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달 - 나의 이름 (feat. 한아름)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깊은 바닷속의 이야기다.

   푸른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앞도 보이지 않는 깊고 캄캄한 곳으로 헤엄쳐 들어가면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진다. 햇빛이라도 드는 것처럼 시야가 환해지고, 에메랄드빛 물속에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생물체들이 나타난다. 그중 그곳의 으뜸인 생물이라 하면,







인어다.





나의 인어왕자

당신을 위해서라면





   윤기는 바닷속을 다스리는 인어 왕의 일곱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막내 여동생과 사이가 좋았던 윤기는 늘 바다가 아닌 바깥세상을 동경해왔다. 둘은 함께 인간들이 바닷속에 흘린 물건들을 찾으러 다녔고, 가끔 수면 위로 나가 모래사장 위의 성을 바라보며 상상해왔다. 저 안에는 어떤 인간들이 살고 있을까. 저 안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지고 있을까. 늘 윤기의 상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윤기님. 막내 공주님이 플라운더와 또 바다 위로 올라가신 것 같습니다."

"또? 요즘 매일 올라가네."

"아무래도 폐하께 말씀을..."

"아니, 세바스찬. 아버지께 한 마디라도 하면 집게를 묶어버릴 줄 알아."



   윤기의 말에 세바스찬을 입을 꾹 다물었다.

   막내가 자꾸 인간 세상을 궁금해하며 호시탐탐 수면 위로 올라갈 기회를 노리는걸 알았던 왕은 세바스찬을 감시자로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세바스찬이 왕보다 더 무서워하는 사람, 아니, 인어가 있다면 바로 윤기였다. 지난번 윤기와 막내 공주가 바다 위로 올라갔다고 왕에게 보고한 물고기 한 마리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이후부터였다.



"너 왜 매일같이 바다 위로 올라가는 거야."



    육지 구경을 마친 막내가 왕국으로 돌아왔다. 세바스찬이 잔소리하기도 전에 윤기가 막내를 낚아채 꾸짖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놀라웠다. 마냥 어리다 여긴 막내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인간과 사랑에 빠지다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고.



"오빠. 그분은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냐. 인간 세상의 왕자님이신데..."



   인간들은 영악하다는 세바스찬의 잔소리와, 불같이 화를 내는 왕의 꾸지람도 소용이 없었다. 막내는 하루하루 육지로 올라가 인간 왕자와 사랑을 나눴다. 오래전 한 인어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인어의 삶을 포기하고 육지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왕은 제 딸이 그런 일을 겪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인간 왕자는 달랐다. 막내를 위해 인간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했다. 우르슐라의 마법으로 인간의 다리를 포기하고 인어의 꼬리를 가져도 좋을 만큼, 막내를 사랑한다고 했다.



"오빠. 왕자님 모시러 나랑 같이 올라갈래?"



   인간 왕자가 인어가 되기 위해 바다로 내려오는 날이었다. 윤기는 막내의 부탁으로 함께 바다 위로 올라갔다. 가까이서 본 막내와 인간 왕자는 애틋했다. 약을 먹고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둘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윤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바다 아래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겠지. 윤기는 인간 왕자가 지냈을 바닷가 근처 절벽 위의 성을 올려다봤다.





"..."



   그러면, 오빠인 왕자가 걱정되어 모래사장까지 쫓아 나온 인간 세상의 공주와 눈이 마주친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힌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인어의 존재를 목격한 공주는 너무 놀라 결국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을 해버리고 말았다.








"윤기님까지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조용히 안 해?"

"아니, 왜 다들 인간들한테 관심을 못 줘서 안달이랍니까! 순리대로 인어끼리 사랑을 하면 덧난답니까!"

"세바스찬."



   잔뜩 화가 나 집게까지 딸깍거리며 윤기에게 소리치던 세바스찬은, 윤기의 한 마디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윤기는 쓰러진 공주를 모래사장 위에 눕히고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이 인간은 잠을 자는 거야?"

"제가 볼 땐 윤기님을 보고 놀라 쓰러진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윤기의 시선은 인어라면 꼬리지느러미가 있어야 할 다리로 향한다. 저 다리... 막내가 데려온 인간은 저 두 다리를 포기했지. 포기할 정도로 저 다리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다리만 있으면 바깥세상을 얼마든지 걸어 다닐 수 있을 텐데. 아마 지금쯤 인어가 된 인간 왕자는 막내와 함께 바다의 왕을 만나러 갔을 것이 분명했다.

   공주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윤기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한다. 이제 깨려는 것 같은데. 또 자신을 보고 놀라 기절하기 전에 바다로 돌아가야 했다. 공주의 눈꺼풀이 살짝 들리려는 찰나 윤기는 바닷속으로 몸을 숨긴다. 정신을 차린 공주가 본 것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윤기의 꼬리, 그 끝부분.



"...아무래도 내가 요새 잠을 못 잔 것 같은데."



   오라버니가 인어를 따라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남자 인어까지. 공주는 한동안 멍하니 모래사장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공주는 오라버니의 빈자리까지 채우기 위해 배로 바빴다. 왕자가 남긴 편지를 받고 충격에 휩싸인 인간 세상의 왕은 왕자를 찾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공주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육지에서만 찾으시니 못 찾으시지요. 오라버니는 바다로 내려갔는걸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공주는 저를 쳐다보던 남자 인어를 떠올렸다. 분명 인어였다. 물에 둥둥 떠 있는 모습 하며, 마지막에 보았던 꼬리까지도. 오라버니도 우연히 여자 인어를 만나서 바닷속으로 따라 들어간 것일까. 혹시나 죽은 건 아니겠지. 공주는 걱정스러움에 매일같이 오라버니가 사라졌던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주는 그때 본 남자 인어를 또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기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던 윤기는 저를 부르는 공주의 목소리에 멈춰 섰다.



"잠시만요!"



   이제는 인어가 된 인간 왕자의 말에 의하면 공주의 이름은 여주였다. 아직 인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없었던 왕자가 매일같이 얘기했던 그의 여동생이었다. 대신 말을 전해달라 윤기에게 부탁했지만, 윤기도 인간과 말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쩐지 겁이 났다.



"혹시, 제 오라버니 잘 계시나요?"

"..."



   여주의 물음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밝게 웃는 얼굴을 보고 윤기는 잠시 멍해졌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노을에 반짝이는 바다 위로 드러난 윤기의 상반신, 그리고 꼬리와 이어지는 허리 부근을 본 여주 역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만 들었던 인어가 정말로 제 눈앞에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못 올라오는데, 나중에 올라와서 꼭 만나 뵙겠다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오라버니가요...?"



   여주는 저도 모르게 발을 바닷속에 담갔다. 윤기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윤기는 여주가 바닷속으로 들어오려 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오히려 여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은 윤기였다. 두 다리만 있으면 저 위로 같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라버니는... 인어가 되셨나요?"



   여주의 물음에 윤기가 두 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여주가 말끝을 흐렸다. 윤기는 찰랑이는 바다 위에 둥둥 떠서 물끄러미 여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답답했는지 여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이 인어가 될 수 있는 건가요?"

"..."

"어떻게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마법과 같은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니까,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어요.

   여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 같은 생물인 제가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

"믿으셔도 됩니다. 제 존재는 거짓이 아니니까요."



   윤기의 말에 여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 인어야말로, 여주에게는 가장 마법 같은 일이었다.







   윤기는 매일 바다 위로 올라와 여주와 이야기를 나눴다. 인어가 된 왕자 대신 왕위를 물려받아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여주의 유일한 휴식처는 윤기였다. 윤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잘 맞고 대화가 잘 통하는 이는 막냇동생을 제외하고 처음이었으니까. 둘은 함께 대화하는 저녁 시간을 하루 중 가장 고대했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왜죠?"

"이웃 나라로 가야 하거든요."




   결혼을 해야 해서요. 여주의 말에 윤기는 충격에 휩싸여 말을 하지 못했다. 결혼을 해야 한다구요? 윤기가 되물었다.



"혼자서는 나라를 이끌어갈 수 없어요. 다른 막강한 이웃 나라의 왕자님과 결혼을 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해요."

"..."

"그래서 오라버니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도망간 거겠지요."





"그럼 여주님도 도망쳐요."

"..."

"나한테요."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나까지 이곳을 떠나서는 안 돼요. 여주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못 살아. 네 막냇동생한테 못 들었어?"

"..."

"너희를 인간으로 바꿨다가는 내 모가지가 날아간다니까."



   윤기는 여주를 위해 인간이 되기를 결심했다. 인간 왕자가 막냇동생을 위해 인어가 된 것처럼, 윤기는 여주를 위해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어떠한 조건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탁드려요, 우르슐라님."

"미치겠네. 인간을 인어로 만드는 것은 바다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해.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야."

"..."

"바다의 운명을 타고난 인어가 그 운명을 거스르고 인간이 되겠다고? 인간이 된 인어는 죽어서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해. 포세이돈님 왕국의 해초 하나도 보지 못한다고. 완벽하게 배척이 된다는 거야."

"...인간이 될 수는 있다는 거죠?"



   윤기가 애타게 물으면 우르슐라가 한숨을 푹 내쉰다. 이거 말로 해서는 안 들을 인어네.



"인간 여자를 사랑하지?"



   우르슐라의 물음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인간이 되면 그 여자는 널 알아보지 못해. 그래도 괜찮아?"



   인어인 윤기만 기억하지, 인간이 되어 나타난 윤기는 알아보지 못할 거란 말이었다. 영원히 인어인 채로 여주를 멀리서만 바라볼 것인지, 인간이 되어 곁을 지킬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인간이 되고 싶어요."



   인어인 채로 수백 년을 홀로 바닷속에서 사느니, 인간이 되어 그 여자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윤기가 말했다.








"그럼 식은 다음 달에 올리는 걸로 하죠."



   여주의 즉위식과 결혼식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웃 나라에 다녀온 뒤로 여주는 매일같이 윤기를 만나기 위해 바다로 찾아갔지만 윤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일까. 바다로 따라가지 않겠다고 해서 화가 난 걸까. 윤기를 따라갈 수 없는 제 처지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오라버니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릴 때부터 오라버니를 위해 양보하고 살아온 여주는 사랑까지도 오라버니를 위해 포기할 정도로 모든 것을 참으며 지내왔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다니는 인어 윤기는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바다로 같이 가겠냐고 한 번만 더 물어봐 준다면, 이번엔 정말 여주 자신을 위해서 대답할 수 있을 텐데. 인어가 되겠노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타나지 않는 윤기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



   여주는 요 며칠 자꾸 제 앞에 나타나는 남자가 거슬렸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고, 출신지와 신분도 불분명했다. 신하를 시켜 제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막았으나 어떻게 해서든지 자꾸만 제 앞에 나타나는 이 남자가 거슬리고 또 거슬렸다.




"좋아합니다."

"..."

"여주님을 만나기 위해 돌고 돌아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저 여주님이라는 호칭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에 윤기는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 올라와 여주를 보니 곧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기 직전이었다. 인어인 채로 남아 그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옆에서 구애를 하는 제 처지가 훨씬 나았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잖아요."

"...뭐라구요?"



   곧 결혼할 이웃 나라 왕자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윤기의 말에 여주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는 거지? 이 사실은 인어인 윤기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이상하게 이 인간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주가 대답했다.



"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

"...바보 같은 실수로 놓쳐버렸지만 다시 나타나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

"이젠 그곳이 어디라도 따라갈 수 있는데."



   만약 인어로 여주를 한 번만 더 만났더라면, 그랬더라면 여주는 바다로 따라왔을 거라는 말이었다. 충격으로 말을 잃은 윤기가 뒷걸음질 쳤다. 여주는 윤기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귀찮게 들러붙더니 효과가 좋은 말임이 분명했다.








   윤기는 여주와 처음 만났던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수평선에 걸쳐진 태양은 점점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오늘이었다. 오늘이 우르슐라와 약속한 마지막 날이었다.



"일주일 내로 그 여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어 버려. 그래도 인간이 될 거야?"



   우르슐라의 목소리가 귓속을 웅웅 울렸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장담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제 존재가, 그분에게는 컸던 모양입니다.

   윤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귀엽다. 꼬리 파닥이는 것 봐."

"그렇지? 너는 잘 지내고?"



   수면 위로 올라온 인간 왕자는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나 한껏 들떠있었다. 막내가 낳은 아기 인어를 보고 너무 귀여워 해맑게 웃는 여주에게 왕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한 살이 되었어. 나중에 꼭 보여줄게. 여주의 아들을 얘기하는 거였다.



"오라버니."

"응."

"...그분은 잘 지내시는 거지?"



   ...응. 왕자가 힘겹게 대답했다. 둘의 엇갈린 사랑 때문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윤기를, 여주만 몰랐다. 아마 윤기가 있었다면, 끝까지 이렇게 잘 지내는 걸로 남아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겠지. 왕자가 애써 웃으며 대답하면 여주가 물기 어린 눈으로 웃는다.



"...다행이다."



   보고 싶다고 전해줘. 여주가 작은 목소리로 왕자에게 부탁했다. 응. 아마 듣고 있을 거야. 왕자가 속으로 대답을 삼켰다.

   여주의 주변을 부드러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다.





18년도에 썼던 단편인데 함 가져와봤어용.

사실 이 글 전에 정국이로 '나의 인어공주'가 있는데

그건 진짜 눈뜨고 못 봐줄 정도의 퀄리티라...

요거만 데려왔습니당.

아래는 번외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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