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조만간





다시 밤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1년. 아직도 여름이었고 아직도 열일곱과 열아홉이었다. 여전히 곳곳에서는 작은 시위가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혁명의 대상이 사라진 세계에서 혁명군은 그저 살아남았다. 


후우, 독고오공은 텅 빈 눈으로 촛불을 불었다. 열일곱. 몇 번째더라, 이건. 몇 번째 부는 촛불이더라. 독고오공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폐에 공기가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여전히 공기 중에 가득 들어찬 바다향. 그리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기네.

 

“생일은 이제 그만 챙겨줘도 돼요.”

 

 독고오공이 꺼낸 말에 백해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백해일은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시간이 멈췄다는 것, 고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 백해일의 표정을 흘끗 살핀 차노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냥 할 짓 없어서 하는 거니까 대충 받아. 어차피 시간도 안 가는데. 안 그래?”

 

 독고오공은 고개를 끄덕이곤 씨익 웃으며 케이크를 바닥에 던졌다. 


"다음엔 딸기 맛 가져오지 마요, 나 딸기 싫어해. 누구 생각나서."


 뭉개진 케이크에서 단 내가 퍼졌다. 땅에 떨어진 딸기는 신선한 붉음 그대로 죽어있었다. 꼭, 파열음을 내며 까드득 부서지던 차두리의 딸기맛 막대사탕처럼. 폭탄 파편이 널린 주변과 참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혁명과 반란, 조작과 혼란의 한복판에서 받는 생일 축하는 꼭 그런 뒷맛 더러운 단 내가 나는 것이었다. 






"여기 봐. 균열이 생겼어."


권세모가 나무 기둥을 매만지며 말했다. 차하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제 눈 안에 담았다.


"뽑아."


간단하잖아. 뽑아. 그냥 못 돌아오게 하면 되잖아. 이대로 멈춘 채로 살면 되잖아. 지금 평화롭잖아. 차하나가 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었다.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권세모는 살랑살랑 흩날리는 나뭇잎을 동정했다. 그게 니 죄야. 권세모는 아무런 감각도 없이 나무의 맨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차하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바닥을 꾸욱 눌렀다.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내일 학교에서 봐."


차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꾸욱 밟았다. 발밑에서 으깨지는 선명한 초록색에 권세모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응. 잘 가. 내일 봐. 차하나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슬며시 고개를 드는 권세모. 팔랑이던 나뭇잎 하나가 달빛을 부여잡은 채 바닥으로 낙하한다. 으깨진 시체 위를 덮은 나뭇잎. 그 역겨운 꼴을 보다 권세모는 고개를 돌려 달빛이 가는 대로 홀린 듯 발을 옮긴다. 


나무가 서있는 정원을 뛰고 큰 창이 가득한 홀을 지나고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달린다. 헐떡이는 숨을 하곤 폐허가 된 듯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도회장 앞에 선 권세모.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커다란 문. 노랫소리도, 화려한 드레스도, 교양 있게 시끄러운 가십도 없이 텅 빈 무도회장. 이게 정말 우리가 바라는 평화인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내려앉는 권세모. 쓸데없는 생각을 품었다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듯 웃는다.


스텝을 이렇게 밟았던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권세모는 어느 순간 몸을 일으켜 파트너 없는 왈츠 스텝을 옮겼다. 텅 빈 무도회장의 큰 창 너머로 달빛이 비쳐들었다. 어두운 공기에 노란 달빛이 은은하게 섞여 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는 마치 눈송이처럼 춤을 췄다. 


있잖아, 혹시 우리가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우린 이런 파티장에서 만났을까? 권세모는 스텝을 멈추고 무도회장 한가운데 가만히 멈춰 섰다. 핀조명 대신 들어오는 달빛. 제 키 보다 길게 늘어선 그림자. 음악 하나 없이 고요한 빈 무도회장. 들이마시는 숨에서는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권세모는 슬픈 듯이 웃었다. 헷갈리고 방황하는 청춘을 보낼 여유도, 사랑을 향해 직진할 용기도, 권세모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키워 온 마음과 그 크기만큼 불어난 죄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제복이 아닌 교복 차림이라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자체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말 죄를 짓고 있는 건 어느 쪽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모순적인 상황에 권세모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집으로 향하던 차하나는 어두운 뒷골목 어디쯤에서 독고오공과 마주한다. 저를 향해 웃어주는 독고오공. 교복 차림으로 혁명군 사이에 낀 독고오공은 어색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래봤자 내일 아침이면 제복을 주워 입고 정부군 본부에 와서 일할 거면서. 반항하지 마. 행복하지 마. 우린 그러면 안 되잖아. 입 모양으로 저주 비슷한 말을 하고 돌아서는 차하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차하나지?"


백해일이 독고오공을 빤히 본다. 너네 친구 맞아? 행복하지 말란 말을 어떻게 해? 백해일의 물음에 독고오공은 그냥 웃었다. 우린 진짜 행복하면 안 되거든요. 전 평생 불행해야 하니까요. 지금 복수하는 중이니까. 독고오공은 굳이 꺼낼 필요 없는 말을 씹어 삼켰다. 자꾸만 역류하는 느낌에 맑게 웃어 보였다. 백해일은 독고오공이 알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독고오공이, 정확히 어느 쪽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궁에는 무슨 일이에요? 황제는 아직인데."


제복 자켓을 어깨에 대충 걸치고 서류더미를 옮기던 독고오공이 백해일을 발견하곤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첫인상부터 재수 없었다. 어딘지 비틀려 있는 사상, 속을 알 수 없는 표정들, 그리고 반말 찍찍. 보통의 귀족들과 비슷하지만 재질이 다른 가식. 가끔 보이는 검은 속내와 목적성이 다분한 행동들. 백해일은 형형히 빛나는 독고오공의 눈을 빤히 올려다본다. 아 씨, 키 더럽게 크네. 그러니까 이 둘의 관계는 생각해보면 정말 안 맞고 짜증 나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닌 것이었다.


"넌 어느 쪽이야?"


백해일의 물음에 독고오공은 잠시 말이 없더니 살짝 웃었다. 권세모나 차하나였다면 바보같이 저런 걸 묻진 않았겠지. 정말이지 맑고 주름진 곳 하나 없는 사람이구나. 몰락 귀족도 귀족이라는 듯이, 밝은 사람. 그래서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제가 어느 쪽이라고 말하면, 절 따라올 거예요?"


"..."


"어느 쪽도 아니에요."


독고오공은 말을 마치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뜬다. 정말 예상 그대로의 답.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하는 사람. 백해일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돌아선다.






"아 학교 가고 싶다."


학교 건물에서 3교시가 끝나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차노을은 하복 셔츠를 입은 채 담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대학 입시할 것도 아닌데 굳이 학교에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종소리가 멎고 다시 고요해지자 차노을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골목길을 돌자 신발 끄트머리에 질척한 피가 묻는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누군가에게 돌로 머리를 맞은 건지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는 귀족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간신. 아마 혁명이 없더라도 살아남을 사람, 혁명이 없었으면 살아남았을 사람. 귀족은 덜덜 떠는 손을 들어 차노을에게 돌을 던진다. 차노을에게 닿기도 전에 땅에 머리를 부딪히며 깨지는 돌. 귀족은 점점 끊겨가는 목소리로 입 모양으로나마 마지막 말을 뱉는다. 


'너도 똑같아.'


고래에게서 살아남았어도 끝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다는 것. 그 사실 만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래를 죽인다고 끝이 나는 싸움은 아닌 거다. 다만 쌍방의 원한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호불호와 책 내용 전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갈 사람을 조금이나마 줄일 뿐.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가던 차노을이 뒤를 돌아본다. 그렁그렁하게 올라온 눈물. 난 고래랑 달라. 난 고래랑 달라. 차노을은 주먹을 세게 쥔다. 진실을 말해서 여러 사람을 사라지게 만든 건 결국, 고래잖아. 난 달라. 난···. ···을 위해서···. 망할 고래 새끼, 재수 없는 영감탱이, 빌어먹을 책···. 차노을은 지금 당장 황제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 순간 짜고 비릿한 바다향이 코 끝을 스치고 간다. 조만간 진짜 후려칠 수 있을 것 같다.

여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