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회에서 믿어진 신화 역시 남성 중심적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여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무척 다양한 여성이 있습니다. 성별 간의 관계는 오늘날의 신화 분석에서 자주 이용되는 도구 중 하나입니다. 여성 인물을 조명하는 것은 또한 신화를 각색하는 작가들에게도 인기 있는 주제입니다. 남성 영웅들에게 감춰져 있던 여성 인물들을 찾아내고, 목소리를 부여하는 작업이죠.

 하지만 고대 작가들이라고 해서 여성 인물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고대 문학 작품에서도 매력적인, 그리고 때로는 남성 인물보다도 뛰어난 여성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여성 인물을 논하는 데 있어서, 에우리피데스는 빼놓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여성 인물을 묘사하는 데 상당히 능숙한 작가였습니다. 혹은 적어도, 다양한 여성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채용했습니다. 온전히 남은 그의 17개 비극¹ 중에서 절반 이상이 여성 인물을 주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온전히 남은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여성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나탈리 헤인즈의 《판도라는 죄가 없다》에서 다뤄지는 여인 중 이오카스테, 헬레네, 파이드라, 메데이아, 알케스티스(‘에우뤼디케’ 파트에서 다뤄짐)는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주인공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비극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알려진 비극은 90편 이상입니다. 그중에는 오늘날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여성 주인공 비극들이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런 비극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실, 소실된 비극 중 상당수는 그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그나마 많은 부분이 남아 있거나 발견되어, 그 줄거리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을 모았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은 모호한 부분이 많으며, 그 성격을 정의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편적으로만 남은 작품에서 그 의의를 발견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아 있는 작품들과 단편들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일정한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그러한 부분을 중점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Ⅰ. 『휩시퓔레』 -새로운 신화

 『휩시퓔레』는 기원전 411년에서 407년 사이에 공연되었으며, 에우리피데스 경력의 후반기에 속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작품으로는 소실된 『안티오페』와 오늘날 온전히 남아 있는 『포이니케 여인들』이 있습니다. 『휩시퓔레』는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전체 줄거리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고, 주요 인물들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시의 많은 부분이 보존된 파피루스가 이집트 옥쉬륑코스에서 발견된 덕분입니다. 파피루스 덕에 학자들은 『휩시퓔레』의 전체 분량이 대략 몇 행 정도인지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휩시퓔레』의 주인공은 제목이 알려주듯이 휩시퓔레입니다. 휩시퓔레는 누구일까요? 휩시퓔레는 네메아의 제우스 신전 사제인 뤼쿠르고스의 노예인데, 뤼쿠르고스와 그 아내 에우뤼디케의 아들인 오펠테스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휩시퓔레는 본래 네메아 출신도 아닐뿐더러, 노예는커녕 왕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일까요?

 아폴로니오스의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에는 휩시퓔레의 이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휩시퓔레는 본래 렘노스섬 왕 토아스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렘노스섬 여인들은 아프로디테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 여신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 때문에 렘노스섬 남자들은 여인들을 피해서 트라케 포로 여인들과만 동침했습니다. 렘노스섬 여인들은 분노해서 남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하지만 휩시퓔레만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대신 상자에 담아 바다에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르고 호가 렘노스섬에 상륙했을 때는 남자가 전혀 없었고 휩시퓔레가 섬을 다스렸죠. 아르고 호 선원들은 섬 여인들과 동침하여 렘노스섬의 대를 이었습니다. 휩시퓔레 자신은 이아손과 동침했습니다(1.609ff).

 그랬던 휩시퓔레는 어쩌다가 네메아에서 노예가 되었나요? 에우리피데스의 『휩시퓔레』는 휩시퓔레가 직접 등장하여, 그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단편 752; 752a-b). 휩시퓔레는 이아손에게서 두 아들 에우네오스와 토아스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휩시퓔레는 렘노스섬에서 추방되는데,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는 것이 발각됐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휩시퓔레는 뤼쿠르고스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휩시퓔레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주며 시작하는 것은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이러한 ‘설명적 프롤로고스(도입부)’는 청중에게 앞으로 전개될 비극의 배경 이야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설명은 『휩시퓔레』에서처럼 등장인물이 하기도 하고, 『알케스티스』에서처럼 신이 하기도 합니다. 『헤카베』에서는 특이하게도 죽은 왕자 폴뤼도로스의 영혼이 이 역할을 맡습니다. 설명적 프롤로고스는 또한 대체로 차분한 어조를 가지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여러 감정이 교차하게 될 후속 내용과 대비를 주는 역할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불어, 설명적 프롤로고스는 에우리피데스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비극은 일반적으로 기존에 존재했던 신화 전통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는 비극 작가 개인이 신화의 주요 이야기를 바꿀 수 없음과 동시에, 비극 청중 역시 그러한 이야기를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써낸다 한들, 클뤼타이메스트라가 남편을 죽이고 아들에게 살해되는 기본 골자는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에우리피데스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이 부분에 있어서 더 과감한 작가였습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을 위해 여러 신화를 새롭게 발명했습니다. 설명적 프롤로고스는 청중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에우리피데스의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는 앞서 언급한 대로, 폴뤼도로스의 영혼이 말하는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폴뤼도로스는 전쟁 전에 트라케 왕 폴뤼메스토르에게 맡겨졌었는데, 트로이아가 멸망하자 폴뤼메스토르는 폴뤼도로스를 죽여버립니다. 폴뤼도로스와 함께 맡겨졌던 황금을 차지하려는 것이었죠. 『헤카베』 후반부는 이를 뒤늦게 알게 된 헤카베의 처절한 복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폴뤼도로스가 폴뤼메스토르에게 맡겨졌다는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 이전의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리아스』에서 폴뤼도로스는 전장에서 싸우다가 아킬레우스에게 살해됐다고 나옵니다(20.407ff). 더욱, 여기서 폴뤼도로스는 헤카베가 낳은 적자가 아니라 사생아입니다(22.46ff). 에우리피데스는 여기서 폴뤼메스토르와 폴뤼도로스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고 보입니다.

 비슷하게 『이온』은 크레우사가 아폴론에게 겁탈당해 아들을 낳아 버렸지만, 이 아들은 델포이 신전에서 자라게 됐다는 헤르메스의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 역시 에우리피데스의 발명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전의 계보에서는 그런 계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자세한 설명은 이전 글을 참고). 특이하게도, 헬레네가 사실 트로이아에 가지 않았었다는 『헬레네』의 프롤로고스 설명은 에우리피데스의 발명이 아닙니다. 이는 이전에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에 의해 쓰인 바 있으며,² 헤로도토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프롤로고스는 비주류 전통을 채택한 에우리피데스의 선택을 청중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합니다.

 『휩시퓔레』도 그런 에우리피데스의 발명이 들어갔다고 생각됩니다. 에우리피데스 이전의 이야기에서는 렘노스섬의 휩시퓔레만 언급될 뿐, 네메아의 휩시퓔레가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리아스』에는 휩시퓔레와 이아손의 아들인 에우네오스가 언급되어 있습니다(7.469). 뒤에서 설명할 비극의 줄거리(오펠테스의 죽음과 네메아 경기의 설립)는 다른 문헌들에서도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휩시퓔레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박퀼리데스 9.10ff; 시모니데스 단편 553; 핀다로스 「네메아 송시」 9). 아이스퀼로스 역시 같은 신화를 다룬 『네메아』라는 비극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네메아』의 정확한 줄거리는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이 비극에서 오펠테스의 어머니가 네메아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핀다로스 「네메아 송시」에 대한 내용 설명). 에우리피데스와 다른 버전을 선택한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서도 휩시퓔레는 등장하지 않았으리라고 예상됩니다.

 비극의 배경에 대한 설명은 이쯤으로 하고, 본격적인 비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에우네오스와 토아스는 어머니를 찾아서 돌아다니던 중 네메아에 도착합니다. 휩시퓔레는 그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이지만, 아직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합니다(단편 752c-e). 에우네오스와 토아스는 집으로 들어가고, 휩시퓔레는 등장가(parodos)를 부르며 나타나는 코로스(합창)와 대화합니다. 코로스는 테바이를 공격하기 위해 모인 일곱 전사가 네메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단편 752f). 이후 첫 번째 삽화(episodion)는 일곱 전사 중 하나인 암피아라오스와 휩시퓔레의 대화입니다. 암피아라오스는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칠 때 필요한 샘물을 찾고 있습니다(단편 752h). 휩시퓔레는 암피아라오스에게 샘을 안내해주러 갑니다(단편 753). 코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펠테스를 데리고서(단편 753a).

 코로스의 합창 뒤에 휩시퓔레가 고통스럽게 돌아옵니다. 오펠테스는 그만 뱀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단편 753d; 754; 754a). 휩시퓔레는 도망칠까 고민하지만, 오펠테스의 어머니인 에우뤼디케에게 발각됩니다(단편 754b-c). 휩시퓔레는 에우뤼디케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에우뤼디케는 휩시퓔레가 고의로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에우뤼디케는 휩시퓔레도 죽이고 싶어 합니다. 휩시퓔레는 암피아라오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예언자인 암피아라오스는 오펠테스의 죽음은 휩시퓔레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더불어 그는 오펠테스의 이름을 ‘첫 번째 죽음’이라는 뜻의 ‘아르케모로스’로 바꿉니다. 이는 앞으로 테바이 전쟁에서 죽게 될 전사들을 예견합니다. 암피아라오스는 아르케모로스를 기리는 장례식 경기가 열릴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 경기를 통해 아르케모로스는 영원한 명예를 얻게 될 것입니다(단편 757).

 이후의 줄거리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에우네오스와 토아스는 장례식 경기에 참가해, 달리기에서 우승했습니다. 전령은 그들의 우승을 보고하면서, 그들이 이아손과 휩시퓔레의 자식임을 밝힙니다(바티칸 신화학자 2.141). 그제야 휩시퓔레와 두 아들은 서로의 정체를 깨닫습니다(단편 759a). 끝부분에 디오뉘소스가 나타난다는 흔적이 남아 있지만, 구체적인 역할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연극의 끝부분은 잘 남아 있지 않지만, 예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아르케모로스의 장례식 경기는 네메아 경기의 시초입니다. 휩시퓔레의 아들인 에우네오스는 에우네이데스 가문의 시초가 됩니다. 에우네이데스 가문은 아테나이에서 노래의 신(melpomenos) 디오뉘소스의 사제들입니다. 이는 에우네오스가 오르페우스에게서 뤼라 음악을 배웠다는 대사(단편 759.1622)³에서도 암시됩니다. 아르케모로스와 휩시퓔레, 두 아들의 운명은 아마도 디오뉘소스가 선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말은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헤카베』에서 폴뤼메스토르는 헤카베가 암캐로 변하고, 그 무덤은 ‘개의 무덤(Kynos sema)’으로 불리며 선원들의 지표가 되리라고 예언합니다(1261ff). 『타우로이족 사이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아테나는 이피게네이아가 브라우론의 신전지기가 될 것이며, 죽어서는 그곳에 묻혀, 출산하다 죽은 여인들의 옷을 제물로 받으리라고 예언합니다(1462ff). 『힙폴뤼토스』에서 아르테미스는 힙폴뤼토스가 트로이젠에서 숭배받을 것이며, 결혼을 앞둔 처녀들이 머리카락을 바치리라고 예언합니다(1424ff). 비록 에우리피데스 비극에서 예견되는 ‘숭배’들은 다른 증거에서 증명되지 않으며, 종종 에우리피데스의 발명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비극의 줄거리를 단순히 가상의 연극이 아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로 만들어줍니다. 즉, 신화는 현재의 것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원인 이야기(aition)가 됩니다. 이는 신화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현실 아테나이 정세를 완곡하게 표현했던 비극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비극들과 마찬가지로, 『휩시퓔레』 역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습니다. 『휩시퓔레』보다 조금 먼저 상연된 『헬레네』나 『타우로이족 사이의 이피게네이아』에서처럼, 휩시퓔레는 낯선 땅에서 어려운 처지에 처했다가 남자 가족과의 감동적 재회로 구원받는 여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앞선 연극들과 달리, 휩시퓔레를 위협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같은 여성인 에우뤼디케입니다. 게다가 『휩시퓔레』에는 탈출을 위한 교묘한 계략이 없습니다. 휩시퓔레는 그다지 똑똑하거나 강력한 인물이 아닙니다. 다만 휩시퓔레를 구하는 것은 그의 친절입니다. 휩시퓔레가 에우네오스와 토아스, 암피아라오스 같은 손님에게 친절히 대했기 때문에 휩시퓔레는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러한 친절은 휩시퓔레가 노예로 팔려 가게 하고, 아르케모로스가 죽도록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선택들에게 끌려다니는 연약한 인물들은 에우리피데스 비극 속 인물들에게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함을 부여합니다.

다리우스 화가가 그린 아풀리아 적색 그림 크라테르. 기원전 340년경.

 끝으로 도기 그림 하나를 보고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그의 사후에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덕분에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 도기에는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특정 장면을 반영한 그림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 도기 그림 역시 그런 것 중 하나로, ‘다리우스 화가’라고 불리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도기의 아래쪽에는 아르케모로스의 시신이 누워 있습니다. 중앙의 집에는 휩시퓔레, 에우뤼디케, 암피아라오스가 서 있습니다. 집의 왼편에는 휩시퓔레의 두 아들이 서 있고, 그 위에 키타라를 든 디오뉘소스가 앉아 있습니다. 다리우스 화가는 이 그림에서 비극의 장면을 요약하고 있고, 이러한 그림들은 소실된 비극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게 해주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입니다.


Ⅱ. 『에레크테우스』 -애국심과 희생되는 소녀

 『에레크테우스』의 공연 연도는 불확실하며, 기원전 42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에레크테우스』는 아테나이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이나 『탄원하는 여인들』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 작품은 모두 애국적인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즉, 아테나이에서 공연되어 아테나이를 배경으로 하는 위 작품들은 아테나이를 이상적인 국가로 그려냅니다. 『헤라클레스의 자식들』과 『탄원하는 여인들』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아테나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탐욕스럽고 불의한 아르고스와 테바이를 대조합니다.

 그래서, 『에레크테우스』는 무슨 내용일까요? 『에레크테우스』의 설명적 프롤로고스는 포세이돈이 담당합니다(단편 349). 포세이돈은 자기 아들 에우몰포스가 어떻게 자라나고, 트라케의 왕이 됐는지 소개합니다(아폴로도로스 3.15.4 참고). 그리고 그 에우몰포스는 이제 아테나이를 침공하려고 합니다. 아테나이 왕 에레크테우스는 에우몰포스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방법을 델포이 신탁에 물어보고 막 돌아온 참입니다. 그 방법은 에레크테우스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에레크테우스는 자기 딸을 바치기 꺼립니다. 에레크테우스의 아내인 프락시테아는 에레크테우스의 망설임을 비난하면서, 딸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고 연설합니다.

 프락시테아의 긴 연설은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단편 360). 프락시테아에 따르면 아테나이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위대하며, 부모들은 도시를 위해 기꺼이 자식을 희생해야 합니다. 아이 한 명을 바치면 도시 전체를 구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러지 않습니까?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야 합니다. 프락시테아는 아들이 전장에서 명예를 얻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가 싫다고 밝힙니다. 전장에서 죽은 아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묻히고 명예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레크테우스와 프락시테아의 딸이 목숨을 바치면 단독으로 묻혀 명예를 얻을 것이며, 부모와 두 자매를 구할 것입니다. 포세이돈의 아들과 트라케 사람들이 아테나이와 아테나를 욕보여서는 안 됩니다. 프락시테아는 시민들에게 자기 딸을 이용해 승리를 얻으라고 선언합니다. 프락시테아는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그보다 조국을 더 사랑합니다(단편 360a).

 그렇게 딸 한 명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하지만 남은 두 딸도 함께 자살했습니다. 그들은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에레크테우스 역시 전장에 나섭니다. 합창(단편 369) 이후, 마지막 장면이 파피루스로 발견됐습니다. 전령이 프락시테아에게 전쟁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에우몰포스는 쓰러지고 트라케인들은 물리쳤지만, 에레크테우스는 포세이돈에 의해 땅에 삼켜져 죽었습니다. 딸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프락시테아는 가족들의 죽음에 애도합니다.

 포세이돈은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며 지진을 일으킵니다. 지진으로 궁전이 무너집니다. 아테나가 위에 나타나서 포세이돈을 저지합니다. 그리고 아테나는 먼저 죽은 딸들을 함께 묻으라고 지시합니다. 아테나는 딸들의 영혼을 하데스가 아닌 하늘로 데려갈 것입니다. 딸들은 ‘휘아킨티데스 여신들’이라는 이름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숭배받을 것입니다. 아테나는 그들을 위해 소를 희생하고 처녀들의 춤으로 의례를 진행하라고 지시합니다. 전쟁을 벌일 때는 여신들에게 포도주 대신 꿀물을 헌주해야 합니다. 에레크테우스를 위해서는 도시 중앙에 신전을 지어야 하며, 포세이돈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프락시테아는 아테나를 위한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에우몰포스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데메테르를 모시는 사제 가문의 시조가 될 것입니다(단편 370).

 『에레크테우스』를 애국적 작품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자식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고 말하는 프락시테아의 연설입니다. 이 연설이 온전히 보존된 것은 웅변가 뤼쿠르고스의 연설 『레오크라테스 반박』에서 전체가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프락시테아 같은 마음가짐을 모범으로써 제시하기 위해서지요.

 ‘어머니’의 중심적인 역할은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탄원하는 여인들』과 비교해볼 만합니다. 『탄원하는 여인들』의 중심인물은 테바이 전쟁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는 어머니들과 테세우스의 늙은 어머니 아이트라지요. 『탄원하는 여인들』과 『에레크테우스』는 둘 다 공적인 이익과 사적인 감정의 대립을 중심으로 합니다. 『탄원하는 여인들』에서 전사자의 어머니들로 이루어진 코로스는 사적인 감정을 중요시합니다. 그들은 시신 수습을 도와달라고 간청하면서 아이트라와 같은 어머니라는 처지를(55ff), 펠롭스의 후손이라는 혈연을(263ff) 강조합니다. 반면 아이트라는 공적인 이익을 중요시합니다. 아이트라는 테세우스를 설득하면서 테세우스가 얻게 될 명예와, 코로스를 돕지 않았을 때 도시가 받을 비난을(301ff) 강조합니다. 개인이나 가정보다도 도시를 우선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비극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상입니다.

 어머니에서 희생된 딸들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아쉽게도, 현전하는 단편에서는 이 딸들이 직접 등장했는지, 대사가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의 다른 비극들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희생되는 소녀들은 에우리피데스가 자주 사용하는 소재입니다. 현전하는 비극 중에서 『헤카베』의 폴뤽세네,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의 마카리아,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이피게네이아, 그리고 (남성이지만 유사한 패턴을 가진) 『포이니케 여인들』의 메노이케우스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타인에 의해 희생을 요구받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희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보다, 희생으로써 얻게 될 명예를 추구합니다. 편안한 삶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선호하는 것은 전형적인 그리스 남성 영웅의 특징이며, 이러한 ‘남성적 여성’들은 그리스 비극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희생은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었나요? 폴뤽세네는 자신이 죽음을 거부한다면 목숨에 집착하는(philopsychos-315행 오뒷세우스의 대사에서 사용된 단어) 비겁한 여인이리라고 말합니다(346). 폴뤽세네는 한때 자신이 여신과 같은 존재였음을 회상하는데(356), 이는 아킬레우스가 살아 있을 때 신처럼 추앙받았다는 『오뒷세이아』의 언급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의 아킬레우스는 폴뤽세네가 선망하는 ‘명예로운 죽음’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11.484ff). 그렇게 고귀한 죽음을 맞이한 폴뤽세네의 시신은 가장 비참하게 죽은 남매 폴뤼도로스와 함께 묻히게 될 것입니다(896ff).

 다시, 이피게네이아는 희생을 자처하며 수천의 여인보다 한 남자가 목숨을 건지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1392ff). 우리는 그 뒤에 한 명의 여인을 위해 수천의 남자가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피게네이아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애도하지 말기를, 그리고 오레스테스를 잘 돌봐주고,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1435ff). 우리는 아가멤논의 가족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알고 있습니다.

 『에레크테우스』의 프락시테아는 딸 한 명의 죽음이 나머지 가족을 구할 것이며, 단독 무덤에서 명예를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프락시테아는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고, 희생된 딸은 자매들과 함께 묻힐 것입니다. 아테나는 죽은 이들이 영예를 얻으리라고 선포하지만, 가족을 모조리 잃은 프락시테아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요? 오히려 아테나는 스스로 ‘어머니 없는(ametoros)’ 신이라고 칭함(단편 370.64)으로써 어머니로서 프락시테아의 슬픔과 거리를 둡니다.

 『에레크테우스』는 국가를 위해 한 몸 바친 이들 가족을 우상화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에우리피데스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이자, 고대 청중들이 받아들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극은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한 소녀들의 희생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옹호한 프락시테아지만, 가족의 죽음에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 역시 프락시테아입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그러한 아이러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Ⅲ. 『멜라닙페』 -수사학 변론

 에우리피데스는 멜라닙페를 주인공으로 하는 비극을 두 편 썼습니다. 『현명한 멜라닙페』와 『결박된 멜라닙페』가 그것인데, 각각 멜라닙페의 인생에서 다른 두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에 비해 단편도 적고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둘 중 어디에 속하는지 모호한 단편 또한 많습니다. 두 작품의 공연 시기는 언제인지, 같은 삼부작에 속해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명한 멜라닙페』의 설명적 프롤로고스는 멜라닙페가 담당합니다. 멜라닙페(‘검은 암말’이라는 뜻)의 아버지는 헬렌의 아들인 아이올로스이고, 어머니는 케이론의 딸인 힙페(‘암말’이라는 뜻)입니다. 힙페는 아버지로부터 지혜를 물려받았습니다. 힙페는 사람들에게 각종 예언과 병의 치료법,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우스는 힙페를 말로 변신시켰습니다(단편 481). 멜라닙페 자신은 포세이돈에게 겁탈당해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멜라닙페는 포세이돈의 제안에 따라 아이들을 아버지의 외양간에 버렸습니다.

 비극의 본격적인 줄거리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단편이 거의 없지만, 비극에 대한 내용 설명(hypothesis)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올로스는 외양간에 버려진 아이들을 발견합니다. 아이올로스는 아이들을 소가 낳은 괴물 자식이라고 여깁니다. 아이올로스의 아버지인 헬렌은 아이들을 태워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올로스는 아버지의 말대로 아이들을 죽이려고 준비합니다. 멜라닙페는 아이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현명한 멜라닙페』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멜라닙페』의 장면을 담은 도기. 윗줄에는 신들이 모여 있고, 아랫줄에는 인간들이 있다. 왼쪽부터 말(힙페?)을 다루고 있는 크레테우스(멜라닙페의 이복형제), 아이올로스, 쌍둥이를 발견한 목자, 헬렌, 유모, 멜라닙페. 지하세계 화가가 그린 아풀리아 적색 그림 크라테르. 기원전 330년경.

 제목이 『현명한 멜라닙페』가 된 것은, 아이들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멜라닙페의 항변이 ‘철학적(philosophei)’이었기 때문입니다(위-디오뉘시오스 『웅변의 기술』 9.11). 멜라닙페는 혼외 임신을 숨기면서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논리적인 주장을 펼친 것으로 보입니다. 아쉽게도 멜라닙페의 주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몇몇 구절만이 단편으로 전해집니다.

 멜라닙페의 성별은 주장을 펼치는 데 확실히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나는 한낱 여자지만 이성을 가지고 있어요”라고 하는 단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단편 482). 멜라닙페는 마치 다른 사람 일인 것처럼, 겁탈당한 처녀가 아버지가 두려워 버린 아이를 죽이는 것이 정당한지 묻습니다(단편 485). 멜라닙페는 또한 하늘과 땅이 태초에 붙어 있었으며, 그것이 분리되어 모든 것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단편 484). 세상의 탄생까지 돌아보는 이 대사는 멜라닙페의 항변을 ‘철학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정의에 관해서 논하는 이런 단편도 있습니다.

그대는 범죄가 날개로 신들에게 뛰어오르고, 누군가가 그것들을 제우스의 서판에 적고, 제우스가 그것을 보고 인간들에게 판결을 내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제우스를 위해 인간들의 죄를 적는 데에는 온 하늘이 부족할 것이고, 그분께서 그것들을 고려하여 각각에 벌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사실 정의는 그대가 보고자 한다면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에우리피데스 단편 506

 즉, 정의는 인간들을 감시하다가 제우스에게 보고하는 신(헤시오도스 『일과 날』 256)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인간들 본인의 행실에 걸린 문제지요.

 멜라닙페는 말을 유창하게 하는 유일한 비극 속 여인이 아닙니다. 『메데이아』에서 메데이아는 여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논설합니다. 여자들은 지참금을 지불하고서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들을 모시며 살아갑니다. 여자의 삶은 남편에 의해 좌지우지되지만, 여자는 거부할 권리가 없으며 남편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메데이아는 한 번 아이를 낳느니 세 번 싸움터로 나가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230ff). 뒤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논쟁(agon)에서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사악하다고 비난합니다. 메데이아는 자신이 이아손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나열합니다. 그런데도 재혼함으로써 메데이아를 배신한 것은 바로 이아손이었습니다(465ff). 메데이아의 언변은 다시 이아손을 속이는 데에도 사용됩니다(869ff).

 『트로이아 여인들』에서는 헬레네와 헤카베의 논쟁이 나옵니다. 헤카베는 헬레네를 원망하며, 메넬라오스에게 헬레네를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헤카베는 헬레네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줍니다. 헬레네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합니다. 애초에 트로이아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파리스를 죽이지 않은 헤카베 본인이며, 아프로디테의 힘은 감히 거역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헬레네는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906ff). 『안드로마케』에는 안드로마케와 헤르미오네의 논쟁이 있습니다(186ff).

 적절한 논거를 들어 상대방을 설득하는 말하기 기술, 수사학은 고대 아테나이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중요해졌습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수사학이나 소피스트 철학과 같은 당대의 지적 유행을 자기 비극에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는 여러 논쟁 장면이 있고, 인물들은 다양한 논리로 각자의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수사학은 대체로 정치와 사법의 영역이었으며, 이는 당연히 여성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아테나이 청중들은 멜라닙페처럼 여성이 자기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사악한 여인들을 창조해냈다고 조롱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러한 ‘사악한 여인들’의 예시로 파이드라와 함께 멜라닙페를 듭니다(『테스모포리아 여인들』 545). 자기 의견을 펼치는 여자는 의붓아들을 사랑하여 죽음으로 몰고간 여자와 동급으로 사악한 존재입니다! 여성의 적절한 역할에 관한 논의는 『결박된 멜라닙페』에서 다뤄졌던 것 같습니다.

 『결박된 멜라닙페』는 텟살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현명한 멜라닙페』와 달리, 이탈리아 메타폰티움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비극에서 멜라닙페는 메타폰토스 왕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메타폰토스는 멜라닙페의 쌍둥이 아들, 아이올로스와 보이오토스를 자기 자식으로 입양했습니다. 메타폰토스의 아내인 시리스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멜라닙페가 어쩌다 이탈리아로 가서 노예가 되었고, 아들들이 메타폰토스에게 입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현명한 멜라닙페』의 결말에서 혼외 임신을 한 멜라닙페가 추방됐을 수도 있습니다.

 본격적인 줄거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멜라닙페는 (왕비에 의해서?) 감옥에 투옥된 것 같습니다. 한편, 왕비 시리스는 입양아들이 못마땅했습니다. 시리스는 자기 형제들과 쌍둥이를 사냥터에 함께 보내고, 쌍둥이를 죽이게 했습니다. 쌍둥이는 시리스의 남매들을 모두 죽입니다(단편 495). 하지만 이 시점까지 쌍둥이들은 자기들이 시리스의 친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본인들이 노예인 멜라닙페의 자식임을 뒤늦게 깨닫고, 투옥된 어머니를 구했을 것입니다.

 단편 중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아마도 논쟁 장면에서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논쟁의 화자는 확실치 않습니다. 한 단편은 파피루스를 통해 발견했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낫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듭니다. 먼저 여자는 공식적인 절차 없이도 대출과 상환을 잘 지킵니다. 또한 여자는 집안을 관리하므로 여자 없이는 집안이 번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과 도도네의 제우스 신탁을 전하는 것도 여자이며, 운명과 이름 없는 여신들의 의례를 진행하는 것도 여자입니다. 남자들은 여인 한 명이 악한 짓을 하면, 마치 여인 전체가 사악한 종족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나쁜 여성보다 더 나쁜 것은 없으며, 좋은 여성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각각 본성이 다릅니다(단편 494).

 여성에게 ‘남성적’ 성격을 부여하고 당당한 성격과 행동을 부여하는 것은 에우리피데스뿐 아니라 그리스 비극의 대체적인 특성입니다. 아마도 이는 고대 그리스 청중에게 부정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여성의 미덕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45.2). 이러한 반-규범적 여성 역할은 역설적으로 기존 규범의 존재를 확인하고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역할 규범의 반전과 파괴는 가상의 이야기인 비극 안에서만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비극에서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실제 여성의 목소리가 아닌, 남성 작가에 의해 구성된 목소리라 하더라도요. 메데이아가 아무리 기만적이고 악한 인물이라 한들, 메데이아가 말한 여성의 고통이 완전히 거짓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에우리피데스는 특히 여성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결박된 멜라닙페』가 말하는 여성의 가정과 종교 역할은 고대 아테나이 사회에서 표준적인 여성의 역할입니다. 『결박된 멜라닙페』는 여성이 동질적인 집단으로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지만, ‘여성’이라는 집단의 동질성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반에서 여성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여성 주인공이 여성 코로스에게 도움이나 동조를 청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성으로서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개한 것 외에도 에우리피데스는 다양한 비극을 썼습니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첫 작품으로, 메데이아 신화를 다뤘습니다. 『알크메네』에서 알크메네는 제우스와 동침하고, 간통을 의심한 남편에게 살해당할 뻔합니다. 『안티오페』와 『아우게』, 『알로페』는 모두 멜라닙페처럼 겁탈당하고 자식을 버린 뒤, 아버지에게 들켜 고통받는 여인들을 다룹니다. 『아이올로스』에서 근친상간을 저지른 카나케는 아버지에게 자살을 강요받았습니다. 『크레테인들』과 『스테네보이아』는 파이드라처럼 부적절한 욕망을 가진 여인들, 파시파에와 스테네보이아를 다뤘습니다. 페르세우스 신화를 주제로는 『다나에』와 『안드로메다』가 쓰였습니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극과 달리, 안티고네가 살아서 하이몬과 결혼하는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이노』는 아타마스의 두 아내 이노와 테미스토간의 다툼을 다뤘습니다.

 이 비극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우리는 일부 단편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단편조차 거의 남지 않은 작품도 많습니다. 우리는 위 작품들의 여성 인물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고, 어떤 말을 했는지 거의 알지 못합니다. 물론 위 인물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는 다른 문헌들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그들이 에우리피데스의 손을 통해 어떤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고대의 수많은 문학 작품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비극에는 무척 다양한 여인이 등장하고, 그들의 역할과 성격에 관해서 어떤 단일한 결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알케스티스나 메데이아, 휩시퓔레나 프락시테아는 모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을 읽어낼 수도, 혹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읽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인 우리의 몫입니다. 이 글이 비극 속 인물들의 목소리를 읽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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