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이 넘어가자 모든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치타우리에게 조종받던 것과는 다른 유리감이 몸에 흘렀다. 마치... 자신만이 세계와 떨어져있는 느낌. 그에게 일어난 있을 수 없는 일을 세계가 알아채고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이질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로키는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피부 아래로 시리게 핏줄이 비치는 모습이 기억과 다르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 기억마저 신용할 수 없어졌다.


‘....’


삼백 마흔 다섯번째. 로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짜피 반복되어 돌아갈 일이었다. 치타우리나 타노스는 이제 로키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셉터는 존재했으나 기묘하게도 그들과의 연결은 끊어져 있었다. 반복되는 순간부터 죽. 오로지 그가 포탈을 열었을 때에만 재차 위용을 드러냈다. 그들은 로키가 포탈을 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리고 치타우리와 상관없이 로키는 쉴드의 기지 안에서 또다시 눈을 떴다. 그의 노력은 완벽하게 무의미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게 언제였더라. 로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 삼백 번이 넘어갔을 때였다. 삼백 번 하고도 열두 번째로 포털 앞에 돌아왔을 때, 로키는 셉터를 미드가르드인들에게 내던졌다. 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 택했다. 총을 든 요원 여럿이 다가와 그를 포박하는데도 저항없이 따랐다. 그러는 동안 테서렉트의 에너지가 차츰 불안정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이 무너져 주저앉았다. 요원과 연구원들이 황급히 대피하며 로키를 질질 끌고갔다. 이대로 나를 잔해 아래에 파묻히게 두고가도 상관없을텐데. 로키는 생각했다. 그러나 미드가르드인들은 완강하게 로키를 챙겼다. 감정적인 이유가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로키는 잔뜩 굳은 얼굴의 닉 퓨리와 클린트-삼백 번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름을 알게 되었다-를 구경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뒤 그들은 로키를 심문실 같은 공간에 집어넣었다. 셉터는 따로 연구를 위해 가져갔다. 별다른 결과를 얻지는 못할 테지. 로키는 지금까지 보았던 미드가르드인의 기술을 떠올렸다. 조용한 공간 안, 로키는 그가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모조리 죽였던 요원 콜슨이 질문을 던지는 것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했다. 테서렉트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려던 시도가 우주 저편의 어떤 미친 거인과 그 무리를 자극했다던가, 자신이 그들을 이끌고 이곳을 침략할거라는 이야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포탈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로키는 시선을 비껴가게 해 요원의 얼굴 너머 흰 벽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들과의 연결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도.

미드가르드 침략을 반복하면서, 로키는 이 회귀가 치타우리 혹은 타노스와 관련된 일이라 가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기에 어렴풋한 지레 짐작이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그가 인피니티 스톤이라도 이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백 번이 넘는 침략 중 고작 세 번 밖에 얻지 못한 성공도 그에게 끝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두 번의 성공 뒤에 로키는 깨달았다. 이것은 치타우리나 타노스의 계략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저주였다. 어떻게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첫 번째 성공에서 미드가르드의 반이 불타고 시체로 뒤덮였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로키가 비틀거렸다. 걸음을 옮기는 단순한 동작마저 힘에 부쳤다. 간신히 움직인 발 아래, 그가 죽인 인간의 뻣뻣하게 굳은 손이 느껴졌다. 제기랄. 로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전장이었고 폐허였다. 이럴 수 없다며 울부짖는 형제의 목소리가 아득하기만 했다. 아니 저것이 실제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환청인지도 모르지. 토르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렸다. 로키는 성공만을 위해 계획을 짰고 실행했다. 하나씩 요소를 바꿔가며 쉬지않고 반복을 이어갔다. 오로지 끝내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이제야. 그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불타는 대지 위로 포탈이 한층 크게 아가리를 벌렸고 타노스가 미드가르드에 발을 내딛었다. 몸이 떨렸다. 허덕이는 숨을 바로잡으려 할 때, 익숙한 파동이 몸을 타고 흘렀다. 로키는 아주 오랜만에 당황하고야 말았다. 아니 당황보다 경악에 가까웠다. 어째서? 나는 성공했을텐데? 허나 의문이 형태를 띄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 그는 사라졌다. 모든 일의 시작인 지하의 포탈 앞으로.

두 번째 성공을 위해 로키는 이를 더욱 악물었다. 이럴 순 없었다.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번 성공하자 그 다음은 보다 쉬웠다. 이백 아흔 일곱번째 반복에서 로키는 또다시 성공했다. 피와 시체의 냄새로 토기가 치밀어오르는 전장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기어코 나타난 치타우리의 수장에게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순환을 끝내라 말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제야 로키는 깨달았다.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않고 그 자리에 풀썩 무릎꿇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것도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는. 로키는 손끝이 상하도록 땅을 거칠게 움켜쥐었다가 내려치기를 반복했다. 미드가르드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단지, 이 저주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지겹게 이어지는 시간을 끊어내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입술을 피나게 깨물고 있는데, 팔에 온기가 느껴졌다.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자 먼지와 피로 엉망이 된 토르가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토르는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으나 어딘가 슬퍼보이기도 했다. 토르. 로키는 아주, 정말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로키의 시도 속에서 미드가르드를 지키려는 필멸자는 모두 한 번 이상 죽음을 맞이했다. 녹색 괴물도 예외없었다. 오로지 토르만이 논외였다. 애초에 모든 시작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로키는 무뎌진 기억을 긁어모았다. 멀거니 토르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로키.



'로키. 그만하거라'


그리고 로키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직전과 비슷한 단계를 밟아 미드가르드를 다시 불바다로 만들고 타노스를 초대했지만 역시 끝은 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지막 순간에 토르가 로키에게 말을 걸었다. 로키.로키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인내했다.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다음. 이백 아흔 아홉번째 시도에서 로키는 익숙한 전개를 선택했다. 호크아이를 세뇌해 스타크 타워에 포탈을 여는 것을. 이 끝은 늘 실패였다. 아무리 변수를 바꾸어보아도 절대 성공하지 않았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 고르다니, 바보같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포탈 앞에서 눈을 뜨는 순간 손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토르 탓이었다. 마지막에 토르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래서.... 

멍청하고 어리석은 제 형. 토르가 로키에게 먼저 찾아오는 건 로키가 이렇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사흘째 되는 날 토르가 퀸젯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로키를 본다. 늘 그랬고 그 외에는 없었다. 이게 아니면 토르와 로키가 마주 보는 것은 마지막 날 정도였다.혹은 만나지도 못한 채 언급만을 듣는 정도가 끝이었다. 로키는 정해진 대로 움직였다. 독일에 갔고, 드러내어 인간들을 무릎꿇렸고...


'번개가 무서운가?'


익숙한 질문을 들으며 로키는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었다.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가 그를 정신 나간 괴생명체를 바라보듯 보았지만 뭐 어떤가. 자신이 진짜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삼백번이 다 되어 가도록 같은 시간안에 갇혀있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진작에 죽어 혼수상태에서 죽 환각을 보는 것일지도 모르지. 로키는 까슬거리는 목을 긁어 말을 토했다. 


'아니. 늘 그립지'



웃음 속에 수많은 감정이 스며있었다. 로키는 속삭였다. 곧 입구가 열렸고, 토르가 그를 잡아끌어 날아갔고, 그는 바닥에 쳐박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각본 대로야. 그게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르가 가라앉은 눈으로 로키를 꾸짖는다. 로키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보고싶었어 형...'


빌어먹게 나약한 소리였다. 불안정하게 덜덜 떨리는 음성에 굳어있던 토르의 낯에 걱정이 스민다. 바보같아.. 정말로. 로키는 턱 막히는 숨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토르가 정해진 대사를 읊을 차례다. 로키는 속으로 토르의 대사를 생각했다. 토르가 말할 때 입을 맞춰 그의 목소리를 겹치게 하면 어떨까. 놀랄까? 사사로운 장난은 그만두라며 화를 낼까? 토르의 대사가 더 추가되겠군. 텅 빈 눈으로 토르를 응시했다. 어서 말해, 토르. 네가 죽은 줄 알았다....



'로키. 그만두거라'
'......뭐?'
'다 그만둬. 집으로 돌아가자. 함께'



이건... 지금까지는 없던 일인데. 로키가 눈을 깜박였다. 비통한 얼굴을 한 토르가 그를 끌어안는다. 로키는 재차 눈을 깜박였다.



'네가 죽은 게 아니라 다행이야. 얼마나 걱정하고 슬퍼했는지 아느냐?'
'......'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고동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듯 웅웅거린다. 로키는 당황으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토르가 한번 더 말했다. 로키. 그만둬.


'.....뭐를'


심장은 이제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마냥 널을 뛰었다. 로키는 요동치는 감정과 생각을 여과하는 것도 놓치고 말았다. 토르를 노려봤다. 내가 무엇을 그만둬야하지?



'내가, 뭘 그만두어야 하냐고 물었어'
'동생아, 테서렉트를 포기하고-'
'누가 그딴 걸 원해서 이러는 줄 알아???'


날카롭게 벼려진 말이 가시처럼 솟아오른다. 이 말들이 상처주려는 대상은 자신일까, 토르일까.



'난 그딴 건 애초에 원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왜-'
'알아서 뭐하게? 난 네 동생도 뭣도 아냐. 그렇지 않아? 고작 서리거인 하나를 찾으려 아스가르드의 후계자가 미드가르드까지 납시다니-'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너는 내 동생이다'



로키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아끼고 소리치지 않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는 또다시 시작으로 돌아갈 것이고 토르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눈을 내려 토르를 피했다. 대화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로키의 행동에 토르가 어깨를 세게 잡아 흔들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이언맨이 토르를 밀쳐 날아갔다. 로키는 그들이 싸움을 멈추고 다시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렸다...



폭발로 헬리케리어가 흔들렸다. 로키는 숨이 꺼져가는 요원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곧 그가 언제나 남기는 말이 날아올 터이다.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며 요원이 말했다.



'당신은 질 거야. 당신에게는 신념이 없거든'



그래. 이번에는 지겠지. 나도 알아. 로키는 들리지않게 긍정했다. 요원의 눈을 깜빡이는 행동이 점차 느려졌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의 손가락이 꿈틀댔다. 로키는 손짓으로 근처의 무기를 멀리 치웠다. 반복 속에서 고통이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유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말을 툭 던져주었다. 변덕이었다.


'나에게도 신념 쯤은 있어'


요원의 반쯤 감겼던 눈이 떠졌다. 의아함이 담긴 시선에 로키는 다시 말을 던졌다. 괜한 짓을 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냥... 입이 움직였다.


'.....무슨...?'
'...세계를 부수겠다는 신념'
'이 세계를?'
'아니. 나의 세계를'


요원의 눈이 흐려졌다. 이해하지 못할 테지. 로키는 입술을 깨물고 죽어가는 인간을 내려다보다, 그의 심장이 완전히 멎지 않게 마법을 걸었다. 운이 좋으면 살겠지. 어짜피 시간이 돌아가면 다시 죽겠지만. 로키가 발을 돌렸다.


그 뒤로는 똑같았다. 헐크에게 붙잡혀 바닥과 조우한 다음 입에 재갈이 물렸다. 어째서 콜슨을 죽이지 않았지? 아이언맨이 물었으나 무시했다. 동생아.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토르의 말도 무시했다. 토르와 나란히 서 테서렉트가 담긴 함을 들었고- 



삼백번째. 로키는 새로운 가설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눈을 뜨자마자 인간들을 위협했다. 그들 중 하나가 총을 쏘았다. 총알에 마법을 걸어 강화한 뒤 정확하게 미간을 파고들도록 만들었다. 눈 앞이 점멸했다....



자살도 답이 되지는 않는군. 삼백하고도 아홉 번째. 로키는 냉정히 생각했다. 총, 화살, 칼... 요원들의 다양한 무기로 죽음을 택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죽자마자 다시 같은 자리에서 눈을 뜨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자살의 여파인지 끔찍할 정도의 두통이 따라붙었다. 로키는 눈을 찌푸렸다. 몸이 흔들렸다. 죽음이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로키는 이 우스운 반복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누구의 의도이든 그에 따라 놀아나진 않을 것이었다. 더욱이, 로키는 지쳐있었다. 그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로키가 잠시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잔뜩 경계태세를 갖춘 쉴드 요원들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총으로 할까. 로키는 서늘해 보이는 총구를 응시했다. 그러다 손에 쥔 셉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군. 이걸로는 아직 시도해 보지 않았네. 로키는 셉터를 들어올렸다. '무기를 내려놓게....' 한번 더 경고가 날아왔으나 알 바 아니었다. 로키는 그대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키! 로키!! 로키!!!'

'.....으윽'


머리가 깨질것 같이 아팠다. 두통이 한층 심했다. 감은 눈 안쪽으로 번쩍이며 아픔이 흰 불빛이 되어 튀어다녔다. 불타오르는 목의 통증도 덤이었다. 간신히 끌어올린 의식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마냥 가물거렸다. 허억. 로키는 내내 숨을 참았다가 토해내는 사람처럼 거칠게 호흡하며 눈을 떴다. 눈 앞이 아주 밝았고, 그리고.. 누가 자신을 안아 기대게 하고 있었다. 그제야 로키는 자신의 상체가 조금 들어올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깨와 허리를 옭아맨 단단한 팔의 존재도.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로키가 의식을 차린 것에 놀랐는지 그를 붙잡은 이의 근육이 긴장으로 굳었다. 로키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다 천천히 눈알을 돌렸다.


'토르...?'
'로키'


토르가 있었다. 놀라 이름을 무심코 입에 담고 말았다.목을 찌른 게 허튼 짓은 아니었는지 단어 하나를 말하는 것에도 상상 이상의 고통이 함께했다. 입술을 짓씹고 고개를 돌려 아픔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토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토르의 손가락이 뺨을 쓸었다. 로키는 이게 자신의 꿈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삼백 번이 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꿈을 꿈 적은 없었지만. 



'네가.....왜 여기에...어떻게...'
'로키, 어찌... 어찌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
'그런 짓..?'
'목을! 스스로 찔렀다고 들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였지?'

'아'



로키가 허무하게 실소했다. 아직 다음 루프로 넘어가지 않았군. 왜지? 충분히 죽을 만큼 깊게 박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셉터는 계약의 증거라 날 죽음으로 이끌어주지는 않는 건가. 곱씹으며 입을 다무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토르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네가 심연에 떨어지고 난 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간신히 슬픔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헤임달이 갑자기 네가 보인다고,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지.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느냐?!?'
'....슬펐어?'
'당연한 소리 하지 말거라'
'...그래...'


이건 내가 아는 대사로군. 로키는 불쑥 말했다.


'다 들었지? 난 네 동생이 아냐'
'아니. 너는 내 동생이다'
'그래...'



또 아는 대답이 나오자 로키는 고개를 숙였다.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하.. 하하하하. 실소는 점점 커져 비탄섞인 웃음이 되었다. 하지만 상처가 제대로 웃는 것을 방해하는 바람에 마음처럼 크게 웃지는 못했다. 거칠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토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본다. 로키는 숨을 가다듬은 다음 토르를 마주보았다. 일렁이는 파란 눈 안에 자신이 비쳤다. 순간 로키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토르. 나를 사랑해?'
'당연하다'
'그럼 날 죽여봐'
'로키!!!!'



토르가 소리를 질렀다. 로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라면 날 단숨에 죽일 수 있겠지? 묠니르를 써. 아니면 그냥 목을 조르는 것도 괜찮겠네. 이래봬도 상처가 꽤나 심각해서 금세 끝날 거야'
'무슨... 어째서'
'끝내고 싶으니까'


단호하게 말하니 토르의 눈이 요동쳤다. 로키를 좀 더 꽉 끌어안은 토르가 으르렁거렸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네게는 치료사가 필요하다'
'집? 그게 어디지? 오, 혹시 아스가르드? 아니. 나는 못 가'
'로키!'
'삼백 번이 넘게 실패했고 딱 세 번 성공했지. 그동안 아스가르드로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했어. 왜일까? 토르. 왜일것같아?'
'로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 제정신이 아니지.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없어. 불가능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날 죽여 토르. 그게 네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야'



그를 완전히 품에 파묻는 바람에 이제 로키는 토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머리 위로 내려앉는 토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동생아. 제발 그러지말거라...'
'왜? 네가 날 죽이는 게 어쩌면 답일지도 몰라'
'답이라니? 무슨 소리냐'
'그걸 알아서 뭐하게? 넌 아무것도 못해. 전능한 토르. 넌 아무것도 못한다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날 죽이는거야. 그것이 정답이길 빌면서... 그래서 내 세계를 끝내는거지'
'로키, 제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감상적이기만...'


로키는 혀를 비비 꼬아 말을 내던졌다. 온갖 것이 뒤섞여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자신을 보고 지금 토르는 무어라 생각하고 있을까. 정신이 혼탁해 헛소리를 하고 있다 여길까.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손끝이 부들거렸다. 지금이 며칠째지. 토르가 있는 걸 보아서는 꽤나 지난게 분명했다. 언제나 토르는 사흘이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으니. 음. 그렇다는 것은 미드가르드인들이 날 수습했다는 건가? 정말이지- 쓸데없이 감성적인 종족이군. 뭐.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시간축이 뒤틀리고 돌아갈 테니까. 당장 토르가 그를 아스가르드로 데려가려해도 돌아갈 것이다. 로키는 루프 안에서 죽 미드가르드에만 존재했다.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아스가르드 또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려할 때, 포탈을 열어 침략에 성공할 때, 로키는 되돌아갔다. 

침략에 실패해도, 덤비는 미드가르드인-어벤져스-를 모조리 죽여도, 죽이지 않아도 되돌아갔다. 아무리 바꾸어도 끝은 같았다. 거기다 이제는 하나를 더 추가해야했다. 그가 죽어도 되돌아갔다. 


'.....'


토르는 한참이나 로키를 놓아주지 않았다. 말 없이 끌어안은 자세를 고수하고만 있다. 이건... 조금 불편하네. 빨리 다음 번으로 가는 게 낫겠어. 로키는 손톱을 세워서 목을 긁어 상처를 파헤쳤다. 끔찍한 아픔이 뒤따랐다. 잠잠해진 듯하던 두통도 다시 울렸다. 토르가 당황하며 로키의 손을 잡아챘다. 따뜻한 온기가 양 손을 감쌌다. 토르의 손. 로키는 이런 상황에 고작 손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에 반응하는 자신을 깨닫고 경멸했다.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떨렸다. 토르가 애원했다.



'로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거라. 부탁이다'
'아니. 기억도 못할 사람한테 말해봤자야'
'아까부터 너는 자꾸만- 좋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걸 말해주렴. 너를 위해 내가 어찌해야 하지? 필요한 것이 있느냐?'
'날 위해? 그럼 나를 죽이라니까. 죽여보고 아니면 다음 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또 죽여보고...'
'로키....'



일그러진 얼굴로 토르가 그를 내려다본다. 토르의 가슴에 볼이 눌렸다. 갑옷 너머 심장소리가 들린다. 두근대는 박동이 평소보다 빨랐다. 아니, 평소가 아니지. 로키는 힘없이 자조했다. 2년 전? 그보다 더 전? 아스가르드에 있던 나날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지금 자신에게 남은 건 외계 종족에게 받은 고난의 흔적과 알 수 없는 루프 뿐이었다. 그것도 삼백 번이 넘는 반복 속에 흐려지고 있다. 끔찍한 고통을 약속하던 치타우리의 말이 우스웠다. 차라리 고통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 죽을 수 있다면, 이 저주를 끝낼 수 있다면.

로키는 자신을 끌어안은 토르를 올려보았다. 목에 느겨지는 아픔과 찝찝한 감각이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토르의 시선이 목을 훑는다. 걱정어린 눈동자와 흔들리는 동공, 이에 어린 분명한 애정. 

정말 우습게도. 삼백 번이 넘도록 그는 한결같았다. 걱정했다 말하고, 아직도 자신이 그의 동생이라 말하고, 슬퍼했다 말하고. 토르만이, 언제나 자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약해진 마음에 금이 갔다. 터진 둑을 막을 수 없듯 흘러넘친 감정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로키는 눈꺼풀이 재차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감상적이라고 남 말할 처지가 아니군...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선을 그리며 눈물이 미끄러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로키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리고... 바보같이..



'......그럼, 나를 찾아줘'
'로키...?'
'..왜 항상 모든 게 끝날 즈음이 되어서야 오는거야? 좀 더 일찍 올 수는 없어?....도와주고 싶으면 그래 봐'



눈물이 고요하게, 그러나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토르의 거친 손이 눈물을 닦아냈으나 나오는 것이 더 많아 의미는 없었다.



'나를 찾아서... 도와줘. 나를... 살려줘. 형'



앞이 부옇게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숨이 가빠 헐떡이며 로키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진심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끔찍한 반복을 끊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아스가르드와 토르가 안전할 수 있다면. 줄곧 생각하던 본심을 털어놓으며 로키는 의식이 멍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게 무슨 징조인지도 아주 잘 알았다.


'나를 사랑한다면...제발'
'약속하마.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리하겠다. 그러니 일단 함께 집으로-'

'거짓말. 기억 못할 거면서'


피식 웃고, 로키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폭죽을 넣고 흔드는 것 같은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정신이 흐려지고 손과 팔에 힘이 빠져갔다. 로키? 로키!! 안 된다! 귀 바로 옆에서 소리지르는 목소리도 어딘가 아득했다. 눈꼬리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로키는 가라앉는 몸을 느꼈다. 그리고 익숙한, 익숙하다 못해 저주스러운 힘의 파동이 그를 감쌌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었다. 두통은 여전했다.



'Sir. 무기를 내려놓게'


또다시. 로키가 손에 들린 셉터를 세게 쥐었다. 또다시, 이번에도. 도망칠 곳은 없었다. 모든 게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머리가 끔찍하게 아프다는 거였다. 상처입었을 목은 따끔거림도 없이 멀쩡했다. 삼백하고도 열 한 번째. 자. 이번에는 뭘 시도해볼까. 로키가 눈을 감고 새로운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미드가르드를 파괴하려 시도할 적마다 포탈을 여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인간, 셀빙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그는 로키가 이름을 밝힌 뒤에나 반응했다. 무조건이었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로키? 토르의 동생? 

이것이 정해진 값이었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이 로키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말 놀랍군. 말 대로야'



말 대로? 로키는 황급히 눈을 떴다. 약간 어지러운 시야에 총을 들고 그를 견제하는 쉴드 직원들과 닉 퓨리, 호크아이가 들어왔고, 무언가 도구를 든 에릭 셀빙이 보였고,



'그래. 내가 말한 대로군'



있을 리 없는 인물이 서 있었다. 로키가 눈을 깜빡였다. 헛것을 보는 것일까. 에릭 곁에 서있던 그가 로키를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도와주러 왔다. 동생아'



로키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수 십, 수 백개의 물음이 떠올랐지만 나오는 말은 딱 하나에 불과했다. 형. 그의 형, 그의 토르가 로키에게 다가왔다. 여즉 무릎을 대고 있는 그를 잡아 일으킨다. 어깨를 꽉 잡는다. 품 안으로 끌어와 안는다.




'널 도우러 왔다'



그게 삼백 열 한 번째의 처음이었다. 뭔가 될 줄 알았던 희망이 보잘 것 없이 짓밟히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이게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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