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앓고 난 덕분일까? 히트 사이클을 보내고 나니 그의 생각 따윈 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하, 백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날, 백작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고 어쩐지 잠잠하다 싶더니, 결국 올 게 오고야 말았다. 나는 가뜩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백작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노크를 두 번 하고 들어간다 말을 했지만,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백작이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기 싫은 얼굴이 함께 있었다. 카데 쿠흐.


"앉거라."


백작의 명령조에 나는 무어라 한 마디도 뱉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저번처럼 당연하다는 듯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모습이 참 고까웠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저번 일은, 아쉽게 되었구나."

"... 예."


백작은 내가 황태자와의 잠자리에 성공한 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때까지 이리도 잠잠했겠지.


"그런데, 최근에 다시 황태자와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송구합니다."


누구때문에 멀어졌는지, 백작은 알 턱이 없겠지.


"처신을, 잘 했어야지."

"... 송구합니다."


나는 조금도 그에게 품어본 적 없는 감정을 이야기하며 생각했다. 고작 이런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백작이 찾아왔을 리는 없고... 또 내게 무슨 일을 시킬까.


"아무튼, 오늘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백작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뗐다.


"카데를 네 호위로 입궁시키려 한다."

"예...?"


카데 쿠흐를 내 호위 기사로 입궁시키다니... 참 뻔한 속셈이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함이겠지.


"최근 2황자와 추문이 돌고 있더구나. 너도 원치 않았으리란 걸 잘 안다. 그자가 네게 찝쩍대지 못하게 네 둘째 형님이 도와줄 것이다. 이 얼마나 든든하냐."

"예..."


정말 내키지 않았다. 아니, 내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끔찍했다.


"그래, 이 형님이 그 누구도 네게 추파를 던지지 못하도록 지켜주겠다, 이 말씀이지. 영광인 줄 알라구."


그렇게 말을 하는 카데 쿠흐는 경박하기 그지없었다. 제 형인 피젠 쿠흐와 같은 피를 타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머지않아 황제 폐하를 통해 네게도 전언이 올 것이다. 오늘은 마음의 준비를 해 놓으라고 이리 찾아온 것이야."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 인내심을 짜내 대답했다.


"오늘은 이만 가보지."

"조만간 또 보자구."


그렇게 내 기분만 가라앉히고 두 부자는 응접실을 떠났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급하게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피젠 쿠흐. 그의 도움이 기껍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그일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적은 뒤, 란을 불렀다.


"란, 이것 좀 큰 형님께 전달해줘. 그리고 황제 폐하께 알현 신청을 하러 가야 하니 준비 좀 도와주고."

"예... 예? 지금요?"

"응."

"일어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제 괜찮아. 급한 일이니까 부탁할게."

"예..."


란의 눈에 의문이 서렸지만 내 말에 빠르게 준비를 도와주었다.


속전속결로 준비를 마치고 황제궁으로 간 나는 비서실을 찾았다. 3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황제 폐하께 알현을 신청하려 합니다."

"예, 저기 있는 신청서 작성하고 가십쇼. 며칠 내로 연통이 갈 겁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마친 이는 다시 자신이 하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예, 감사합니다."


나는 비서가 가리킨 곳으로 가 알현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제출함에 넣고 황제궁을 나왔다. 바로 별궁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이제 곧 이런 자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만 더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발을 돌려 황제궁의 정원을 구경했다.


황제궁의 정원은 별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황궁에서 생활한 지 이제 곧 1년이 다 되지만 황제궁의 정원을 이렇게 자세히 둘러본 건 처음이었다. 사실 별궁의 정원과 큰 차이는 없었다. 날씨 탓인지 아직 꽃이 피지 않아서일까? 이렇게나 넓은 황제궁 정원 전체에 꽃이 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는 했다.


봄에 꽃이 가득하게 핀 정원을 상상하며 길을 걷는데, 눈앞에 막다른 길이 나를 막았다. 이런 탁 트인 정원에 막다른 길이 있다는 게 신기해 그 벽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머지않아 그 벽 너머로 향하는 입구가 보였다. 아무래도 나를 막은 벽은 미로 정원의 외벽인 것 같았다. 들어가 볼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게야."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 내가 알현 신청을 마치고 온 황제 폐하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날 이후로 잘 지냈나? 몸치 좋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염려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구먼."


황제는 사람 좋아 보이게 웃으며 말했다.


"저... 그런데 이곳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그곳이 생각보다 넓어서 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서 들어갔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르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고 말이지."

"예?"


황제가 미로에서 길을 잃는다니... 황제와 미로, 미아.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뭐, 다 어릴 적 이야기지. 그때 이후로 잘 들어가지 않는다네."

"그렇군요..."


황제에게도 어릴 적이 있었겠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떠올려 보려는데, 황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우리 새아가는 황제궁까지 무슨 일로 왔는가?"

"아..."


그제서야 내가 온 이유가 다시 떠올랐다. 황제와 우연히 만날 수 있다니,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내게 부탁이라... 말해보게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도와주겠네."

"황송합니다. 헌데, 자리를 옮겨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황제의 뒤에 있는 긴 무리의 시종들을 보며 말했다.


"그렇구만. 내 생각이 짧았네.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지. 온실로 가서 이야기하지. 그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말일세."


황제는 아무나에 힘을 주고 말하며 내게 눈짓을 했다.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무시하며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 이제 눈치 볼 이도 없고... 말해 보게.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겐가?"


황제궁에 오기 전, 몇 번이고 생각한 말,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상상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황제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나는 손에 힘을 한 번 더 세게 주었다 풀고, 그와 함께 큰 숨을 내뱉었다.


"폐하, 제가 이 궁에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쇼."





<등장인물 프로필>

카데 쿠흐 (베타), 1326년 8월 18일생.
: 쿠흐 백작가의 차남. 장남인 피젠과는 다르게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하다. 형을 이어 2기사단 부단장의 자리를 이을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도, 훈련을 게을리한 탓에 기사단 단원으로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그만두고 망나니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벌써 벚꽃이 피었더군요. 같이 볼 사람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예쁩니다 ㅎㅎ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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