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을 정의한다면 어려웠다. 손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도 채 펴지지 않는 두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동공이 작아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흑백으로 변한 시야때문에 빛은 소용이 없다. 무슨 색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가 손바닥을 뒤덮었다. 쓸모없이 쥐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누구인지도.





Sweet Dreams! (스윗 드림즈)


<1> 재회 - 1

w. 앳



막바지에 접어든 듯 격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한 놈만 남았다해도 긴장을 풀 순 없다. 제 아무리 육체화에 성공하지 못한 영혼이지만 자신에게 해를 입히긴 너무나도 쉬우니까. 


“……!”

“…ㅆ,”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하나 없이 뺨 위로 가는 붉은 일자가 새겨졌다. 얇지만 예리하게 베인 상처 틈으로 긴 줄기가 둘, 짧게 하나. 예상보다 깊게 공격 당했다. 개의치 않고 소매로 상처를 대강 닦아버린다. 쓰라림을 느낄 여유도 없다. 철컥. 50미터 이내에 적이 있다. 곧 달려올 기세다. 장전된 총의 탄환을 머릿속에 그린다. 하나, 둘, 셋. 충분한 개수다. 악령은 움직임을 서두른다. 시야를 혼동시키려 주위를 떠돈다.


“그 이상한 트레이닝 바지보단 청바지가 낫지 않아? 영 핏이.”

“…”

“다리도 더 길어보이고 간지도 나고.”

“…”


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달려든다. 모습을 숨겼던 적이 이 순간만큼은 감추기 힘들 때다. 지금이다.


“넌 키가 작아도 비율이 좋,”


탕-!! 보기좋게 말을 씹고는 방아쇠를 당긴다.


“……”


눈 앞의 악령은 치명타를 입은 모양인지 머리 위쪽, 얼굴 반쪽이 날아간 상태다. 진흙같이 떨어진 덩어리에선 검은 피가 진득하다. 웃기게도 호빵맨처럼 모서리가 날아갔다. 떼어먹은 듯한 얼굴에선 떨어져나가지 않은 두 눈알이 도르륵 구른다. 온전한 모양새는 아니다. 탄환의 성수가 눈에도 튀었을 것이다.


“신경 꺼.”

“아 예에-”


리볼버를 잡은 손, 그 손목을 덮은 회색 소매엔 닦아낸 핏자국이 선명하다. 다시 탕! 캬아악-!! 귀청을 찢는 괴이한 소리가 허공을 뚫는다. 허름하고 음습한 도시 뒷골목 한가운데서.


“나이프.”


힘을 풀자 손 안의 리볼버가 순간적으로 공중에 붕 뜬다. 무기와 수평선을 유지한 채 엄지를 살짝 꺾으니 보통의 총구 길이로 돌아온다. 변형된 탄환에 맞게 개조된 리볼버. 이내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다 회색 후드티의 큰 앞주머니 안에 안착한다. 남자가 같이 있는 누군가에게 나이프를 조용히 외치자 빈 손에 두 뼘 정도의 칼 형상이 나타난다.


“더럽게 끈질기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악령을 보던 남자가 땅바닥에 침을 퉤 뱉는다. 그리곤 장난스레 중얼거린 말의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살짝 날아오른다. 금세 소환되어 손 안에서 선명해진 나이프를 허공에 긋는다. 끄아아아악!! 평범한 사람이 보았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곳에 무언가가 땅을 향해 추락한다. 소멸하는 물체는 끔찍한 소리를 뿜는다. 남자는 가벼운 몸으로 소리없이 착지한다. 지나치게 찐득한 검은 핏덩이에 가까운 액체가 남자의 발치에 닿으려한다. 완전히 소멸되기 직전이다.


“Sweet dreams. 좋은 꿈 꿔라, 질긴 새끼.”

“야아! 경수야 피! 피!”

“어.”


곧이어 핏물은 잿더미가 되어 소멸하는 악령과 함께 공기 중으로 흩날린다. 전투의 결말을 확인한 경수가 짧은 인사를 마치고 미련없이 뒤를 돈다. 핸드폰을 꺼내들어 익숙하게 메시지 버튼을 누른다.


(오늘) 오후 10:04

1


간단한 숫자 한 자리를 누른 경수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도심이 가까워지자 나이프마저 사라지게 한다. 한때 유행하던 브랜드의 마크가 새겨진 트레이닝 바지에 품이 큰 회색 후드티를 입고 운동화까지 신은 그의 후리한 모습은 그저 가볍게 외출한 20대 청년의 그것이다. 동그란 뒤통수에 이마를 반만 덮은 짧은 머리의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도심을 향해 걸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어폰에선 오래전 유행했던 팝송이 들린다. 회색 후드티 위, 왼쪽 가슴팍에 꽂힌 노란색 스마일 뱃지는 그가 듣는 뜬금없는 팝송만큼이나 격하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 바지 하도 입었더니 가랑이 해졌다.”

“그러니까 이 김에 청바지라도 입어. 신축성 좋은 걸로. 앞주머니에 덜렁덜렁 누가 총을 거기다 넣어.”


전혀 살아있지도 않을 법한 스마일 뱃지가 입을 열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아직 주변에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다. 줄곧 웃는 얼굴이던 뱃지의 표정이 여간 소름돋는 게 아니다.


“청바지.”


그러거나말거나 경수가 조용히 청바지를 외친다.


“그건 못 주거든?!!”


화난 이모티콘 모양이 된 스마일이 버럭 화를 낸다.


“스마일, 넌 나한테 불만을 터뜨릴 거면 청바지 정도는 소환 가능해야지.”

“…”

“뭐.”

“…”

“다시, 청바지.”

“…아악!! 짜증나 너!!!”


불빛이 화려한 길거리를 향해 걸어가는 경수 뒤로 얕은 안개가 깔린다. 스멀스멀 밤안개같이 차분하던 그것은 이내 회오리를 만들어낸다. 한참을 잘게 떨던 일그러진 안개는 중심을 잃는다. 눈동자만이 지면 위에 흐트러진다. 죽은 듯 보이던 눈동자가 또렷이 초점을 맞춘다.


“…………”


그 끝엔 경수가 있다.




* *



V****의 커버호 실내 촬영장. 마무리에 다다른 일정 가운데 스태프들의 행동이 분주하다. 그 속에 어떤 남자가 서있다. 단추가 여럿 풀린 하얀색 와이셔츠는 가만히 있어도 섹시한 그의 가슴근육을 한껏 돋보이게 했다. 구릿빛 피부의 그는 왁스로 올려 더 잘 드러난 잘생긴 이마를 가졌다. 서있기만 해도 빛이 나는 그의 외모는 이따금씩 짓는 미소로 매력을 더했다.


“오~케이!”

“수고하셨어요 종인씨.”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화보 촬영을 마친 남자가 구석에 자리한 의자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종인씨, 인터뷰는 오랜만이겠네요. 그런 것 같아요. 옆 의자에 앉은 한창 들뜬 모습의 인터뷰어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지난 번 영화 이후로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하하,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작품 활동 외에도 다른 활동들을 하느라 쉰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아, 그렇죠. 오늘 화보 촬영까지 끝내면 당분간은 정말 온전히 쉬실 수 있겠어요.”

“그래서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배우 활동한 뒤로 전혀 쉴 틈이 없었는데 잠깐이라도 쉴 생각하니 좋으면서도 낯설고 그래요.”

“휴식 기간에 뭘 제일 하고 싶으셨나요?”

“글쎄요.. 혼자 이것저것 해볼 생각이긴한데 아직 리스트도 생각 못 해뒀어요. 머리로만 이거 하고싶다. 저거 하고 싶네. 이 정도에요 지금은.”

“혼자 하신다면.. 여행..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행도 좋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으니까.”

“친한 친구들이랑 놀기만 해도 재밌을 것 같아요.”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가던 종인은 별거 아닌 인터뷰어의 말에 말문이 잠시 막힌 듯 했다. 2초간의 공백이었다.


“어.. 제가 그렇게 인간관계가 넓은 편이 아니라 친구가 별로 없어요. 하하.”


종인은 잘 정돈된 뒷머리를 한손으로 쓸어내리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중,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친한 친구는 없으셨어요? 인기 진짜 많으셨을 것 같아요.”

“놀랍게도 없어요 거의. 인기도, 음.. 글쎄요. 사실 많았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공부에만 신경을 써서.. 하하.. 너무 좀.. 재수 없는 말인가요?”

“아, 아니에요. 워낙 공부 잘 하는 걸로 유명하시잖아요. 근데 이런 대단한 외모를 숨기고 다니셨다는 게 신기해요.”

“정말 조용히 다녔죠.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학창시절 첫사랑이나.. 연애는 전혀 없으셨던 건가요?”


인터뷰어는 최근 있었던 모종의 스캔들과 관련해 대답을 이끌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속사에서 인정하려던 모 배우와의 열애설을 종인 스스로 단호히 부정했다. SNS를 통해 무성히 자라려던 억측들을 끊어낸 그는 최근 몇 주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다행히 나쁜 말들은 아니었고 그저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김종인 걔가 성격이 그렇게 인정머리없고 쌀쌀맞다더라.’, ‘그래도 확실해서 좋네.’, ‘<너와 나, 첫사랑>에서 이미지랑 너무 상반되는 거 아니냐.’ 등등 종인의 성격과 이미지에 대한 정의들이었다. 틀린 말들은 아니네. 회사 대표와 인터넷 댓글을 보던 종인은 그저 그렇게 말을 던졌더랬다.


그런 사건들이 있었다고 해서 이 질문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특히 고등학교 때의 추억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반 이상은 그 녀석의 얘길 안 할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라.


“..없었어요. 전혀.”


사글사글 웃던 종인의 입가가 눈에 띄게 내려갔다. 미간까진 찌푸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음.. 그러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눈치 빠른 인터뷰어가 흘러가는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주제를 바꾸었다.



* *



데뷔 작 <너와 나, 첫사랑> 부터 최근 작 <안개(The Mist)>까지 각기 다른 장르는 물론이고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최고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명실상부 인기 절정인 남자 배우로 약 5년을 보내고 있는데 소감이 어떠한가.


내가 가진 것보다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시청자들과 관객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할 말이 없다. (웃음)


휴식 기간 이후에 차기 작으로 생각해둔 것이 혹시 있나.


솔직히 말하면 아직 계획은 없다. 로맨스도 좋고 멜로, 스릴러 어떤 장르든 거침없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일단 푹 쉬고난 후에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한다.  



“……”


소파 위 삐딱하게 자리를 잡고 엎드려 누운 경수가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가만보니 잡지다. 슥슥 넘기는 듯 하더니 누군가의 인터뷰 페이지를 유심히 읽는다. 


“..가식은.”


책장을 넘기던 손이 저도 모르게 볼을 긁는다. 앗씨ㅂ. 아직 덜 나은 상처를 무심코 건드렸다. 아픔이 잊혀질 무렵 이어 읽은 지면의 문장에 심사가 뒤틀린다.


“아- 괜히 봤네. 돈 아깝다.”

“뭐, 뭐? 뭐 보는 중이야?”


어디있다 온 건지 거실 바닥에서 뱃지 움직이는 소리가 철그렁철그렁 났다.


“알 거 없어.”


읽다가 짜증이났는지 잡지를 턱 덮어버리곤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아 새끼 여기도 있네 얼굴. 잡지를 덮어도 또 보이는 얼굴에 짜증이 확. 12월 호의 커버를 장식한 녀석의 때아닌 등장에 기분이 잡치는 경수였다.


“맨날 뭘 안 알려주더라 너는.”

“그럼 스마일 넌 뭘 알려주긴 하냐, 나한테.”

“난 원래 미스터리~ 한 게 컨셉이야.”

“컨셉 좋아하네.”


카똑! 평소와 같은 둘 사이 말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안 오세요? 오후 6:06


알아서 하라니까. 얘는 또. 미리보기로 카톡을 확인한 경수가 다 귀찮다는 듯 소파에 벌러덩 눕는다.


“걘가 보네. 사범. 답장 좀 해줘.”

“귀찮아.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관장님 유령아니냐고 꼬마애들이 그러더라.”

“그건 언제 들었어.”

“꼬마애들이랑 놀다가.”

“퍽이나.”

“재밌어. 애들이랑 놀면.”


평소 안 보일 때 스마일이 뭐 하나 했더니 애로 변해서 동네를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재밌나 그게.


띠링! 이번엔 문자다.


(오늘) 오후 6:07

안녕하세요. 이번 청인고 13회 졸업생 모임이 10주년을 맞이하여..


굳이 문자를 열어 다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 ‘동창회 모임 참석바람’ 뭐 이런 내용이겠지. 그나저나 벌써 10주년이라니 세월 빠르네.


“또 확인 안 해봐?”

“동창회 문자야.”

“아.. 이번에도 안 가게?”

“..글쎄.”

“흐음..? 이번엔 반응이 좀 다르다?”

“왠지 걔도 올 것 같은데.”

“……?!”


베란다 창문 밖을 보며 멍 때리던 경수가 어디서 퐁-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어린애다. 금세 형체가 변한 스마일에 헛웃음이 나온다. 일어나 앉아 짧은 한숨을 쉬던 경수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뭐하냐.”

“그냥~”

“너랑 안 어울리는 그 애로는 언제까지 변신할래.”

“아패로도 계속-”


귀여운 바가지 머리의 6살 남자 아이. 머리 위엔 노란 모자에, 노란 유치원 복까지 깜찍하게 입고선 경수를 올려다본다. 뱃지에서처럼 동그란 검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이번 주지? 동창회.”


세상 귀여운 아이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스마일 특유의 억양이 부조화를 이뤘다. 발음까지 명료하니 기가 막힌다.


“근데. 뭐.”

“혹시 걔 말하는 거야~? 나도 갈래~ 압빠~”

“가도 너는 안 데려갈 건데.” 

“아아아!! 나도 데려간댔짜나! 너무해 아빠 미워!”


이제야 좀 애같다. 어리광 피우는 못난 여섯 살 짜리 남자아이.


“……”

“…아빠?”


아무말 없이 눈을 깜빡이던 경수가 귀여운 모습의 스마일을 내려다봤다. 들어줄 모양인가, 기대에 가득 찬 스마일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반짝였다.


“………”


그러다 경수는 오른손을 조용히 후드티의 앞주머니에 넣는다. 찰그락. 짧아졌던 리볼버의 총구가 길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찰랑 때린다.


“..?!?!! 야!! 이건 반칙이지!! 아니 근데 총을 거기에 계속 넣어놨던거야?!”


아까 엎드려 있었잖아 도경수 너! 배에 총 안 배겼냐! 다급해진 스마일이 경수에게 아무 말이나 퍼부어댔다. 얜 진짜 쏠텐데.. 성수 탄환이라해도 아프긴 아프단 말야! 연신 무표정의 경수를 진정시키려는 스마일의 머릿속 생각들이 뒤엉켰다.


“아빠는 우리 스마일 놓고 동창회 가고싶은데.”

“으어억! 악!! 아프단 말야 그거!!”


옛날 옛적 정말 자신에게 총을 겨눴던 경수이기에 농담이라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도경수 이 자식은 하려고 한다면 기어코 할 녀석이니까.


“……”

“..악! 꺼내지 마!”


경수가 앞 주머니에 넣은 손을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스마일을 놀렸다. 꽥꽥 비명을 질러대던 스마일이 종래엔 여섯 살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두 손을 파리처럼 비볐다.


“야아.. 조용히 있을게.. 응응? 나도 궁금하단 말야 걔.”


성격 드러븐 도경수.. 

행동과는 달리 새초롬한 도끼눈으로 경수를 노려보는 중이다.


“그 모습으론 거절인데.”

“알았어! 돌아간다구!!”


바뀐 몸과 같이 행동이 변하는 건지, 벌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자존심은 굽히고 싶지 않은 녀석을 보며 여전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경수가 속으로 웃는다. 어른인 모습이면 떼는 안 쓰려나 싶기도 하고 흠. 이러나저러나 상관은 없지만. 모르는 누가 보면 정말 싱글파파가 아동학대 하는 줄 알았을 거다.


“대신 가방에 달 거야.”

“흥!”


그래도 상대방이 궁금은 한 모양이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걔’가 대체 누구야. 경수를 만나고난 후 틈만 나면 물었던 스마일이다.


띠리링띵띵띵딩-

경수의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번호가 없다. 발신자 표시 제한이다.


“..가자.”

“걔네들?”

“어.”


경수가 익숙한 몸놀림으로 여느 때와 같이 간단히 핸드폰을 챙겨 든다. 쇳소리를 내며 거실에 떨어진 스마일을 주워 후드티 가슴팍에 꽂는다.


오늘도 시작이다.




* *




양 옆으로 주차한 차들이 빡빡한 길 위로 검은색 밴이 정차했다. 밴에서 내린 종인은 자신에게 쏠리는 주변 시선은 아랑곳 않은 채 수트의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특별히 신경쓴 듯한 모임의 장소 앞에 선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꼴에 10회 째라고 신경은 썼나보군. 여유로운 미소 속에 건조한 눈동자가 서늘했다.


“엇, 죄송합니다-”

“……”


어깨를 부딪힌 누군가에게 얼굴을 한껏 찡그리려다 만다. 보는 눈이 꽤 많다. 이미지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해도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다. 바쁜지 대강 사과만 하고 들어가는 남자의 뒤통수가 낯익다. 동창 중에 하나겠지 싶다. 지나간 남자에게서 탄내같은 게 나긴 했지만 어디서 연탄이라도 피웠나,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오- 김종인!!”

“와- 나 연예인 처음 봄.”

“야, 이따 싸인 좀 해줘라.”

“야이씨 넌 만나자마자 그게 뭐냐.”

“아 뭐~”

“성공했는데 얼굴 코빼기도 안 비춰서 서운했다 우리 쫌.”

“…”


종인은 대답대신 그저 웃어보인다. 순수한 웃음은 아니고 어딘가 조금 비뚤어보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옆 자리의 동창들이 컵에 물을 따라주고 술잔까지 채우려한다. 술은 이따 마실 게. 술을 따르려는 동창을 가볍게 제지한 종인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깄네. 설마했더니 아까 그 녀석,


“비싼 술 내가 대신 마시지 뭐.”

“경수 넌 오자마자 깡으로 마시냐.”

“친구 잘 된 거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 김종인 반갑다?”

“..누군가 했더니 도경수 너였구나 아까.”

“뭔.”

“됐다. 말해서 뭐하겠어.”


귀한 술들도 있겠다. 술로 배를 채우려는 경수가 종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3초간 눈이 마주친 둘 사이로 차가운 정적이 흐른다. 먼저 눈을 피한 경수가 술병을 쥐고는 제 잔에 콸콸 따른다.


“몇 년 사이에 변했나, 도경수가.”

“…”


웬일로 제 눈을 다 피하는 도경수가 낯설다. 이 새끼 성격 변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종인이 경수에게 아니꼬운 듯 시비를 건다. 야이씨 또 시작됐다 쟤네. 우린 싸물고 밥이나 먹자. 소곤대는 동창들을 애써 무시했다.


“너-어무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가 없네. 존나 잘 나가는 연예인이 내 눈 앞에 있어서.”

“눈깔이 있긴 있냐, 도경수 니가?”

“그만하고 밥이나 먹지?”

“그래, 그만하자. 우리 경수가 철 들었나보네.”

“……”


여전한 둘 사이에 살얼음판을 걷는 공기가 계속됐다. 와중에 경수는 죽을 맛이었다. 스마일이 눈치 챘을 게 뻔했다. 동창회에 절대 올 리 없는 도경수가 이곳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눈 앞에 이 녀석때문에. 뒤집어지는 속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온 자리지만 막상 마주하니 기댈 곳은 술밖에 없는 거다. 왜, 씨발, 김종인은 내 앞에 앉은걸까. 나는 왜 예전보다 못 숨기는것 같은 건지. 술이라도 취해서 부끄러운 감정이 드러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붉어진 볼이 그저 술기운이라 여겨지길 바라면서.



* *



나 담배 좀. 

어, 이따 2차 갈 거지? 

아니, 가야할 것 같은데.


무심하게 답한 종인이 코트를 챙겨입고 한식당 밖 뒷골목 쪽을 향해 걸어갔다. 담배갑을 꺼낼 줄 알았던 그가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연락한다. 나 몇 잔 마셔서. 부탁해. 얼굴만 비추러 온 모임이었지만 어쩌다보니 술을 마셨다. 앞에 앉았던 녀석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직까지도 얼굴에 생채기를 달고 사는 녀석.


“춥네.”


맨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밖에 있다보니 꽤 춥다.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뺀 종인이 주위를 확인하곤 오른손을 공중에 살짝 턴다. 손 끝에서 불이 화라락 피어올랐다가 부드럽게 스며든다.


좀 늦어요. 한 20분 쯤. 오후 9:09


“빨리 좀 올 것이지..”


주둥이가 삐죽나온 종인이 혼잣말로 짜증을 냈다. 그런 종인의 발치로 쥐 한 마리가 지나간다. 샤사샥- 소리도 없이 지나가려는 쥐를 종인이 빤히 본다. 중지와 엄지를 마찰시켜 손가락을 가볍게 튕긴다. 쥐의 몸통과 머리가 자로 그은 것 마냥 쩍 갈라진다. 삽시에 일어난 공격에 몸통과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움직이다가 뒤늦게 피를 뿜곤 고꾸라진다.


“으,.. 피가 ㅆ,”


더러운 게 비싼 구두에 튈 뻔 했다. 괜히 죽였나, 성가시게. 종인은 깨끗한 자신의 구두를 확인하곤 무의식적으로 앞을 본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 구석진 자리라 인기척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

“김.. 종인…?”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하던 종인의 얼굴이 보기좋게 구겨졌다. 목격자의 의아한 표정으로 보아 지금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니다. 적어도 몇 분 전부터 있던 게 확실했다. 


왜.

왜 하필.


“…도경수.”


하필이면 제 비밀이 더럽게도 재수없는 도경수한테 까발려질 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녀석이.


“…”


전세가 뒤집힌 건 순식간이었다. 비로소 재회한 한날 한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랜만입니다. 줄거리부터해서 설정까지.. 뜯어고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일주일에 3편 이상씩 올리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ㅋㅋ.. (최소 1편은 꼭,,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ㅎㅎ!


In Heartfelt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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