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클리셰 05.

 

05. 이유

 

 

딱 죽고 싶다는 말은 지금인 것 같다. 백마 탄 왕자도 아니고 이경식 차장을 처단해 줄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나 대신 여기서 추잡한 쇼를 해줄 흑기사도 아니다. 그냥, 이딴 꼴을 보이는 게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딱 죽어버리고 싶은, 나보다 두 살 어린 직장 상사. 전정국 팀장이 내 꼴을 훑으며 문 앞에 서 있다.

 

바닥에 나뒹구는 양철 바스켓이 도르르 굴러 내 발에 와 멈춰 선다. 단추를 푸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얼음이 살에 닿아 녹아내려 소변이라도 한 것 같이 척척히 바지 안엔 아직 미처 녹지 못한 얼음이 우스꽝스럽게 울퉁불퉁 한 모양을 만들고 있다.

 

얼음 때문에 추워서인가, 아니면 너무 쪽팔려서? 그것도 아니면 분해서? 모르겠다. 몸이 덜덜 떨린다. 나 진짜로 기절할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확 쓰러져 버릴까. 아니야, 문이 열려있으니 도망칠까? 그럼 계약은? 이 상황에서도 계약을 생각한다는 게 좆같은 을의 입장을 대변한다. 좆같다. 회사생활 좆같아.

 

“뭐야?”

 

송전무가 날카롭게 물었다. 속이 울렁인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욱-하고 마셨던 술이 넘어올 것 같다. 역겨운 소리로 가득했던 룸 안이 고요하다. 반쯤 풀어진 셔츠에 온통 젖은 꼴을 한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원망스럽다. 나를 왜 이 자리에 가라고 해서. 왜 멋대로 사람을 오해하고 업무의 연장이라며 알지도 못하는 소리나 지껄이면서...

 

“에이씨! 술맛 떨어지게 뭐냐고? 야, 너 뭐야?”

 

땅으로 떨군 시야로 전정국 팀장의 발이 보인다. 나를 지나쳐 의자 끄트머리에 놓인 가방을 챙긴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챈다. 가까스로 쥐고 있던 마이크가 땅에 떨어지고 ‘쿠웅’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저 새끼, 저거..저거 뭐야?”

 

송전무는 화가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룸 안의 시선을 무시하고 조금 빠른 듯한 전정국 팀장의 발걸음이 문밖으로 향한다. 나를 이 개 같은 상황에서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미움과 원망이 크다. 이제 와서 어쩌라고. 차라리 오지나 말지. 이딴 모습을 보여줄 바에야 그 사람들 앞에서 옷 벗고 춤추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계단을 빠르게 오르는데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토기가 올라 그의 손을 잽싸게 뿌리치고 입을 막았다.

 

“웁-”

 

비틀거리며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랐다. 그의 발소리도 내가 뛰는 소리만큼 빨라진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붙잡고 속을 게워냈다. 술과 물 외에 먹은 게 없어 지독한 알콜 향을 풍기는 양주가 쏟아져 나온다. 제기랄, 길거리에서 구역질이라니. 전정국 팀장이 내 등을 두드린다. 역류하는 술이 고약해 눈물이 다시 고인다. 내가 어디까지 수치감을 느끼려는지 시험이라도 하듯 송전무가 찢어버린 내 명함이 같이 게워져 나온다. 막무가내로 찢긴 몇 개의 종이 쪼가리에 하필이면 회사 로고와 ‘사원 박지..’의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이름이 적혀 찢어진 작은 조각을 주워 든다, 씨발. 진짜 개씨발... 찢긴 명함 조각까지 뱉어내고 나니 더는 나올 것도 없어 소매로 입을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잔뜩 굳어버린 전정국 팀장과 눈이 마주친다.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어 그의 손에 들린 내 가방을 뺏다시피 가져왔다. 전정국 팀장이 잘못한 게 있던가? 나를 이 자리에 보낸 거? 따지고 보면 그에게 화가 날 일도 아닌데. 이런 자리일 줄 모르고 보낸 걸 텐데 그를 탓해도 될까? 상관없다. 나는 누군가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

 

바지 안의 얼음이 거의 다 녹아 밑에선 물이 뚝뚝 흐른다. 이 꼴로 집에 갈 수도 없고, 택시를 잡을 수도 없지만 일단 뒤를 돌았다. 전정국 팀장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그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쳐다도 보지 않고 잡힌 어깨를 뿌리쳤다. 다시 앞만 보고 걸으니 이젠 손목을 잡아당겨 몸을 돌린다. 씨발, 진짜. 전정국 팀장을 쳐다봤다. 아니 조금 쏘아봤다.

 

“..내 차로 가요.”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네가 왜, 네가 왜 화가나? 화가 나야 할 건 나다. 한 사람 말만 듣고 나를 어설프게 판단해 이 좆같은 자리에 내보냈으니 내가 화내야 한다고.

 

“아뇨, 알아서 가겠습니다.”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어림없는 힘이다. 사실 그의 차를 타고 가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기엔 지금 내가 너무 지쳤다.

 

“이 꼴로 어딜 갑니까.”

“내일 출근은 지장 없게 하겠습니다.”

 

다시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가 손목을 더 아프게 쥔다.

 

“...더 화나게 하지 말고 차로 갑시다.”

 

더 화나? 더 화난다고? 왜, 대체 네가 왜 화나. 나한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잘못 판단했다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더 화나게 하지 말라고? 기가 차서 웃었다.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으면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텐데, 나는 지금 만취했고 눈에 뵈는 것도 없다.

 

“팀장님이 왜 화나요? 뭔데 화나요? 빡쳐야 할 건 전데 왜 팀장님이 화내요?”

“.....”

“이거 좀 놔요!”

 

인상 쓰며 잡힌 손을 뿌리치려 하니 이젠 힘을 주고 팔을 끌어당긴다. 길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며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끌려갔다. 화낼 힘도 없다. 건물 앞에 비상등 깜빡이는 외제 차가 보인다. 벤츠네. 저게 벤츠구나. 늦여름 밤의 선선한 공기에 젖은 몸이 조금씩 떨린다. 조수석 문을 연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일단 차에 타고 얘기해요.”

“.....”

 

그가 내 어깨를 감싸고 힘을 준다. 더는 유치한 몸싸움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차마 탈 수가 없다.

 

“박지민씨.”

“차 더러워져요. 이 꼴로 어떻게 타요.”

 

흥건히 젖은 바지에선 여전히 질질 물이 흐른다. 대체 얼음을 얼마나 넣은 거야 개새끼.

 

“차 걱정할 땝니까.”

 

인상을 확 찡그린 그가 조금 거칠게 나를 차에 밀어 넣었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시동을 꺼두지 않은 차 안엔 에어컨이 나온다. 그가 운전석 문을 열기에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우리 집 근처에 모텔이 있던가. 어디서 자지.

 

재킷을 벗은 그가 내 몸에 덮는다. 그러고 보니 풀어진 셔츠도 잠그지 못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싶으면서도 아직 룸 안에 남아있을 송전무와 이경식 차장이 신경 쓰인다.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가장 큰 대형 마트인데. 다 어그러지는 건가... 이경식 차장은 분명 나를 탓하겠지.

 

그가 차를 빠르게 출발시킨다. 차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몸을 떨었다. 온통 젖어 찝찝함이 느껴지기도 전에 몰려오는 추위에 그가 덮어준 재킷을 말아 쥐었다.

 

“아무 데나 내려주셔도 돼요.”

“내 집으로 갈 겁니다.”

“아뇨, 저는 그냥 저희 집으로..”

“이 꼴로 들어가면 부모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러게요. 뭐라고 생각하실까요.”

 

욱하는 마음에 비아냥거렸다.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은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가 맞을 것 같은데 자꾸 나를 타박하는 것 같은 말투에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그도 말없이 차의 속력을 낸다. 회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고급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섰다. 도무지 전정국 팀장의 집에 갈 이유를 모르겠지만 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차를 마친 그는 내리지 않고 한숨을 길게 내쉰다.

 

“어디라고 갑니까, 그런 자리를.”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 때문에 이 꼴을 당한 부하직원에게 저딴 걸 말이라고 하나.

 

“오늘 참여하라고 제게 직접 말씀하신 직장 상사 명령인데 따라야죠. 별수 있나요?”

“그런 곳인 줄 알았으면 보고를 해야죠.”

“오전 브리핑 시간에 계약 따냈다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밟혀서요. 좀 좋아했어야 말이죠.”

 

이렇게까지 비꼴 마음은 없는데, 자꾸 말이 삐죽하게 나간다.

 

“지금까지 다 이런 식으로 따낸 계약입니까?”

“네. 그럼 뭐, 사업 계획안 내고 피티라도 해서 따낸 줄 알았어요? 제가 가져간 페이퍼는 꺼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짓 해서 성사시키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회사에선 과정보다 성과 아니에요? 좋은 조건에 체결했으면 됐잖아요. 팀장님이 술을 따랐어요? 팀장님이 억지로 술이라도 마셨나요? 밑에서 알아서 만들어 와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냈는데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아예 없군요.”

“뭐라고요?”

 

전정국 팀장의 목소리가 차갑다. 내가 지금 이 사람과 왜 싸우고 있지.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고도 위로는커녕 저딴 소리나 듣고 있는 거지.

 

“제품에 대해 자신 있으면 비굴한 모습 보일 이유가 없겠죠. ‘좋은 자리 선점하게 해달라, 우리 제품 잘 좀 봐 달라.’라 하며 술 따르고 아첨할 게 아니라, 우리 거 납품 안 하면 너희가 손해다. 소비자가 우리 제품 없어서 발길 돌릴 만큼 괜찮은 제품이다. 이런 식으로 영업했겠죠.”

 

고작 사원이 어떻게 그렇게 말해. 지도 알면서, 내가 그럴 위치가 아니라는 거 알면서...

 

“네 저는 자부심도, 자존심도 없어서 그런 거 못 해요. 술 따르고 아부해서 계약 따내는 게 훨씬 쉬워요. 됐어요?”

“…박지민씨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까?”

“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낮에도 멋대로 절 판단하신 분이 뭘 묻고 그러세요. 저 이것밖에 안 되는 새끼니까 알아서 생각하세요.”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사원인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냐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 괜찮냐고 그 한마디를 못 들었다. 왜 지가 화내. 왜. 왜...

 

덮고 있던 재킷을 던지듯 건네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여기 어디야 씨발. 나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일단 걸었다. 어차피 그가 와서 잡을 걸 알고 있다. 그럼 나는 뿌리치고, 또 잡히고, 뿌리치고를 반복하겠지.

 

역시나 그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선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진다. 이미 팔린 쪽, 우는 모습 보이는 것 정도야 대수롭지도 않아졌다.

 

“자부심이고 나발이고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내가 거기서 뭘 할 수 있기나 해요? 꼭 말을 그딴 식으로 해야 해요?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한쪽 말만 듣고 오해했으면서, 이런 꼴 당하기 싫어 가지 않았던 건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도 모르면서... 왜 화내. 나한테 왜 화내! 흐...흐윽...”

 

술 깨면 후회할 수도 있다. 직장 상사에게 반말하고 게다가 나이 어린 애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으니. 그래도 할 말을 뱉어내고 나니 속은 시원하다. 어깨까지 들썩여 가며 울었다. 술이 올라서 그런가 감정의 폭이 더 커진다.

 

몇 분은 운 것 같은데 상대방은 반응이 없다. 달래 주던가, 아니면 다시 화를 내던가, 면박을 주던가 뭐든 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 없다. 내 시야엔 아직 그의 두 발이 보이는 걸 보니 내 앞에 서 있는 건 맞는데 아무런 행동이 없어 고개를 들어 전정국 팀장을 올려 봤다. 가끔 나를 보던 그 빤한 눈으로 쳐다본다. 말도 미동도 없이 나를 쳐다본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울고 나니 이제야 조금 민망하다. 그렇다고 억울함이나 서러움이 가라앉은 건 아니다. 여전히 전정국 팀장이 밉다. 많이.

 

“그러게요.”

 

나를 빤히 보던 그가 ‘그러게요.’ 네 글자를 말한다. 대답하지 않고 코를 훌쩍이며 쳐다만 봤다.

 

“왜 화를 내죠, 내가.”

“......”

“괜찮냐고 물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도 해야 하는데, 왜 박지민씨를 보자마자 화가 났을까요.”

“.....”

“지금도 화납니다. 박지민씨가 우는 것도 화나고, 그런 꼴로 내 앞에 있는 것도 화납니다.”

“.....”

 

그의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옷은 차갑게 젖어있고 주차장의 맴도는 공기의 온도도 낮다. 몸을 조금 떨었다. 왜 화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다. 자기도 모르는 거 내가 어떻게 알아.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 대답할 말을 찾았다.

 

“..추워요.”

“.....”

“저 춥다고요...”

 

전정국 팀장이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내게 걸쳐주곤 조심스레 어깨를 감싼다.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왜 화가 났는지 여전히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말은 곧 괜찮냐고 묻는 것과도 같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았다.

 

 

*

 

 

재건축 허가가 나길 바라는 낡은 우리 집과 비교도 안 되는 고급 아파트다. 드라마 속 잘 나가는 재벌 아들들이 그렇듯 전정국 팀장도 넓은 집에 혼자 사는 듯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손 씻고 밥 먹으라며 엄마가 반기는 우리 집과 달리 반겨주는 이도 사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은 조금 차가운 집이었다.

 

그의 평소 모습답게 군더더기 없는 가구로만 꾸며진 집에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내가 꽤 민폐같이 느껴졌다. 나를 화장실로 안내한 그가 ‘잠시만요.’ 하며 사라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이제야 봤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는지 지금에야 확인했다.

 

이경식 차장이 마이크로 툭툭 쳤던 이마 한쪽이 붉다. 술을 마시면 응당 붉어야 할 얼굴은 창백해져 있다. 눈시울은 여전히 빨갛고 추위에 떨어 파랗게 질린 입술도 볼 만 하다.

 

널따란 욕조에 걸터앉으려다 중심을 잡지 못해 뒤로 넘어갔다. ‘으앗!’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욕조로 자빠졌다.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괜찮습니까?”

 

문이 벌컥 열리며 전정국 팀장이 들어온다. 하필 또 이럴 때. 황급히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기에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다른 손엔 지난번 우리 집에 왔을 때 입고 돌려주지 않은 아빠의 파자마와 나의 낡은 티가 들려있다.

 

“안 돌려주길 잘했네요. 씻고 입어요.”

 

전정국 팀장이 새 칫솔을 꺼내곤 옷가지를 두고 나간다. 세면대 옆에 놓인 옷가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옷을 벗었다. 몸이 떨려와 뜨겁게 온도를 맞추고 한동안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서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그가 올려둔 옷을 들추니 새것으로 보이는 속옷이 툭- 떨어진다. 괜히 민망하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엉망이 된 내 옷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옷의 물기를 꼭 짜내고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래도 감기가 올 모양인지 그리 차갑지 않은 공기임에도 몸이 흠칫 떨린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그도 씻고 나왔는지 편한 옷차림이다. 반바지 추리닝에 큰 티를 걸친 그가 내게 다가온다.

 

“옷 주세요.”

“아뇨, 그냥 어디 담아 갈 수 있게..”

“주세요.”

 

내 손에서 옷을 뺏다시피 가져간 그가 거실 화장실 옆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잠시 뒤 빈손으로 나온다. 먹었던 술도 게워냈고, 한바탕 울기도 했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하고 나오니 이제야 정신이 든다. 동시에 민망함도 밀려온다. 악다구니를 쓰며 주차장에서 전정국 팀장에게 소리를 지른 것도, (물론 정말 화났었지만) 울면서 그에게 못 보일 꼴을 보였다는 게 쪽팔린다. 룸에서의 일이 벌써 아득하다.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먼일 같이 느껴진다.

 

“아, 제 핸드폰이..”

 

그러고 보니 핸드폰을 두고 왔다. 아마 술집 테이블 위에 있을 텐데.

 

“정신이 없어서 못 챙겼네요. 내일 내가 찾아올게요.”

“아뇨, 제가 가면 됩니다. 죄송한데 전화 좀 빌려주세요.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연락드렸습니다.”

“.....”

 

그러고 보니 전정국 팀장이 어떻게 알고 술집에 온 건가 싶었다. 이종필 대리가 말했을 리는 없고...내가 아버지께 보낼 문자를 전정국 팀장에게 보냈을 리는 더더욱 없고.. 그렇다면..

 

“박지민씨 어머님이 연락주셨습니다. 아버님이 약주를 하셔 데리러 갈 상황이 아닌데 혹시 같이 있냐고요.”

“죄송해요. 앞으론 연락하지 말라고 할게요.”

 

그는 대답이 없다. 매번 느꼈던 거지만 답답한 사람이다. 멀쩡한 소파 두고 마주하고 서 있는 모양새가 웃겼다. 말없이 얼마간 나와 눈을 마주친 전정국 팀장의 시선이 이마에 멈춘다.

 

“이마에 상처가...”

“넘어졌어요.”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손을 뻗어 이마를 만진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다. 약을 바를 상처도 아닌데 계속해서 살살 이마를 쓰는 손길에 쭈뼛대며 몸을 뒤로 빼니 그가 헛기침하며 손을 거둔다. 또 침묵이다. 그리고 또 그 시선이다. 이번엔 내가 흠, 흠. 하며 목을 가다듬자 그가 얼른 말을 잇는다.

 

“게스트룸이 따로 없습니다. 제 방에서 주무세요.”

“저 기다렸다 첫차 뜨면 갈게요.”

“나도 박지민씨한테 신세 졌는데 이걸로 갚는 셈 치죠.”

“그럼 팀장님은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제 방에서 자야죠.”

“네?”

 

같이 자? 한 침대에서? 뭐, 남자끼리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좀..

 

“침대가 넓어서 안 불편할 겁니다.”

 

말을 마친 그가 나를 지나쳐 걸음을 옮긴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날카로운 말이 오갔던 감정을 해결하지도 않았는데 아무 일 없던 척 신세를 지는 게 조금 별나긴 했지만 일단 자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크 그레이와 블랙으로 인테리어 된 그의 방엔 정말 넓은 침대가 있었다. 패밀리 사이즈 정도 되어 보이는 침대를 두고도 방에 공간이 텅텅 빈다. 우리 집 거실만 한 방엔 침대를 비롯해 책상과 비싸 보이는 피규어 몇 개가 진열되어 있다.

 

“누워요.”

 

너무 어색하다. 전정국 팀장과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같은 갈등이 생길 줄 상상도 하지 못했고, 어찌 됐든 아까는 감정이 격해져서 미안하다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 또한 그에게 받아야 할 사과가 있는데 그도 말이 없다.

 

그의 말처럼 침대는 넓었다. 혹시 팔이라도 닿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우리 사이에 한 사람이 더 껴도 될 만큼의 공간이 남았다. 내가 먼저 눕자 그도 눕는다. 방 안의 불이 밝은데, 나보고 끄라는 얘긴가.

 

“불...끄고 올까요?”

“박지민씨 옆에 보면 버튼 있습니다. 그거 누르면 됩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호텔처럼 여러 버튼이 보인다. 뭘 누르지? 첫 번째 버튼을 누르니 위이잉-소리를 내며 방 한쪽 벽면을 모두 덮은 블라인드가 올라간다.

 

“와, 야경 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 야경을 감상할 때가 아니기에 다른 그 옆의 버튼을 누르니 이번엔 띠리링- 소리를 내며 에어컨이 켜진다. 불 버튼이 뭐지, 허둥대며 다시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가 켜지고, 피규어 쪽 조명이 켜지고... 방 불 빼고 모든 걸 다 켜는 셈이다.

 

“불 어떻게 꺼요..?”

“흐흥.”

 

그가 웃었다. 이 상황에, 우리 아직 감정이 상한 상태인데 그는 내 모습이 퍽 웃긴지 흐흥-하고 웃었다.

 

“웃으셨어요? 우리 아직 화해도 안 했는데 왜 마음대로 웃으세요.”

“그러게요. 화해도 못 했는데 웃었네요, 내가.”

“헙.”

 

순식간에 몸을 겹쳐오는 전정국 팀장의 움직임에 놀라 나도 모르게 헙-하며 숨을 참았다. 마치 지난번 차에서 시트 조절하는 걸 알려줬을 때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전정국 팀장이 뻗는 손을 따라 벽을 쳐다보니 내가 조작했던 여러 버튼 위에 떡 하니 ‘Light’라고 쓰인 버튼이 있다.

 

“영어 읽을 줄 모릅니까?”

“...농담 재미없어요.”

 

내가 막무가내로 조작한 커튼과 스탠드, 에어컨을 차례로 끈다. 가까운 거리의 전정국 팀장에게서 좋은 향이 난다. 몸을 겹치다시피 하고 있으니 그 온도에 추위도 잦아든다. 방을 밝히는 불까지 끈 그가 몸을 비키지 않는다. 내 위에서 몇 초간 더 머무른다. 어두워서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건지, 어딜 보는지도 모른다. 취해서 그런가.. 심장이 빠르게 뛴다. 왜 이러지. ‘불 다 끄셨으면..’ 내가 작게 말하자 그가 ‘아, 미안합니다.’하며 제자리로 가서 누웠다. 멀어지는 온기가 아쉽다. 조금 추워서, 그래서 아쉽다.

 

 

*

 

 

취기가 가시질 않아 굉장히 피로함에도 잠이 쉬이 오질 않았다. 잠자리가 낯설기도 하고, 내일 출근에 대한 걱정도 있고. 아무래도 이 짧은 시간에 옷을 세탁하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당장 아침에 눈을 뜨고 마주할 상황에 벌써부터 어색하다.

 

사이즈도 맞지 않는 전정국 팀장 옷을 입고 출근할 수도 없고... 민망하게 이 옷 저 옷 입어보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동이 트는 게 보이고 나서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가 이리도 넓어서 다행이다. 미동 없이 자는 전정국 팀장을 한참 바라보다 방을 둘러봤다. 좋은 집에, 값비싼 옷, 외제 차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스물일곱의 전정국 팀장. 멀게만 느껴졌는데 옆에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나와는 아예 출발선이 다를 그가 또 낯설기도 하다. 불현듯 아까 몸을 겹치고 있는 전정국 팀장의 온도가 생각난다. 왜 그랬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살금살금 걸어 나와 거실에 둔 가방을 챙기고 현관에 가 신발을 신었다. 신발장에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차마 이 집에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파자마에 정장 구두라니…. 신발장에 얌전히 놓인 슬리퍼가 보인다. 빌려도 되나... 다음에 나중에 갖다주면 되겠지. 구찌 로고가 크게 박힌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섰다.


*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운 좋게 택시를 잡았다. 집 주소를 말하고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택시에서 눈을 붙였다.

 

오전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다. 제발 엄마가 깨지 않길 바랐지만 도어락을 누른 소리에 바로 달려온 엄마가 내 등짝을 몇 대나 후려친다.

 

“이놈 새끼!”

“아아! 엄마 아파.”

“옷은 어쩌고 잠옷을 입고 다녀? 미친놈처럼!”

“전정국 팀자…아니 팀원네 집에 두고 왔어. 옷만 갈아입고 바로 출근 해야 해.”

“어휴 저 화상, 화상! 아빠한테 그렇기 문자만 덜렁 보내고 연락도 안 되면 어떡해?”

“미안.”

“너 이제 술 취해서 엄마 아빠 부르는 거 금지야. 어디서 다 큰 애가 아직도 엄마 치마폭에 들어오려 그래?”

“아 알겠어. 그리고 그런 일로 전정국한테 연락하지 마.”

“같이 있냐고만 물어본 건데, 지가 더 놀라서 회식 장소 물어보더라. 너 어디서 아주 그냥 나쁜 버릇이 들어서 술 취하면 아빠나 불러대고…”

 

엄마의 폭풍 같은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방에 들어와 누웠다. 아, 핸드폰이 없으니 먼저 간다는 연락도 못 남기고. 어차피 두 시간 후면 볼 테니 괜찮겠지.

 

집에 오니 졸려 미치겠는데 그렇다고 출근을 안 할 순 없다. 그리고 피곤에 절은 몰골로 출근하거나 어제의 일을 다 추스르지 못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것도 성격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경식 차장을 마주하는 건 별로 신경이 쓰이질 않지만, 어제 그 난리를 피우고 제대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못한 전정국 팀장을 마주치는 건.. 벌써부터 걱정이다.

 

꾸역꾸역 옷을 갈아입고 출근길을 나섰다. 지금 가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도착할 테니 수면실에서 삼십 분이라도 잘 생각이다. 몰래 신고 나온 그의 명품 슬리퍼도 챙기고 통근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오늘이 금요일인 게 다행이다. 주말에 쉴 수 있으니.

 

 

*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건 나도, 전정국 팀장도 어제 아파서 조퇴한 이종필 대리도 아닌 이경식 차장이었다. 사유는 병가. 어제 괜찮았냐는 이종필 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님에게 어제의 일을 가타부타 설명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정국 팀장은 오전 내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먼저 가서 화났나? 아니지, 화 날 이유는 없지. 그럼 감사 인사를 안 해서? 아니 그런 일을 겪고도 멀쩡하게 출근해 자기 몫을 해내면 칭찬해줘야지 뭘 삐진 사람처럼 눈을 피해? 나도 딱히 건넬 말이 없어 묵묵히 내 업무를 쳐내기만 했다. 전정국 팀장은 임원 회의에 참석하고 나는 그 틈을 타 눈을 붙이려고 업무 노트를 확인하니 오늘은 어제 못다 한 레시피 개발이 있다. 와씨, 또 야근이야. 핸드폰도 찾으러 가야 하는데... 그럼 지금 삼십 분이라도 잘까...

 

“지민씨, 연구소에서 생두, 원두 샘플 왔어요.”

“벌써요?”

“네. 분류작업 도울게요.”

 

하필 오늘같이 컨디션이 최악인 날 일복이 터졌다. 다음 주 중에 받기로 한 샘플이 벌써 왔다. 생두를 직접 볶아 사용하는 카페와 원두를 납품받아 사용하는 카페들에 샘플과 설문지를 전달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오래 보관하면 신선도가 떨어지니 적어도 내일 중으론 이 샘플들을 다 전달해야 하는데, 퀵으로 보내면 비용이 커지니 직접 발품 팔 수밖엔 없다. 토요일도 일하다니. 젠장.

 

배송받은 샘플을 들고 R&D실로 가서 아라씨와 분류작업을 끝냈다. 내일 방문할 카페는 회사 근처의 개인 카페 삼십여 곳. 아라씨가 내일 출근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샘플을 전달하며 일종의 홍보도 함께 해야 하니 내가 도맡아 하는 게 나았다. 파견직원에게 부탁할 일도 아니었고.

 

분류를 마치고 라벨작업 까지 마치니 퇴근 시간이다. 서류 봉투에 제품 홍보 카탈로그와 커피콩 샘플을 넣고 책상에 쌓아뒀다. 하, 직딩의 삶. 한숨을 푹 쉬니 정대리님이 입속에 홀스를 넣어준다. 화한 느낌이 입안에 퍼진다.

 

임원 회의가 길어졌는지 전정국 팀장은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들어왔다.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그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다그닥 소리를 내며 입안에서 굴리는 사탕을 얼른 삼켰다.

 

“케켁-”

 

목구멍에 걸린 사탕 때문에 괴로워 기침하니 정대리가 등을 두드린다. 전정국 팀장은 나를 보다 고개를 돌린다. 조금 웃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비웃은 것 같은데.

 

팀원들이 퇴근하고 사무실엔 나와 전정국 팀장만 남았다. 망할 레시피 개발. 나는 내일도 나야 하는데..

 

“박지민씨.”

 

그가 오늘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 대신 아침에 슬리퍼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전정국 팀장에게 향했다.

 

“제가 슬리퍼 좀 빌렸어요. 말없이 빌려서 죄송합니다.”

“내일 시간 있어요?”

“네?”

 

내일? 내일 왜? 옷 주게? 밥이라도 사주게? 고마움의 표시? 미안함? 뭔데? 왜? 슬리퍼를 한번 슥 쳐다본 그가 대뜸 시간이 있냐며 묻는다. 내일 샘플 돌리러 가는 것도 모르겠구나, 아직. 보고해야 하나, 그냥 내 일인데 다 하고 말할까. 주말에 괜히 일한다고 생색내는 것처럼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오후에는 괜찮은데.. 왜요?”

“레시피 개발은 내일 합시다. 다섯 시쯤 봅시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시죠.”

 

에라이. 그럼 그렇지 고마움이나 미안함은 무슨. 역시 일이었다. ‘네, 알겠습니다.’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니 그가 나를 한 번 더 불러 세운다.

 

“여기요.”

 

핸드폰이다. 중간에 나갔다 온 건지 어제 술집에 두고 온 핸드폰을 건넨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다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내일 시간 있냐는 전정국 팀장의 물음이 사적인 것 이기를 바랐다.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다. 그러면 사과를 받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이젠 모르겠고.. 그냥, 모르겠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가까워질 이유는 없지만.. 왜 아쉽지? 에이, 모르겠다. 그냥 생각하기를 관둬야지.

 

 

*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이 들었다. 몇 시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지만, 창문 밖이 밝은 걸 보니 꽤 잔 모양이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켰다. 목요일 밤부터 꺼져있던 핸드폰인데 토요일인 지금까지도 온 연락이라곤 두 통의 전세 자금 대출 홍보 문자가 다였다.

 

어지간히 피곤했던지 이미 열한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전정국 팀장과는 다섯 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그 전에 샘플 전달을 마치려면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대충 씻고 오늘은 렌즈 대신 안경을 꼈다. 사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래도 업무의 연장이지 싶어 슬랙스에 셔츠를 꺼내입고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주말인지, 평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복장이지만 어제 푹 잔 덕에 컨디션은 매우 좋다.

 

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집을 나섰다. 회사에 들러 샘플을 챙겨 나오면 한 시 정도가 될 테고, 네 시 반까진 일을 마무리해야 하니 마음이 급하다.

 

 

*

 

서른 개가 넘는 서류 봉투 더미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카페 한 곳 한 곳을 방문하며 샘플과 설문지를 전달하고 상품 설명까지 덧붙이니 시간이 만만치 않다. 열다섯 군데를 들렀고 동네를 옮겨 열일곱 군데만 더 들르면 됐다. 이제 반 했네, 반 했어.

 

처음 와보는 동네인데 낯이 익다. 내가 여길 와 본 적이 있던가? 회사가 강남이라 그런지 근방의 집들은 다 크고 멋져 보인다. 괜히 이 동네에서 킥보드를 타는 애들도 좀 달라보이고.. 밥도 먹지 못하고 나오는 바람에 배가 고파와 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여전히 손엔 서류 더미가 한가득 들려있다. 저 편의점은 무슨 삼각김밥이 맛있더라. 전주비빔인가, 참치마요인가.. 아 둘 다 먹자. 라면이랑 핫바도.. 무슨 메뉴를 먹을지 고민하며 편의점으로 가는데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모르는 번호여서 받지 않을까 하다 받았다.

 

-네 박지민입니다.

-커피 코코 카페인데, 저희 아르바이트생이 무슨 서류 봉투를 줘서요. 여기에 담당자분 명함이 있길래, 이게 뭔가요?

 

아, 아까 들렀던 카페에 사장님이 없어 아르바이트생에게 샘플을 줬던 곳이다.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전달이 안 된 모양이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제품 설명서를 읊었다. 늦여름의 막바지 더위에 땀도 조금 흐르고 배는 고프고, 사장님은 질문이 백 개쯤 되는 것 같고. 길 한복판에서 진땀을 뺐다.

 

-네네, 생두 샘플 드렸으니 볶아서 사용해 주시고 설문지만 작성하셔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그 봉투에 그대로요! 아뇨, 비용 드는 건 없어요. 단순한 리서치입니다. 보내드린 샘플은 에티오피아에서..

 

“과테말라죠.”

 

-아, 과테말라에서…어…?

 

 

전화로 설명을 하다 말고 수화기 너머가 아닌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말이 뚝 끊겼다. 그래 생두는 과테말라산이 맞는데.. 그걸 누가..

 

“에티오피아 거는 다음다음 주에나 옵니다.”

 

와, 전정국 팀장이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편의점에서 막 나왔는지 검은 비닐봉지를 손목에 끼고 비비빅을 먹고 있는…추리닝 바람의….

 

-사장님 여튼, 샘플 쓰고 보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했다.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그렇다고 하기엔 좀 잘생기긴 했지만) 대학생의 모습을 한 전정국 팀장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팀장님 여긴 어쩐 일로….”

“동네인데, 박지민씨는 무슨 일입니까.”

“아, 저는 샘플 전달하려고요..”

“토요일에 외근한단 말은 없었잖아요.”

“다 하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어쩐지 아파트가 낯이 익었다. 그가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누구는 주말에도 일하는데 추리닝 바람에 아이스크림이나 빨고 있는 모습이 얄미워 나도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뭘 봅니까.”

“팀장님이 먼저 봤잖아요.”

“난 반가워서 본 건데.”

“.....”

“어차피 두 시간 뒤에 만날 사람인데, 조금 먼저 봤다고 되게 반갑네요.”

“.....”

“안경 쓴 것도 멋집니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봐서 그런가, 그가 부쩍 살갑다. 아직도 마음속에 회식 때문에 꽁한 건 남아있지만, 그의 살가움에 괜한 용기가 난다.

 

“밥 사주세요. 주말에도 일하는 사원 불쌍하지도 않아요?”

“나도 밥 먹으려던 참인데 잘됐네요.”

 

그가 손에 들린 봉투를 흔들어 보인다.

 

*

 

근사한 걸 사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편의점 음식을 사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흔드는 봉투 안을 들여다보니 편의점 도시락이 들어있다. 의외다. 이런 걸로 밥을 때우다니. 유기농 채소에 한우만 먹게 생겨선.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삼각김밥을 뜯었다. 그도 전자렌지에서 막 데워온 도시락을 열고는 밥을 먹기 시작한다.

 

“왜 이런 거 드세요?”

“요리할 줄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지난번 우리 집에 왔을 때 엄마가 해준 반찬은 맛있게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좀 싸달라고 할까. 아, 아니지 내가 왜 이 사람 밥을 신경 써.

 

컵라면을 호로록 먹다 그의 도시락에 있는 계란말이를 낼름 집어먹었다. 전정국 팀장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박지민씨도 도시락을 사지 왜 남의 걸 뺏어 먹습니까.”

“계란말이만 먹고 싶어서 하나 먹은 건데 그게 그렇게 아까우세요?”

“손버릇이 나쁜가 봅니다. 슬리퍼도 마음대로 가져가더니.”

“아이쿠,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데 손버릇까지 나쁜 부하직원 때문에 힘드시겠어요.”

 

웃자고 한 장난이었는데 전정국 팀장의 표정이 굳는다. 내가 뭐 말실수했나?

 

“그땐 미안했습니다.”

“.....”

“박지민씨 그런 사람 아닌 거 아는데, 내가 경솔했어요.”

“괜찮아요, 저 신경 안 써요.”

 

편했던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마시며 풀 얘기를 맨정신에 하려니 민망하기도 하고.

 

“그날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실 줄 몰라서 놀랐어요.”

“그런 자리인지 알았다면 안 보냈을 겁니다.”

“알아요.”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뭐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라면 식겠습니다. 먹어요, 어서.”

“다음엔 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컵라면에 삼각김밥 너무 시시하다.”

“그래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전정국 팀장과 진지해지는 분위기는 유독 견디기 힘들다. 이 역시 모르겠다. 이 사람에겐 원인도, 이유도, 이름도 모르는 감정을 자주 느낀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카페로, 그는 집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나를 돕겠다는 걸 겨우 만류했다. 추리닝 바람으로 영업을 다닐 생각이냐며 괜히 더 타박했다.

 

손에 든 샘플을 모두 해결하고 양손 가볍게 회사로 향했다.

 

[이제 회사로 들어가요. 카페 몇 곳을 좀 헤매느라 늦었어요.] 17:14

[괜찮습니다. 과일 손질 하고 있으니 천천히 오세요.] 17:17

[요리 못하시다면서 과일 깎을 줄 아세요?] 17:18

[네.] 17:18

 

뭐야, 단답의 문자가 너무나 그다워 픽 웃음이 난다. 회사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레시피 개발을 내가 좋아했던가? 이 역시 모르는 감정이지만 그냥 기분이 좋다. 나도 워커홀릭인 건가.

 

*

 

온 사무실 전체가 불이 꺼져있다. 하긴, 누가 토요일 여섯 시까지 근무를 하겠냐마는. 화장실 옆 가장 안쪽 창고로 쓰이던 곳을 R&D실로 개조했기에 건물의 맨 끄트머리에서만 아주 희미하게 불이 새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정국 팀장이 사과를 깎다 말고 나를 쳐다본다.

 

“고생했어요.”

“아뇨, 뭘….”

 

그가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놓은 과일들을 봤다. 키위, 자몽, 수박을 비롯해 여름에 잘 볼 수 없는 딸기까지 먹기 좋게 손질되어 있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사과와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잘하셨다.”

“.....”

“히익, 근데 사과가 그게 뭐예요? 껍질에 살이 그렇게 많이 붙어있으면 어떡해요, 아깝게.”

 

그에게서 사과와 칼을 뺏어 들었다. 사실 나도 잘하는 건 아니지만 엄마를 도와 몇 번 깎아본 적은 있었다.

 

“잘 보세요. 이렇게, 살짝만 칼집을 내서, 얇게. 엄지로 사과를 지탱하면서….”

 

엄마가 보면 이게 뭐냐고 욕할 모양이지만 그의 실력보단 훨씬 나았다.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니 전정국 팀장이 살짝 웃는다. 또 이 감정이다. 편안한 것 같으면서도 긴장되고, 장난을 치고 싶기도 하면서 또 진솔한 얘기도 하고 싶은 이 이상한 감정.

 

괜한 말로 분위기를 굳게 할 것 같아 열심히 과일만 깎았다. 파인애플까지 손질을 마치고 미리 뽑아둔 레시피 대로 음료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탄산수와 시럽을 넣어 에이드를 만들기도 하고, 우유와 으깬 과일을 섞어 라떼를 만들기도 했다. 오늘은 총 열 개의 과일 음료 레시피를 확정 지어야 한다.

 

“라떼는 딸기, 멜론, 바나나, 파인애플 정도만 괜찮은 것 같아요. 에이드는 청포도, 자몽, 딸기, 키위? 어떠세요?”

“바나나는 음료를 만들어도 색이 변하니 미관상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파인애플도 글쎄요...”

 

나와 그의 의견이 조금 달랐다. 나는 어차피 빙수나 생과일주스를 할 거면 과일은 상시 준비되어 있으니 메뉴의 폭을 넓히자는 의견이었고, 그는 커피에 주력하는 게 컨셉과 맞으니 과일 음료는 사이드로서의 역할 정도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나는 레시피를 조금 더 특화해 우리만의 과일 음료를 만들고 싶었고 그는 다른 곳에서 하는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흐음. 그래도 레시피는 개발해 놓고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은가.

 

“이 정도 레시피면 훌륭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택하죠,”

“남들 다 하는 거잖아요. 물론 커피 연구소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과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이 친구여서 우리 카페에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커피는 당연하고, 다른 음료들까지 개성있으면 좋잖아요.”

“우리의 시그니처 음료는 커피입니다. 다양한 음료가 아닌, 커피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진 컨셉입니다. 굳이 활용 안 될 레시피 만드느라 고생할 필요 있나요.”

 

전정국 팀장의 말이 맞았다. 컨셉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어지러워진 테이블을 치웠다.

 

“박지민씨는 열정도 많고,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감도 있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웬 칭찬인가 싶어 테이블을 정리하다 말고 전정국 팀장을 쳐다봤다.

 

“별 뜻 없습니다. 예전부터 해주고 싶던 말이었어요.”

 

전정국 팀장이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곤 일회용 컵들을 정리한다. 조금 솔직하고 싶다. 나는 찝찝한 걸 싫어한다.

 

“팀장님.”

“네.”

“저는 뒤끝이 꽤 길어요.”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저 우리 브랜드에 자부심 없는 거 아니에요.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습니다.”

 

주차장에서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술이나 따르며 계약을 따내는 편법을 쓰려던 게 절대 아니었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보였겠지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압니다. 그땐 제가 화나서 박지민씨 배려하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건 그냥…”

“왜요?”

 

그의 말을 잘랐다. 왜, 왜요?

 

“…….”

“왜 화나셨어요?”

“…….”

“생각했어요, 내내. 왜 나에게 괜찮냐고 먼저 묻지 않았을까.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뻔히 아실 텐데 왜 화를 낼까. 이경식 차장에게 화를 내야지 왜 나한테 화를 낼까 하는 거요.”

“…….”

“왜 화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 이유는 찾으셨나요?”

“네.”

 

의외의 대답이다. 왜 화를 냈는지 이유를 찾았다니.

 

“이유가 뭐였어요?”

“박지민씨가 몰라도 될 이유입니다.”

“내가 당사자인데 왜 몰라요, 말해주세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제 익숙해진 것도 같다. 저 눈에. 나도 그를 지지 않고 쳐다봤다. 전정국 팀장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다 이내 관둔다. 에이 답답한 사람. 내가 한숨을 푹 내쉬니 그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곤 웃는다.

 

“한숨까지 쉴 일입니까.”

“궁금하잖아요. 말 안 해줄 거면 말아요, 됐어, 됐어요.”

“이경식 차장님은 회사에 계속 있을 겁니다.”

“네? 갑자기 웬 이경식 차장님….”

“제가 어느 정도의 조치는 취하겠지만, 부서를 당장 이동하거나, 이런 일로 해고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예상하고 있었어요,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알면서 묵인했겠죠.”

“앞으로 계속 봐야 할 텐데, 불편하면 말해요. 걱정됩니다.”

“화는 왜 내고, 걱정은 왜 하세요. 제가 팀장님보다 두 살 많거든요.”

 

손으로 브이 표시를 만들어 가며 흔들었다. ‘무려 두 살. 두 살이 많다고요.’ 미묘해진 분위기에 또 어색해지지 않으려 부산스럽게 R&D실을 돌아다니며 정리했다.

 

“그러게요, 화는 왜 나고 걱정은 왜 되는지.”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들릴락 말락 한목소리로 말한다. 내게 직접 하고 싶은 말은 아닌 것 같아 못 들은 척했다. 마음이 다시 이상하다. 원인도 이유도 이름도 모를 그 감정. 이상하다. 이상해.

 

어느 정도 정리가 마무리됐다. 마지막에 썼던 휘핑기만 씻으면 초과 근무도 끝이다. 전정국 팀장이 내가 손으로 정리한 레시피를 쭉 훑는다. 나는 휘핑기를 들어 싱크대로 가져갔다. 뚜껑을 열고 작은 가스를 빼내야 하는데 뚜껑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거 왜 이래 가스가 남았나. 내가 잘못 닫았나.

 

괜히 휘핑기를 두어번 더 흔들고 안에 있는 생크림도 세면대로 쭉 짜봤다. 멀쩡한데 왜 뚜껑이 안 열리지. 전정국 팀장에게 열어 달라고 하는 건 조금 자존심이 상해 있는 힘껏 뚜껑을 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휘핑 가스통이 빠지면서 안에 있는 생크림이 옷에 튀었다. 으, 제길. 조심했어야 하는데. 다행히 큰 폭발은 아니었지만 옷이 크림으로 범벅 된 게 문제였다.

 

“괜찮습니까?”

 

레시피를 검토하던 전정국 팀장이 빠르게 다가온다. 싱크대 물을 틀어 셔츠 앞에 크림이 묻은 부분에 물을 묻혔다. 셔츠가 젖긴 해도 크림 때문에 미끈미끈 한 건 더 싫다.

 

셔츠가 물을 먹는 범위가 넓어지며 반 정도가 젖어버렸다. 저번엔 바지가 젖은 꼴로 있었는데, 오늘은 셔츠가 젖었다. 가지가지 하네 박지민.

 

그가 내 셔츠를 쳐다본다. 걱정되는 얼굴인지 얼빠진 표정인진 몰라도 셔츠에 계속 시선을 두기에 너무 심하게 젖었나 싶어 고개를 숙여 상태를 확인했다. 파스텔 톤의 셔츠가 젖어 안의 유두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씨, 누가 보면 내 가슴 자랑하는 줄 알겠네.


“뭐, 뭘 계속 보세요.”

“아, 여, 여기.”

 

당황한 전정국 팀장이 옆에 놓인 키친타올을 뜯어서 내게 건넨다. 슥슥 두어번 가슴을 문질렀다. 이거 어떻게 말리지...

 

“여기에도.”

 

그가 한 발짝 다가와 얼굴에 손을 올린다. 크림이 얼굴에도 튀었나 보다. 큰 손이 왼쪽 볼을 감싸고 살살 눈가를 쓴다.

 

“아..”

 

다 닦았을 것 같은데 그의 손은 여전히 볼에 있다. 뭐지, 왜 이렇게 가깝지. 몸을 뒤로 빼자 이번엔 다른 손으로 손목을 제 쪽으로 잡아 끈다.

 

차 안에서처럼, 전정국 팀장의 집 침대 위에서처럼 우리의 거리가 가깝다.

 

“여기에도요.”

 

이번엔 입술이다. 입가를 천천히 문지르니 기름진 크림이 고소한 우유 향을 내며 닦였다. 역시나 입술에 묻은 크림도 다 닦은 것 같은데 우리의 사이는 여전히 가깝다.

 

“박지민씨가 걱정됩니다.”

“..뭐가요.”

 

내 손목을 여전히 꽉 쥐고, 왼쪽 볼을 감싸고 있는 손도 그대로다.

 

“또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 것 같아서요.”

“그거야 제가 조심하면….”

“화도 납니다.”

“…이유가 뭔데요.”

 

이유가 알고 싶다. 왜 화가 났는지, 왜 걱정이 됐는지, 왜 나를 가끔씩 빤히 쳐다보는지, 왜 지금은 그런 표정인지.

 

“이유가 궁금합니까.”

“…네.”

 

아주 솔직히, 사실은, 이유를 저도 알 것 같아요.

 

“이유 알려줘도 됩니까.”

“…네.”

 

그 이유를 알고 나면, 어쩌면 후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지금은 알고 싶어.

 

그가 한 발 더 다가온다. 내게 어떻게 이유를 설명할지, 다음에 그가 내게 할 행동이 뭔지 알고 있다. 여기서 내가 멀어지면 그는 그만둘 사람이다. 나 또한 어설픈 농담으로 어색하지 않게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유도, 이름도 모르는 감정이 다시 튀어나왔다. 역시나 모르겠다. 여전히 내 볼을 감싼 그의 손은 따듯하고, 우리 거리는 아주 가깝고, 나는 심장이 뛰고…. 그 뿐이다.

 

잡은 손목을 힘주어 끌어당겨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다. 내 젖은 셔츠가 그의 맞닿은 가슴팍도 적신다. 손목을 잡던 손은 어느새 허리에 둘려있다. 그는 내가 거절할 기회를 주는 듯 몇 초간 나와 눈을 맞춘다. 가까이서 보는 전정국 팀장의 얼굴이 낯설다. 지금이라도 뿌리칠까, 우리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렇게 될 거란 걸 예상했던가? 아니다. 전혀 몰랐던 일이다.

 

“나는 박지민씨 생각 많이 합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팀장님도 제 생각하시는구나. 기분 좋아요.”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도 그를 많이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와 밀착돼있던 순간이 가끔 떠올랐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훑는다. 노골적으로 다음의 행위를 알려주는 행동에도 가만히 있었다. 닫힌 입 사이를 살짝 벌리곤 그대로 내 턱을 쥔다. 살짝 입술이 벌어졌다. 망설이는 듯한 그의 눈에 이번엔 내가 전정국 팀장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허리를 감싸 안는 순간 그의 입술이 뜨겁게 부딪혀 왔다.

 

곧장 입 안을 파고드는 뜨거운 혀가 나의 것과 뒤엉킨다. 그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치니 이내 차가운 벽에 등이 닿는다. 그는 나를 품 안에 가두고 정신없이 입을 맞춘다. 이 키스의 의미를 모르겠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와 키스하고 싶었는지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우리는 고개를 몇 번이나 더 비틀고,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에 흥건히 젖고 나서야 입술을 떼었다. 숨이 찬 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니 전정국 팀장이 허리에 둘렀던 손을 등으로 가져가 어린아이 달래듯 등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카페라떼 대신 히비스커스 티를 사줬던 이유,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온 이유, 내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듯 나를 빤히 쳐다봤던 이유, 엄마의 문자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데리러 온 이유, 엉망이 된 내 모습에 위로보다 화를 냈던 이유….

 

그가 내게 보였던 수많은 행동의 이유들을, 

그 이유를 한 번의 입맞춤으로 전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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