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 뚝, 진홍색 혈액이 우드 소재의 바닥 위로 수없이 방울져 떨어졌다. 뜨끈하고 비릿한 열기와 고동치는 생명력까지 품은 그것은 바닥뿐만 아니라 입술에도 흥건했다. 진기는 정신없이 입술과 목으로 넘어오는 생명의 액체를 받아넘겼다. 미처 삼키지 못한 뜨거운 것은 발등 위로까지 뚝뚝 떨어져 고였다. 넘치는 피 속에서 그가 느낀 것은 단 하나. 미칠 듯한 갈구. 더, 더. 조금 더! 목마른 노루가 우물에 코를 박듯, 배고픈 사자가 초식동물의 척추에 앞니를 박듯, 굶주린 아이가 어미의 가슴에 매달리듯, 진기는 정신없이 태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는 진기의 어깨를 매만져 주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굶으랬어. 이렇게 잘 먹을 거면서. 



  “…하아…….”



  혀끝에 느껴지는 진한 피의 맛은 꿀보다도 더 달았다. 항상 몽롱했던 머리가 맑게 깨면서 시야를 가렸던 안개가 확 걷히고 보다 선명한 색의 세상이 나타났다. 포만감과 유쾌함을 함께 느끼며, 진기는 태민에게서 물러났다. 이제야 온통 피에 젖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살인 사건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 역시나 붉은 피로 가득했다. 저걸 언제 다 치우지. 맥이 빠져 철푸덕 주저앉았다. 태민의 뽀얀 왼쪽 목덜미에 자신의 무자비한 잇자국이 보였다.



  “앞으로는 이렇게 안 해 줄 거야.”

  “…네. 감사합니다. 대부님.”

  “너도 그 나이 먹었으면 이제 먹을 건 스스로 알아 챙겨야지.”

  “네. 네.”



  생기 있고 예쁘던 어린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끙, 하며 그는 비단 손수건을 꺼내어 대충 목의 상처를 닦고 소파로 가 앉았다. 성인 남성의 몸을 하고 있는 자신이 배가 빵빵하게 부를 정도로 혈액을 취해 마셨으니 아무리 태민이 최고위의 프린스여도 타격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프린스의 성혈(聖血)은 뱀파이어들에게는 최고의 양식이었다. 대제전이나 대축제에서만 아주 조금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두 방울만 받아 마셔도 은혜 입었다며 황송해 해야 마땅하다. 특히나 태민은 갓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책봉이 되어 나눠줄 수 있는 성혈의 양이 다른 프린스들보다 훨씬 더 적었고 순도 높은 순수 혈통인 주제에 몹시 베푸는 데에 인색하기까지 했다. 그런 귀하디귀한 태민님의 성혈을 드럼통으로 마셔댔으니. 역시 그의 첫 번째 아이로 선택되길 잘 한 것 같다.



  “저. 괜찮으세요?”

  “…조금 쉬면 괜찮아져.”



  태민은 어지러운 듯 눈을 감고 쇼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다.



  “요즘 것들은 더러워서 도통 먹을 수가 없어.”

  “…….”

  “…아무리 뒤져도 먹을 만한 게 있어야 말이지.”

  


  아무 놈의 피라도 던져 주면 황송하게 받아 마실 수 있는데. 아침나절에야 한 점의 사냥감도 잡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온 태민은 아무리 그래도 제 아이에게 더러운 것을 먹일 수는 없다며 궁여지책으로 제 목덜미를 진기에게 내밀었다. 차마 그의 피를 마실 수는 없어 한사코 사양했지만 견딜 수 없는 달콤한 냄새와 매끈한 살결의 유혹에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이를 박아 넣고 말았다. 친부모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넘치도록 베풀어 주는 하해와 같은 은혜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물결쳐 다가왔다. 물걸레를 가져와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기 시작했다. 이걸 버리기에는 진짜 아까운데. 진기는 자기도 모르게 쩝, 입맛을 다셨다. 닭 피나 사람 피와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최상급의 성혈이 바닥 곳곳에 널려 있었다. 태민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틈을 타 슬쩍 손가락으로 가득 고여 있는 그것을 찍어 혀끝으로 가져갔다. 먹을 거 버리면 벌 받는데.



  “…설마 아직 부족해?”

  “히끅.”

  “이리 와.”

  “아,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요!”



  눈을 감고 있어도 태민은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어디 남작이나 된 게 상것들처럼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어!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어 이진기! 하고 카랑카랑한 불호령이 떨어졌다. 결국 아까운 것들을 박박 물걸레로 닦아내어 하수구로 짜 버리고야 말았다. 어흑,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바닥에 핏물이 배어 버리면 곤란했기에 수십 번을 닦고 또 닦았다. 탈취제까지 뿌린 후 한숨을 돌리니 오전도 한참 지나 있었다. 태민은 쇼파에 기댄 자세 그대로 도롱도롱 잠에 빠져 있었다. 민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



  조금 파리해진 얼굴로 두 눈을 꼭 감고, 조그만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새근새근. 그는 세상에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천진난만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이는 그렇게 흙먼지와 밤이슬이 그대로 묻은 망토를 이불삼아 좁은 소파 위에 쭈그려 누운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그는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더없이 편안하고 즐거워 보인다. 진기는 잠시 그런 태민을 내려 보다가 목덜미와 무릎 안쪽에 팔을 넣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얇은 뼈대와 작은 몸집이 어쩐지 저번보다 더 가벼워진 것도 같다. 작은 몸 안을 돌고 있는 피의 3분의 1 정도는 자신이 다 먹어치워 버렸을 것이다. 아이고. 여기까지 생각하니 너무도 미안해졌다. 태민을 데리고 들어가 침대 위에 눕혔다. 단시간 안에 피를 많이 흘린 몸은 평상시보다 체온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하얀 이불 두 겹을 가슴 위까지 꼭꼭 덮어주고 장식장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둔 곰 인형까지 안겨줬다. 좋다고 생글거리며 잘 잔다. 



  친자식은커녕 반려도 두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고독하게 살아 온 프린스 태민은 대신 자신의 양자들에게 정을 많이 주었다. 첫째 아이인 진기에게 더더욱 끔찍했던 것은 일족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태민은 자신이 막 알에서 깨어난 유체(幼體)이던 시절엔 품에서 한 시간도 떼어놓지 않을 만큼 예뻐했다고 한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과거 속의 그를 천천히 그려 본다. 기억 어느 곳에서나 그는 어리고 조그마했던 소년. 백 년 후, 오백 년 후, 그리고 자신이 언젠가 늙어 소멸할 그 때에도 그는 변함없이 보석처럼 아름다운 소년일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히. 



  “자장자장.”



  토닥토닥 몇 번 잠든 작은 가슴을 두드려 주었다. 소년은 기분 좋게,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한우 꽃등심 시식해보고 가세요. 40% 특가 세일 중입니다!”

  “유기농 검은콩 두부 행사 중입니다. 고객님 한 번 맛보고 가세요!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입니다.”

  “떡갈비 세트 보고 가세요!”



  주말의 대형 마트는 발 디딜 곳 없이 붐볐다. 어디에서들 그렇게 있다가 꾸역꾸역 기어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인구가 수없이 밀집해 있어 넓은 공간도 좁게 느껴졌다. 둔하게 움직이는 카트를 밀며, 진기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신나게 뛰어 앞장서 나가는 두 명의 말썽쟁이들을 애타게 소리쳐 불렀다. 한 녀석은 껑충하게 키가 크고, 한 녀석은 그보다는 작다. 둘 다 어거지로 입혀 놓은 진기의 남방이며 셔츠며 청바지가 어색하게 맞지 않는다.



  “우와! 진기야 이것 봐! 이 가게 뒤에 바다가 있어? 생선이 너무 싱싱해. 게다가 얘네들은 아직 죽지도 않았어!”



  팔딱거리는 커다란 생선 눈알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쿡쿡 찔러본다. 판매원이 경악을 한다. 아 진짜 이러지 마세요!



  “아빠 나 이거 사 줘.”

  “우와. 상자 안에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네?”

  “사 줄 거야?”



  게임기 앞에 쭈그려 앉아 정신을 판 동생님이라거나. 저마다 앉아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던 초딩 아이들이 기가 죽어 흩어진다.



  “저, 고객님. 그렇게 많이 드시면…….”

  “먹으라고 구워 놓은 거 아니었어?”

  “그렇지만…….”

  “좀 짜네.”



  소복소복 쌓아 놓은 훈제 오리고기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는 대부님. 아이고 죄송합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줌마 사원 앞에 굽실굽실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태민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어냈다.



  “맛있긴 한데 오래됐다.”



  손가락 끝에 남은 소스를 짭짭거리며 태민은 쫑알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 이것도 사 줘!”

  “형아. 나는 이거.”

  “생 곡물을 이렇게 포장해 놓은 건 처음 봐! 어어. 요즘은 악마의 열매도 이렇게 가공해서 파는구나! 신기해라.”



  이것들을 데려 오는 게 아니었어. 인간세상 100여 년 만의 외출이라더니 정말인가 보다. 아이고. 세상이 이렇게나 많이 변했네! 이 과일은 보석 한 말을 줘도 안파는 비싼 거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반 상점에서 마구 팔지? 진기야 나 이것도 사 줘! 우와 세상 참 좋아졌네! 완전 늙은이 같은 소리를 주워섬기며 무엇 하나 얌전히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함께 데려 온 동생님도 소리 없이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있다.



  “진기야.” 

  “네에.”

  “나 소고기.”



  마트를 한 바퀴 돌며 태민이 사 달라는 걸 죄다 장바구니에 넣고 나니 이번 보너스가 모두 날아가게 생겼다. 마지막으로 태민은 붉은 조명이 번쩍거리는 정육 코너 앞에 섰다. 아, 다른 건 몰라도 그래. 태민이 좋아하는 고기는 사야겠다. 점원이 판매대에서 고개를 쓱 내밀었다. 



  “고객님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소고기. 이거.”



  태민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시식 코너에서 먹음직하게 굽고 있는 소고기 등심에 손을 뻗는다. 구워진 것도 아니고, 빨간 날것에. 재빨리 따라가 손목을 잡아채어 만류했다. 이잉. 왜 이래? 



  “육회는 집에 가서 해드릴게요.”

  “맛만 볼 건뎅.”

  “안 돼요!”



  백주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열일곱 살짜리 꼬맹이가 시뻘건 생고기를 무한정으로 씹어 먹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진기 자신이 보호자인데. 결국 태민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노릇노릇하게 익은 꽃등심을 콕콕 이쑤시개로 집어 먹는다. 



  “이건 얼마나 하죠?”

  “네, 고객님. 횡성직송 최고급 한우 등심세트입니다. 가격이 좀 높지만 그만큼 맛과 품질은 보증합니다. 이걸로 드릴까요?”



  손이 달달 떨린다. 아무리 대부님 드릴 거라지만 등심까지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시식코너에서 고기를 다 동낸 태민이 도도도 달려 와 진기의 등에 찰싹 붙어 고개를 내밀었다.



  “왜 그래?”

  “…아. 저어.”

  “돈 없어서 그래?”



  고객님.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한우 특선 세트인데 조금 더 저렴하지만 블라블라블라…….



  “…어디서 거짓말이야. 인간.”

  “육질이 촉촉하고……, 네?”

  “서양 것 싸구려 더러운 고기를 갖다가 한우라고 속이다니 누굴 놀리는 거야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고객님……?”

  “장사하는 것들이 신용이 있어야지. 감히 허튼 것을 가져다가 거짓말을 해?”



  소고기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D사의 한우 세트를 자랑스럽게 들고 있던 점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이딴 건 개나 먹여. 난 저것으로 줘.”



  태민이 가리킨 것은 처음 내려놓았던 횡성직송 어쩌고 하는 초호화 세트였다. 점원은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하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재빨리 진기의 카트에 소고기 세트를 던져 넣었다. 가격표는 차마 읽고 싶지도 않다. 이번 달 망했다…….



  “그나마 저게 덜 더러운 냄새가 났거든.”



  살벌한 표정을 거두고 다시 생글생글 웃는다. 요즘은 소고기도 먹을 만한 게 없더라. 헤헤. 진기는 곧 흔적도 없이 말라 버릴 지갑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다. 역시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자식 간이라도. 으음. 그렇지. 



  “나 이거 사 줘.”

  “민호야. 착하지? 내려놓고 와요. 형아가 돈이 없어서 그것까지는 못 사준대요.”

  “가지고 싶어.”

  “네가 이걸 다 사면 내가 소고기를 못 먹는단 말이야. 빨리 제 자리에 두고 와요. 착하지?”

  “민호 갖고 싶은데…….”

  “혼날래요?”

  “…아니.”



  그나마 조금 고맙다. 민호는 태민의 꾸중에 입을 삐쭉이며 품에 가득 안고 있던 게임기, 장난감, 축구공 등을 반환대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동생이 조금 불쌍해 축구공 하나는 계산하겠다고 했다. 카드 값은 뭐. 하아. 산더미 같이 쌓인 식료품을 양 손에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말썽쟁이 동생과 대부님은 기분이 좋아 얌전히 군다. 기껏 프린스의 성혈로 영양 보충을 해 놨건만 벌써부터 다리가 풀리는 게 한 시간 사이에 3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우와!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겉면의 핏기만 제거한 거의 날 것의 레어 스테이크를 기쁘다는 듯 냠냠 잘도 먹어치운다. 오늘 안으로 한우세트가 다 동나게 생겼지만 아직까지도 안색이 파리한 태민의 얼굴을 보며 효도해야지. 하나뿐인 대부님인데 내가 효도해야지. 주문처럼 자기 암시를 걸었다. 그것 참, 가스비는 안 나가서 좋구만. 역시나 국산 한우인지 고기질은 좋았다. 민호에게는 삼겹살을 구워주었는데(그래도 돼지고기가 좀 저렴하니까) 별 불평 없이 잘 먹는다. 나름대로 성찬이다. 자신의 몫으로는 다이어트를 핑계로 수십 팩 냉동실에 쟁여둔 닭 가슴살을 구웠다. 태어날 때부터 닭 피만 익숙하게 먹어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진기는 닭고기를 몹시 좋아했다. 하얗게 구워 낸 닭 가슴살 스테이크를 바라보며 태민이 한 소리 한다.



  “그거 참. 닭고기 좀 그만 먹어.”

  “이게 맛있어요.”

  “피 구해다 먹기 귀찮으면 소 생간이라도 사다 먹고 그래라.”

  “으, 물컹거려서 싫어요.”

  “얘 봐라. 넌 역시 아직 어려. 생간이 얼마나 맛있는데.”



  간은 사람 거나 짐승 거나 항상 맛있더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 조각을 또 낼름 입에 집어넣으며 태민은 즐거운 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좀 무섭다. 



  “네가 인간들 틈에 오래 살아서 그렇게 인간화가 된 거야.”

  “…그건 그렇지만 전 이 생활이 좋아요.”

  “네가 좋다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 그만 좀 돌아오렴.”



  붉은 와인을 홀짝이며 태민은 진기의 허벅지를 콕콕 찔렀다. 만날 민호랑 둘이 심심해서 죽겠는데 너라도 내 곁에 있으면 좀 좋아? 



  “그나저나 대부님 언제 돌아가실 거예요?”

  “응? 안 갈 건데?”

  “뭐라고요! 내일은 월요일이라고요. 저 출근해야 해요.”

  “왜? 피곤하고 귀찮잖아. 그만 두면 되지.”

 


  하아. 진실 된 근로의 유희를 모르는 아버님이로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아 포크로 죄 없는 닭고기만 콱콱 찔러댔다.



  “이제 그만 마계로 돌아와. 응?”

  “그건 좀…….”

  “나 외롭단 말이야. 요즘은 태어나는 애들도 없고. 내가 딱히 할 일도 없고. 맛있는 것도 없고. 너라도 나랑 있어줘야지. 예전처럼 같이 재밌게 살자. 진기야아…….”



  그렇다고 해도 별로 마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제 좀 인간들 생활에 적응되고 무리 없이 사나 싶었는데. 그러나 태민은 여간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진기야. 응?”



  반쯤 접시에 남은 스테이크를 버려두고, 태민은 냉큼 자리를 옮겨 자신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달콤한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나 너랑 있고 싶은데. 녹작지근한 목소리가 낮은 노랫가락처럼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태민이 손가락으로 진기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고양이처럼 모로 선 검은 눈동자에 촉촉하게 물기가 어렸다.



  “너랑 있고 싶어.”

  “…대부님.”

  “네가 없으니…, 심심하고 외롭고 지루해.”



  마법의 주문처럼 태민의 목소리와 눈빛과 손가락이 진기의 몸과 정신을 감쌌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입술에서 단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살며시 진기의 인중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자신의 몸속을 흐르고 있던 태민의 피가 노랫가락처럼 부드럽게 피부 안에서 간질간질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알았어요.”



  지금은 말고…, 그러니까, 갈게요. 일 다 정리하고…, 인간계 일 정리하면, 으음 그러니까 다 마무리 지으면, 그 땐 틀림없이 제가 마계로 돌아가서……. 대부님이랑…, 민호랑.



  “약속해.”

  “네.” 



  살랑거리며 다가온 손가락을 마주 걸어 약속을 했다. 모든 게 안개처럼 몽롱하고 황홀한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

  “저녁 맛있게 먹었어. 민호야, 가자!”

  


  다 식어버린 스테이크를 홀라당 삼키고 마지막 남은 와인을 꼴깍 삼켜 식사를 모두 마친 태민이 구형 텔레비전 앞에 쭈그려 앉아 축구 경기 재방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민호에게 다가가, 읏차, 하고는 녀석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싫어 이거 다 보고 갈 거야. 태민의 어깨 위에 얹힌 민호가 몸을 마구 꿈틀거렸다. 



  “자, 그럼 곧 보자. 기다릴게.”

  “가시려고요?”

  “응. 네가 오겠다는데 내가 더 이상 인간계에 있을 이유가 없지. 재밌고 신기한 게 많지만 난 아무래도 인계랑 안 맞아.”

  “…….”

  “잘 있어. 언제든 정리되는 대로 와야 해.”

  “네.”


  

  태민은 민호를 들쳐 멘 채 고개를 뻗어 작별의 키스를 했다. 뺨에 촉촉한 입술이 다시 한 번 닿아왔다. 그 입술의 느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사라졌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엷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나비 두 마리가 어둑어둑한 박명의 하늘을 향해 벌새 같은 속도로 도약했다.











  “흐읍.”

  “으으음.”



  그의 다부진 손길이 급하게 셔츠 단추를 끌러냈다. 늑대인간 특유의 거친 숨결이 창백한 진기의 뺨과 어깨와 목덜미를 뜯어먹을 것처럼 노리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진기의 턱 줄기를 문 그는 바로 입술로 다가와 탐욕스럽게 키스를 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을 받아내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종현이 입술을 맞댄 채 진기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못이기는 척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주었다. 쉴 새 없이 자신의 냄새를 맡아대는 동그란 코를 콱 깨물었다.



  “…아 누구야.”



  분위기를 깨는 드르릉, 핸드폰 진동 소리. 종현의 옷을 벗겨내다가 멈춰 버리고 말았다.



  “나 괜찮은데. 받아.”

  “…별 전화 아냐.”



  어제부터 계속 기범이 전화를 걸어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만난 10년 지기 연인 늑대인간 종현과 해후를 즐기기 정확히 9시간 전부터. 한 시간에 두어 번 정도 끊임없이 핸드폰에 찍히는 부재중 통화 김기범. 김기범. 김기범. 김기범. 태민 슬하에서 막역하게 자란 얼마 터울 안 나는 아우긴 하지만 한국 본부 수장이 되고 난 이후 엄청나게 깐깐해졌다. 얼굴만 맞대면 잔소리를 하는 통에 이제는 저절로 피하게 되는 녀석이었다. 정 급하면 직접 와서 말하는 기범의 성격 탓에 별 일 아니겠거니 치부해 버리고 계속 불응답 중. 신경 끄라고 대답하고 종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여 다시 키스를 이어 갔다. 종현이 투박한 손길로 헐거운 청바지 버클을 꺾어 주르륵 내렸다. 황금늑대인간들의 수장인 그는 요즘 이러쿵저러쿵 까불어대는 붉은여우 일족들과 크고 작은 분쟁을 치르느라 매우 바빴다. 보고 싶어 죽겠다 투정을 수없이 한 끝에 겨우 시간을 내어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 



  “흐으, 종현아.”

  “…거기 다쳤는데 살살 만져 줄래?”



  종현의 옆구리에는 여우 녀석들이 할퀴고 간 상처가 몇 갈래 찍혀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혀를 내밀어 세심하게 그것을 핥아 주었다. 상처에서 늑대의 쓴 피 냄새가 났다. 



  “흐읍.”



  그가 바지를 벗기고 은밀한 부분을 슬금슬금 문질러 왔다.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과되지 않은 종현의 야성이 좋았다. 그의 약한 피부 주위를 집중적으로 핥고 빨며 서로 얽혀들어 정신없이 애무를 나누었다. 한참 동안 젖어든 둘은 오랜만의 결합을 위해 손을 내밀어 깍지를 끼고 반쯤 벗은 몸을 맞대어 비볐다. 엎어지고 넘어지는 한참의 몸싸움 끝에 종현이 승기를 잡고 진기의 몸 위로 자신을 겹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쾅!!!!!!!!



  어디서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났다. 응? 종현이 이렇게 능숙했었나? 진기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몸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달아오른 실내의 후끈한 공기가 갑자기 김이 빠진 듯 식어가고 있었다. 아직 종현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누구세요?”

  “…….”

  “저기…….”


  

  종현아 나 섹스 전에 뜸 들이는 거 싫어하는 건 네가 좀 잘 알잖아. 응?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기에 결국 눈을 떠야 했다.



  “…헉…….”

  “진기야. 저 애기 누구야?” 

  “…….”

  “네 일족이야? 피 냄새가 나는데.”



  이건 꿈이 확실한데 왜 이렇게 오금이 저리지? 발기한 아들놈이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후다닥 이불을 잡아 아랫도리를 가렸다. 난데없이 은밀한 연인의 침대에 급습한 불청객 때문에라도 알몸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이진기.”

  “…하…, 하하하.”

  “…이러려고 나한테 먼저 가라고 했어?”

  “대…부, 아니아니. 태…민아!”



  저러다가 태민이 활활 타올라 공기 중으로 흩날리면 어쩌나. 진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버티고 앉은 종현을 지나쳐 나는 듯이 태민에게로 다가갔다. 태민은 까만 비로드 코트를 입고 불처럼 선명하게 타오르는 빨간색의 프릴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얼핏 보면 연주회라도 나가는 꼬마 피아니스트 같은 예쁜 차림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가 칼날처럼 좁게 서 진기와 종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귀엽네. 동생이야?”

  “아니……. 조카.”



  오오오! 종현은 다행히도 섹스의 흥을 깬 진기의 조카에게 너그러웠다. 어린 것이라면 강아지 새끼마저도 좋아하는 종현은 읏차~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후 붙박이처럼 우뚝 서 있는 태민에게로 다가가 풍성한 버섯 모양의 머리를 부산스럽게 흐트러트린다.



  “귀여워라. 이봐, 애기. 너도 뱀파이어냐?”

  “…….”

  “이름이 뭐지?”

  “태민인데요.”

  “오오. 이름도 예쁘네. 몇 살?”

  “…오십 살이요.”



  얼어붙는 와중에도 태민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기가 막혔다. 오천 살이라면 몰라도 무슨 오십 살. 그러거나 말거나 종현은 아이고 귀여워라! 하며 태민에게 과다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진기 너네 조카 진짜 귀엽다.”

  “하하하…, 그, 그렇지? 누구 조카인데.”



  종현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쓰다듬을수록 태민의 표정은 험상궂게 변해갔다.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종현은 태민이 귀엽다며 아주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태민은 자신을 감싼 뱀파이어 프린스의 광휘나 태고 왕족의 거대한 기운을 모두 숨긴 채 미성년 뱀파이어가 가진 정도의 엷은 기운만을 품고 있었다. 뱀파이어라곤 진기밖에 모르는 종현이 태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종현아, 모처럼 왔는데 미안해.”

  “아, 그래?”

  “응. 돌아가 줘. 난 조카를 돌봐야 해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보자.”

  


  종현은 아쉽다는 듯 진기에게 작별 키스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종현이 탄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기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내 종현과 진기가 하는 양을 그림처럼 서서 가만히 보고 있던 태민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진기.”

  “…….”

  “저 늑대인간이랑 네 사이에 나중은 없어.”



  진홍색 불꽃이 팍, 하고 튀었다. 그가 한 마리 날쌘 야생고양이처럼 진기의 배 위에 올라타 앉았다. 제어하지 못한 분노가 가늘고 무겁게 떨고 있었다. 누운 채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태민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대부님.”

  “다음에 만나게 되면 죽여버릴 거니까. 그렇게 전해.”



  과연 그 말을 종현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의 경고는 없었다. 대신 태민은 날카롭게 솟아오른 이를 세워 진기의 말랑한 목덜미를 깨물었다. 상처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혀가 자신의 피를 맛있게 핥는다. 그의 혀끝을 타고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달콤하고 진득한 피 냄새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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