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지수현 작가님의 장편소설 『열여덟 스물아홉』과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를 모티브로 하여 쓰여 졌음을 밝힙니다. 본 글은 영리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1차 저작물임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bgm : White love story - As One (커피프린스 1호점 ost)







 

열여덟, 스물아홉


5화

 

 

 

 

 

 

 

 

 

 

 

 

1. 마음들 사이에 멈춰선 우리

 

 

[오늘은 언제 와?]

물음표까지 완성한 메시지를 우주가 차마 전송까진 못 하고 죄다 지워버렸다.

[많이 바빠?]

…이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촬영 중인데 당연히 바쁘겠지, 뭘 물어. 우주는 문득 어제까지 혜성과 오고간 메시지 내역들을 올려 보았다.

[나 심심해.]

[열시에 촬영 끝난다면서 왜 아직 안와?]

[니 서재에 있는 닌텐도 내가 해도 돼?]

죄다 우주가 보낸 것들뿐이고 혜성의 답장은 없었다. 혜성이 촬영장에 나가 있는 동안 하루에도 네다섯 번, 우주가 이런 식으로 시덥잖은 연락을 하면 혜성은 대부분의 말에는 답장을 않다가 나름 중요한 안건에는 촬영 쉬는 시간에 직접 전화를 하곤 했다. 너 내 게임기 아무것도 건들지 마라. 나 진심이야.

한여름의 태양열로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을 기세였다. 결국 혜성에게 연락하지 못한 핸드폰을 우주가 하릴 없이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됐다, 됐어. 나도 자존심이 있지. 우주의 입술이 빼죽 튀어나왔다. 툴툴 걸으며 길가에 난 작은 돌멩이들을 아무렇게나 챘다. 언제는 연락만 하면 바로 받을 것처럼 그러더니.

혜성의 드라마는 얼마 전 첫방 했다. 촬영은 한창 중반부에 접어들며 가장 집중해야 할 때라고 현민이 말해주었다. 지독한 더위. 눈자위를 무작위로 찔러대는 햇볕 때문에 우주가 절로 인상을 썼다. 한참 화난 사람 같이 씩씩대던 우주의 걸음이 별안간 잦아들었다. 무슨 생각에 빠진 것처럼, 발걸음을 늘이며 우주가 샌들을 질질 끌었다.

 

‘너무 그렇게 윤혜성 챙기고 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저번에 내가 그랬지. 너 그러다 뒤통수 맞는다고. 그때 네가 깨달은 바가 있는 줄 알았는데, 난.’

 

술자리에서 오선호가 했던 말. 술이 잔뜩 취한데다가, 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혜성과 서로 악감정이 있는 게 분명한 애가 하는 말을 담아둬 봤자라는 걸 알지만… 어쨌거나 남편과 그렇게나 사이가 나쁜 사람의 축하자리까지 초대 받을 만큼 우주 자신이 가까운 것도 이해가 안 가고. 또 오선호가 부부 사이에 관여해 섣불리 그런 말을 해댈 정도면 분명 우주 역시도 오선호와 무슨 사건이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우주를 내내 따라다니는 탓이었다.

 

“아이 씨, 괜히 찝찝하게…”

 

혜성과 우주의 동네는 각자의 마당이 딸린 중형 주택들이 프라이빗하게 모여 있는 단지였다. 블록을 몇 개 벗어나면 상가용으로 마련된 야트막한 건물들이 줄지어서 있었다. 깔끔하고, 조용하고. 또 조경도 잘 되어 있어 예쁜 동네. 밤낮이 없는 직업 특성상 출퇴근을 위해서도 그렇고 교통이 편한 도시 한가운데의 대형 아파트에 살아야 할 것 같은 혜성이 왜 이런 전원생활을 하는 걸까. 근래 들어 슬슬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하며 우주는 궁금해졌다.

오셨어요? 우주가 카페로 들어서자마자 제법 젊은 사장이 우주를 알아보고 반겼다. 이런 일도 이제 우주는 제법 익숙해졌다. 당장 옆집이며 앞집, 뒷집… 우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모르고 알은체를 해오는 사람들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데에 도가 튼 것이다. 기사로 봤어요. 얼마 전에 사고 나셨다면서요. 괜찮으세요, 소 작가님? 카운터 앞에서 에코 백을 뒤져 지갑을 꺼내며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시다 시피요. 완전 멀쩡. 우주의 취향을 안다는 듯, 주문을 받지도 않고 커피를 내리며 사장이 작게 웃었다. 그러게요. 훨씬 더 밝아지셨어요. 말투도 그렇고.

 

“한창 동화책 삽화 작업하신다고 자주 오실 때, 남편 분께서 선 결제 하셨던 거 아직 남았어요.”

“아. 걔가 그랬어요?”

“늘 그러시잖아요.”

 

올, 윤혜성. 우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계세요. 가져다 드릴게요, 아이스 모카. 지갑을 도로 집어넣고 돌아서는데, 창가 자리를 탐색하며 걷던 우주가 문득 멈춰 섰다. 우주의 시선이 곧 벽 끝으로 향했다. 검은색 화구통. 어, 저거 내가 쓰던 거랑 완전 똑같은 거네. 요즘 애들도 저거 쓰나? 화구통의 주인. 제법 어린 태가 나는 검은 생머리의 남학생 하나가 미술학원의 이름을 적인 엘홀더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우주가 그것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사장이 모카를 가져다주었다. 이건 서비스. 하고 옆에 생크림 스콘도 하나 내려두었다. 우주의 시선 끝이 닿는 곳을 보곤 사장이 우주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미대 입시생인 것 같더라구요. 소 작가님이 누군지 알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어유, 저 그렇게 유명한 사람 아닌 데요!”

“적어도 저희 동네에선 모르는 분이 없죠.”

“윤혜성 와이프루요?”

“그것도 그렇구요.”

 

암튼, 맛있게 드세요. 사장이 자리를 물림과 동시에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남학생이 일어섰다. 화구통을 메고, 앉은 자리를 정돈해 쟁반을 카운터에 반납하는 뒷모습을 우주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시생이면 고 삼인가. 곧 카페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우주가 되뇌었다. 열아홉… 열아홉이라 이거지.

 

 

 

 

혜성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주는 정원의 흔들 그네에서 졸고 있었다. 앞에는 먹던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액체 상태로 파인트 컵에 담겨있었다. 혜성의 짐을 들고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던 호준이 혜성의 등 뒤에서 멈춰 섰다. 왜 그러세요, 형? 혜성이 곧장 고개를 돌려 세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읽고 입을 다문 호준이 혜성의 어깨 뒤를 넘어다보았다. 아, 형수님 주무시는구나. 혜성이 호준의 양 손에서 짐 가방을 받아들었다. 내가 옮길게. 이만 퇴근해.

호준이 나간 대문이 닫히자 혜성이 양 손에 든 가방을 잔디밭 아래에 툭 내려놓았다. 그 둔탁한 소리에 거의 고개가 넘어갈듯 하던 우주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마구 주변을 둘러보던 우주가 곧 혜성을 발견했다. 왔어? 우주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모기한테 나 잡아드세요, 하지 그래.”

“너 올 때 된 것 같아서. 기다리다가 잠깐 존 거야.”

 

우주가 기지개를 쭉 펴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누군갈 기다리느라 나와 있었다기엔 아이스크림까지 먹으며 혼자 너무 즐거웠던 것 같은데. 잠깐 졸았다는 사람이 얼굴은 한 시간은 잔 것처럼 부어 있고… 짓궂은 의문들은 접어놓고 혜성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아무 연락도 없던데, 떽떽이.”

“떽떽이라고 하지마라.”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나봐?”

“재미는 무슨. 그냥 동네 산책하다가 카페 갔다 왔어.”

“주택가 끝에 하얀 상가 건물 있어. 거기 일층에 연우커피라고, 너 거기 자주 갔었어.”

“어. 거기 맞아! 안 그래도 사장님이 나 알아 보더라구.”

“이 동네에 우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건 그렇지. 너님이 잘나신 덕분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 아냐?”

 

혜성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우주가 저도 모르게 움츠렸고, 우주의 어깨 위를 날아다니던 작은 풀벌레 한 마리를 손짓으로 쫓은 혜성이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니야. 구부리며 경직했던 어깨를 펴고 우주가 혜성과 눈을 맞췄다.

 

“너 워낙 동네 사람들한테 잘하고 다녔어. 인사도 잘 하고, 수박 하나를 살 때도 꼭 몇 통씩 사서 옆집, 뒷집, 앞집 나눠주고. 너 네 그림이 얼마나 비싸게 팔리는 줄 알아? 그런데도 어느 집에 좋은 일 있다 그러면 꼭 너 직접 그린 그림 선물하곤 했어.”

“그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오만데 퍼주고 다녀서 갑갑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랬다고?”

“맞아. 어머님이 그러셨지.”

“이상하다. 네가 울 엄마를 그렇게 부르니까.”

“지금 네가 뭔들 안 이상하겠냐.”

“그니까, 우리 부부의 이 훌륭한 평판이 다 내 덕분이라는 거지?”

 

그 말을 하며 우주의 표정은 이미 광대가 눈 밑까지 올라와 좋은 기분으로 둥글둥글했다. 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우주 저 달덩이, 하는 생각을 하다가 실 웃음을 터뜨렸다. 아, 수박 얘기 하니까 나 수박 먹고 싶네. 우주가 그네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많네.

 

“서울 바로 옆인데도 별 잘 보인다고 좋아했었어. 이 집.”

 

그렇구나… 고개가 뒤로 넘어간 채로 여전히 그네를 움직이며 우주가 중얼거렸다.

 

“나는 카페에 가면 모카만 마셔. 그리구 동네 사람들이랑 가까이 지냈구, 이렇게 앉아서 밤에 별 보는 걸 좋아 했구나. …오늘 나에 대해 알게 된 사실.”

“……”

“너한텐 어땠어?”

“…응?”

“뭘 좋아하고, 다른 사람한테 어땠고, 뭐 그런 거 말고…”

“……”

“너한테, 나 어떤 사람이었어? 어떤 어른, 어떤 스물아홉이었어?”

 

우주가 어떤 시간들을 지나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혜성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아니, 혜성만이 알았다. 우주의 주변에서 그 궤적을 꿰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혜성이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단 한사람인 혜성에게, 우주는 고작 그것만이 궁금한 듯 했다. 소우주가 윤혜성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촬영에 집중하느라 며칠 무심했나. 먼저 연락하지 않는 혜성을 기다리며 우주가 종일 그런 생각을 한 걸까봐 순간 혜성의 마음이 철렁했다. 하지만 혜성은 곧 시선을 떨궜다. 우주의 질문은 곧 저에 대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쨌거나 혜성은 명목상 부부라는 이유로 엄연히 우주를 속이고 있었고, 그런 자각을 할 때마다 따라오는 자책 때문에 우주가 비슷한 질문을 할라치면 묘하게 피해 왔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넌 항상,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됐어. 나보다 먼저 크고, 주저앉을 때도 나보다 먼저 일어서서…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나를 일으켜주고, 또 이끌어줬어. 너 그랬어. 지난 십일 년 동안.”

“내가? 네가 아니라?”

 

그 반대가 아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주가 반문하자 오히려 혜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응. 네가.

 

“와, 나 철들었었네.”

“……”

“소우주. 너 대단했구나. 마음에 들었어.”

 

양 팔을 교차시켜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우주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조금 전의, 그 달덩이 같던 표정이었다. 정말 열아홉에나 보던 얼굴. 그러나 혜성은 좀 전처럼 그런 우주를 보고 웃지 못했다. 그 때에도 지금에도 우주는 같은 사람인데, 저 표정을 정말로 간만에 본다는 생각 때문에.

혜성은, 어쨌거나 저를 만난 이후로 우주가 늘 여느 또래보다 한 발짝 앞서 어른이 되어야 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고작 스물네 살에 아직 대학생이던 혜성과 결혼해 어린 가장이 된 것이나, 당연히 거기에 꽤 오랫동안 수반됐던 고생 같은 것. 혜성이 배우로서 주목받고 난 이후라고 해서 우주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유명인의 아내가 되며 우주는 만나는 사람들, 제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조차 고르고 또 걸러야 했다. 매일같이 우주분식에서 등짝을 맞으면서도 이십 년을 넘게 고쳐지지 않았던 그 왈가닥이 고작 이삼 년 만에 변했다는 게… 혜성은 주제넘게도 우주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너무나 당연하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암튼 다행이다. 혜성의 대답을 들은 우주가 안도했다. 뭐가?

 

“우리 말야. 같이 있어서, 그동안 행복했던 것 같아서.”

“……”

“왜… 아니야?”

“…그랬어, 대개는.”

“아, 맞다!”

 

또 다른 화제가 생각이 난 모양. 하루 종일 대화 나눌 사람 없이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테니, 요즘의 우주는 혜성만 보면 새처럼 종알대기에 바빴다. 또 왜. 눈이 커다래진 우주를 보며 혜성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모르게.

 

“나 미술학원 다니려구.”

“진심이야?”

“농담처럼 들려?”

“무슨 학원을, 너 입선한 지 오 년도 넘은 작가야.”

“작업실에 있는 작품들 아무리 봐도 내가 그린 작품 같지가 않아. 게다가 손이 굳는 게 자꾸 느껴지는 것도 불안하구. 정작 기억 돌아왔을 때 그림을 못 그리게 될 수도 있잖아.”

“그래도,”

 

혜성이 뒤의 말을 더 이을 새도 없이, 부리나케 그네를 박차고 테이블을 돌아 나온 우주가 혜성의 앞에 철썩 달라붙었다. 물러나봤자 등받이가 다인 혜성의 코끝에 곧 우주의 얼굴이 한가득 빤히 다가왔다. 왜인지, 그런 우주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혜성이 고개를 돌려 피했다.

 

“윤혜성 부인이라고 절-대 말 안 해. 응? 진짜루.”

 

이제 우주는 혜성의 팔을 붙잡아 흔들고 있었다. 귀찮다고 내치치도 못하고, 혜성은 제 몸이 어쩐지 뻣뻣이 굳는 걸 느꼈다.

 

“아, 혜성아.”

“…마, 맘대로 해. 그럼.”

“진짜지? 히, 신나.”

 

용건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주가 혜성에게서 떨어졌다. 잠시 동안,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혜성은 길게 호흡을 내쉬며 깨달았다. 경황없이 의자를 끌며 혜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주는 한 눈에도 신이 난 뒷모습으로 녹은 아이스크림을 정리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덥다.”

“먼저 들어가서 씻어. 나 이것 좀 치우구!”

 

혜성이 내려두었던 짐 가방을 다시 양 손에 들었다. 미술학원에 간다는 생각에 신났는지 우주는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사실 애초에 허락을 받아야 할 일도 아니었는데. 나 짐이 있어서, 대충하고 들어와. 우주를 두고 현관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올라서던 혜성이 불현 듯 뒤를 돌았다. 소우주. 쟁반에 젖은 파인트 컵을 담아 올리던 우주가 뒤를 돌았다. 양 손에 그 무거운 걸 벌이라도 되는 듯 들고, 혜성은 잠시 우주의 무구한 두 눈을 응시했다.

 

“우리 함께여서 분명 좋았어도, 모든 순간이 그랬던 건 아니야.”

“……”

“기억이 다 돌아와서, 생각만큼 우리가 평탄하지는 않았다는 걸, 힘들었던 순간들을 네가 다 알게 되어도. 소우주.”

“……”

“미리 말해두는데, 그거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혼란스럽거나 힘들어하지 말라고. 그 뜻을 알아들었을 리 없는 우주는 그저 천천히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래.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로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안도가 되는 듯 혜성이 다시 등을 보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말라붙은 수저를 테이블에서 들어 올리다 말고 우주가 문득 고개를 돌려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왜 저래? 갑자기 진지하게…

 

 

 

 

 

 

 

 

 

2. 폭풍전야

 

곽 대표의 전화를 받았을 때 우주는 혜성의 서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말이 서재지, 혜성이 대본을 연습하고 연기에 필요한 공부를 하는 방. 혜성이 하던 대로 덴탈 마스크를 끼고, 책장 위를 청소하려고 막 받침대를 밟아 올라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오늘 행사, 제수씨가 안 간다고 한 거예요? 한 손에 먼지 털이를 든 채로 현민의 말을 듣던 우주가 이내 네? 하고 되물었다. 행사라뇨? 혜성이 보충 촬영 생겼다고 하고 갔는데…

 

―혜성이가 그렇게 말해요?

“…네에.”

―아, 이 녀석. 안 되겠네.

“왜요?”

―촬영은 무슨. 지금 걔 코엑스에 있어요.

“코엑스…요?”

―오늘 거기 기업행사가 있거든요. 비공식 스케줄. 심한나라고, 혜성이 친한 후배 배우가 초대한 자리예요.

 

아, 그냥 우주 씨랑 같이 가라니까. 이 자식이. 수화기 너머의 현민이 혜성을 향해 좀 짜증을 냈다.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우주가 대충 파악이 됐다. 그리고 우주는, 심한나라는 배우 역시 알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 혜성의 이름을 검색하면 늘 연관검색어로 딸려 나오던 이름이라서.

 

―안 되겠다. 지금 차 한 대 보낼게요. 내가 보내주는 옷 입고, 그 차타고 행사장으로 가요. 제수씨.

“아…”

―뭘 망설여요. 그러다 늦어요.

“혜성이가 저 때문에 불편한 거면…”

―제수씨. 학교 다닐 때 그룹 스톰의 에릭 좋아했다고 했죠?

“어떻게 아세요? 그리고 과거형 아닌데? 우리 오빠 십일 년 지난 얼굴도 완전 그대로 아이돌인데?”

―그쵸. 그럼 그 여전히 아이돌인 에릭 오빠 보고 싶겠다.

“당연하죠!”

―참, 잘 됐어. 공교롭게도 에릭이 우리 소속사인데. 아, 언제 한 번 식사자리 마련해야겠네.

“우와. 진짜요?”

―이제 좀 구미가 당겨요?

“……”

―내가 갈게요. 준비하고 있어요.

 

현민이 가지고 온 원피스는 너무 작아서 호흡 한 번 잘못 했다간 등허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문득 괘씸함이 치민 건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현민의 등에 떠밀려 행시장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윤혜성… 내가 에릭 진짜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같은 소속사에, 심지어 친한 사이라는 말을 여태 안 해? 비공개 행사라 언론 노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다만, 워낙 초대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시선이 좀 집중될 각오는 해야 할 거예요. 혜성이, 진짜 징그러울 정도로 제수씨 노출 안 시키거든요.

 

“제수씨. 가면, 미션이 있어요.”

“미션이요?”

“꼭, 혜성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해요.”

“혜성이 옆에… 찰싹?”

“네. 다른 사람들 눈에 제수씨랑 혜성이 녀석 말고 다른 투 샷은 절대 잡히지 않게. 오직 둘이서만 같이 있어야 해요.”

 

잘 할 수 있죠? 현민은 재차 다짐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가서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혜성이 곁에 있는 거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냐만은… 콧등을 긁적이던 우주가 좌석 팔걸이에 몸을 척 기대고 통로 사이 옆자리에 앉은 현민을 빤히 보았다. 대표님. 에릭 오빠랑 식사자리 약속… 진짜 지켜주셔야 돼요?

 

 

 

윤 배우! 행사장 한가운데 서 있던 혜성이 현민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예정에 없던 현민의 등장에 한 번, 현민의 옆에 드레스 업 한 채로 서 있는 우주를 보고 두 번 놀라 혜성이 다가오려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현민이 두루 살필 것도 없었다. 파트너라도 되는 양 한나는 혜성의 옆에 서 있었다. 현민이 제 옆의 우주에게 낮게 속삭였다. 에릭 솔로앨범 친필사인 시디 줄게요. 제수 씨, 출동.

 

“어머, 우주 언니!”

 

우주가 출동하기도 전이었다. 한달음에 우주의 앞으로 와, 양 손을 붙들고 호들갑을 부리는 이를 우주가 곧장 알아보았다. 한나라는 사람. 인터넷으로 봤을 때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네. 한나의 얼굴이 주는 기에 눌려 우주가 잠시 말을 잃었다. 언니,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너무 반갑다. 그제야 혜성도 그 앞으로 다가와 섰다. 혜성이 바라보는 건 우주가 아닌 현민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한나 배우가 너 제수씨랑 같이 오라고 한 걸로 아는데. 그래서 데리고 왔지.”

“형.”

“선배, 그만해. 나 안 그래도 언니 보고 싶었단 말이야.”

 

혜성의 옆자리를 마크하라는 미션이 무색했다. 한나의 손에 붙잡혀, 우주는 곧장 혜성과 멀어졌다. 언니. 나랑 같이 행사장 좀 둘러봐요. 언니 침대 꽤 썼죠? 누워보고 골라요. 내가 하나 선물할게요.

 

“선배. 나 언니랑 한 바퀴 둘러보고 와도 되지?”

“아니, 뭐 그걸 쟤한테 허락을…”

“가요, 언니.”

 

마치 저 둘이 커플이고 내가 깍두기가 된 느낌… 뭔가 이상한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꼬집어내지 못한 채로 우주가 한나에게 이끌려갔다. 멀리서 혜성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탐탁찮은 얼굴로 현민에게 뭐라고 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긴장할 필요 없어요, 언니.”

“네? 아니, 응? 아니… 네?”

“나 다 알고 있어. 언니 기억, 잃었다면서요.”

 

신상 침구류들이 있는 코너에는 음악조차 흐르지 않았다. 다들 본 행사장에 모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공간. 우주의 손을 잡고 이리로 오자마자, 저희끼리 볼게요. 하며 서 있던 직원까지 자리를 비우게 한 한나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아… 말을 다 이해해 놓고서도 우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

 

“혜성이… 한테 들은 거예요?”

“그런 셈이에요.”

“…그렇구나.”

 

지나칠 정도로 우주에 대한 보안을 주변에 철저히 한다는 혜성이, 혹시 우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날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당부하고 조심시키는 혜성이, 지금 우주의 앞에 있는 이 상대방에게 만큼은 그렇게나 쉽게 둘 사이의 일을 모두 털어놓는 사이라고. 한나의 말은 우주에게 그런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선배랑 대학 후배여서 언니 알게 된 거지만, 나 선배랑 친한 만큼 언니랑도 정말 친했어요.”

“…아, 그래요?”

“말 편하게 해요, 언니.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ㅇ… 아니. 괜찮아.”

“혼란스럽고 힘들죠. 언제든 나한테 전화해요. 특히 선배에 관한 거 궁금하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친절한 동시에 이상하게 우주의 심기를 긁었다.

 

“윤혜성이랑 한 집 사는 건 이쪽인데, 궁금한 게 있다고 해서 왜 내가 그쪽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언니는 잃은 게 있잖아요.”

“내가 뭘 잃었는데?”

“시간요.”

“뭐?”

“십 년은 기억을 못한다던데, 그럼 적어도 지금은 내가 선배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 아닌가 싶어서요.”

“……”

“언니가 기억을 잃지 않았어도, 아니 그랬으면 더더욱 지금 이 자리엔 없었겠지만.”

“그게, 무슨 얘기야…?”

 

소우주! 저 멀리서, 우주를 발견한 혜성의 발걸음이 잦아들었다. 우주와 한나 사이에 있던 묘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둘 사이로 파고든 혜성이 곧장 우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 있었어?

 

“선배. 언니 내가 여기 소개 좀 해주려고 했는데. 언니 계속 집에만 있다가 나와서 간만에 기분 전환 좀 시켜주고 싶어서 그래.”

“그럴 거 없어. 우주 나랑 같이 있을 거야.”

“뭐가 걱정이야. 내가 언니 상태 어떤지 모르는 것도 아니구, 선배 걱정 안 해도,”

“우주 환자 아니야. 그래서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

“내 아내니까 내가 같이 있겠단 거야. 그것뿐이야.”

 

가자. 저를 데리고 가려는 혜성을 우주는 따르지 않았다. 붙잡힌 팔목을 쳐내고, 혜성을 마주보는 우주의 얼굴은 약간 퉁명해 보였다. 이유를 알 리 없는 혜성이 그런 우주를 내려다보며 미간에 주름을 새겼다. 우주가 제 어깨로 혜성을 치고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툴툴대는 발걸음으로 먼저 걸어갔다. 혜성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한나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혜성이 곧장 뒤돌아 그런 우주의 뒤를 따랐다. 우주야. 소우주!

 

“에릭 친필 사인시디? 고작 형 사인에 나를 팔아?”

 

행사장 뒤편, 복도 끝에 다다라서야 우주는 혜성을 팩 돌아보았다.

 

“고작 사인 시디로 나도 이런 덴 안 오지. 대표님이 식사자리도 마련해 주신댔거든.”

“어이가 없다, 진짜. 이보세요, 정신연령 열여덟 씨. 철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지금은 열아홉이거든? 그리고 거짓말쟁이한테 그런 말 들어야 할 이유 없는데.”

“뭐? 거짓말쟁이?”

“오늘 보충 촬영 있다며. 아침에 그렇게 말하고 나갔잖아. 그런데 봐, 너 지금 촬영 중이야?”

“……”

“아주 대배우 납셨어.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나한테 거짓말을 해? 곽 대표님이 그러는데 저 한나라는 사람이 나도 같이 초대한 거라며.”

“그건, 우주야. 너 이런 데 오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니까, 불편할까봐…”

“그것까지 거짓말이지?”

“뭐?”

“솔직히 말해. 너 창피한 거잖아. 네 말대로 난 떽떽거리기나 하고 덜렁대기나 하니까. 몸만 스물아홉이지, 이런 데 와서 너처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난 섞일 수 없으니까. 그런 내가 창피했던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난 그저…”

“뭐? 내가 환자가 아니야? 환자 취급 하는 게 누군데.”

“……”

“그래. 기억을 잃은 건 병이지. 그럼 난 환자가 맞고. 근데, 그런 내 병을, 넌 너무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녔다고는 생각 안 해?”

“한나가, 그래? 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고?”

“아. 혹시, 와이프에 대한 비밀까지 다 털어놓을 만큼 둘이 과하게 가까운 사이인데 나만 모르는 건가?”

“소우주. 오해야. 그리고 너 지금 말 심해. 그만해. 더 하면 너 후회해.”

“그래. 나도 날 정신연령 열여덟 취급하는 너랑은 더 말하기 싫어.”

 

그야말로 냉전이었다. 우주는 지금 제 마음속에 또아리를 튼 채 소용돌이치는 설명 불가의 감정을 느꼈다. 혜성에게 화를 내는 것 말고는 해소할 길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개운해지는 건 아니었다. 잠시 혜성과 말 없는 대치를 했다.

 

“소우주? 네가 웬일이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 우주가 혜성의 뒤편을 내다보았다. 반대편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다가오다가, 혜성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오선호가 유심한 눈빛을 했다. 윤혜성, 네가 데리고 온 거야. 설마? 뒤늦게 침대 판매장에서 따라 나온 한나 역시 세 사람을 보고 가까이 걸어왔다.

 

“선호 선배. 이제 와?”

“어, 미안. 좀 늦었어. 한나야.”

 

우주는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가 필요했다. 뭐야, 심한나가 오선호는 또 어떻게 알아? 혼란스러운 와중에 우주는 제 손을 감싸는 감촉을 느꼈다. 우주의 손바닥을 꽉 맞잡고 있는 건 혜성이었다. 오선호를 향해, 왜인지 모르게 경계심이 서린 혜성의 얼굴을 우주가 올려다봤다.

 

“웬일이냐? 꿀단지나 되는 것처럼 소우주 꽁꽁 숨겨놓고 맨날 혼자만 다니더니.”

“무슨 상관이야.”

“신기해서. 행사장에서 이 투샷을 보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우주 언니 내가 꼭 데리고 오라고 했어. 이번 우리 가구 라인, 언니가 좋아할 것 같기도 해서. 한나가 웃으며 혜성 대신 오선호에게 대꾸했다.

 

“우리 동문회 때 본 게 마지막이지, 선배? 오랜만이다. 영화 개봉한다며.”

“어. 안 그래도 초대하려고 했는데. 보러 올래, 한나야?”

“당연하지.”

 

동문회라니… 혜성과 한나가 대학 선후배라고 했으니까, 그럼 오선호랑도 그렇게 아는 사이인가. 혜성이 오선호랑 같은 대학을 갔구나. 우주는 포털사이트에 혜성의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프로필에 ‘국민대학교 영화과 학사’ 라고 적혀 있던 한 줄을 떠올렸다. 그래, 이제야 좀 이해가 갔다. 그럼에도 좀 튀는 게 있다면 한나를 바라보는 오선호의 눈빛이랄까. 뭐가 저렇게 다정하고 애틋해? 우리 혜성이는 이죽이면서 쳐다보더니.

그나저나, 하고 말을 떼며. 오선호는 또다시 혜성을 향해 몸을 틀었다. 우주는 저도 모르게 혜성의 뒤로 반 발자국 물러나 숨어 들어갔다.

 

“요즘에는 둘이 사이가 좋아졌나봐? 절대 다시 붙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되물은 건 우주였다. 오선호가 아니라 혜성에게였다. 대답 없이, 혜성은 우주를 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혜성의 턱이 꾹 다물리는 것을 우주는 보았다. 혜성이 화를 참을 때 으레 하는 버릇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아무리 좀 전까지 혜성을 물어뜯을 듯 했어도, 역시 이럴 땐 혜성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주는. 붙잡은 혜성의 손을 우주가 먼저 당겼다. 어금니를 갈던 혜성이 겨우 숨을 내쉬는 듯했다.

 

“집으로 가자, 혜성아.”

“……”

“그냥 가자. 응?”

“싫어.”

 

혜성은 단호했다. 그리곤 오선호를 적대심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 말대로 이제 우주 안 숨겨두려고. 워낙 곡해하는 사람도, 또 넘겨짚으려는 사람도 많아서 말이야. 오선호 너처럼.”

“그래? 그러던가.”

“참, 그리고.”

“……”

“행사장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말아줬으면 해. 사람들 앞에서 너 필요할 때만 친구라고 나 갖다 쓰는 거, 불쌍해서 그냥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널 너무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아서.”

“야, 윤혜성.”

 

간다. 혜성이 우주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손을 잡은 채로 함께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대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되는 것을 느꼈다. 한켠에 서 있던 현민이 같이 있는 둘을 발견하고는, 눈이 마주친 우주를 향해 제 가슴 밑으로 엄지를 들어보였다. 혜성의 옆을 마크하라는 미션을 잘 수행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게 아닌데… 우주는 울상을 하며 저를 끌고 가는 혜성의 뒤를 건너다보았다. 통로 쪽에서 씩씩거리는 선호와,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오직 혜성의 뒷모습만을 응시하고 있는 한나. 언니는 시간을 잃었다는 한나의 말이 잔상처럼 남았다. 스스로가 지나온 행과 불행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주를 비웃는 것만 같아서.

 

 

 

 

 

 

 

 

 

3. 불행을 볼 수 없는 사람

 

 

우주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혜성은 없어졌다.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한창인 자리였다. 조도 낮은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붐볐고, 아주 가까이 있지 않으면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대에서 공연하는 음악소리며 각종 소음이 혼재했다. 클러치를 껴안은 채로, 우주가 황망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인파를 비집고 혜성이 아닌 누군가 우주에게로 가까워졌다. 현민이었다.

 

“심 회장이 불러서 혜성이 잠시 룸으로 내려갔어요. 한나랑요.”

“심 회장이 누군데요?”

“한나 배우 아버지요. 이 행사 주관하는 가구회사 회장이고.”

“그런데 왜 혜성이를…”

“혜성이, 처음 미디어에 얼굴 알린 게 이 회사 지면광고였어요. 혜성이 연극무대에서 제법 뼈대가 굵어졌을 때, 그러면서도 연기 말고 연출 하고 싶어서 갈팡질팡 했을 때. 한나 배우가 혜성이 프로필을 자기 맘대로 지원해서 모델로 붙었던 거였거든요. 잘빠진 사진 한 장으로 아주 센세이션했었죠, 그 때. 지면 광고 모델에서 단숨에 영상 광고를 찍고, 영화도 들어오고요.”

“아…”

“심 회장 입장에서도 혜성이가 효자예요. 덕분에 경쟁사 제치고 업계 1위가 됐거든요. 그래서 아껴요. 가끔씩, 지 사위라도 되는 듯 다룬달까…”

 

이제 우주는 알 것 같았다. 한나가, 우주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던 이유. 혜성이 여태 이뤄 왔던 일들, 또 지금 쥐고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의 물꼬를 터준 장본인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을까. 둘의 관계가, 어쨌거나 단순히 좀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우주는 거뜬히 알 것 같았다.

모르겠다. 스물아홉의 소우주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서 초라한 기분은 아닐거라는 생각.

 

“한나 배우가 제수씨한테 거슬리게 한 건 없었죠?”

“저, 대표님.”

“네, 제수씨.”

“나 집에 가고 싶어요. 데려다 주시면 안 돼요?”

“파티 곧 끝나요. 혜성이가 같이 간다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하랬는데.”

“아뇨, 난… 나는…”

 

우주가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우주의 시선 끝이 이내 어딘가를 올려다봤다. 현민이 따라 돌면, 천장이 높다랗게 뚫려 있는 2층의 한 룸에서 심회장과 함께 나오는 한나, 그리고 혜성이 보였다. 혜성에게 깍듯이 인사를 받은 심회장이 어디론가 가고, 둘만 남은 혜성과 한나가 나란히 난간에 기대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양 하다가 동시에 둘 다 웃어버리는 그 순간을 보며, 우주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현민이 절로 표정이 좋지 않은 우주의 눈치를 봤다.

 

“차 준비시키라고 할게요. 아직 무리하면 안 되는데 내가 제수씨 괜히 데려왔나봐. 그쵸?”

“아뇨.”

 

혜성에게서만 시선을 거뒀을 뿐, 우주의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를 좇고 있었다.

 

“잠시만요, 대표님.”

 

우주가 제 시선 끝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수씨. 어디 가요? 현민의 물음에도 대답 없이 우주가 금세 사람들 틈바구니로 섞여들어 사라졌다. 금방 따라가려고 했지만 순간 그 앞을 지나가는 와인 카트에 앞을 가로막혀버린 현민이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우주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제수씨, 우주씨!

인파를 헤집고 나온 우주가 누군가의 손목을 낚아챘다. 계단 아래, 이제 가려는지 나설 양으로 서있던 오선호의 몸이 홱 돌려졌다. 윤혜성 동창, 윤혜성 대학 동기 카드를 쓰지 못해 행사며 파티에서 내내 자신과 제 영화에 대한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한 오선호는 기분이 여간 상해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심기가 꽝인 건 우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이 다신 못 붙을 줄 알았다느니, 혜성이가 내 뒤통수를 칠거라느니. 은근히 흘리지 말고 너 똑바로 말해.”

“지금 나한테 화풀이 하는 거야? 아까 보니까 윤혜성이랑 심한나랑 분위기 좋던데.”

“…혜성이랑 나랑 아무 문제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정말 그래?”

 

오선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뭔가 있나? 내가 모르는 게? 되려 기세가 죽어서 우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도 다시 이렇게 너희랑 엮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야. 왜 자꾸 기억 못 하는 사람처럼 굴어? 나도 너희 둘이랑 인연 끊고 살고 싶었다고. 너희 어머니 장례식만 아니었으면,”

“뭐?”

 

오선호가 말을 멈췄다. 되묻는 우주의 목소리보다도, 방금 저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도록 하얗게 질린 우주의 얼굴을 보고.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머니… 우리, 엄마?”

“…야. 너 괜찮아?”

“무슨말이냐니까!”

“말 그대로야. 소우주 네 어머니… 사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 너희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턱, 하고 우주가 숨을 멈췄다. 들이 마쉬지도, 내쉬지도 못한 채로 얼어붙자 곧 심장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과 함께 빠져나가지 못하고 꽉 막힌 호흡이 우주의 안을 가득 채웠다. 사년 전. 우주가 잃어버린 시간 어디쯤이었다.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일을 지금 겪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조여드는 것 같은데, 이미 이런 마음을 사년 전에 겪었고, 그래서 이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고. 눈앞의 오선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우주는 모든 것이 선연해졌다. 엄마가 베트남에 있다고 둘러대던 은하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말에 제 앞에 무릎까지 꿇고 애틋한 눈으로 소식을 대신 전하겠다고 했던 혜성.

우주가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호흡이 곤란해지며 숨을 거칠게 바투 쉬는 우주를 보며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선호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운다는 자각도 없이, 우주의 눈물이 볼을 흐르지 않고 그대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너 진짜, 왜… 왜 그래? 우주가 큰일 났다는 생각. 겁에 질려 손을 뻗을락 말락 하는 오선호를 두고 우주가 힘겹게 뒤돌았다. 하지만 두 발자국도 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내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란스러운 사이에서도 그런 모습의 우주에게로 금방 시선이 집중 되었다. 우주 씨! 현민이 달려와 황급히 우주를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요, 제수씨?”

 

일단 나가요. 어둡고, 경황이 없는 와중이라 사람들은 파티장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혜성과 함께 온 그의 부인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우느라 전혀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우주를 부축하는 일이 힘에 부치는 것은 둘째 치고, 현민은 혜성이 이 사실을 알기 전에 빨리 우주를 데리고 나가 상황을 봉합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발, 제발. 혜성과 마주치지 않기를 염원했던 현민의 바람은 고작 몇 걸음을 옮긴 것에서 끝났다. 좀 전부터 우주를 찾고 있던 혜성이 이미 이 소란을 인지해 코앞까지 와버렸기 때문에. 현민 만큼이나 당황하기는 오선호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오선호가 혜성에게 변명하듯 말을 뱉었다.

 

“우리 그냥 얘기하고 있었어. 나도 이해가 안 돼. 사 년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에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혜성이, 그저 낮게 한숨을 뇌까렸다. 언젠간 닥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 거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혜성은 침착하고자 했다.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우주 대신에 저가 그래야 했다. 혜성이 입고 있던 수트의 재킷을 벗었다. 잠깐 눈이 마주치자, 현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현민이 조용히 데리고 가게 놔두라는 듯이. 하지만 혜성은 그러지 않았다. 벗은 재킷을, 주체할 수 없이 우는 우주의 머리 위로 씌워 그 얼굴을 가렸다. 그리곤 현민에게서 우주를 받아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혜성이 그러는 걸 보고 저 여자가 혜성의 와이프임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그 주변에서부터 물살처럼 벌어져 길을 만들었다. 혜성은 우주를 한층 더 깊게 감싸 안아, 사람들이 트여 준 길을 따라 망설임 없이 우주를 파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4. 모든 걸 잊지 않기엔 기억은 힘이 약해

 

 

은하가 방문을 조심히 닫고 나왔다. 응접실로 나와, 소파 옆에 초조하게 서 있는 혜성에게로 다가오는 표정이 착잡했다. 혜성의 곁에는 은하가 갑작스럽게 귀국하느라 부랴부랴 싸가지고 온 캐리어가 세워져 있었다. 좀 어때? 혜성의 물음에 은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불 뒤집어 쓰고 있어요. 자는지 어쩌는지 대답도 없어.

 

“벌써 사흘째야. 내 얼굴은 아예 보지도 않으려고 하고, 나 촬영가고 없을 때만 그나마 방 밖으로 나온다는데… 헬퍼님 말씀으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고 하셨어.”

“그러게 왜, 자기가 스스로 기억 찾아서 알게 됐어도 충격일 일을, 그렇게 아무 입에서나 듣게 해요? 의사 선생님이 뭐랬어. 충격 받으면 기억 찾는데에 좋지 않다고 자극하지 말랬잖아요!”

“……”

“맡기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구.”

“처제.”

“아, 왜요!”

“원망은 나중에 얼마든지 들을 테니까, 일단은 우주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미치겠네. 진짜. 은하가 미간을 구기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때 집 안으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촬영을 가야 할 혜성을 호준이 데리러 온 것이었다. 혜성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은하가 잠시 한국에 들어오기 까지 사흘을, 이런 식으로 혜성이 전전긍긍 했을 것 같아 은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혜성에게 손짓했다. 얼른 가 봐요, 언니는 나한테 맡기고. 아, 일은 해야 할 거 아니야.

혜성을 등 떠밀어 내보내고, 한숨 쉬며 현관 앞을 왔다 갔다 하던 은하가 다시 침실 문을 두드렸다. 언니, 소리 들었지? 형부 나갔어. 이제 좀 나와 봐. 문 밖에서 한 걸음을 떼고 은하가 잠시 기다렸다. 발소리가 작게 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우주가 방문을 당겨 열었다. 우주가 빼꼼 얼굴을 반만 밖으로 내밀었다. 은하야… 있지, 나…

 

“응, 언니. 왜?”

“…배고파…”

 

우주를 먹이려고 혜성은 수박을 두 통이나 사두고 갔다. 빨간 과육을 반으로 가르며, 은하는 식탁에 앉아 포크를 물고 앉아 있는 우주의 핼쑥한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비행기에서, 나 언니한테 혼날 각오 단단히 했었어. 형부랑 말 한마디도 안 섞으려고 한다길래. 나랑 형부가 언닐 속였다고 생각해서 화난 거 같아서.”

“……”

“근데 형부만 벌주는 거였어?”

“그런 건 아니구…”

 

그 날, 우주를 집으로 데려오며 혜성은 아무 발언권이 없었다. 우주는 울다가, 울면서 혜성을 원망하다가, 나를 속였다며 못된 말을 하곤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벌을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러고 나니까 혜성을 보기가 조금 껄끄럽기도 했고, 어쨌거나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주가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일을 하러 나갔을 혜성이 내심 신경 쓰였다. 커다란 접시에 수박을 잔뜩 썰어가지고 온 은하가 식탁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먹어. 안 그래도 형부가 언니 밥 대신 이거 먹을 거라고 했어. 냉기를 지닌 수박을 우주가 포크로 집었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내려놓았다. 엄마를 떠올리니 목 안이 꺼끌거려 입 안으로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신부전증이었다고, 혜성이가 말해줬어.”

“응. 급성이었어. 발병한 지 일 년 만에 돌아가셨구. 언니도 나도 신장이 안 맞았거든. 뭐, 맞았더라도 엄마, 우리 신장 받으셨을 분 아니잖아.”

“……”

“이식 기다리는 와중에 더 버티지 못하셨어. 사실 이식이 가능할지도 모를 정도로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우리 다 준비는 하고 있었어.”

 

…그랬구나. 또 다시 목 끝까지 울컥하는 게 있어, 우주가 겨우 숨을 꿀꺽 삼키며 울음을 참았다. 우주가 내려놓은 포크를 은하가 다시 힘없는 손에 쥐어주었다. 근데, 형부가 다른 얘긴 안해?

 

“무슨 얘기?”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스물 네 살이면, 형부 영화로 데뷔하기도 전인데 왜 둘이 그렇게 결혼 빨리 했는지.”

“……”

“엄마 때문이잖아. 엄마 시한부 진단받은 그 다음 날에, 형부 우리 집 찾아와서 언니랑 결혼하겠다고 했었어.”

“뭐?”

 

기반이 있기는커녕, 당시는 혜성이 제대 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의문을 갖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야 아귀가 맞게 된 상황들을 짚어보며 우주가 놀랐다.

 

“그땐 나도 왜 그렇게까지 하나, 이해 못했었거든. 아무리 형부한테도 엄마가 엄마 같은 존재셨다곤 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에 가족이 되겠다고 저렇게 단번에 맘을 먹는단 말이야? 하고. 게다가 쥐뿔도 없으면서.”

“……”

“근데 엄마 돌아가시고 나니까 알 것 같더라. 엄마가 아들이 있어, 아니면 우리가 아빠가 있어? 언니 결혼식 날에 엄마가 얼마나 든든하고 기뻐했는지… 형부가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그랬대. 은하 대학공부하고 시집보내는 것까지 다 자기가 책임 질 테니까, 이제 자기한테 맡기고 엄마 치료하시는 것만 집중 하시라고.”

“……”

“엄마 장례식장에서도, 형부가 있어서 우리 둘은 마음껏 슬퍼하기만 했어. 그것만 하면 됐었어.”

 

그런 거 생각하면, 참 고마운 사람이지. 은하에게는 아마도 먼 과거의 일. 되짚어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은하를 보며 우주의 눈썹이 축 내려갔다. 그랬었구나. 우리가 부부가 된 이유. 나를 고아가 되지 않게 해 주려고, 또 엄마의 마지막을 걱정 없게 해 주려고… 혜성이 지체 없이 견디기로 결정한 것들. 그런 혜성에게 지난 며칠간 어떤 벌을 세우고 어떤 원망을 퍼부은 건지 생각하면 우주는 막 마음이 아득해졌다.

이런 일들이 괜찮아 질 수 없는 건 시간이 지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인건지, 곧 은하의 얼굴도 우주와 같은 표정으로 변해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곧장 침통해졌다. 한참을 말이 없다가, 뭔가 생각난 듯 우주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은하야.

 

“응?”

“혜성이, 그때까지 데뷔도 안 했을 때라고? 대학가면서 연기로 전공 바꾼 게 아니었어?”

“연극무대 서긴 했었지만 연출자로서 제작비 아끼려고였지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어. 여전히 연출 하고 싶어 했고.”

“…그럼…”

“언니랑 결혼하고 가정을 책임져야 했으니까. 불확실하고 먼 길보다 확실하고 빠른 길을 찾아 간 거야.”

 

꿈이 바뀌었어. 십일 년은 그런 시간이야, 소우주.

왜 여전히 연출을 하지 않고 연기자가 되었냐는 물음에, 언젠가의 혜성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거짓말이었다. 혜성의 꿈은 바뀐 적 없었다. 그것조차 혜성의 눈빛에서 읽지 못한 스스로의 둔함을 탓하며 우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우주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하 역시 알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빙 돌아온 은하가 우주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토닥였다. 말 못해서 미안해.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 안다는 듯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 역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5. 사랑이란 혼자되지 않는 것

 

 

우주는 소파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은하를 일찌감치 호텔로 쉬라고 보낸 뒤였다. 화면 속에서는, 우주가 혜성의 서재를 뒤져서 찾은 두 사람의 결혼식 DVD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진과 고등학교 동창들을 비롯해, 우주가 얼굴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대학 동기들의 영상 메시지가 차례대로 지나가고. 남편 없이 홑몸으로 은하와 하객들을 맞고 있는, 적색 저고리의 한복을 차려 입은 엄마의 모습이 몽타주로 나타나자 우주가 저도 모르게 구부린 무릎을 끌어안았다.

혜성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제 눈에 보인, 소파에 앉은 우주의 뒷모습. 그리고 우주가 보고 있는 우리의 결혼식 영상. 우주는 혜성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고 있었고, 짧은 순간 상황을 대강 파악한 혜성이 현관 옆에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혜성을 발견하면 다시 우주가 방 안으로 모습을 숨길까봐 마음을 졸였는데, 그럴 생각은 없었는지 혜성이 그 옆에 다가온 뒤에도 우주는 무릎 사이에 턱을 묻은 채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앉아도 돼?”

“…응.”

 

한 사람이 앉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혜성이 우주 옆에 자리했다. 둘 사이의 빈 공간으로 시선을 보내 빤히 보던 우주가, 이내 빈 공간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가까이 와도 된다는 뜻을 놓치지 않고, 혜성이 얼른 사이를 붙였다. 반나절 만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고민 않고 은하를 진작 부를 걸 그랬다고 혜성은 생각했다.

 

“나도 어딨는지 까먹었던 건데, 용케도 찾았네.”

“며칠 전에. 네 방 청소하다가 봤어.”

 

이상한 결혼식이었다. 신랑 석과 신부 석의 구분이 따로 없었고, 혜성 역시 꼭 아들처럼 엄마의 옆에서 함께 하객들을 맞고 있었다. 혜성의 어머니… 정말로 결혼식에도 오시지 않을 정도였구나. 마찬가지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혜성의 옆모습을 우주가 흘긋 봤다. 앞머리를 올리고, 큰 키에 어울리는 수트를 차려 입어도 영락없이 어린 모습인 화면 속 신랑. 스물 넷의 혜성은 이런 얼굴이구나. 감상하며 번갈아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좀, 실감이 나?”

“…어?”

“내가 네 남편이라는 거. 다 거짓말 같다며.”

 

실감이 나느냐고, 그렇게 묻는 이는 눈앞의 스물아홉 윤혜성. 잠시 그 윤곽이 또렷한 얼굴에 시선이 머물던 우주가,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에서 짧게, 그러나 정면으로 머무른 엄마의 모습에 우주가 저도 모르게 일시정지를 눌렀다. 조금 되감은 다음에 우주가 엄마의 얼굴이 나오는 장면만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우주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화면 속 엄마의 모습이, 혜성이 엄마에게 했다던 약속대로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한 기쁨으로만 가득해 보여서. 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혜성을 소개시켜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주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옆에서 함께 보고 있는 혜성 역시 감회가 새롭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십 분 남짓, 짧은 영상이 금세 끝나고 암전처럼 화면이 꺼지자 혜성과 우주는 아득한 어딘가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우주는 그제야 몸을 돌려 혜성을 마주했다. 며칠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혜성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촬영 빼면 좋겠는데 어려워. 다음주에, 어머니 뵈러 가자. 처제랑 같이.”

“…응.”

“미안해. 이 말 하고 싶었는데, 이제 기회가 생기네.”

“나도 미안.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다 알면서 떼 부렸어. 그리고… 고마워.”

“……”

“우리 엄마, 나랑 은하. 걱정 안하게 해줘서. 네가 아들 되어 줘서.”

“…나한텐 당연한 일이었어.”

“너 하고 싶은 거 포기해가면서, 네 삶을 바꿔가면서 한 선택이야. 그게 왜 당연해?”

“왜겠어.”

 

마주 본 채로, 혜성이 몸을 당겨 더욱 가까워졌다. 혜성이 손을 뻗으려 망설이다가 이내 내려놓는 그 작은 움직임을 우주는 느꼈다. 다만 혜성은 바라보았다. 우주의 눈을, 가만히.

 

“널 사랑하니까.”

“……”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었어. 가진 게 없는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게 너였으니까. 그런 네가 힘들지 않게,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어. 그게 다야.”

 

우주가 이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 할 수 있을지, 그런 배려같은 건 없는 혜성의 온전한 진심이었다. 대답 없이 혜성을 바라보며, 점점 눈동자가 흔들리던 우주가 이내 눈물을 떨구어 냈다.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우주가 울기 시작했다. 감정을 터뜨리듯 소리를 내며 저에게 기대 오는 우주를, 혜성이 팔을 벌려 기꺼이 품에 안았다. 울지 말라고 달래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껏 울어도 된다는 뜻으로.

울다 잠든 우주를 혜성은 소파에 뉘였다. 저녁도 먹지 않았을 테니 오래 잘 것 같진 않아서. 야트막한 쿠션으로 머리를 받쳐두고, 혜성은 일어나 방에서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다시 소파로 돌아온 혜성이 모로 누운 우주에게 시선을 맞추느라 몸을 낮췄다. 린넨 재질의 얇은 담요를 우주의 위로 둘러주고는 혜성이 잠든 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넘기는 혜성의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상체를 숙인 혜성의 입술이, 우주의 이마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내리 누른 입술을 떨어뜨린 혜성이 다시 지그시 우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쩌면, 이렇게 된 김에 모두 말을 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내가 너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혜성 저 스스로는 하지 못할 말인 걸 안다. 비겁해도 좋았다. 이런 식으로 하루라도 우주를 더 곁에 둘 수 있다면.

 

 







이번 편은 에필로그 없는 것 맞습니다!

참 그리고 ... 제 개인 트위터 계정을 보시는 칭구들은 알겠지만 ...

원래는 오늘 메리드매리 16화를 올리려고 했는데요 ...

이렇게 되어버렸고 어쩐 일인지 자동 저장도 안 되는 바람에 ㅜ_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써서 올게요 흑




나는 사랑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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