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6일 슈퍼맨 + 배트맨 온리전에 배포했던 배트맨x슈퍼맨 BL 글원고입니다.

과학자 브루스와 외계에서 날아온 실험체 클라크 SF AU 설정입니다.

미완성 원고입니다.





눈이 마주쳤다, 고 생각했다. 브루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랬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서류에 나와 있는 바로는 실험체는 수면상태라고 했다.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도 당연히 감고 있다. 아무래도 실험체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게 문제인 듯싶었다. 수조의 강화유리에 반사된 빛을 보고 눈이 마주쳤다고 착각한 거겠지. 브루스는 억지로 본인을 납득시키고는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실험체에게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크립토니안. 새삼스럽게 감상적인 기분이 되는 꼬리표였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크립토니안들이 지구를 침략했다. 그들은 특유의 호전성과 노란 태양광 에너지를 몸에 축적할수록 더 강해지는 특질을 이용해 지구인들을 처참하게 살해했고, 지금 지구인들이 무사히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크립토니안이 지구를 침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우주에서 운석이 떨어져 내렸다. 당시는 몰랐으나 초록색 형광을 띤 그 광석은 멸망한 크립톤의 잔해였다.

크립토나이트. 광물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지금은 정치가로 더 유명한 한 과학자였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작명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코웃음이 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과학자란 작자들은 대부분 다 그런 식이었다. 커피에서 발견된 혼합물에 카페인이란 이름을 짓는 족속들이니.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 광석으로 인해 학살이 멈췄다는 점이다.

잔혹한 학살자들이 갑자기 쓰러진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던 지구인들은 이내 그 원인이 운석 때문임을 알아내었다. 전세는 대번에 역전되고 학살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큰 피해를 남겼지만 결국 지구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세간의 인식은 그런 식이었다. 죽은 사람 중 대부분이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으로 죽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는 이유도 그런 인식을 강화하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브루스의 생각은 달랐다. 내버려 둬도 곧 죽을 것이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목숨에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인 토머스 웨인은 학살로 인해 죽었다. 의사인 그가 한 명의 환자라도 치료하겠다며 격리구역으로 넘어간 지 고작 일주일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어머니 마사 웨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몇 달 동안이나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토머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브루스는 8살의 나이에 양친을 잃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지금 와서 복수하고 싶다느니 저 외계인을 증오한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 봤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궁금했다. 왜 지구에 온 것인지, 왜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죽인 것인지. 그렇게 해서 얻으려고 했던 게 대체 무엇인지. 알아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른 크립토니안은 크립토나이트에 너무 오래 노출된 탓에 모두 죽었다고 했다. 운이 좋은 한 개체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실은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몇십 년째 수조에 갇혀 그리 인도적이라 볼 수 없는 실험과 연구에 이용당하는 것보단 죽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을 터였다.

실험체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내고 서류를 넘기자 본격적인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인간과 거의 다름이 없는 신체를 가졌으면서 어떻게 맨몸으로 수많은 인간을 학살할 수 있었는지가 가장 첫머리에 설명되어 있었다.

저들은 지구의 노란 태양광을 흡수시켜 저장함으로써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세포를 가졌다. 태양광이 충분히 저장되고 나면 그들은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는 데다가 심지어는 눈에서 광선을 쏘고 날아다닐 수도 있으며 입으로는 모든 것을 얼릴 만한 냉기를 뿜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읽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능력들이지만 실제로 그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브루스도 잘 알고 있었다. 연구소를 안내해 주던 연구원은 우쭐대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이 연구 덕택에 기존에 있던 태양력 전지의 수십 배의 효율을 내는 태양력 전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죠.”

물론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온갖 매체에서 선전해 대니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브루스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연구원은 씩 웃어 보였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미소였다.

브루스는 자신이 어느새 다시 실험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록색의 반투명한 점액질 안에 잠긴 생명체는 인간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얘기를 듣자 하니 수술복 한 장이나마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 탓이라고 했다.

“하라는 실험은 안 하고 클라크한테 장난을 치려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클라크요?”

“예전에 크립토니안이 많을 때 구별하려고 적당히 붙인 건데, 지금도 다들 그렇게 불러요.”

물론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브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장난을 쳤죠?”

“뭐……. 질 낮은 장난이었죠. 그 왜, 아시잖아요.”

연구원은 대답을 피하며 차갑게 웃었다. 인간 남성과 흡사한 신체를 가진 알몸의 실험체에게 했을 법한 장난. 명확한 언급을 꺼리는 점까지 더하니 무슨 짓을 했을지 쉽게 짐작이 갔다. 이런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 역시도. 아마 적당히 화제를 전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캐봤자 득이 되진 않을 테니. 브루스는 알만 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위험하단 생각은 안 했었나 보네요."

“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무언가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 싶어 대화를 되짚었으나 아무 문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잠시 뒤 연구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무슨 소린가 했네. 클라크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라서 그렇게 위험할 건 없어요. 뭐……. 온순하죠.”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브루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미심쩍어서 그런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연구원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뭣하면 대화라도 해보시겠어요? 금방 준비 되거든요.”

“대화요?”

“네, 뭐. 복잡한 얘기는 힘들지만 간단한 얘기면요. 서류에도 아마 나와 있을 텐데. 없나요?”

브루스는 들고 있던 서류를 휙휙 넘겼다. 한참을 넘어가자 겨우 수면상태인 크립토니안을 깨우고 대화를 나눌 때에 대한 안내가 짧게 적혀 있었다.

“여태껏 나눴던 대화 사본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돼 있으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어요. 굳이 찾아볼 정도로 대단한 대화는 없지만요. 그런 건 우리 레벨로는 접근이 불가능해서.”

연구원은 수조 옆으로 다가가 기계를 조작했다. 서류 내용에 따르면 실험체를 각성시킬 약물을 투여하고 대화에 필요한 장치를 가동시키는 중인 듯했다. 안구의 움직임과 눈 깜빡임을 감지해 문장을 출력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다 보니 연구원이 그를 불렀다.

“이제 깨어났네요.”

브루스는 서류를 내리고 수조를 쳐다보았다. 인공 크립토나이트 점액질 너머로 실험체가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연구원이 마이크를 켜고 말을 걸었다.

“안녕, 클라크.”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연구원에게로 향했다. 한참 동안 눈이 깜빡이고 나자 합성된 기계음이 스피커로 출력되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잘 잤어?”

『네. 덕분에요.』

“새로 오신 분을 소개하려고. 브루스 웨인 박사님이셔. 오늘부터 여기서 같이 일하실 거야.”

연구원을 향해 있던 고개가 다시 천천히 돌아가 브루스를 향했다. 브루스는 처음으로 실험체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아플 만한 형광 초록색 액체에 잠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체의 눈 색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서늘한 파란색. 브루스는 그제야 아까 전에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저런 인상 깊은 눈이라면 잊어버릴 리가 없다.

한참이 지나도 실험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줄곧 실험체를 보고 있던 브루스는 어지럼증 비슷한 거북함을 느꼈다. 분명 눈을 마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특출하게 이상한 구석 없이 인간과 닮았는데도 이질감이 드는 외모였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산소마스크 탓도 있겠지만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에서 정감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클라크?”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연구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 실험체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것인지 몸을 약간 움츠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 행동이 컴퓨터를 오작동 시킨 것인지 스피커를 통해 무의미한 기계음이 출력되었다. 시끄러워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잠시 뒤 소음이 멈췄다. 연구원이 투덜거렸다.

“이게 이것 때문에 좀 그래요. 느린 것도 안 좋고.”

“어차피 위험하지 않으면 내놔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

“어……. 그렇죠, 네. 그렇긴 한데, 그러려면 저것도 다 빼야 하고 붉은 태양광등도 켜야 하고 일이 귀찮아서요. 아, 또 왜 내보냈는지 사유서도 써야 되구요.”

연구원은 턱짓으로 수조를 가리켰다. 수조에 가득 찬 인공 크립토나이트 점액질을 보며 브루스가 물었다.

“한번 사용하면 재사용이 불가능한가요?”

“음……. 딱히 그렇진 않은데, 빼냈다가 다시 넣는 것도 일이고 인간한테도 좀 위험해서. 아시다시피 방사능이 나오니까요.”

대화하는 사이 실험체가 무언가 이야기한 것인지 기계음이 들려왔다. 브루스는 다시 실험체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웨인 박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클라크라고 불러주세요.』

연구원이 건네는 마이크를 받은 브루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평범하게 대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머뭇대는 사이 실수로 전원이 켜진 듯 마이크에 붉은 빛이 깜빡였다.

“안녕. 난 그냥 브루스라고 불러도 돼.”

말하고 나자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브루스라고 불러도 된다고? 실험체에게 친한 척을 해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멍청한 실수였으나 이제 와서 정정하기도 이상한 꼴이었다. 브루스는 마이크를 끄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번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네, 브루스 박사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브루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잘 부탁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모르모트가 연구자에게 저를 잘 부탁한단 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질 나쁜 헛소리. 제 처지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일부러 한 말일까 궁금해졌다.

“그래.”

그러나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브루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고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마지막 남은 크립토니안이라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삼십 년이 가깝게 흘렀다. 당시 어렸던 실험체가 대학살의 주범일 리는 만무했다. 당연히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물어도 브루스가 원하는 대답은 얻을 수 없을 터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지.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갑자기 들려온 기계음에 브루스는 놀라 실험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멍한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험체에게 걱정 당했다는 것을 깨닫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 왈칵 밀려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러나 브루스로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랐다. 고개를 돌리자 별 반응 없이 멀뚱하게 서 있는 연구원이 보였다. 어떻게 이 대화를 들으면서도 아무 감흥이 없을 수가 있는지. 아니면 혹시 자신이 이상한 것일까? 브루스는 혼란스러워졌다.

크립토니안은 분명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주범, 동정심 따위 가질 필요 없는 존재였을 터다. 여태껏 그렇게 배웠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브루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온순하다’ 따위 낮잡아 보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평범하고 예절 바른 청년이었다. 저 수조 밖으로 나와 평범한 옷을 입고 서있으면 그가 저 잔혹한 외계인 중 하나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조 안에 있었고, 제게는 독이나 다름없을 액체 속에 잠겨 실험을 당해왔고, 심지어는 그 와중에도 인간을 걱정할 수 있는 존재였다.

브루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언가 얹힌 듯 뱃속을 꾹 눌러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저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동족이 죄를 지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수십 년간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자를,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클라크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걱정해준 건 고마워.”

브루스는 주저하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순수한 호의라기에는 죄책감이 더 많이 섞인 인사였지만 어쨌거나 빈말만큼은 아니었다. 연구원이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클라크의 눈 역시도 브루스를 향한 채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놀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의 눈에는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졌다.

『천만에요.』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자 기계음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짧은 문장이었다. 뭐라고 해야 대화를 더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브루스에게 연구원이 물었다.

“그럼 대화는 이쯤 할까요? 아직 둘러볼 데가 많으니까요.”

브루스는 재빨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갑자기 끼어드는 연구원에게 놀란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이대로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정작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세요? 뭐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연구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어물거리고 있어 봤자 수상쩍게 보일 뿐이다. 별것도 아닌 일로 쓸데없는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럼 됐어요.”

브루스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연구원은 클라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깨울 때와 마찬가지로 기계를 조작했다. 식도로 삽입된 관을 통해 수면제가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브루스는 속이 꼬이는 것 같은 기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안녕히 가세요.』

클라크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저 잠들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어쩐지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와 긴 복도를 걷는 내내 연구원은 쉴 새 없이 연구에 대해 설명해댔다. 브루스는 연구원의 말에 따라 서류를 적당히 넘겨 대며 그가 하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들이 클라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생기 없는 표정으로 느리게 눈을 감던 모습이 왜 그렇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지조차 몰랐다. 크립토니안, 잔인한 학살자, 실험체, 클라크. 부모를 잃고 자라난 아이, 자신처럼.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동정심 따위는 가져 보았자 쓸모가 없었다. 하물며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기까지 하다니. 멍청한 짓이었다. 이건 브루스 개인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실험이 아니다. 애초에 복수심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을 터였다. 브루스는 어디까지나 더 많은 사람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무슨 일 있어요?”

연구원이 물었다. 자신과 열 걸음 쯤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브루스는 그제야 자신이 걸음을 멈춘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브루스는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했네요.”

연구원은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럴 수도 있죠. 어쨌든 인간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다고 말하는 연구원의 태도는 전에 비해 유독 부드러웠다.

“하지만 앞으론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예요.”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건 좋지 않은 징후였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이웃 나라와의 마찰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겠지. 크립토니안 연구는 전쟁의 행방을 좌우할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브루스가 바라든 그렇지 않든 간에.

프로필 사진은 맘벅님(트위터 계정 @bukram1116)께서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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