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관광객과 런던에 사는 사람들도 자주 찾는 웨스트민스터는 뉴트에게도 익숙하고 친숙한 장소였다. 이 지역은 런던의 중심으로 불리며 템스강이 있어 뉴트는 차분한 생각을 하고 싶을 때 종종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자주 찾는 장소에 뉴트는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온 것이 처음이라 걸음걸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관광객임을 자랑하는 민호는 고개를 숙일 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친숙함과 낯섦의 길에 서서 각자 다른 시각으로 웅장한 런던의 역사를 보고 있었다.


"처음 보지? 이런 건물."

"그렇지. LA에는 이런 건물이 없을걸?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본 적은 없어."

"바쁘게 살았나 보구나."

"바쁘게,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럴 수도 있고."

 여행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사는 곳의 풍경은 알고 있다. 하지만 민호에게는 그것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뉴트는 기억이 없는 것을 바빠서 제대로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쁘면 주변조차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잘 보이지 않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보다 나쁘게 하는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민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과연 내가 바빠서 그랬을까? 민호는 사막지대에 이런 건물은 안 어울린다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려함을 즐기는 미국에는 이런 고전적인 건물은 안 어울린다며 호탕하게 웃는 민호의 미소에 어색함만이 남아 있었다.


끝없는 길


12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긴 역사도 유명하지만, 특별히 궁전을 빛내는 것이 있었다. 그 건물을 지나쳐 온 탓에 뉴트는 민호의 팔을 쭉 잡아당기며 움직이던 발의 방향을 바뀌었다. 

"뭐야?"

 민호는 뉴트의 이끌림에 당황해 자칫 넘어질 뻔했다. 비틀거리며 뉴트의 옆에 선 민호는 생각보다 뉴트가 가까이 있음을 깨달았다. 뉴트는 휘청이며 중심을 잡지 못하는 민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 위로 넘어지려는 민호를 겨우 붙잡은 뉴트는 민호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쪽 가지 말고 저쪽에 이 궁전의 유명 명소가 있어. 멋대로 가지 마."

 민호는 코 앞에 다가온 뉴트의 얼굴을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뉴트의 눈이 이렇게 컸던가? 검은색 눈동자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금발 머리의 호리호리한 체형이라는 정도로 보고 있던 민호는 생각보다 크고 동그란 눈에 뉴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동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뉴트도 역시 동양인 특유의 동안 얼굴과 달리 그의 몸이 단단하고 크다는 사실을 그의 팔뚝과 어깨를 잡고서야 알았다.

"좀 구경 하자."

"어차피 다시 이쪽으로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뉴트는 투덜거리는 민호에게 천천히 다 볼거라고 말하며 뒤로 돌았다. 민호는 급히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뉴트를 따라 걸으면서 머리를 긁었다. 아까보다 조금 예민해진 뉴트의 반응에 민호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뉴트는 템스 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거리를 걸으며 템스 강 쪽으로 가는 사람들과 뉴트와 민호처럼 유명한 시계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뉴트는 런던의 대표 시계인 빅벤을 보기 위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어?! 나 이거 알아. 시계."

"그래, 많이 봤을 거야. 영화에도 많이 나오고,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지. 이름은 빅벤이야."

"응? 이거 궁전 바로 옆에 있는데 왜 이름이 따로 있냐?"

 빅벤. 우리가 익숙하게 본 큰 시계가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있는 탑으로 106m를 자랑한다. 원래 이 시계는 빅벤이 공식 이름이 아니었다. 시계탑에 달린 큰 종이라는 의미로 Big Ben 이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정식 명칭은 엘리자베스 타워였다. 하지만 요즘은 엘리자베스 타워보다는 빅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불린다.

"원래 이 탑 이름은 성 스티븐 타워였어. 옛날엔 시계가 있는 자리에 종이 있었는데 종 이름은 그레이트 벨이라고 하더라고 정확하게는 모르고. 성 스티븐 타워라는 이름이 있긴 했는데, 사람들은 빅벤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탓에 이름이 사라졌다가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기념을 하기 위해 빅벤을 엘리자베스 타워라고 공식 명칭이 생겼어."

"아, 지금 여왕?"

"응. 맞아."


 민호는 아는 단어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첫 여행 때 들었던 이름이 생각보다 머리에 잘 남아 있어서 1세와 2세의 차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민호는 뉴트의 얘기가 얼마나 기억에 오래 남는지 다시금 느꼈다. 그가 얘기해서 그런 걸까,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그런 걸까. 민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뉴트는 민호가 시계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뒤로 슬쩍슬쩍 움직이는 걸 보고도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저 탑을 보려고 애쓰는 민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그의 행동들이 귀엽게 보였다. 가끔 무식하게 행동하거나 멍청한 발언을 하긴 해도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그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뒤로 주춤거리던 그는 결국엔 뒤에 있는 사람과 부딪혔다. 그는 인상을 쓰며 뒤로 돌자, 뒤에 있던 사람이 민호를 보고 슬쩍 몸을 비틀었다. 저 험악한 표정과 큰 몸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위협을 준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신경 쓰고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을 테니.


  표정에 힘을 주고 뒤돌아보던 민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메라에 빅벤을 담아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을 들어 올리자 빅벤이 카메라에 가득 찼다. 그사이에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민호의 눈에 들어왔다. 금발의 큰 눈을 가진 청년이 민호를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빅벤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민호는 카메라에 뉴트와 빅벤을 담아 넣었다. 매번 그와 함께 걷고 자리에 앉아있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런던의 우아함과 잘 어울리는 그의 얼굴과 몸. 긴 코드를 입은 그는 화보를 찍는 것처럼 런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했다. 민호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뉴트는 이 런던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민호는 그가 카메라에 있으니 마치 잡지의 사진을 찍은 것만 같았다.

"야."

"...."

"뉴트."


 고개가 돌아오질 않는다. 민호는 그의 얼굴이 자신 쪽으로 돌려진 상태의 모습을 찍고 싶었는지 계속 뉴트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을 불렀을까, 뉴트의 이름을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부르고 나서야 뉴트의 얼굴이 민호 쪽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민호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린 뉴트의 눈동자를 카메라 화면에 가득 채웠다.


"왜?"

"아니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던 민호는 뉴트에게 들키기 전에 재킷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푹 찔러넣었다. 

민트 소설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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