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 전서 16:14






스티브 로저스의 얼어붙은 몸을 손에 넣은 구소련의 하이드라는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단순히 프로파간다 선전용으로 쓸 계획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캡틴 아메리카가 미국에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고 그가 ‘전향’해서 구소련이나 하이드라의 선전용이 되면 그것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지만, 하이드라는 애초에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조직이었다. 하이드라는 기생충처럼 드러내지 않고 수많은 머리로 각 나라에 들러붙어 눈먼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눈치 빠른 이들, 그리고 하이드라의 이념에 맞지 않은 적들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암살할 강력한 존재가 필요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완전히 조각나고 찢어져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주 약간의 이지만을 간신히 가진 채로 수십년간 하이드라 아래에서 충실하게 움직였다. 레드 스컬과 함께 사망했다고 알려진 캡틴 아메리카를 어둠의 그늘에서 움직이는 암살자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이드라의 음습한 복수였다. 

구소련 내에서도 캡틴 아메리카가 윈터 솔져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미국 내에서는 이제 한 사람 추가 되어, 버키 반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키 반즈는 돋보기 안경을 끼고 나타샤가 건넨 서류를 침착하게 읽었다. 노인들 특유의, 그들이 쌓아온 세월이 켜켜히 느껴지는 다정한 무표정인 채로. 버키는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읽어내렸다. 

“하이드라.” 버키가 지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플로리다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있는 동안 하이드라가, 스티브 로저스를 되살려내서, 그가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을 시켰군.”

“아직 극비입니다.” 나타샤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하면서도 과연 버키의 귀에 제대로 들릴까 의심스러웠다. 버키의 목소리는 허탈함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속에는 들끓는 분노가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들썩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나타샤는 새삼스럽게 트리스켈리온 지하 깊숙한 곳에서 얼어붙어있는 자기 또래로 보이는 젊은 스티브 로저스와 눈앞에 있는 구십 세가 넘는 노인이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같은 전장에 섰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눈앞에서 보이는 시간의 간극은 쉽게 그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사실 나타샤는 과거의 영웅인 캡틴 아메리카보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윈터 솔져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5년 전 이란 과학자를 사이에 두고 윈터 솔져와 대치했고 그 이후 윈터 솔져라는 전설을 캐기 시작했으니 윈터 솔져가 70년 전의 사람이라고는, 솔직히 말해서 당연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50여년 간 활동해온 암살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얼굴이 드러났을 때 거기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얼굴이 있었다. 

나타샤는 나긋하게 물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예를 들면 자식이라거나 클론 같은?”

버키가 피로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버키가 생각하던 일이기도 했다. 스티브 로저스 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브는 마치 사신의 칼날에서 무정하게 놓인 표류자처럼, 헤어졌을 때 그대로였다. 

버키는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져서 안경을 들어올리고 눈을 비볐다. 인간은 어째서 구십이 될 때까지 살아있으면서도 그 인생의 가장 농밀한 순간은 아주 짧았던 초기에 머물러 있을까. 버키는 스티브가 없는 시간을, 북동부가 아닌 남부 플로리다에서 몇 배는 더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속절없이 새파란 어린아이처럼 그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스틱스의 강을 건너는 스티브의 목덜미를 악마가 채온 이후로 그의 발끝에도 죽음의 강물은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슈퍼 솔져, 달리는 기차 위로 줄을 매서 뛰어내린다는 또라이 같은 작전을 희생 없이 해내는 캡틴. 마지막의 한 번을 빼고는 죽음의 사신이 완전히 그의 곁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죽음의 사신의 칼날에서 벗어났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버키는 양손으로 잠시 마른 세수를 하고 눈을 감았다 뜨며 나타샤를 향해 말했다. 

“클론이라고 해도 복사기처럼 완전히 똑같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유전 정보만이 같은 인간인 거잖습니까. 복사기로 인간을 복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스티브 로저스가 맞아요.”

그의 모든 것을 샅샅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 버키는 말을 삼켰다가 간신히 이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스티브 로저스가 제정신이라면 그 길을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으리란 겁니다. 이 사람한테는 협박도 통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다른 곳에 알릴 순 없겠군요. 캡틴 아메리카가 세계 최악의 암살자가 되었다는 걸 다들 알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버키는 서류철을 덮어 나타샤에게 돌려주었다. 나타샤가 그렇게 말하자 모든 것이 이제야 현실처럼 느껴져 손이 떨렸다. 워싱턴 DC의 고가도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테러범이 캡틴 아메리카로 밝혀진다면. 매년 메모리얼 데이와 독립기념일 기념 행진에서 빠지지 않는, 할로윈에서도 빠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캡틴 아메리카가 범죄자로 밝혀진다면. 스티브 로저스가, 단 한 번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거침없이 싸움에 뛰어드는 멍청이가……. 

“스티브가 원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늙은 심장이 또다시 분노로 달아올랐다. 나타샤는 서류철을 들고 양 손을 앞으로 모았다. 

“낙관적이시네요.”

“스티브 로저스를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70년의 시간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아시겠죠.”

버키는 잠시 파르르 떨리는 숨을 멈췄다. 사람은 바뀐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조금씩 닳아가기도, 혹은 무자비한 일격에 부서지기도 한다. 그러나 항구적인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피가 흐르지 않지만 아물지도 않는 마음의 상처. 바람이 쓸고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빈 소리가 나는, 메워지지 않은 구멍. 스티브 로저스를 향한 마음. 자신과 같은 인간도 이토록 일관적으로 무언가를 간직할 수 있다면 스티브와 같은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는 그렇지 않아요. 강제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을 겁니다. 거기에 그가 나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을 거고요.”

“슈퍼 솔져 세럼의 효과를 비교적 하찮게 보시는군요.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성공작이 나오지 않은 희대의 세럼인데.”

나타샤가 버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오래 마주쳤다. 나타샤는 모든 것을 아는 듯이 초연하게 버키를 관찰하고 있었다. 버키는 한순간 아찔하게, 실은 나타샤 로마노프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사후 확인 차 자신을 데려와 보여준 것뿐인가 하는 착란에 가까운 두려움에 빠졌다. 버키는 워싱턴 DC 고가도로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 중무장 아래에 전향한 캡틴 아메리카가 서 있다는 사실을 나타샤와 마찬가지로 정보국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굳이 나타샤 로마노프가 슈퍼 솔져 세럼을 언급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슈퍼 솔져 세럼의 어떤 부작용이 있어 그의 신념을 부러뜨리거나 혹은 비틀어버렸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버키가 이를 악물고 나타샤의 시선을 받아치며 말했다. 

“만일 스티브가 자의로 하이드라에 몸을 담았다면 그렇게 띄엄띄엄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요. 그는 자신이 캡틴 아메리카로 보여지는 것에 익숙했어요. 채권팔이를 싫어하지만 유효하다고 평가했죠.”

 나타샤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고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총상 이후로 제대로 쉬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타샤가 버키를 관찰했듯이 버키도 처음으로 나타샤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음 말은 비교적 매끄럽게 나왔다. 

“그러니 스티브는 제재를 받고 있었던 겁니다. 인질로 마음을 바꿀 사람도 아니고.”

“결국 그가 바뀌지 않았음을 확신하시는군요.”

나타샤는 충분히 그렇게 들릴 만하게 스티브 로저스의 마음이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버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키는 오히려 그 때문에 이 여자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반이 블러핑이며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가 어째서 하이드라의 암살자로 일해왔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만을 놓고 보았을 때, 스티브 로저스는 죽은 줄 알았던 이후 몇십 년간 하이드라를 위해 암살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나타샤도 버키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과정과 ‘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빠져 있었다. 하이드라에서 쏜 뉴욕에 처박힐 미사일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캡틴 아메리카가 왜 손바닥 뒤집듯이 하이드라를 위해 일하는가? 돈? 명예? 신념? 세뇌?

본부가 무너졌으니 쉴드가 총력을 다해 그를 깨운 후 제대로 구금하고 심문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나타샤 로마노프가 이토록 모든 일에 나서야 하는 것을 보면. 

그래서 해동한 후 스티브 로저스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신문이나 만화 따위가 아니라 그를 진실로 알고 있었던 사람을 불러모은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실제로 어땠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전향할 가능성이 그 때에도 있었는지, 무엇을 가장 바랐는지 알기 위해서다. 포로가 깨어났을 때 가장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원하는 것을 미끼로 내미는 것이니까. 

버키는 마침내 분노와 어우러진 깊은 피로감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나타샤가 수배해준 호텔의 침대에 버키는 모로 누웠다. 버키가 예약했던 호텔보다 별이 두 개는 더 붙었고, 그중에서도 최고급이었기 때문에 침구는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고통으로 잠이 오지는 않았다. 마음의 고통이 곧장 몸으로 전이해 산 채로 상어에 뜯기는 듯한 고통이 쇠약한 육체를 짓눌렀다. 고통은 점차 커져 버키는 그대로 빈 껍데기만 남은 몸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 줄기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흘렀다. 눈을 감아도 얼어붙어 있는 스티브 로저스의 창백한 얼굴이 눈꺼풀 안쪽에서 생생했다. 버키는 몸을 뒤척여 반대편으로 누웠다. 그렇지만 얼음 속에 누워있던 스티브 로저스 자체야말로 어떤 끔찍한 상상과도 같았다. 

왜 이제 와서 살아있는 스티브 로저스를 만나는 것인가.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끝날 찰나에. 십 년이나 이십 년 정도 차이라면 얼마든지 열정적으로 스티브 로저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럴 만한 체력도 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흔 살이 넘어서 자신의 시간을 모두 써버린 지금에 와서 스티브가 돌아왔다니……. 

왜 젊었을 때 스티브 로저스를 찾으려 더 노력하지 않았지? 왜 그토록 쉽게 스티브 로저스가 죽었다고 생각해버렸을까? 스스로에 대한 후회, 자책과 또한 스티브가 하이드라의 암살자라는 말도 안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용암처럼 피부 바로 아래에서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었다. 뺨과 귓가를 적시는 눈물이 뜨거워 버키는 황급하게 베개에 얼굴을 눌렀다. 

‘포기하지 않고 너를 끝까지 찾았어야 했는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나타샤 로마노프와 다른 사람들은 스티브 로저스를 모른다. 그저 과거의 영웅인 캡틴 아메리카로, 그리고 지금은 어떤 이유로 하이드라에 투항한 최악의 암살자로만 본다. 버키만이 스티브가 죽었다 깨어나도 고집을 꺾는 일이 없으며 어떤 부귀영화를 가져다 대도 절대 하이드라의 개가 되지 않았을 것을 알았다. 그와 같이 전장을 누볐던 하울링 코만도즈라면 모두가 엄숙하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맹세하며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빨갱이를 하면 했지, 하이드라는 아닐거요.’ 이젠 아무도 없지만. 버키 반즈를 빼고서는 아무도 없지만…….

그러니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하이드라가 단순한 고통만으로 스티브 로저스를 자신들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암살자로 만들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버키는 중공군에서 인지부조화와 세뇌로 미군을 전향시킨 일이나 해리성 정체 장애 같은 실제로 일어난 일과 동시에 SF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모조리 떠올렸다. 기억을 모조리 지운다거나, 세상의 악을 선으로 보고 선을 악으로 보도록 나사를 풀어 정반대로 이어버린다거나, 세뇌했다거나. 

모두가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스티브 로저스 개인을 모조리 파괴하고 그저 껍데기만을 남겨 하이드라를 위해 써왔던 것이다. 50년이 넘도록 새파랗게 어린 모습으로. 그 죄는 이제 스티브 로저스 개인이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눈물이 흘러내려 베개를 축축하게 적셨다. 

아, 하나님, 대체 스티브가 그런 고통을 겪을 동안 저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살기 괜찮은 플로리다에서 빈둥거리며 스티브 로저스를 잊고 살려고 애쓰기만 했죠. 아무 것도 알려 하지 않은 채, 어렸을 때의 약속을 잊으려 애쓰며!

버키는 두 손을 모아 턱 아래에서 꽉 쥐었다.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합니다, 하나님.’ 웅크린 채 그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저는 제 시간을 살았는데 왜 스티브 로저스는 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죠? 끝까지 함께 가자고 약속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서 한 명은 암살자 취급을 받으며 얼어붙었고 한 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를 구하지조차 못하고 허비하고 있었던 겁니까?’

버키의 심장이 쥐어짜이듯 뛰었다. 신을 믿지 못하는 자의 기도가 간절하게 반복되었다. 

눈을 감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주변이 어두워지며 암흑으로 덧칠되어가는 것을 약간 늦게 알았다. 그러나 스무살 초반의 그 때처럼 뒤늦게 알지도 않았다. 그는 예민하게 주변의 공기가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시야에서 차츰 어둠이 깊어졌다. 앞이 컴컴해지자 버키는 무심코 손을 자신의 셔츠 앞주머니로 가져갔다. 안경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얇은 셔츠의 미끄럽고 부드러운 감촉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만지고 있다는 감각만이 아직 남아있고 술에 취한 듯 감각은 둔했다. 버키는 있는 힘껏 아랫입술을 물어뜯어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꿈속에서 몸을 휘둘렀을 때처럼 혹은 마취했을 때처럼 희미한 파문이 일었을 뿐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이 버키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언젠가의 때처럼, 어둠은 꿈틀거리고 우악스럽게 공간을 잡아삼키고 있었지만 특정 부분만이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무언가가 침대의 발치에서 서 있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옆으로 왔다. 그것의 움직임에 따라 침대의 머리맡 좌우에 놓인 흰 원형 테이블이 촛불이라도 켠 듯이 음산하게 밝아졌다. 버키는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시선을 따라 옮겼다. 테이블의 서랍이 부드럽게 열렸고, 호텔이라면 흔히 그러하듯이 서랍 안쪽에 성경 양장본이 놓여있었다. 

성경책이 서랍 밖으로 들려나왔다. 허공에서 얇은 종이가 파라라라락 바람 소리를 내며 넘겨진다. 어둠이 고인 끈적끈적한 바람 소리에 버키는 몸을 떨었다. 성경 어림에서 문구를 외우는 것처럼 나직하게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이 소리를 버키는 알고 있었다. 이 겹겹이 내려앉은 어둠을, 그리고 이 왱왱대는 불길한 음조의 소리를. 

공포에 가까운 경외감으로 버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두려움으로 떨면서도 눈앞에 있는 위험할 정도로 온화한 빛으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형체에 계속해 박혀 있었다. 버키 반즈는 여전히 식사 전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교회에도 주말마다 나갔지만, 그런 일은 매일 아침 일어나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는 일상적인 일처럼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뿐 진심으로 믿어본 적은 없었다. 문자로만 남은 성서나 기껏해야 토스트 빵 위에 나타난 예수처럼 보이는 얼룩 따위를 어떻게 신앙심에 가득 차 볼 수 있겠는가. 그는 이미 기적을 체험했다. 그 기적이 어떤 거대한 것을 대가로 가져가는 지도 잘 알았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4)』

이미 알고 있었고 각오하고 있었으나 목소리가 인간의 말을 하자 머리가 멍해지고 몸이 덜덜 떨렸다. 현실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눈이 먼 듯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음산하고 온화하게 빛나는 하나의 형체,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는 듯한 말소리는 초현실적이었고, 버키는 이 뒤에 올 기적의 놀라운 모습과 쓰디쓴 대가를 알았다. 

“이런 식으로 스티브 로저스를 죽음에서 건져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버키는 말했다. 스티브 로저스의 정체를 나타샤가 아직 은밀하게 감추고 있다 해도 영영 감추고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헬리캐리온과 트리스켈리온이 수도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테러로 쓰러졌다. 그 테러에 대한 까닭을 내놓아야 할 것이고 가장 손쉬운 방법은 명백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하이드라가 암약하고 있었으며 그 캡틴 아메리카가 하이드라의 고스트 요원으로 미국을 테러하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차라리 그 때 정말로 죽는 게 나았잖아.

그리고 곧 그 생각을 후회했다.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필사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을 가지고 ‘죽는 게 나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미치도록 저주스러웠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토록 스티브가 살아돌아오기를 바라고, 죽음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도! 고작 몇십년 후에 돌아왔다고, 너무 늦었다고. 

“살고 싶습니다.”

버키는 두 손을 맞잡았다. 나이로 인해 건강하다 해도 야윈 팔다리와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하는 몸을 느끼면서. 스티브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버키는 진심으로 살고 싶어졌다. 분노와 체념에 이어 다시 현실이 버키를 일깨웠다. 

“그저 스티브의 편에 서서 다시 싸울 만큼이면 돼요. 밤에 잠들지도 못할 정도로 악몽을 꾸면서도 단지 정의를 바로잡는다고 사지를 헤쳐가며 쌓은 명예가 누명으로 뒤덮인다고 생각하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시대에는 아무도 그의 편이 없어요, 나밖에는. 내가 해야 합니다. 이미 충분히 살아왔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의 누명만이라도 벗길 수 있게……. 그와 끝까지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그대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으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였다.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였다.(시편 26:4-5)』

그전까지 그것이 말한 구절은 잘 몰랐으나 시편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죄지은 자와 똑바로 믿음을 가진 자신을 같은 곳에 두지 말라는 문구였다. 버키는 무엇 때문에 그것이 이 구절을 인용했는지 확신이 똑바로 서지 않았다. 

‘떨지 마.’ 버키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저게 무엇을 또 대가로 가져갈 지 똑바로 봐.’

그러나 대체 무엇이 버키 반즈에게 남아있을 지, 과연 악마가 또 한 번 거래를 하게 될 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버키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버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애착을 가진 물건도 있고 사람도 있으나 버키는 진정 그걸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토록 텅 빈 사람에게 받아낼 무언가가 있을까? 

미친 듯한 파라라라락 바람 소리를 내며 성경책의 얇은 페이지가 넘어갔다. 버키는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폐는 차가운 냉기로 얼어붙는 듯 했고, 숨이 내뱉어질 때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요한계시록 9:6)』

성경은 허공에 둔 채 그것이 두 팔을 펼쳤다. 마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십자 모양처럼, 그것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빛이 잉크 같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그림자 하나 없는 오로지 빛만이 있는 빛이었다. 사람이 믿는 어느 신의 모습과 닮았지만, 버키는 도저히 그 모습을 자비롭다고 보지 않았다. 거대하고 강력한 힘은 개미처럼 작은 인간 개개인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길을 멈추고 변덕으로 개미의 앞을 가로막은 돌을 치워줄 수도 있지만 그게 개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모르는 것처럼. 버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소원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병을 물리치고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그린란드의 얼음폭풍 사이로 처박혀 사라진 줄 알았던 스티브 로저스를 2014년까지 젊을 때의 모습 그대로 살려놓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바라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해도, 순진할 정도로 여전히 온 마음을 다 바쳐서, 무엇이든 가져가도 좋으니 스티브 로저스가 이 세계에 얼어붙어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제대로 뿌리뻗고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은 누렸지만 스티브는 누리지 못한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스티브의 누명을 벗겨주십시오, 스티브의 인생을 스티브가 살 수 있게……!”

그러나 죽음은 가장 바라지 않을 때 급시에 찾아올 것이며, 그대는 영원히 이 세까지 생명을 누리지 못하리라

유황과 몰약 냄새로 마비되다시피 한 코에 스멀스멀 쇠와 기름 냄새가 번져왔다. 버키는 처음에 자신의 목에서 피가 솟구쳐 입안을 물들이는 냄새인가 의심하고 코 아래를 훔쳤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인중에 차가운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여전히 얇은 종잇장은 파락파락 하는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그 소리가 차츰 커졌다. 넓은 호텔 방인데도 마치 아주 좁은 칸에서 울리는 것처럼 소리가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귀를 울렸다. 바람 소리에 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그것이 말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편 49:12)』

그리고 빛이 거대한 손가락처럼 부드럽게 버키를 짓눌렀다. 

“기다려, 잠깐!”

버키는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돌처럼 단호한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나동그라져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다시 고통스러운 눈을 떴을 때, 그는 스위스를 가로질러 최고 속도로 달리는 열차 안에 엎드려 있었다. 기차 옆면은 떨어져 나가 폐가 얼어버릴 것만 같은 눈 섞인 차가운 공기가 열차의 속도만큼 빠르고 우악스럽게 몰아닥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기름과 쇠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냄새가 났다. 하이드라의 신무기가 푸르게 빛나며 내는 플라즈마 이온의 냄새. 무언가 열기로 지져지는 듯 하면서도 매캐한 것 없이 비릿한 특유의 냄새, 버키로서는 공포로 깊이 각인된 그 끔찍한 냄새가 눈앞의 병사가 들고 있는 무기에게서 강력하게 방사되었다. 

버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손을 더듬거려 무언가 방어할 만한 것을 찾았다. 손에 차갑고 매끈한 것이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였다. 버키는 고개를 들었고 저편에서 마찬가지로 거꾸러져서 일어나려고 꿈틀거리는 스티브 로저스를 발견했다. 이해보다 빠르게 버키는 알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기에 있는 것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아직 뉴욕을 구하기 위해 그린란드에 뛰어들지 않은 스티브 로저스. 2014년 갑자기 워싱턴 DC에 나타난 테러리스트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 고통에 절여진 깊은 표정이 새겨진 채 냉동된 스티브 로저스가 아닌, 아직 살아있고 하이드라에 맞서 싸우는 스티브 로저스. 

열차의 스피커에서 아르님 졸라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다시 발사!”

버키는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잽싸게 방패를 들어올려 앞을 방어하며 총을 쏘았다. 

하이드라의 병사가 입은 보호장구는 간단하게 총알을 막았고, 병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보호 헬맷 안 하이드라의 병사의 눈은 이상할 정도의 불길로 불타고 있었다. 어둠의 어둠, 빛의 빛처럼 설명할 수 없이 오로지 불길로만 타오르고 있는 눈이었다. 그 불길에는 불의 그림자가 없었다. 버키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대화하던 존재를 떠올렸다. 소름이 오싹하게 돋았다. 빛만이 존재하고 어둠만이 존재하는 그것은 현실의 물리학과는 다른 갈래의 존재였고, 그 악마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다……. 

여기서 스티브 로저스를 죽이면, 그는 오래도록 고통받지 않을 거야. 섬뜩한 깨달음. 단 한 방이면 된다. 버키 반즈는 자신의 사격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이 또렷하고 손가락이 민활하게 움직인다. 이 때가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 악마가 여기로 자신을 보낸 것은 분명히 이것을 원하기 때문이리라. ‘스티브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왔어. 스티브가 하이드라를 위해? 웃기지마, 분명히 그 새끼들이 죽느니보다 못한 짓을 해온 거야……!’

손가락이 미친듯이 떨렸지만 버키는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팅 소리가 나며 하이드라의 갑옷이 총알을 튕겨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플라즈마 이온의 끔찍한 냄새가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진해지며 푸른 빛이 터져나오듯 쏘아졌다. 버키는 방패를 앞으로 하며 막았다. 푸른빛이 방패에 직격으로 쏘아졌다. 

버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방패를 놓치며 뒤로 날아갔다. 차가운 눈보라가 쓸려들어오던 그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듯이. 기차 옆면을 덜컥덜컥 긁듯이 쓸려나간 버키는 간신히 바에 매달려 절벽으로 나가떨어지지 않고 버텼다. 상황이 너무 빠르게 급변하는 데다 위험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이제야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바를 움켜쥔 손은 힘세고 아직 주름지지 않은 청년의 것이었다. 

버키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기차 가까이 붙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가 떨어지며 부딪친 왼팔이 욱신거리고 와들와들 떨렸고 그 떨림을 다잡기엔 버키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억겁과 같았던 짧은 시간이 지나고 절박한 표정의 스티브가 기차 옆구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버키!”

어떻게든 매달려 있는 버키를 발견하고 스티브는 짧게 안도가 섞인 표정을 짓고 거침없이 구하기 위해 기차 밖으로 몸을 빼냈다. 버키는 여전히 현실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손과 팔에 잔뜩 힘을 준 채 그를 보았다. 

스티브 로저스가 살아있다. 그의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에서 번지는 다급하고 급한 감정들의 존재가 버키에게서 더욱 현실감을 앗아갔다. ‘윈터 솔져’로 얼어붙은 창백한 얼굴이 아닌, 국장에 쓰인 다부진 군인의 얼굴의 사진뿐만이 아닌 살아있는 스티브. 

“내 손 잡아!”

스티브가 위험할 정도로 몸을 내밀고 버키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었다. 버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안간힘을 쓰며 팔만으로 몸을 지탱해 스티브에게 다가갔다. 몸을 베고 지나가는 칼날과 같은 바람이 스티브의 목소리를 웅웅 흐트러트렸다. 

‘그린란드에 꼬라박으면 안 돼.’ 머리에서 그 말만이 솟아올랐다. ‘알겠지, 그린란드에 꼬라박으면 안 돼! 저놈들이 너를,’

버키는 크게 입을 열어 말하고 싶었으나 그 순간 잡고 있던 바가 휘청여 짧은 비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출렁거리며 바의 한쪽이 기차에서 떨어져나갔다. 우그러져 망가진 바는 매달린 버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크게 흔들리며 기차에서 분리되었다. 스티브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버키는 그 눈에 서리는 감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는 중력의 무게도.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리면서 버키는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공포와 두려움으로 울부짖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그는 스티브 로저스의 누명을 벗기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소원을 빌었을 뿐이다. 먼저 죽음으로서 그런 현실을 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악마의 소원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 그의 앞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전까지 그가 적대했던 단체에 포로로 붙잡혀 온갖 실험과 세뇌를 반복하며 21세기까지 냉동되어 이용당하는 미래다. 그가 스티브 로저스에 대해 걱정했던 그대로, 버키 반즈라는 개인은 모두 파괴 당하고 그저 껍데기만을 남긴 채 하이드라를 위해 쓰이며 이제 그 죄는 버키 반즈가 받게 될 것이다.






오래 전에 꽃이 지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눈부시던 꽃잎이 아물리며 산들바람에 조용히 목이 잘리듯 떨어진다. 눈부시게 밝은 색의 아름다운 꽃. 그 꽃을 보며 생각하던 사람. 그러나 버키 반즈는 더 이상 그 기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레벨 6의 ‘스티브 로저스’가 그를 내던졌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을 보았을 때와 같은 허탈함과 분노가 붉게 눈앞을 태웠다. 버키는, 윈터 솔져는 허벅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빼들었다. 오로지 상대방을 죽이려는 것밖에는 모르는 인간 병기가 육박해 들어오자 스티브 로저스 역시 급하게 맞붙었다. 인간의 육체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육중하고 무거운 소리가 연달아 울렸고, 윈터 솔져는 끝없이 덤벼들었다. 그 팽팽한 박투가 끝난 것은 그를 내던지고 난 후 스티브 로저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말한 한 마디였다. 

“버키?”

스티브의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과 표정.

“버키가 대체 누구야.”

이미 거기에는 윈터 솔져를 내던지고 공격하던 신중한 공격성은 사라져 있었다. 윈터 솔져는 그 정도로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감정이 거북했다. 그는 냉동 상태에서 꽤 오래 깨어나 있었고 녹은 냉동식품들이 그렇듯이 일부 허물어지며 질척거리고 있었다. 조금 더 녹아버린다면 자신의 안에서 눈보라 속에 파묻힌 것이 드러나리라는 어렴풋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라는 남자는 불길이었고, 윈터 솔져의 안에 가장 꽁꽁 얼어붙어 있던 버키는 얼어붙은 눈을 떴다. 걔를 알아.

“브레인워싱하고 준비시켜.”

윈터 솔져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주는 대로 마우스피스를 물었다. 당연히 쌓여야 할 나이테와 같은 기억은 윈터 솔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귓가로 전류가 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몸에 새겨진 공포로 온몸이 떨리고 심박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두뇌에 전류가 꽂혔다. 말 그대로 머리 안쪽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그는 울부짖었다. 한 인간의 영혼이 부서지는 비명.

그도 멀쩡한 인간일 때가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버키 반즈는 부서지고 깨져 강제로 조물되고 있다. 

대가는 혹독했다. 고문당하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얼고 다시 고통스럽게 녹고 세뇌당하고 전기에 지져지고 기억이 뒤죽박죽 타 버리고 뇌가 갈리며 자신이 누군지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어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죽이며 자신이 무엇을 빌었는지조차 모르지만, 소원 때문에 그는 이 자리에 있었다. 







스미스소니언의 박물관에서 그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캡틴 아메리카와 하울링 코만도즈.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은 파랗고 어린 얼굴은 마치 사람처럼 보였다. 1944년도에 죽은 유일한 전사자. “그들은 학교에서부터 전쟁터까지 함께였습니다……”

아직 빙하 아래에 고요히 얼어붙어 있는 수천수만의 감정들이 눈동자 위로 별빛처럼 반짝이며 스쳐지나갔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는 조용히 입술을 꽉 다물었다. 피투성이 스티브 로저스가 한 말이 조약돌처럼 단단하게 삼켜져서 그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네 이름은 제임스 뷰캐넌 반즈.”

보안 카메라의 붉은 빛이 곧 그를 윈터 솔져로 돌아오게 했다. 이제 와서 제임스 뷰캐넌 반즈로 되돌아간다 해도, 하이드라가 그를 이용했었고 그가 하이드라의 충실한 무기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또다시 윈터 솔져를 이용하려 든다면 그는 저항하겠지만, 그 저항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윈터 솔져는 똑똑히 알았다. 열 단어면 그는 윈터 솔져가 된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하이드라는 CIA나 의회 의사당 어디에든 손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잡히면 휘둘리게 되리라는 것은 캡틴 아메리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캡틴 아메리카도 그를 휘두르려 할 것이다. 그는 멀리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빈 깡통에 조약돌 하나가 계속해서 덜그렁거렸다. “끝까지 함께 할 거야.” “버키.” 버키는 비틀거리며 골목의 쓰레기통 옆에 주저앉았다. 뚜껑이 달린 녹색 플라스틱의 쓰레기통 위에는 재활용 표시가 그려져 있었고, 쉰 냄새가 풍겼다. 자신처럼.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이다. 

워낙 기억이 뒤죽박죽이고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기억에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히 노인이 된 자신도 기억이 나는데 여기에 있는 자신은 새파랗게 어렸다. 무언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고 오직 깊은 어둠만이 느껴졌다. 

‘천천히 해.’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다시는 누구도 날 휘두르게 두지 않을 거야.’ 완전히 이 세계와 유리되어 있고 아무 것도 자신을 잡아채지 않으며 억누르지도 않는다는 홀가분한 고독. 정물과 같은 고독.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경의 개역한글(KRV)이 대충 알아듣긴 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게 많으므로...현대인의 성경(KLB) 버전으로도 달아놓겠습니다. 물론 멋있기는 개역한글 버전임. 현대인의 성경 버전은 풀어서 보는 느낌이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4) 

→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것은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으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였다.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였다.(시편 26:4-5)

→  내가 거짓된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위선자들과 사귀지도 않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며 그들과 함께 앉지도 않습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요한계시록 9:6)

→  그 기간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할 것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편 49:12

→ 사람이 아무리 영화를 누리며 살아도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 인간 역시 짐승처럼 죽기 마련이다.


MCU:CA S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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