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컬러버스AU :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보인다는 세계관 (자잘한 설정 임의 추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김춘수, 꽃 中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보쿠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가 다니던 때에 후쿠로다니 중등부는 중학종합체육대회 남자 배구경기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무명의 팀을 상대로 한 올해의 결승 역시 깔끔하게 이기고 우승을 차지할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마지막 1점을 두고 고전하고 있었다. 우위를 지키고 있긴 하지만 연이어 점수를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땅 꺼지겠다, 보쿠토."


끝날 것 같지 않던 보쿠토의 한숨이 코노하의 한마디에 겨우 그쳤다. 옆자리의 코노하를 쳐다보는 보쿠토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에이스가 빠졌다고 바로 이래도 되는 걸까?"

"또 바보 같은 생각하고 있었네."

"엑."

"상대팀 잘하긴 한다. 처음 들어보는 학교인데."


코노하의 말에 발끈했던 것도 잠시, 보쿠토의 눈길은 자연스레 상대팀으로 향했다. 아직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한 보쿠토에게는 온 세상이 흑백이었으니 상대 팀의 유니폼이 무슨 색인지, 학교 현수막이 무슨 색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같은 색으로 뒤덮여 있더라도 유난히 눈을 사로잡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보쿠토에게는 상대팀의 세터가 그러했다.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실력이 좋았다. 다양한 스타일의 스파이커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게 단번에 눈에 띌 정도였으니까.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쉴 틈 없이 팀원들을 격려하는 그에게 계속 눈이 갔다. 보쿠토는 경기 책자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책자를 부드럽게 훑었다. 등번호는 1번, 팀의 주장이기도 한 그 아이의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아카아시, 흔치 않은 성이었다. 보쿠토는 입 안에서 몇 번 더 그의 이름을 굴렸다. 익숙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입에는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카아시 역시 지금까지와 별 다를 바 없는 흑백의 사람이었다. 눈길이 간다고 갑자기 세상이 색으로 뒤덮인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랐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그의 색이 궁금하다는 것이 평소와는 다른 점이라 대답할 수 있었다.


“코노하, 쟤는 무슨 색이야?”

“누구?”


몇 달 전, 코노하는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중학생 때 다녔던 학원에서 만난 친구와 운명의 상대임을 확인했다나 뭐라나. 그 후 보쿠토는 색이 궁금할 때마다 코노하를 찾았다. 색명(色名)을 말해주면 어떨지 감이 와? 애초에 색을 알 리 없는 보쿠토에게 코노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당연히 큰 감흥은 없었다.보쿠토의 대답에 그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보쿠토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어떤 색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단순히 이름과 연결 짓는 것만으로 그 대상을 더 잘 알게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상대팀 1번! 무슨 색이야?”

“음…. 청록색?”


관중석과 코트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다. 보쿠토가 궁금해 하는 1번의 머리카락색이나 눈동자의 색이 코노하에게 보일 리가 없었다. 고민 끝에 답한 청록색은 아카아시 팀의 유니폼 색이었다. 어차피 금방 잊을 테니 이정도로 얘기해줘도 되겠지. 그의 대답을 듣고 보쿠토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갈대라는 뜻의 이름이기에 당연히 적색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색이 나와 버렸다. 

청록색…, 아카아시 케이지의 색은 청록이구나. 청록색의 아카아시 케이지. 보쿠토는 입안에서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멍하니 아카아시를 바라보던 보쿠토는 경기장을 가득 울리는 심판의 휘슬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크나큰 함성소리가 주위를 꽉 채웠다. 결국 대회의 우승은 후쿠로다니 중등부였다. 마지막 스파이크 친 애 성이 쇼지였나, 좀 멋있던데! 내년 후배로 들어오겠지? 직속 후배들이 우승했다는 기쁨에 코노하는 잔뜩 흥분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후배들이 우승한 그 순간마저 보쿠토의 눈은 아카아시를 좇고 있었다. 팀의 주장답게 다른 팀원들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는 모습이 꽤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경기의 끝을 알리던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허벅지를 짚으며 깊게 숨을 내쉬던 아카아시의 모습이 보쿠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감싸 안고 싶은 충동을 쉬이 억누른 것은 금세 돌아온 아카아시의 담담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코트 위에서 허망한 표정을 짓던 그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러기 위해 아카아시와 같은 팀이 되어 지지 않는 경기를 하고 싶다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함께 승리의 기쁨에 취해보고 싶다고.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끝에는 그의 빛깔에 알맞은 이름을 직접 불러보고 싶다고.


“보쿠토, 뭐해? 이제 가자.”


코노하가 제 어깨를 툭툭 치고 나서야 보쿠토는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시상식 준비를 하고 있는 코트 위에는 아카아시가 없는지 오래였다. 코노하의 뒤를 따라 보쿠토도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이렇게 소망하더라도 다른 학교 학생이 일반입학으로 후쿠로다니에 들어오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나중에 네트 너머로나 만날 수 있으려나.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려던 때였다. 이 좋은 날 웬 한숨이야! 코노하에게 주먹으로 팔을 한 대 맞고 나서야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강한 선수다. 경기를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알 수 있었다. 팀의 공격력을 여지없이 끌어올릴 수 있는 세터가 강하다면, 그 팀 역시 강해지겠지. 누구나 그렇듯 아카아시의 팀 역시 전국을 목표로 나아갈 것이 분명했다. 같은 팀으로 싸울 수 없다면 그가 좇고 싶어 할 ‘강함’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아카아시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다.

중등부의 결승을 보고 돌아온 이후, 보쿠토는 전보다 더욱 연습에 열중했고 무서운 속도로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해 봄고대회 예선 석 달 전, 보쿠토는 1학년 중 홀로 주전 선수로 발탁되었다.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파이커’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도 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


언제나 그렇듯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긴장되는 첫 부 활동 시간이 찾아왔다. 앞선 친구들을 따라 체육관으로 들어오는 저를 향하는 수많은 눈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제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함께 움직이는 단 하나의 시선이 있었다. 수많은 신입부원 중 어째서 제게 관심을 갖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그와 함께 배구를 하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게 사실이니까.


“안녕하세요. 1학년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세터 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자 짧게 박수가 이어졌다. 이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음 신입부원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그 사람만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굴자. 아카아시는 흑백의 풍경 중 하나인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공중에서 시선이 엉키었다.

항상 관중석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 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몸소 보여주던 사람. 그와 같은 팀이 되어 전국에 가고 싶다는 목표로 여기까지 왔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부터 시작했던 배구이지만, 본격적으로 흥미를 갖고 열중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대부분의 조건이 비슷했던 초등학생 때와 달리, 남들보다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은 점차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공을 다루는 센스가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났다. 아카아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스파이커들 개개인의 역량을 고려해 토스를 올릴 수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개인뿐만 아니라 팀으로서도 강해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배구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배구를 더욱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필연이었다. 아카아시의 두 눈은 강함을 좇기 시작했다.


보쿠토 코타로는 강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을 들은 날에 아카아시는 빛난다는 의미의 한자(光)가 이름에 있어서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경기가 끝난 뒤에 관중석에 앉아있던 아카아시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중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든든한 체격과 세 명의 블로커도 문제없이 뚫어버리는 강력한 파워, 코트 위의 보쿠토는 이름 그대로 빛이 났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더욱 궁금해졌다. 부모님께 보쿠토의 경기영상을 보여드리고, 어떤 색을 가진 사람이냐고 여쭤보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어머니는 ‘황금빛’이라고 대답했다. 정확히 어떤 색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반짝이는 빛과 비슷하다는 설명을 듣고 마치 누군가에게 맞은 양 명치 부근이 아려왔다. 보쿠토는 흑백 풍경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빛나는 사람이었어.

오직 흑백뿐인 세상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그러했고, 대부분의 시설들은 불편하지 않도록 지어져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처음이었다. 운명의 상대를 찾기 전까지 흑백의 세상만을 볼 수 있다는 게 억울해진 것은. 색이 입혀진 그를 보게 되면 눈이 멀어버리는 건 아닐까, 아카아시는 문득 걱정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황금빛이라 설명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 사람, 보쿠토 코타로를 직접 보고 싶었다.


색을 입혀진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야 했다. 없던 욕심이 한 번 생기자 그 마음은 끝도 없이 크기를 키워나갔다. 아아, 그래. 당신의 운명의 상대가 나였으면, 내 운명의 상대가 당신이었으면 싶었다. 보쿠토에게 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나였으면 했고, 본인도 모르는 ‘아카아시’의 색을 당신이 봐줬으면 싶었다.

코트 위에서 보쿠토의 길을 여는 세터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세상을 새롭게 틔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당신과 마주볼 수 있는 이곳까지. 

오랜 시간 둘의 시선이 마주닿았다. 스트레칭을 시작하자는 코치님의 말씀에야 두 사람은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쿵쿵, 심장이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왼쪽 가슴 위에 오른손을 가만히 올려두고 나서야 서서히 진정이 됐다.


서로를 만나기 위해 전력으로 달렸던 두 사람, 이제야 둘은 발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

.


1년이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연습량에 맞춰 끝까지 토스를 올렸고, 모든 부원들이 당황스러워하는 에이스의 초의기소침모드에도 해결책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는 주전 선수로 발탁되었다. 마치 제가 다시 주전 멤버로 뽑힌 것처럼 기뻐하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그를 좇아 여기까지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등굣길이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조용한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그를 힐끔 쳐다 보았다. 어제 연습 때 꼭 고장 난 기계 같이 움직이더니… 잠도 제대로 못 잔건가? 그러나 피곤해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의아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조금 느린 제 발걸음에 맞춰 움직이는 하얀 운동화를 바라 보았다. 그렇다면 뭐지? 

짧은 시간 고민하던 아카아시는 습관적으로 그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제 모습에 피식 소리내어 웃었다. 이정도면 보쿠토 선배에게 최적화된 세터 아닌가? 별 영양가 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참이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깨우듯 뒤따라 보쿠토가 그의 이름을 불러왔다. 여느 때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카아시."

“네.”

“너는 색이 보여?”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더욱이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 왜 물어보는 거지? 의문을 뒤로 한 채 아카아시는 대화를 이었다.


“아뇨.”

“아, 그래?”


보쿠토는 다시 조용해졌다. 아카아시의 마음 속에 있던,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던 촛불이 다시 확하고 살아나는 듯 했다. 보쿠토의 갑작스런 질문에 아카아시는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보쿠토 선배는 보이시나요?”

“아-니? 나도 안 보여!”

“그렇군요.”

“응!”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기라도 하셨나요?”


그럼에도, 정작 묻고 싶었던 질문은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나왔다. 미세하게 떨렸던 목소리를 보쿠토가 눈치 채지 않았기를 바라며 아카아시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쿠토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학교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괜히 물어봤나하는 생각이 들어 아카아시는 말없이 오른 손만 만지작거렸다.


“생각이야 예전부터 들었어. 2년 전에 너희 팀이 경기하는 거 볼 때부터.”


보쿠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카아시는 쿵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카아시의 발걸음이 늘어졌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보쿠토는 여전히 앞만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꺼낸 것치고는 말이 제법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시 많이 당황스럽겠지.


“문득 궁금해졌어! 주위 풍경과 색이 같은데도 이렇게 눈에 들어오는 네가, 아카아시의 색으로 뒤덮여 있다면 어떨지.”

“…….”

“네가 어떤 색인지 모르지만 알고 있어. 말이 좀 이상하지! 음…, 넌 청록빛이래. 친구한테 물어봤었거든.”

“…….”

“…흠, 내 운명의 상대가 아카아시이길 바라는 건 욕심이려나?”


고교 마지막 인터하이를 앞두고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아카아시가 있었다. 네 운명의 상대, 내가 될 수는 없으려나? 오랜 시간 고민하던 보쿠토는 결국 오늘 아침 결정을 내렸다. 아카아시에게 고백해보기로.

그런데 제 말이 끝났는데도, 대꾸 하나 없는 아카아시에 보쿠토는 조금 겁이 났다. 역시…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완전 프로포즈같아서 망설였는데! 하지만 왠지 오늘 꼭 해야 할 거 같았다고!

보쿠토는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아카아시는 없었다. 아카아시? 이름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니 오른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는 아카아시가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모습에 어디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보쿠토는 서둘러 아카아시에게 달려갔다.


“아카아시! 괜찮아? 눈에 뭐 들어갔어?”

“…놀라서요.”

“크, 큰 거 들어갔구나! 호 불어줄까?!”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아카아시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 내어 웃는 아카아시에 보쿠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아시…, 괜찮아? 보쿠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곧바로 그의 눈은 촉촉하게 빛나는 아카아시의 눈과 마주쳤다. 1년이 넘는 동안 아카아시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보쿠토는 화들짝 놀랐다. 아카아시! 괜찮아? 마, 많이 아파?!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는 보쿠토의 손이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웃음을 잔뜩 머금은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의 움직임이 멈춘 건 순식간이었다.


“보쿠토 선배 눈 예뻐요.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뭐?”


놀라움에 말을 잃어버린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쿠토를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선배를 보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색을 보지 못하는 게 억울하다고.

“…….”

“…그런데 이정도 기쁨이면, 음, 지금껏 못 보게 했던 것도 용서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아카아시….”

“저희 어머니가 보쿠토 씨는 황금빛이라고 했어요. 정말 궁금했는데, 선배는 정말 보쿠토 코타로네요.”


다시 한 번 눈물을 글썽이며 웃는 아카아시에 보쿠토는 일시 말문이 막혔다. 진짜, 진짜로….


“…색이 보인다고?”

“네. 선배가 있는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아카아시는 다시금 웃어보였다. 그리고 어버버 소리를 내며 저를 놀란 듯 바라보는 보쿠토를 두 팔 벌려 끌어 안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아카아시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느끼고 있는 흥분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카아시의 운명의 상대가 나, 보쿠토 코타로….

어안이 벙벙했다. 저를 꽉 끌어안는 힘이 느껴지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리고 조금씩 아카아시에게 미안해졌다. 빠른 속도로 옆을 지나가는 오토바이, 길가의 전봇대, 저를 끌어안고 있는 아카아시의 팔까지, 아직까지 모든 것들이 흑백이었다. 적어도 아카아시보다는 빨리 보고 싶었는데, 내 사랑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는데. 보쿠토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아카아시가 축 처진 보쿠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왔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흥분을 그새 가라앉혔는지 아카아시의 심장 박동소리는 평온했다. 눈을 감은 채 보쿠토도 아카아시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네가 흑백이라면, 눈을 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대신 운명의 상대가 다른 사람이면 용서 못해요."


읊조리듯 조용히 울리는 아카아시의 목소리를 듣고 보쿠토는 미소 지었다. 그럴 리 없잖아. 웃음 섞인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 역시 피식거렸다. 짧게 목을 울리던 보쿠토는 평소의 밝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내 머리카락은 무슨 색이야? 아카아시 거랑 비슷해?


"아뇨. 선배 헤어스타일 참 화려하네요. 전 검은색이에요."


으음, 그럼 우리 교복 색깔은?


"쥐색에… 넥타이는 잘 안 보이네요. 고개 잠깐만 들어주실래요?"


흐음,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보쿠토는 거리를 두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숙여 가슴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빠르게 교복을 훑었다. 음, 넥타이는 파란색에 흰색 줄무늬가 있어요. 셔츠는 흰색이고요. 그리고 바지는 검은색…


"아카아시 청록색 아닌데?"


덤덤히 이어가던 아카아시의 말이 단번에 멎었다. 숙이고 있는 목의 뒤편이 빳빳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머리는 검은색이고, 피부색은 나랑 비슷한데? 코노하는 어디 보고 청록색이라 한거야?"


방금까지 제게 미안해했던 이유를 까맣게 잊은 듯 보쿠토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코노하의 이름을 꿍얼거렸다. 놀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아카아시와 눈이 마주치고나서야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했다. 순식간에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제야 보쿠토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카아시!


"…눈! 대박인데, 코노하 눈 진짜 좋구나."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카아시를 빤히 쳐다 보는 동안, 아카아시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사람, 지금 뭐가 중요한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보쿠토 선배."

"응?"


아카아시가 자기 볼에 검지를 갖다대자 보쿠토의 눈이 재빨리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애교를 부리는 건가 잠시 설렜지만, 아카아시의 말을 듣고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 제 볼, 무슨 색이에요?


"보여! 아카아시!"

"…이걸 왜 몰라요?"


아카아시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보쿠토가 갑자기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서너 번 눈가를 문지르던 보쿠토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어찌나 세게 문질렀는지 눈가가 시뻘겠다.


"이제야, 다 보여."

"…네?"


아카아시에게 거리를 두며 눈을 떴던 보쿠토에게는 오직 아카아시만이 색(色)이었다. 갑작스레 눈에 들어온 다양한 색깔들, 생각도 못했던 변화에 어벙벙하던 보쿠토의 머릿속에 갑자기 코노하의 말이 빠르게 스쳐갔다. 구분할 수조차 없던 색이 아카아시와 연결되는 그 순간, 보쿠토에겐 무엇보다 그 때가 중요했다.

아카아시의 퉁명스런 말 이후에나 모든 풍경이 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잔뜩 물을 먹은 물감이 흰 도화지 위에서 번져나가듯 아카아시의 어깨 위로 똑하고 떨어진 색은 순식간에 주위로 퍼져나갔다. 빨강, 주황, 노랑… 색(色)이란 게 이렇게 다양한 건가 싶었다. 재빠른 변화에 눈 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눈을 몇 번 비빈 뒤에야 모두 원래의 색으로 뒤덮인 듯 주위가 조용했다. 그제야 보쿠토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청록빛의 아카아시가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설명을 다 듣고도 조용했다. 한 걸음 다가간 보쿠토는 그를 품에 안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행이야, 아카아시. 진짜… 다행이야. 보쿠토가 안심하자 아카아시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다만, 상대의 대답을 마냥 기다리던 방금 전과는 달랐다. 지금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색(色)이, 그리고 세상이, 우리의 미래를 증명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서로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누구에게나 이름에 알맞은 빛깔이 있다. 다만, 쉬이 알 수는 없다.

그대의 이름에 알맞은 색을 '그'가 부르는 순간, 당신은 그에게 특별한 것이 된다.


 보쿠토 코타로아카아시 케이지라는 이름에는 알맞은 빛깔이 있다. 







*

上, 下편 나뉘어 있던 거 합쳤습니다!

컬러버스 처음 써보는데, 재밌게 읽으셨다면 좋겠습니다 (>_<) 감사합니다!




하이큐 / 트위터 @jw819_

정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