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둔 창문 사이로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청은 창틀에 걸터올린 다리를 내렸다. 모기에 물렸는지 무릎이 간지럽다. 손톱으로 십자 모양 자국을 내고는 도로 창틀에 다리를 올렸다. 청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플라스틱 통에서 자두 하나를 꺼냈다. 물기를 흰 반팔 티셔츠에 문질러 닦고는 한입 베어먹었다.


“침대에 누워서 먹지 말라니까.”


엄마의 말에도 청은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청은 뚝, 뚝, 제 얼굴로 떨어지는 자두 물을 엄지로 닦아 냈다. 여전히 느껴지는 진득함에 결국 제 반팔 티셔츠를 끌어 올려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그 덕에 새하얀 배가 드러났다. 엄지를 타고 자두 물이 흘렀다. 청은 그걸 혀로 핥아 올렸다. 시고 달다. 씨만 남게 되면 청은 그걸 입안에 넣고 굴렸다. 데루룩, 데루룩. 입천장에 닿는 딱딱하고 거친 느낌이 썩 좋지만은 않다. 청은 씨를 이로 살살 깨물다 결국 플라스틱 통에 뱉어냈다.


“엄마 갈게.”

“응.”

“문 잘 잠그고 있고.”

“응.”


침대에 누운 상태로 짤막하게 답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면 청은 꾸물꾸물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 저가 다리를 올리고 있던 창틀에 몸을 기댔다. 타이밍을 노리다 방충망을 열고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또 봐.”


청의 말에 엄마는 웃었다. 청은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길게 목을 빼내고는 지켜보았다.


엄마가 떠나고 나면 홀로 남은 청이 하는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있거나, TV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리모컨을 들고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청은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았다. 썩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별달리 볼만한 게 없었다. 청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덥다. 엉덩이가 축축했다. 저거만 다 보고 씻어야지. 청은 그런 생각을 하며 리모컨을 든 손을 소파 밑으로 떨구었다.




/




이곳의 바다는 위험했다. 땅이 울퉁불퉁해 물속에 들어가 놀다 보면 푹, 푹 발이 꺼지고는 했다. 한두 번 일이 생길뻔한 게 아니었다. 그 때문에 어른들은 절대 바다에 가지 말랬다. 땅에 구덩이가 너무 많아 위험하다고. 청의 부모님도 종종 그 말을 꺼냈다. 바다는 위험하니 절대 가지 말아라, 하고. 하지만 청을 포함해 아이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위험한 건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물속에서 놀다 보면 푹, 푹 꺼지는 땅에 코로 물을 마시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청은 수영을 잘했으니까. 구덩이를 잘못 밟아 휘청거려 머리끝까지 물에 잠길 때면 청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헤엄을 쳤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것이라고 청은 생각했다.


오늘 역시도 그랬다. 친구 여럿과 함께 바다로 향하던 길이였다. 샌들을 신은 탓에 밟히는 모래가 신경이 쓰였다. 결국, 청은 샌들을 벗고선 친구들의 뒤를 따랐다.


발바닥이 따갑다. 나뭇조각을 밟은 모양이었다. 청은 표정을 찡그렸다.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 물었다. 청은 비틀거리며 제 왼발을 확인했다.


“먼저 가!”

“알았어. 맨날 놀던 곳으로 와.”


청은 자리에 쭈그려 앉아선 발을 확인했다.


이곳의 모래는 썩 부드럽진 않았다. 저 멀리서 오는 건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때문인지 항상 바다를 포함해 모래사장은 더럽기만 했다. 이렇게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나무 가시나 유리에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청은 익숙하게 손을 더듬었다. 아픈 곳을 발견하면 여드름을 짜듯 양 엄지로 그 부근을 힘주어 눌렀다. 살짝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그걸 빼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나름 버틸 만은 했으나 또 가시가 찔릴까 두려웠다. 청은 샌들을 신을까 말까 고민했다. 곧 물속으로 들어갈 테니, 괜찮겠지 싶었다. 슬리퍼를 양손에 들고선 걸었다. 친구들은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은 홀로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매일 같이 친구들과 걷다 홀로 걸으려니 외롭기만 했다. 오늘은 가서 뭐 하고 놀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조금은 낯선 뒤통수가 보였다. 청은 표정을 찡그렸다. 아까 친구 중에 저런 옷을 입고 있던 애가 있던가. 청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옷도 그렇고 키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애가 없었다.


이 근방에 청이 모르는 애는 없었다. 뒷집에 사는 철근이부터 시작해서 몇 달 전 이사를 온 영은이까지. 청은 이곳에 사는 모든 아이를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애가 있다니. 샌들을 손에 든 청이 다가갔다. 야. 짤막하게 부르니 뒤를 돌아본다. 바람이 불었다. 청은 표정을 찌푸렸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눈을 부비고 있으니 아이는 청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청은 놀란 티를 냈다. 눈이 따끔했다. 손으로 눈을 부비며 아이를 보았다.


“너 누구야?”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청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는 움직일 생각도 않고 청을 보았다. 야. 청은 다시 아이를 불렀다. 누구냐니까. 닿을 듯 가까운 거리까지 걸어가니 아이는 저쪽으로 달음박질을 치고 말았다. 놀란 청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이가 달려간 쪽을 보았다.


“야! 그쪽은……”


어른들이 거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 말랬는데. 걸리면 진짜 혼나는데.


이미 아이는 떠나버렸다. 청은 꿍얼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리 생각하고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




너희 혹시 새로 이사 온 애 아니, 하고 청이 물면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이사를 온 애는 영은이 밖에 없잖아. 청은 샌들을 팡팡 털었다. 머리카락은 이만하고 또…… 청이 설명을 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애는 모르겠다는 말만이 들려왔다. 청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분명 봤는데. 이 근방에서 못 보던 앤데. 그 아이를 생각하던 청은 그만 들어오라는 아이들의 재촉에 샌들을 번지고는 물로 달려들었다.




/




“야!”


또 그 애였다. 청은 다급하게 아이를 불렀다. 혹 도망갈까, 도망가지 말란 말까지 덧붙이며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청의 말을 들은 건지 도망가지 않았다. 멀뚱히 서선 청을 보았다.


“나는 청이야.”


청은 제 이름을 소개했다. 네 이름은 뭐니. 물음에 아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대화하기가 싫은 걸까. 청은 눈동자를 데룩 굴렸다. 애들은 이사 온 애가 없댔는데. 청은 제 눈앞에 서 있는 아이가 누구일까, 에 대해 생각했다. 저 옆 마을 애일까, 아니면 잠시 내려온 애일까. 청은 어느새 아이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나한테 말해 주기 싫어?”


청의 물음에 아이는 도리질을 했다. 청은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청은 샌들을 신었다.


“여기서 살아?”

“…….”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산다고? 그럼 막 이사를 왔다는 건가. 청은 아이를 보았다. 친구들한테 소개해줘야겠다. 청은 웃었다. 저쪽으로 가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소개해줄게. 청의 말에 아이는 도리질을 했다. 어쩐지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청은 조심스레 물었다. 싫은 거냐고. 그럼 아이는 또 도리질을 했다.


“너 혼자 노는 거 좋아해?”


도리질.


“……애들이 아직 좀 낯설어서 그렇구나.”


도리질.


“뭐야. 그럼……나랑만 놀고 싶어?”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나 싶어 말을 뱉어낸 청은 놀란 티를 냈다. 너도 참 독특한 애구나. 그리 말하고는 저 뒤쪽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친구들은 재미있게 놀고 있을 터였다. 아쉽기는 했지만, 오늘은 가지 않기로 했다. 뭐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청은 아이를 보았다.


“네 이름은 뭐야?”


물음에 아이는 제 입가를 가리키고는 손으로 자그맣게 엑스자 표시를 해 보였다. 아. 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왜 말을 하지 않나 했더니. 청은 아이를 보았다. 그럼 아이는 제 귀를 가리키고는 아까와는 달리 손을 말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청이 알아먹지 못하자 아이는 이리 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청이 앞으로 다가갔다. 손목이 붙잡혔다. 아래로 당긴 탓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


네 목소리, 들려.


모래사장 위에 삐뚤빼뚤한 글이 적혔다. 청은 아일 보았다. 그럼 아이는 아래를 보라는 듯 손끝으로 아랠 가리켰다.


여름.

내 이름.


청은 아이를, 아니 여름을 보았다. 이름 예쁘네. 그리 말하곤 웃었다.




/




청은 무얼 하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는 애였다. 반찬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도, 늦게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마쳐도, 어버이날 용돈을 다 써 뭘 할까 고민하다 삐뚤빼뚤 카네이션을 만들어 가슴팍에 달아드려도. 그냥 무얼 하든 잘한다고, 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는 아이였다. 청은 그냥 모든 게 쉬웠다.


청은 사람들이 자길 좋아하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그걸 이용했다. 청이 저기 가서 물놀이를 하자, 하고 말하면 친구들이 갈 걸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매일같이 하는 물놀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청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친구들은 청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청은 여름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갔다. 자길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종이를 넘기니 여름이 청의 정수리를 쓰다듬는다. 책을 읽던 청은 고갤 들어 여름을 보았다. 바람이 분다. 청의 머리카락과 책장이 팔랑거렸다. 청이 표정을 찡그리니 여름이 청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볼에 살짝 닿는 여름의 손끝이 차다. 청은 고맙다는 말 대신 웃어 보였다.


여름과 함께 있는 시간은 고요했다. 청은 몸을 뒤집었다. 책을 덮어 머리 밑에 깔고는 편히 누웠다. 배 위에 제 양손을 포개어 올리곤 여름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은 참 예뻤다. 여름에게선 기이한 분위기가 풍겼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차갑고, 고요한……. 바다. 그래, 마치 바다 같았다. 여름은 꼭 바다 같았다.




/




너 요새 왜 우리랑 놀지 않느냐는 친구들의 투정이 들려왔다. 창틀에 걸터앉은 청은 기침을 했다. 감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답을 하고는 손에 든 담요를 어깨에 걸쳤다.


“그럼 어쩔 순 없지만……”

“다 나으면 같이 놀자. 소개 시켜주고 싶은 애가 있어.”

“누군데?”

“있어.”


청은 웃었다.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친구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어깨에 걸쳐 두었던 담요를 밀어냈다. 청은 힘을 뺐다.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간다. 침대 위로 떨어진 청은 제 등에 불편하게 깔린 담요를 옆으로 치우고는 발로 창문을 닫았다.


여름은 낯을 심하게 가렸다. 청이 아닌 다른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도,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청은 그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저를 좋아한다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청은 여름이 좋았으니까. 청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모자를 쓰곤 샌들을 신었다.


청은 바다가 좋았다. 머리끝까지 바닷속에 집어넣고는 헤엄치는 걸 좋아했다. 바닷물에 눈이 따끔따끔한 것도 괜찮았다. 그와 반대로 여름은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댔다. 차갑기만 해서 무섭다고. 온통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이 마을에서 바다를 싫어하는 애는 아마 여름밖에 없을 것이라고 청은 생각했다. 청의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바다를 좋아했다.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뒷집에 사는 아줌마 등을 포함해서 모두가. 참 별난 애구나. 청은 여름을 별난 애로 생각했다. 바다가 재미있기는 했지만, 굳이 여름을 끌고 바다로 향하지는 않았다.




/




“여름.”


이리저리 천이 찢긴 버려진 의자에 앉은 청은, 바닥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여름의 정수리를 보았다.


“예전에 들은 건데. 여기서 보는 노을이 제일 이쁘대.”


요새의 청과 여름은 붙어 다니는 일이 잦았다. 아침부터 부모님이 오기 전까지. 그렇게 붙어 다녔지만, 같이 노을을 본 일은 없었다. 청은 그게 아쉬웠다. 이미 여름은 노을을 지겹도록 봤을지도 모르지만, 청은 여름과 함께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같이 보자.”


청은 무릎을 세웠다. 볼을 갖다 대곤 여름을 보았다. 여름이 고갤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청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예쁠 거야. 청의 말에 여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나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엘 가자고?”


청은 여름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저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다시 물으니 여름이 고개를 끄덕인다. 청은 신발 밑창으로 방금 여름이 쓴 글을 지웠다.


“안돼.”


청의 말에 여름이 청을 보았다.


“진짜로 어른들한테 혼날 거야. ……바다에 가서 노는 건 상대도 안 될 만큼 혼날거야.”


여름은 괜찮다고 했다. 위험한 건 하나도 없다고, 분명 즐거울 거라고. 여름의 당당함에 청은 고민했다. 가도 괜찮을까. 그렇지만 들키면 정말로 크게 혼이 날 게 분명했다. 청은 머뭇거렸다. 그곳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냥 어른들이 위험하다, 위험하다 하기에 가보지 않았다. 그곳 말고도 재미있는 곳은 많으니까. 친구들도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 굳이 그곳에 가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여름이 자리에 일어섰다. 청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청은 마지못해 일어섰다. 가면 안 되는데…….


어른들이 그곳을 가지 말라고 한 이유는 단순했다. 위험하니까. 낭떠러지가 있어 떨어질까 위험하지 그곳에서는 놀지 말라고 했다. 청은 위험한 게 싫었다. 푹푹 구덩이가 패인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놀았지만, 청은 위험한 게 싫었다.


청의 손목을 붙잡은 여름은 달렸다. 손을 미끄러트렸다.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청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찬 여름의 손가락이 자리 잡았다.


청은 몸에 열이 많았다. 그래서 여름이면 뜨겁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가까이 붙지 말라며 구박을 하곤 했다. 그와 반대로 여름의 손은 참 차가웠다. 청은 여름의 손을 보았다. 너 참 손이 차구나. 그렇게 말하니 여름이 고갤 돌려 청을 보았다.


도착한 곳은 청이 생각한 낭떠러지가 아니었다. 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냥,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다였다. 청은 조용히 바다를 보았다. 물이 깊어 보였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 바다. 청은 고갤 돌려 여름을 보았다. 괜히 겁을 먹었다 싶었다. 청은 수영을 잘했으니까.


여름이 웃었다. 괜찮지,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겁을 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른들은 이게 뭐라고 무서워한 거야. 청은 다시 바다를 보았다. 다른 바다보다 짙은 푸른색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래도 어른들한텐 말하지 말자. 혼날 테니까.”


청의 말에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은 다시 바다를 보았다.




/




청과 여름은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 그곳에서 만났다. 어느 날은 청이 먼저, 그리고 어느 날은 여름이 먼저 그곳에서 기다렸다. 여름과 별달리 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재미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집에 갈 시간이었다. 청은 여름에게 손을 흔들었다.


부모님은 잔소리가 심했다. 조금만 늦게 들어오면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닐 기세로 청아, 청아, 하고 부르며 돌아다니고 해서, 청은 어쩔 수 없이 해지기 전에 들어가야만 했다.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내일 보자. 그 인사를 하곤 청은 마을 쪽으로, 여름은 반대편으로 걸었다. 청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걸음이 절로 다급해졌다. 멀리서 집이 보였다. 청은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선 씻고, 그리고 주린 배를 채워야지, 하고……


“너 또 물놀이하고 오는 길이야?”


목소리에 청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보니 옆집에 사는, 청보다 네 살이 더 많은 수은이보였다. 청은 도리질을 해 보였다. 물놀이는 무슨. 물놀이를 했으면 몸이 이렇게나 보송할 리가 없다.


“하지 않기는. 너한테서 물 냄새가 진동한다.”

“물속엔 들어가지도 않았어.”


청은 킁킁거리며 제 냄새를 맡았다. 어깨도 킁킁, 손등도 킁킁, 그리고 옷을 잡아당겨 냄새를 맡았다. 본인의 냄새라 그런지 수은이 말한 바다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물 냄새는 무슨. 청이 중얼거리자 수은은 웃었다.


“바다 다녀왔다고 엄마한테 이르지 않으니까, 굳이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청은 입을 삐죽 내밀곤 수은을 보았다. 청이 무슨 말을 하든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청은 가지 않았다고 빽 소리를 지르곤 수은을 지나쳐 걸었다. 가지 않았다니까.




/




“엄만 저 끝에 가본 적 있어?”

“저 끝?”

“아니 마을 끝 말야……맨날 가지 말라고 하던 곳.”

“청아, 너 혹시 그곳에 갔니?”


청의 물음에 엄만 고갤 들었다. 청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아니 갔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청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어른들은 항상 저러지. 청은 제게 올 잔소리가 두려워 홀랑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엔 무서운 건 하나도 없는데. 다들 겁쟁이야. 청은 발끝으로 선풍기를 튼 청은 얇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




좁은 일인용 소파. 꾸깃꾸깃 들어가 앉은 청은 팔걸이에 다리를 올리고선 책을 읽었다.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으니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아, 가서 수일이네 집에 이것 좀 가져다줄래. 그 말에 청은 읽던 책으로 제 가슴팍을 덮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에 매달린 듯 엄마가 거꾸로 보였다. 싫은 소리를 하기도 전에 청의 배 위로 바구니 하나가 올라왔다. 청은 어쩔 수 없이 소파 밑으로 발을 내렸다.


“바다 쪽으론 가지 말고.”

“네.”

“빨리 다녀와.”

“네.”


바구니에 든 건 가지가 전부였다. 청은 오른손으로 빨간 바구니를 들었다. 슬리퍼를 신고서 터덜터덜 걸었다.


밖은 어둡다. 그렇지만 가로등이 가는 길목을 비추고 있어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 으스스해졌다. 느리게 걷던 청은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거의 달리다시피 한 속도로 걸었다. 멀리서 수일이의 집이 보이면 청은 크게 수일이의 이름을 불렀다.


“청아.”

“아, 깜짝이야!”


마당에 있던 수일이가 불쑥 튀어나오자 청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허리를 굽혀 가지를 주운 청은 묻은 먼지를 대충 옷에 문질러 닦아 냈다. 다행히도 상처가 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이 가지를 내밀자 수일은 웃었다. 나도 마침 이거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그 말과 함께 수일이 내민 것은 포도였다. 바구니에 수일이 준 포도가 담겼다. 청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아까보다는 가볍게 걸었다. 포도 두 알을 따 입안에 집어넣었다. 청은 과일을 좋아했다. 밥보다 더 좋아해서 어느 날은 밥을 먹지 않고 하루종일 과일만 먹어댔다. 속이 쓰려 떼굴떼굴 굴러다니면서도 청은 과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으면서 포도를 먹을 생각이었다. 벌써 좋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청의 어깨를 툭 쳤다. 처음엔 본인의 머리카락이겠거니 생각을 하고서 넘어간 청은 다시 한번 툭 치는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 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놀랐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청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여름이 서 있었다. 청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제 옆을 보았다. 떨어진 포도가 보였다. 떨어진 포도알을 주워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아깝다. 청은 울상을 지으며 포도알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청은 불쾌한 티를 전혀 내지 않고 포도알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씨와 껍질까지 모조리 씹어 삼키고는 여름을 불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어둡다. 입 모양을 보고 말을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청이 계속 말을 알아먹지 못하자 여름은 청의 팔뚝을 붙잡고는 아래로 당겼다. 마주 보고 쪼그려 앉았다. 청은 바구니를 저와 여름의 사이에 두고는 글씨를 쓰고 있는 여름의 손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여름의 말에 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름을 보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놀란 와중에도 청은 포도알 하나를 더 따 입안에 집어넣어 우물거렸다. 심부름 가는 나를 보고 여기서 기다렸다는 소리인가보다. 청은 그렇게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밤이 늦었는데. 계속 여름을 보던 청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먹을래, 하고 물으니 여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포도알을 집었다. 아까 땅에 떨어진 것이라, 청이 다급하게 여름을 불렀다. 여름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 들린 포도알을 내려놓곤 새로운 포도알을 따 여름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름이 조심스레 포도알을 입에 집어넣었다. 꼭 처음 먹어 보는 애 같다. 청이 맛있지, 하고 물으면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되게 손 차갑다.”


나는 엄청 뜨거운데.


청이 그렇게 중얼거리니 여름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은 청에게서 시선을 떼어 낼 줄을 몰랐다. 어찌나 그 시선이 노골적인지, 청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데룩굴렸다.


“그런데……너 왜 자꾸 나 봐.”


청의 물음에 여름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글자를 적었다. 청은 여름을 기다려주지 않고서 저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너 나 좋아해?”


청의 물음에 여름의 손이 멈췄다.


“좋아하면 자꾸 보게 되잖아.”


청아, 청아. 멀리서 청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청아, 청아. 청은 저 뒤를 보았다. 엄마한테 죽었다. 그리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름에게 내일 보자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선 냉큼 달렸다.




/




청이 바닷물에 들어가 놀 때면 여름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꼭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 싫다는 듯, 바닥에 쭈그려 앉아선 청을 구경했다. 청은 바다를 좋아하지만 혼자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다. 혼자 잘 노나 싶었는데, 흥미를 잃었는지 가만히 서선 여름을 보았다. 괜히 물을 발로 차 튕기고는 물 밖으로 나왔다. 물에 젖은 민소매가 몸에 무겁게 달라붙었다. 청은 대충 비틀어 물기를 짜냈다.


“혼자 노니까 재미없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청은 손등으로 제 턱을 문지르고는 여름의 옆에 털썩 앉았다. 혼자 손을 꾸물꾸물 움직이던 청은 여름을 보았다. 저쪽에 애들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하고선 다시 제 손을 보았다.


“……싫으면 말고.”


죽어가는 목소리. 여름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청은 제 무릎을 쓰다듬었다. 아, 그만 집에 갈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여름이 청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일, 같이 노을 볼래.


여름의 물음에 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같이 보자. 그렇게 답하고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




청은 찰방찰방 물을 찼다. 여름을 기다렸다. 이 시간이면 올 법도 한데, 여름은 오지 않았다. 청은 하염없이 여름을 기다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누웠다. 온몸이 차게 젖는다. 청은 몸에 힘을 뺐다. 동, 동 떠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청은 귀에 물이 들어가는 느낌을 무시하고는 가만히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오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청은 그만 일어설 생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발이 닿지 않았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청은 당황했다. 수영 잘하는 청이었으나 몸은 자꾸 아래로 가라앉았다. 청은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도 못 하고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갑자기 청의 몸이 들렸다. 청은 기침을 했다. 입에서 짠맛이, 코에선 매운 느낌이 났다. 청은 손으로 얼굴의 물을 훔쳐냈다. 무슨 일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화가 나 보이는 여름이 있었다.


조심해야지.


여름은 마치 그렇게 말을 하는 듯했다. 기침이 잦아들면 청은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미안, 하고 사과를 했다. 여름은 청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뭍으로 청을 데리고 나왔다. 동, 동. 청은 마치 튜브처럼 힘없이 여름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물 밖으로 나온 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머리카락을 넘긴 청은 조용히 여름을 보았다.


“언제 온 거야.”


청의 물음에 여름이 고갤 돌려 청을 보았다.


큰일 날뻔했어.

“괜찮아.”

바다는 위험해, 청아.


여름의 화는 금방 가라앉았다. 눈치를 보던 청은 여름의 옆에 가서 섰다.


“헤엄 잘 치네.”


바다 싫어한대서 수영 못할 줄 알았더니. 청의 말에 여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청은 여름의 어깨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여름은 피부가 차가웠다. 청이 조용히 여름의 손을 잡으면, 여름은 뜨겁다는 이유로 잡힌 손을 빼냈다. 청은 여름을 보았다. 여름에게선 이상한 분위기가 풍겼다.


청아, 실은 내일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보여주고 싶은 거?”


궁금했다. 뭔지 귀띔이라도 좀 해달라고 해도 여름은 단호했다. 꼭 내일이어야만 된댔다.




/




청은 창가를 보았다. 어쩐지 빗소리가 난다 했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못 나가겠구나. 창문을 닫은 청은 침대에 도로 엎어졌다. 청은 제 팔뚝을 쓰다듬었다. 매일같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놀다 보니 살이 벗겨졌다. 손끝으로 얇은 비닐 같은 딱지를 뜯었다.


습하고, 또 습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몸은 진득거렸다. 멍하니 누워 있던 청은 선풍기를 틀었다. 혼자 나와 있는 건 아니겠지. 침대에 걸터앉은 청은 여름을 생각했다.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매일같이 나오던 여름을 생각하다 보니 조금 걱정이 됐다. 연락할 방도를 알면 연락이라도 해볼 텐데, 청이 여름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이름이 여름이라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놀기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바다를 싫어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청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뭐 먹을 게 있나 둘러보았다. 온통 짠 냄새가 가득한 반찬 통을 훑어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닫은 청은 식탁 위에 올라가 있는 토마토를 집었다. 물로 대충 닦아 내곤 민소매에 물기를 닦아 냈다. 토마토를 한입 베어먹으며 소파에 가 앉았다.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별달리 재미있는 건 나오지 않는다. 리모컨을 발끝에 던진 청은 벽면에 달린 달력을 눈에 담았다. 내일이면 입추로, 벌써 방학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숙제해야 하는데. 청은 그 생각‘만’하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옮겼다.


토마토를 다 먹었다. 배가 다 차지는 않았지만 일어서기는 귀찮아서 휴지를 뽑아 손을 닦아냈다. 무릎을 끌어안고서 TV를 보았다. 썩 재미가 있진 않지만 그만큼 시간 때우기 좋은 건 없기에, 계속 TV를 보았다.


번쩍거렸다. 청은 고갤 돌려 창문을 보았다. 다시 한번 번쩍거리더니, 우르릉, 하고 소리가 났다. 쉬이 그칠 비는 아닌 모양이다. 소파 밑으로 발을 내린 청은 창문을 닫았다. 그새 바닥엔 물이 고여 있었다.


화장실 문 앞에 놓여있는 발수건을 굳이 발로 질질 끌고 온 청은 창문 아래에 고여 있는 물을 닦아냈다. 또 번쩍거린다. 청은 TV를 꺼야 하나 고민했다. 전기가 나가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사이 또 한 번 천둥소리가 나더니 팟 하는 소리와 함께 TV가 꺼졌다. 청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집안의 전기가 나간 모양이다. 전기가 나가서 어둑한 방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청은 제 방으로 향했다. 습해 축축한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책을 읽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어 결말은 알고 있는 책이었지만, 청은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쿵쿵쿵,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그저 빗소리, 혹은 천둥소리이겠거니 생각한 청은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수일이일까, 아니면 저 멀리서 사는 진수. 청은 책을 덮었다. 본인 집도 전기가 나가서 심심하다고 찾아온 걸까. 그리 생각하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곤 창틀에 걸터앉아서 바깥을 볼 때였다.


“여름!”


청은 놀란 티를 냈다. 문 앞엔 여름이 서 있었다. 그것도 홀딱 젖은 상태로. 청은 침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큰 보폭으로 단숨에 현관까지 향했다. 문을 열었다. 청은 여름의 손목을 잡고는 집 안으로 당겼다. 여름이 힘없이 딸려왔다.


청은 걱정스런 얼굴로 여름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찬 피부가 더 차게 느껴졌다. 여름의 코끝에, 턱에 물방울이 진 것이 보였다. 청은 여름에게 잠시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선 욕실로 가 마른 수건 하나를 들고 나왔다. 여름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주었다.


“설마……기다렸어?”


물음에 여름이 고갤 끄덕였다.


“비 오는데?”


그럼 또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은 여름에게 들어와 앉으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던 청은 제 방으로 달려갔다. 손에 잡히는 옷 아무거나 들고나와 여름의 손에 쥐여주었다. 감기에 들지도 모르니 갈아입고 나오란 말을 남기고선 청은 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청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어서 여름이 이렇게 온 걸까. 소파에 쭈그려 앉아선 여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여름이 나왔다. 청은 여름을 보았다. 여전히 머리카락은 젖은 상태다. 수건을 건넸다. 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름이래도 감기에 들까 걱정이 됐다. 청은 찬장을 뒤적였다. 이즈음에 유자차가 있었던 것 같은데. 평소 냉장고 문이나 열줄 알았지 이렇게 무언갈 찾는 경우는 처음이라 더디기만 했다.


여름이 청의 어깰 툭툭 쳤다. 찬장의 문을 닫은 청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어?”

청아 바다에 가자.

“비 오잖아.”

바닷속엔 비가 내리지 않아.


청은 여름을 보았다. 바다엘 가자고? 바다라고 하면 싫다고 하던 애가 그런 말을 꺼내다니 놀랍기만 했다. 그렇게 놀고 싶었나. 청은 밖을 보았다. 비는 여전히 거셌다. 안된다고, 위험하다고 말을 해도 여름은 고집을 부렸다. 꼭 오늘이어야만 된단다. 청은 고민을 했다.


“안돼. 감기에 걸릴 거야.”

보여줄게 있어.

“중요한 거야?”


청은 고민했다. 분명 큰일 날 텐데.


여름이 고민을 하는 청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빨리 가자는 듯 문가로 잡아끌었다. 이렇게까지 적극성인 여름은 처음이었기에 청은 보여준다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슬리퍼를 신고 우산을 챙겨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우산을 펼치기 무섭게 여름이 달렸다. 손에 들린 우산이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청이 우산, 하고 떨어진 우산을 걱정했지만, 여름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




저쪽엔 무서운 게 있단다.

무서운 거요?

사람을 홀리는 괴물 말이다.




/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청은 아무 말도 않고 물수건으로 눈을 덮었다. 차갑다가도 금방 따뜻해진다. 청은 입술을 씹었다. 이 소란의 원인은 청에게 있었다. 말을 듣지 않고 가지 말라는 곳에, 그것도 비바람이 치는 날에 갔기에.


드문드문 나는 기억을 파헤쳤다. 분명 바다에 갔고, 여름이…….


어른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처음은 청을 겨냥해서, 그리고 나중엔 서로를 겨냥해서.


“그러니까, 진작 애 데리고 올라가자고 했잖아요. 애 데리고 해 뜨는 대로 올라갈 테니 그런 줄 아세요. ……청아, 청아?”


청은 물수건을 옆으로 치웠다.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도 모르고 몸을 일으켜 멀뚱히 벽을 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보았다. 비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서늘하고, 눅눅한 바람이 청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청은 창아래로 발을 내렸다. 가볍게 뛰었다. 발바닥에 축축한 것이 닿는다. 청은 발바닥을 닦을 생각도, 그리고 신발을 챙길 생각도 못 하고 무작정 달렸다.




/




나 봤어. 물속의 너를 말이야. 넌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지.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 날 구해준 게 너라고.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내 주변에 머물렀고 나를 바다로 이끈 거지. 맞지, 응. 넌 괴물이 아닌 거지. 어른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 홀리는 괴물이, 바다로 이끄는 괴물이 아닌 거지, 응.


청아.


응.


청아. 그거 아니.


무얼.


나는 바다를 무서워한단다. 바다 없인 못 살면서. 그 주제에 바다를 무서워한단다. 청아. 나는 실은 노을도 싫어한단다. 바닷속에서 보면 낮도 밤도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노을도 온통 시꺼멓기만 하거든. 바닷속은 온통 밤이야. 깊은 밤. 별도 달도 해도 뜨지 않는 깊은 밤.

그런데 열다섯이 되어 처음 위로 올라갔던 날. 난 너를 보았다. 난 너를 보았어. 청아. 넌 모를 테지만 열다섯부터 지금까지 쭉. 난 매년 여름 너를 지켜봐 왔단다. 너는 나를 기억 못 했지만 나는 항상 너를 지켜봤어.

슬프진 않았어. 나는 처음으로 바다에 살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내게 많은 걸 알려줬으니까. 노을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밤하늘이, 낮의 하늘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걸 너는 내게 알려줬으니까.


여름.


응.


나 이제 떠나.


알아.


여름과 청은 아무 말도 않고 서로를 보았다. 여름은 퐁당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찬물이 청에게로 튀었다.


청은 얼굴에 튄 물을 닦으며 여름을 불렀다. 여름아, 여름아, 하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청의 목소리는 바다의 소리를 이길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여름의 이름을 부르던 청은 바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얼굴을 푹 담갔다. 뻐끔, 뻐끔 입을 열 때마다 거품이 뽀글뽀글 올랐다. 여름이 청의 볼을 매만졌다.


여름이 청의 이름을 불렀다. 청도 여름을 부르고 싶었으나 아무리 입을 열어도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 물 밖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눈을 맞추고 그리고 여름이 청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청이 놀랄 새도 없이 더 놀라운 것이 청을 찾아왔다. 청은 제 입을 덮었다. 숨을 쉴 수가 있게 됐다. 청은 여름처럼 바다에서 사는 존재도, 바다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도 아닌데, 청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청이 여름을 보았다. 여름은 웃으며 청의 몸을 당겼다.


여름과 청이 바다로 잠겼다. 깊숙이, 더 깊숙이. 두 사람을 집어삼킨 바다는 거세게 울었다.




안녕

작은형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