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좀.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침대 모서리까지 굴러와서 목덜미를 만지작대는 민규의 손을 아프지 않게 툭 때리고 쳐내면서, 승관은 살짝 어깨를 틀어 침대에서 등을 뗐다. 그렇지만 민규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어깨를 꽉 눌러서 승관은 다시 침대에 푹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애 아니고 개도 아니라면서. 이럴 땐 애 같고 개 같은데. 합치면 강아지. 개새끼까진 좀 아닌 거 같고. 생각하는 사이 뒷목에 덥고 끈적한 숨이 와 닿았다. 승관이 고개를 빼기도 전에 승관의 턱을 쥐고 목에 더운 숨을 불어넣다가, 입술로 꽉 물고 한참 지분거리다가, 목에 계속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추며 턱선을 타고 올라가 귓불을 이로 살짝 무는 민규의 이마를 손끝으로 밀어내며 승관은 장난스레 말했다. 아이, 진짜. 개새끼도 아니고. 민규가 눈을 샐쭉하게 뜨고 대꾸했다. 개새끼? 너 지금 개새끼라고 했냐?


 귓불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다가 귓바퀴에서 질척한 소리가 나도록 핥을 때 승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보다 훨씬 짙어진 민규의 페로몬이 귓가에서부터 목을 타고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잠깐만, 야... 단호하게 민규를 저지하기에는 너무도 힘없는 목소리라서, 승관도 말하면서 반쯤 체념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승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볼에 꾹 입술을 찍으며 두 팔로 승관의 어깨를 폭 끌어안기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턱을 꾹 누르고 고개를 돌리게 해서 키스하는 민규 때문에 승관은 잠깐 허둥지둥했다.


 팔 밑으로 손을 넣고 으쌰, 하고 애 들어 올리는 것처럼 승관을 들어 올려서 침대에 눕히더니, 곧 민규는 승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 곳곳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부딪쳐왔다. 말랑한 입술보다 뾰족한 송곳니가 더 먼저 맨살에 와 닿을 때 승관이 살짝 정신을 차리고 민규의 볼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옷 위로 배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더 밀착해오는 민규 때문에 그것도 곧 흐지부지됐다. 민규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려는지 더 세게 끌어안으려는지 모르게 손을 움찔거리다가 승관은 그냥 손끝을 세워 민규의 등에 박았다.


 민규가 승관의 허리를 잡고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으, 하지 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틀었더니 민규가 볼에 입술을 댄 채로 킥킥 웃었다. 왜, 뭐. 내가 뭐 한대? 목을 살살 간지럽히듯 핥고, 어깨를 살짝 따끔할 정도로 깨물었다가, 손끝으로 니트를 살짝 들어 올리고 맨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게 뭐가 아니면 뭐냐. 승관이 눈을 흘겼다.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민규가 급하게 입술을 부딪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갈무리했던 페로몬이 고삐라도 풀린 듯 훅 퍼졌고 입술을 맞대고 있던 민규가 승관보다도 먼저 예민하게 반응해서 흡, 하고 숨을 삼켰다. 허리와 배를 더듬던 손이 엉덩이를 쥐었고, 정신을 놓고 민규의 송곳니를 혀로 꾹꾹 누르며 핥다가 엉덩이를 잡힌 순간 퍼뜩 정신이 들어서 승관은 민규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미친 새끼야, 밖에 너희 어머니 계시다고.


 여전히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승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어쨌든 민규는 승관이 제 어깨를 치고 발로 허벅지를 밀어내는 것에 순순히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몇 번 머리를 쓸었다. 훅 달아올랐다가 애매하게 열기가 식은 방 안의 공기는 어색했다. 침대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풀풀 내뿜고 있는 오메가 페로몬을 집중해서 흩트리려고 노력하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고 느끼자 승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민규를 불렀다.


 “야.”

 “왜.”

 “너 진짜 왜 그러냐, 요새.”

 “아, 내가 뭐...”

 “외롭냐? 고파?”

 “...그런가?”


 살짝 몸을 틀어서 침대에 앉은 민규의 옆모습을 바라보니 민규의 얼굴은 진짜 승관의 말에 허를 찔렸다는 것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한참을 생각하는 민규를 보자 승관은 저도 모르게 가시를 잔뜩 세운 뾰족한 말투로 타박했다.


 “야, 외로우면 나한테 이러지 말고 오메가를 만나.”

 “어... 그래야 되나.”


 사실 외롭냐고 물은 말에 민규가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 않고 ‘그런가?’ 하고 모호하게 대답하며 고민하는 게 이상하게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뭐야,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야? 외로울 때 손쉽게 안고 욕구 해소하기 좋은 오메가냐? 민규가 그런 의도로 남을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승관 자신이 제일 잘 알면서도 자꾸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니꼬워서 차라리 오메가를 만나라고 말했는데, 민규는 그 말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승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픽 웃기까지 하며 그러든가. 하고 대답하고 돌아누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민규는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다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허공을 쏘아보았다. 승관이 한 말이 정말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라,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그런가 싶어졌다. 사실 승관의 히트사이클 때와 민규의 러트를 나란히 같이 보낸 이후로, 승관만 보면 온몸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머리끝까지 쭈뼛 서서 참기가 힘들었다. 처음 발현했을 때처럼 승관이 한없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던 적은 수없이 많지만, 요새처럼 자제력이 아예 없어질 정도로 흥분했던 적은 없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아니, 브레이크라는 게 원래 없었던 것처럼 달려들게 되고, 몇 번이고 핥고 깨물고 맛봐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갈증만 심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민규가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들 때마다 승관이 싫은 티를 내거나 질색하지 않고 받아주니까 그래서 더 별생각 없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승관을 안고 입맞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승관에게만 이러는 건지, 아니면 모든 오메가한테 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일종의 발정기 같은 건데 단지 가장 가까이 있는 오메가가 승관이라 이러는 건지, 승관의 한마디에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냥 손 뻗기 쉬워서, 저를 잘 이해해 주니까, 친하니까 그런 걸까? 괜히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민규는 고개를 돌려 돌아누운 승관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점심을 먹고 공이라도 좀 차다 들어갈까 했는데, 밥을 마시기라도 했는지 2학년보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뜬 1학년들이 이미 운동장을 다 점령해서 자리가 없었다. 그냥 쟤네 꺼지라고 하자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석민이 ‘아, 됐어. 어차피 나 다리 아파서 축구 하기 싫었어.’ 하고 웃고, 승관이 그 뒤를 따라 쪼르르 ‘나는 추워서 싫어...’라고 말하자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그래서 다들 매점에서 빵이나 우유 따위를 하나씩 들고 올라와서 교실에서 둥그렇게 모여 앉아 어중간하게 뜬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민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야.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불확실한 호명에 다들 핸드폰을 만지던 그대로, 또는 옆에 앉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대로 민규의 말을 흘려 들었지만, 뒤이은 민규의 말에 일제히 민규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야, 나 오메가 좀 소개해줘라.”

 “어?”

 “뭐?”


 진짜 소개받기는 받을 건가 봐. 예상은 했지만, 친구들에게 대놓고 말하는 타이밍이 좀 어이없을 정도로 뜬금없어서 승관은 고개를 숙인 채로 살짝 볼에 바람을 부풀렸다가 후 불고 얼굴을 들었다. 민규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은 없어서, 승관은 민규 대신 민규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 그리고 승관은, 석민과 눈이 마주치고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다들 민규를 보고 있는데 석민은 슬쩍 승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뭐야, 나를 왜 봐...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석민의 눈을 피해 민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주변에 누구 없어?”

 “누구는 존나 많지. 네가 원하는 누구가 누구냐가 문제지.”

 “아니, 뭐 어마어마하게 괜찮은 오메가 만나자는 거 아니고. 왜, 그런 거 있잖아. 나는 좋은 형질 그런 것보다 얼굴 본다 하는 애들...”

 “새끼, 얼굴은 자신 있다?”


 존나 재수 없네. 친구 하나의 농담 섞인 타박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민규도 웃으면서 아니. 나 정도면, 뭐. 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고, 다들 이때다 싶어서 민규를 퍽퍽 때리고 발로 찼다. 다들 민규를 소재로 즐겁게 웃고 떠들며 농담하는 가운데서 승관도 그냥 낄낄 웃었다. 그렇지만 박장대소를 하는데도 그만큼 웃겨서 웃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은 사이,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이 민규는 정말 누구한테 소개를 받긴 받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냉큼 어깨로 올라오던 손이 올라오지 않아서, 괜히 허전해져서 민규를 슬쩍 곁눈질하니 민규는 분주하게 자판을 두들기느라 바빴고, 그래서 승관은 민규가 그 소개받았다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승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민규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다가 불쑥 승관의 쪽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 씨... 깜짝이야. 뭔데.”

 “얘 예쁘지.”


 민규가 보여준 사진은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조금이라도 안 예쁘면 눈이 작네, 턱이 비대칭이네, 얼굴이 넓적하네, 치열이 별로네 등등 온갖 딴지를 걸 준비를 하고 사진을 봤는데 정말 누가 봐도 예쁜 얼굴이라 승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진발이라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정직한 각도로 남이 찍어준 사진인데도 예뻤다. 심지어 좀 민규의 취향이기까지 했다. 긴 생머리,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청순한 인상.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정말 예사로운 목소리로 승관은 맞장구를 쳤다. 어우, 예쁘네. 민규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치? 아니,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지가 왜 뿌듯해. 삐죽 솟는 심통을 어쩌지 못하고 승관은 기어코 한마디를 했다.


 “근데 네 취향 아니게 생겼다.”

 “아닌데?”

 “...”

 “나 이렇게 생긴 애들 되게 좋아하는데?”

 “그래, 만나.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애도 한 셋 낳고, 아주 오손도손 사세요.”


 너 저렇게 생긴 애들 좋아하는 거 모르는 거 아니거든. 괜히 말을 꺼냈다가 확인사살을 당한 것 같아서 승관은 더 심기가 불편해졌다. 소개받았다는 그 애가 어디 사는 누군지, 누구에게 소개받은 건지, 민규한테 관심을 보이고는 있는 건지 궁금하고 알고 싶은 마음과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어지럽게 공존했다. 약간 판도라의 상자 앞에 선 기분 같기도 하고. 한참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승관은 핸드폰을 든 민규의 손을 꽉 쥐고 제 쪽으로 끌어와서 익숙하게 잠금을 풀었다.


 그래서, 누군데. 어느 학교. 몇 살. 호구조사라도 하는 것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승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정도 낮아져 있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건지, 승관이 조금 서운해할 정도로 신나게 민규는 말을 이었다. 오메가인데, 거의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래. 형질 엄청 약해서. 나도 뭐 우성이니 열성이니 따져가면서 만날 거 아니고. 그리고 어쨌든, 예쁘잖아. 그럼 됐어. ‘예쁘다’를 강조하며 몇 번이고 말하는 민규를 발로 뻥 차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승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 뭐하러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냐. 내가 소개팅하라고 한 거잖아. 정신 차려, 부승관. 하여튼 심보 착하게 안 쓰지. 사촌이 땅 샀다고 배가 아픈 거는 어릴 때 다 졸업하지 않았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승관은 마음을 다스리려 끊임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마음이 넓다. 마음이 비단결같이 고운 친구다. 나는 친구가 잘되는 걸 좋아한다. 친구의 일에 내 일처럼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참을 혼잣말하다가, 승관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울컥 짜증이 치솟는 걸 어쩌지 못하고 승관은 그새 메신저를 하는 민규의 핸드폰 잠금 버튼을 꾹 눌러서 화면을 꺼 버렸다.


 아이, 저... 부승관 저놈의 성질머리 진짜... 민규가 인상을 쓰며 노려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승관은 몇 발자국 앞으로 도망가서 혀를 날름 내밀며 잔뜩 약을 올렸다. 그러니까 조금 속이 시원해지는 거 같았다. 하여튼 부승관, 철들려면 멀었다. 아직도 이렇게 친구 잘되는 꼴을 못 봐서야.


 그래도 이쯤 했으면 굽히고 들어가야겠지. 더 하면 김민규 진짜 화낸다. 승관은 다시 쪼르르 민규의 옆으로 가서 생글생글 웃으며 민규의 팔을 콕콕 찔렀다. 민규가 승관을 몇 번 꼬집더니, 곧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이번 주 토요일. 빨리도 만나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승관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잘 만나고 와.



-



 눈을 뜨고 천장의 등을 올려다보자 천장의 등이 두 개로 보였다. 초점을 맞추려고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머리만 더 아파지고 어지러운 시야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아서, 승관은 그냥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젯밤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더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애써 생각하며 한참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일어나니까 이제는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솔직히 말하자면 죽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몸도 지치고 왠지 마음도 울적해서 승관은 일어나길 포기하고 턱밑까지 올린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서 몸을 한껏 웅크렸다.


 원인은 안 봐도 뻔했다. 이 망할 놈의 성질머리, 진짜. 스트레스받고 신경 쓰는 일 있으면 다른 것보다 몸이 먼저 알아서 이상하게 기운을 못 차리고 시름시름 아팠다. 아무래도 몸이 주인의 성질을 견디다 못해 뻗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왜 성질 낼 일도 아닌 데다가 신경을 쓰고. 습관처럼 아이고, 아이고...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침대 위를 마구 더듬다가 겨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벌써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제 좀 늦게 자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래 자긴 잤다. 민규에게서 30여 분 전, 메시지가 세 개 연달아서 와 있었다.


 ‘일어났냐?’, ‘오늘 날씨 되게 좋다.’, 그리고 파란 하늘이 다 보이도록 구도를 잡아서 살짝 웃는 얼굴로 찍은 민규의 사진 한 장. 씨, 소개팅한다고 되게 꾸몄네. 벌써 만나러 가는 건가 보다. 무슨 아침 댓바람부터 만나냐. 괜히 말도 안 되는 트집이 났다.


 공들여서 만진 듯 말끔한 머리와 시원스러운 이목구비, 승관과 함께 쇼핑 갔을 때 샀던 니트에 하얀 셔츠까지 받쳐 입은 민규의 사진을 한참 보다가 승관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 진짜. 존나 잘생겼어... 짜증 나게. 승관은 민규가 보여 줬던 상대 여자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존나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꾸며서 잘생긴 것 따위 아니라는 건 승관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새끼는 자고 일어나서, 머리 까치집 짓고 퉁퉁 부어서 눈도 못 뜨고 끔벅거리고 있어도 잘생겼잖아. 오늘 만난다는 걔가 그걸 알겠냐. 핸드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니, 걔가 김민규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겠냐.


 그런 생각에 이르자 승관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나 소개팅에 대한 이야기, 다른 어떤 이야기도 없이 두 마디만 써서 보냈다. 나 아파. 금세 메시지를 읽은 표시가 났지만, 민규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뭐야... 괜히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더니 잠시 후 간결한 문장이 답으로 돌아왔다. 힛싸 아니지? 뭔 소리야, 얘는. ‘힛싸 지난 지가 언젠데.’ 하고 대답했더니 곧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너 주기 모르는 거 아니고, 최근에 좀 이상했으니까... 혹시나 해서 그랬지.

 “그거 변명하려고 전화했냐.”

 - 아니, 너 어디 아프냐고.

 “몰라... 감기몸살인가.”


 신경성이라고 말하자니 자기가 한껏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 떠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승관은 대강 얼버무렸다. 핸드폰 너머의 민규가 푹 한숨을 쉬었다. 넌 어째 이 시기에 감기 안 걸리고 넘어가는 법이 없냐. 괜히 거짓말을 한 게 조금 민망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승관이 침묵하니 민규가 다시 물었다.


 - 나 갈까?

 “어?”

 - 나 너희 집에 가?


 순간 심장이 쿵쾅댈 정도로 민규의 말이 반가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도, 승관은 괜히 한번 거절해 보았다. 됐어. 너 오늘 약속 몇 신데. 민규가 대답했다. ‘열두시 반.’ 정말 약속 시각이 코앞이었다.


 그럼 좀 있다가 걔 만나야지. 승관의 말에 이번엔 민규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또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지는 신경 줄을 어쩌지 못하고 승관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너 소개팅 네가 시켜달라고 한 거잖아. 그럼 나가야지. 네 말마따나 내가 이 계절에 아픈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집에서 땀 푹푹 내고 한숨 자면 낫겠지. 승관의 날이 선 말을 잠자코 듣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민규가 다시 말했다.


 - 그래서 나 가, 말아?


 자꾸 선택의 칼자루를 승관에게로 넘기는 게 저한테 아쉬운 소리를 시키는 거 같아서, 놀리는 것만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도 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승관은 저도 모르게 짜증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몰라, 알아서 해. 오든지 말든지.”

 - ...

 “오늘 존나 꾸몄더만. 그러고 나 만나러 오면 아쉬워서 어떡하려고 그러냐? 그러니까 그냥 걔 만나러 가.”


 빽 소리치듯 말한 다음 승관은 민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거칠게 꾹 눌렀다. 아, 나 진짜 최악이다. 자책하면서 침대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가, 조금 마음이 차분해지자 그래도 와 주지 않을까 하고 아주 잠깐 기대했다가, 이렇게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고 엉망진창으로 굴었는데 김민규가 오겠냐 하고 곧 체념했다가, 분명히 먼저 오지 말라고 했던 건 저 자신인데도, 진짜 안 오면 친구도 아니다. 하고 일부러 친구에 방점 쾅쾅 찍어서 생각하다가, 약속 장소가 코앞일 텐데 오겠냐, 씨발. 하고 짜증을 팍 내면서 승관은 핸드폰을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냥 잠이나 자자. 안 그래도 복잡한 생각을 계속해서 그런지 머리가 더 지끈지끈 아파졌다.


 잠이 들 듯 말 듯, 약간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서 몽롱하고 현실감이 없는데, 제 이마를 쓸어내리고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은 한없이 익숙해서 승관은 자연스레 볼을 감싼 손에 얼굴을 비비고 폭 기댔다. 게슴츠레 눈을 떠 보니 민규가 진지한 얼굴로 걱정스레 승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규의 얼굴을 본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서 말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눈만 느릿느릿 깜박이다가, 갑자기 둑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할 말이 쏟아져서 오히려 무슨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라 승관은 그냥 민규의 얼굴만 계속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끔하게 꾸민 민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승관은 천천히 입을 열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약속은 어쩌고...”

 “지금 그게 중요하냐.”


 민규의 말에 괜히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에 힘을 꽉 주며, 승관은 다시 눈을 살짝 감았다. 민규는 승관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볼과 이마를 연신 짚고 있었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중얼거리는 민규의 목소리를 듣자 기어코 승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승관의 미소를 보고 민규도 농담조로 말했다. 야, 웃는 거 보니까 살만한가 보네.


 가슴팍을 토닥이고, ‘너 내가 끓이는 참치죽 먹어야 낫잖아. 그치? 또 형이 나서 줘야지.’ 하면서 한참 너스레를 떨더니 민규가 주방으로 나갔다. 아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승관은 가슴 한구석에서 뜨뜻하게 퍼지는, 얼굴만 아는 그 여자를 향한 알량한 우월감을 인지하고 흠칫 놀랐다. 민규가 소개팅을 받는다고 했을 때부터 계속 시도 때도 없이 벌컥벌컥 짜증이 나던 이유를, 애써 친구가 잘되는 게 배가 아파서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는데 결국 이쯤 되니 그런 눈 가리고 아웅 따위도 다 부질없어졌다. 친구 하고 싶다며. 이게 지금 친구로서 할 행동이냐. 이 미친 새끼야... 승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민규는 주방에서 승관의 어머니에게 어머니, 어머니 하고 살갑게 굴며 죽을 끓이고 있었다.


 야, 어머니도 나 죽 맛있게 끓였대. 자랑하듯 말하며 문자 그대로 헤헤 웃고 민규는 승관의 머리맡에 앉았다. 승관이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자 민규는 죽을 호호 불어서 승관에게 떠 먹여주기까지 했다. 아, 내가 먹는다니까. 승관이 살짝 도리질을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규는 숟가락을 승관에게 내밀었다.


입까지 뻐끔거리면서 아이고, 잘 먹네. 하고 애 어르듯 하는 민규에게 반쯤 체념한 채로 승관은 민규가 주는 대로 죽을 받아먹었다. 승관이 숟가락을 입에 물 때마다 실실 웃는 민규에게 뭘 웃냐고 톡 쏘아붙이다가, 기어코 ‘아유, 우리 뿌야 다 먹었쪄요?’ 하고 혀짧은 소리를 내는 민규의 등을 퍽 때리고 승관은 정말 궁금했던 걸,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심드렁하게 툭 던지듯 물어봤다.


 “그래서 걔는 어떡하게?”

 “뭐가?”

 “안 만날 거야?”


 민규는 한참 대답 없이 물끄러미 승관을 바라보았다. 민규가 뚫어지게 저를 쳐다보면서, 정작 답은 해주지 않는 것에 조금 조바심이 나서 승관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안 만날 거냐고. 그러자 민규가 대답 대신 승관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야, 밖에 우리 엄마... 말하려다가 승관은 잠시 멈칫하고 그냥 민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승관이 목에 팔을 두르자 살짝 입술을 떼고 승관의 얼굴을 바라보던 민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승관아.”

 “응.”

 “나...”

 “응.”

 “...아니야.”

 “장난치냐?”

 “아니야, 아니야.”

 “아, 뭔데.”


 승관이 다시 한 번 졸라도 민규는 살짝 웃으며 시선을 피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왜, 민규야. 승관이 말꼬리를 늘이며 조르듯 다시 물었지만, 민규는 그냥 승관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아니야, 나중에. 나중에 말할래. 민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더 물으려다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편하고 아늑해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승관은 그냥 민규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옅게 뿌린 듯한 향수, 그리고 그 향수의 향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민규 특유의 알파 향이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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