 잘 벗겨지지 않았다.


"후... 정확한 건 의원에게 진단을 받아야겠지.. 지금은 걷기 힘들 것 같으니 내게 업히거라."


내 발목을 이곳저곳 살펴본 황태자는 등을 돌리며 내게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비도 많이 오는데, 저를 업고 가시다 전하도 다치시면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전하는 먼저 내려가셔서 도움을 요청하십쇼.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어찌 다친 너를 혼자 두고 갈 수 있겠나. 고집 부리지 말고 빨리 업혀."


정말 고집을 부리는 게 누구인지...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다친 나를 업고 숲을 나가는 건 무리였다. 그런데 그런 고집을 부리는 그의 모습이, 싫지가 않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 이렇게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드나 보다.


"... 무슨 일 일어나도 제 탓으로 돌리시면 안 됩니다."

"이 상황에 무슨... 알겠다."


나는 결국 그의 고집에 내 몸을 맡기고 말았다. 젖어서 피부에 달라붙은 옷 너머로 그의 근육과 온기가 느껴졌다. 그게 뭐라고 지금 같은 상황에 얼굴이 붉어졌다.


"꽉 잡거라, 꽉. 떨어지지 않게."

"예."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그의 온기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절망적인 상황과 대비되는, 무척이나 포근한 감각이었다.





오늘 마침 밖에 비가 오네요. 의도한 건 아니고, 예전부터 구상한 장면이었는데 아주 나이스 타이밍 ㅎㅎ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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