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저것들 보통이 아니네”

“예상했었잖아”

 

“............. 무슨 말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잘 했었어. 걱정하지 마”

 

“괜찮았어?”

“어. 멋있었어”

 

“아 그건 원래 그런 거고....”

 

 

1차 공판이 끝났다. 상대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패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였다. 이미 소송을 이만큼 끌고 오는 데에 적지 않은 손해를 감수했다. 태형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거래처들 가운데에는 계약 취소를 통보한 회사들도 더러 있었다. 아마도 대형 국제 기구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데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혹은 드러나지 않게 압박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한쪽에서는 편하게 한 손만 써도 되는 싸움. 다른 편에서는 손발로도 모자라 온몸으로 맞서야 하는 싸움. 누가 보더라도 한쪽이 불리한 싸움. 주변에서는 이쯤 했으면 됐으니 소송을 이만 취하하라는 조언까지 들리고 있다. 태형은 아버지가 무척 곤란한 상황에 놓였음을 눈치 채고 슬쩍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아버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이제 그만하시는 거 어때요?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다는 건 이대로 끌고 갈 저력이 아직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본부장에게 결코 쉽게 밀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여기서 접을 수는 없었다. 태형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신이 앞으로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성찰하게 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모든 것을 걸 배짱도 있어야 하는 거구나.

 

그래서 태형은 두 번 다시 아버지에게 그만두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잘 하셨습니다. 어유, 변호사인 저보다 나으시던데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1차 공판만으로 어느 쪽으로 기울 거라는 확답은 못 드리지만. 아마 판사들도 골치 깨나 아플 겁니다. 국제적으로 여론이 ISCA에 불리하도록 형성되고 있잖습니까. 판사들도 적잖이 압박감을 느낄 겁니다”

 

“그럴까요....”

 

변호사는 애써 위로하려는 듯 말을 한다. 태형도 석진도 변호사의 그 말이 진심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위로임을 잘 알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태형과 석진이 실질적인 손해를 본 바가 없다는 점을 주장했고, 이편에서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손해가 발생할 사건이라며 또한 공세를 올렸다. 그들과 대면했을 때, 태형과 석진은 의외로 자신들이 그들에게 대단히 분노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자각했다. 시일이 많이 흘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감정이 어느 정도 정돈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 2차 공판에 있기 전에 두 분 결혼식인 거죠?”

“네. 그렇게 됐네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어 변호사님 그때 청첩장 드렸는데. 혹시 못 오세요?”

 

“아니에요. 그때 가서 뵐 거긴 하지만 미리요”

“아아... 꼭 오세요. 그 예식장 뷔페 되게 맛있어요!”

 

“네. 꼭 가서 먹어 봐야겠네요”

 

결혼식이 꼭 한 달 남았다. 요즘은 편히 잠을 잘 시간도 부족하다. 지금도 태형과 석진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식을 앞두고 피부 관리도 받으러 다닌다는데, 태형과 석진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이러다가는 결혼식 사진이 생애 가장 못나게 찍힌 사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 눈 빨갛다”

“자기도”

 

“우리 어제 잠 못 자서 그래....”

“어제만 그러면 다행이게....”

 

“오늘은 좀 푹 자자... 아 피곤해”

“우리 오늘 스케줄 이거 끝 아니야....”

 

“또 뭐 있지?”

“웨딩 플래너 만나기로 했잖아. 이따 저녁에”

 

“아... 맞다.....”

“얼른 집 가서 씻고 옷 갈아 입고 준비하자. 시간 딱 맞을 것 같아”

 


“이만 가시죠. 정문 말고 다른 곳으로 나가야겠습니다. 바깥에 취재진들이 쫙 깔려서요”

 

워낙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본권이 얽힌 문제여서 그런지, 재판정 앞에 포진한 언론사들과 방송국의 취재 열기도 보통 이상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태형과 석진의 편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어쩌면 자신들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적일 수도 있는 싸움. 차라리 이 싸움을 빨리 끝내고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 치료에요”

“선생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축하드린다구요. 이제 특별한 일 없으면 안 오셔도 된다구요”

“그 말씀은....?”

 

“이제 호르몬이 제 균형을 찾았어요. 여기 그래프 보실래요? 왼쪽 그래프가 처음 오셨을 때 검사한 결과구요, 가운데가 두 달 전. 그리고 제일 오른쪽이 오늘 검사한 결괍니다. 그냥 보시기에도 훨씬 선이 안정적이죠?”

 

“어... 그러네요 진짜...”

 

오늘 검사한 결과에 따라 계속 치료를 이어갈지, 아니면 여기에서 그쳐도 좋을지를 결정한다고 했다. 요즘은 ‘결정적인 일’들이 꽤나 많이 일어난다. 1차 공판 때만큼은 아니지만 태형과 석진은 오늘 병원에서도 퍽 긴장했었다. 처음에 태형에게 난임 치료를 몰래 받는 걸 들켰을 때, 석진은 치료를 더는 하지 않겠다고 태형에게 선언했었다. 물론 그건 태형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형은 줄곧 석진에게 스스로의 진심 어린 결정을 요구했다. 그래서 석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치료였던가. 그렇지 않으면 타의에 의해 강요된 욕구였던가.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석진은 진심으로 원했다. 태형과 결혼을 한다면 그를 닮은 아이를 하나 정도 갖는 건 나쁘지 않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석진에게는 꽤나 절실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태형에게 말했다. 나 치료 계속 받을래 - 태형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었다. 그 후로는 병원에 갈 때마다 태형과 동행하고 있다. 오늘은 더더욱이나 태형이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사에게 이런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보통 다른 분들은 이렇게 빨리 끝나는 경우가 드물어요”

“아.. 진짜요?”

 

“네.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짜 감사합니다”

 

“다다음주에 결혼한다고 하셨죠?”

“네!”

 

“아마 곧 예쁜 아이 보실 수도 있을 거예요. 한 번 기대해 보세요”

“하.....”

 

근래 들어 가장 환하게 웃은 것 같다. 얼굴이 당길 정도로 크게 미소를 짓는다. 석진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태형도 석진과 마찬가지로 날아갈 듯 기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형이 석진에게 말한 것과는 반대로 내심 아이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지금 태형이 기쁜 이유는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라 석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석진은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다. 정말 간절했었구나 - 그러나 이제는 가슴 아파 할 필요도, 미안해 할 이유도 없다.

 

“선생님 근데 혹시... 다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없나요?”

 

그러나 석진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만에 하나를 생각하는 석진의 표정은 금세 다시 어두워진다.

 

“그동안 드셔 왔던 약 때문에 그런 거니까, 이제는 그 약 드실 이유도 없으니 아마 괜찮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잠시 주춤했던 기쁨은 금방 되살아난다.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잠시 수그러들었던 불꽃이 화르륵 살아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좋아?”

“좋지 그럼!”

 

“그래. 자기가 좋으면 나도 좋다”

“아 맞다. 어머님이랑 아버님한테 말씀 안 드렸다”

 

“아까 내가 전화 했어”

“언제?”

 

“자기 화장실 갔을 때”

“아아... 뭐라고 하셔?”

 

“엄청 좋아하시지. 고생 많았다고”

 

석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저렇게 좋을까- 저 웃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석진의 얼굴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태형은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웃는 법을 모두 잊은 사람인 줄 알았다. 피식, 하고 냉소를 치는 게 웃음의 전부였던 석진이다. 그런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잘도 웃는다. 석진이 웃으면 태형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웃어. 자기는 웃는 게 제일 예뻐”

“진짜?”

 

“처음 만났을 때 뚱해 가지고 나 쳐다 보던 거. 나 아직도 안 잊혀”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다고?”

 

“그걸 말로 다 해?”

“그랬었나....”

 

이제 석진은 자신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태형과 함께 한 시간이 불과 일 년여라고 해도, 그 일 년이 석진에게 끼친 영향력이 너무도 강해서 그 전의 모습을 모두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신기한 일이다. 태형을 만나지 않은 채로 살아 온 삼십 년이, 그 후의 일 년에게 맥을 못 춘다.

 

 

“아... 아까 약국 들렀다 올 걸”

“약국은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온라인 주문 해”

 

“아니... 자기 영양제 하나 사려고 했지”

“내 영양제? 내꺼?”

 

“응”

“내꺼 왜? 나 먹는 거 있잖아”

 

“아 그건 그냥 기본 비타민 이런 거고...”

“그럼 뭐?”

 

“그.. 남자한테 좋은 거... 그런 거...”

“풉... 뭐어?”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이제 확실히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니 석진은 오늘부터라도 당장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참이다. 그동안은 치료를 받느라 호르몬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형과의 관계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금욕의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석진은 목표한 대로 달릴 일만 남았다.

 

“나 아직 멀쩡해!”

“누가 안 멀쩡하대? 먹으면 좋은 거지!”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먹어서 더 좋은 거면?”

 

“............ 감당할 자신은 있고?”

“어. 있어”

 

“오... 이 객기 뭐야”

“객기라니!”

 

“지금도 힘들다며... 다리가 후들거린다며... 그럼 나 말고 자기가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난 아무 약이나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이제!”

 

“오우 무서워”

 

 

태형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뀐 석진의 태도에 몸을 떤다. 물론 얼굴은 웃고 있으니 장난이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밤은 좀 화끈하게 장식해 볼까 싶었는데, 석진이 먼저 불을 질렀으니 태형은 자신에겐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번쩍 일어나서 석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예고 없이 앞으로 들이닥친 태형을 석진은 피하지 않는다.

 

“어쩌게?”

“앙 잡아 먹어버리게”

 

“지금?”

“안 돼?”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먼저 누가 자극했더라”

 

태형이 석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한층 더 그윽하게 깊어진 태형의 눈동자에 반짝반짝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걸 보는 게 좋다. 그의 짙은 눈썹, 오똑한 코. 반듯한 입술. 하얀 뺨까지 석진은 손바닥으로 쓸어 담아 본다. 마치 손금 한 줄 한 줄마다 그의 모습을 새겨 넣으려는 듯.

 

“사랑해”

“그런 말로 은근슬쩍 빠져 나가려고 하지 마”

 

“확 안 사랑해 버린다”

“가능은 하고?”

 

“아니.. 안 될 것 같아”

“까불기는”

 

애초부터 사랑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한 번 그를 사랑하고 나서는 다시 사랑하지 않을 법은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두려웠었다. 출구가 없는 깊은 웅덩이로 빠져드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망설임도 여러 번. 하지만 한 번 감정에 몸을 맡기니 그 다음은 쉬웠다. 출구가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석진은 그저 태형에게 푹 잠긴 채 평생을 살아 갈 것이다.

 

“진짜 부담 갖지 마. 생기면 감사하게 낳아서 잘 기르면 되는 거고. 안 생기면 안 생기는 대로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 살면 돼”

 

“몰라. 자꾸 욕심 나. 나 원래 욕심 같은 거 별로 없는 사람인데”

“나 때문이야?”

 

“그럼 자기 때문이지”

“그 욕심 나한테만 부려”

 

태형의 얼굴이 그늘을 만들어 천천히 석진의 얼굴을 덮는다. 석진의 눈이 잠드는 것처럼 스르르 감긴다. 머지않아 이불처럼 덮는 태형의 입술을,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느껴 본다.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습도가 석진을 나른한 행복에 젖게 한다. 잠시 그의 입술을 음미한 뒤 혀가 느리게 입술 안으로 밀려든다. 작은 살덩어리 하나가 이끌고 오는 행복의 크기는 거대하다. 그 행복의 덩치에 짓눌려 죽는다 해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다 됐습니다. 일어서서 거울 한 번 보실래요?”

“네”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석진은 깜짝 놀란다. 화이트 턱시도를 입고 메이크업을 마친 자신은 삼십여 년 동안 보아 온 모습이 아니다. 꼭 꿈을 꾸는 것 같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현실인지, 그렇지 않으면 오래 된 동화 속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역시... 원래 잘생기신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감사합니다”

 

“어? 누가 오신 것 같은데요?”

“누구지?”

 

석진은 오늘 태형과 결혼식을 올린다. 원래는 더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태형의 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이고, 태형 또한 지인이 많으니 초청할 하객의 수만 해도 보통의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태형과 석진은 지금 소송 중이기 때문에 최대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 괜한 불청객들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태형은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릴 장소를 바꾸었다. 조금 돈을 더 쓰더라도 외부와의 접촉을 피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태형이 예약했던 웨딩홀에도 제일 위층에 그런 공간이 있다고 했다. 꼭 초대해야 할 하객만 부르고, 나머지는 애석하게도 초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석진은 지금 구름 위에 오른 듯 기쁘고 벅차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살면서 제대로 꾸며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완벽한 착장을 갖춘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낯선 만큼 황홀하다.

 

내가 이런 모습일 수도 있구나 -

 

이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 온 건 지민이다.

 

 

“허... 참... 이게 ... 뭐야”

“어, 지민 씨 왔어요?”

 

“와.... 진짜... 말이 안 나온다....”

“왜요? 뭐 이상해요?”

 

“아니... 와.... 대박.... 진짜....”

“...............?”

 

지민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원래 석진의 외모가 수려하다는 건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눈의 빛깔 같은 화이트 턱시도에 까만 나비 넥타이.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빛깔의 라운드까지 차려 입은 석진은 어지간한 연예인도 울고 갈 만한 후광을 내뿜고 있다. 흑백의 선명한 대조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한다.

 

 

“김태형이 보면 기절하겠는데요.....?”

“태형 씨는 다 됐어요?”

 

“걔도 거의 다 되어 가는 것 같더라구요”

“보고싶다 빨리”

 

“아... 진짜.. 서러워서 못 살겠다. 이래서 잘생긴 애들 사이에 끼어 다니면 안 되는 건데”

“지민 씨도 차려 입으면 이 정돈 나올 텐데 뭘 그래요”

 

“안 떨리세요?”

“아주, 조금?”

 

“참... 신기하네요. 김태형이 결혼을 한다는 게”

“기분이 어때요?”

 

“왜 그대들의 결혼식에 내 기분을 묻는 건진 모르겠지만. 복잡미묘하네요 참”

 

이 차림으로 저 문 밖을 나서면 새로운 삶이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내밀 것이다. 지금까지도 분에 넘치게 행복했지만 앞으로 행복의 정도는 수직으로 상승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석진은 문을 열기가 아직 두렵다. 갑자기 치솟을 행복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겁이 나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무척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다. 이 자리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러나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 물론 석진은 어제 태형과 함께 할머니의 유골이 모셔진 납골당에 다녀 왔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결혼을 한다고.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다고. 그리워서 우는 것은 늘 혼자 있을 때의 일이었는데 어제는 태형이 보는 앞에서 주룩주룩 울었다. 그래도 서럽고 처량하지는 않았다. 눈물의 끝맛이 달콤하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

 

 

“나중에 사회 잘 봐 주세요. 지민 씨만 믿어요”

“아 왜 나한테 사회를 봐 달라고 해 가지고는...”

 

“그럼 누구한테 봐 달라고 해요. 지민 씨가 제일 적격인데”

“사회 보다가 울 것 같은데요”

 

“남들이 오해해요”

“무슨 오해를 할까요. 내가 김태형을 좋아했다만 아니면 되는데. 차라리 내가 석진 씨를 좋아했었다는 오해가 훨씬 낫겠네”

 

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문이 또 다시 빼꼼히 열린다. 그리고 문 사이로 슬쩍 얼굴을 들이미는 태형이 있다. 태형도 준비를 다 마친 모양이다. 그러나 태형은 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 채로 굳어버린다. 갑자기 마비라도 온 것처럼 표정도, 움직임도 없다. 지민이 그 앞으로 다가가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대도 묵묵부답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지민이 물었다.

 

“뭐냐 너? 왜 그래?”

“....................”

 

“너 설마......”

“................”

 

“지금 석진 씨 보고 이러는 거 아니지?”

“................ 지민아....”

 

“어.....”

“너 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맞아?”

 

“............... 걍 들어 와 임마....”

 

지민이 팔을 잡아 당겨서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 온 태형은, 석진과 마주 서고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석진은 태형을 보며 웃지만 태형은 석진을 보며 웃지도 못한다. 정말로 모든 근육들이 일시에 경직된 느낌이다. 석진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블랙 턱시도. 처음엔 석진이 블랙 턱시도를 입고 태형이 화이트 턱시도를 입을까 고민했었는데, 둘 다 입어 보니 주변에서 석진이 화이트 턱시도를 입는 편이 더 낫다고 했었다.

분명 옷을 갖춰 입은 걸 처음 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런지 태형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혀가 굳어버렸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기 마련인데 이건 감탄사조차 함부로 뱉을 수가 없다. ‘기가 막힌 풍경’이라는 말이 딱 적당할 것 같았다. 정말로 태형은 기가 막혀 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 쳐다 봐?”

“.................. 정신을 못 차리겠다 자기야”

 

“왜?”

“너무... 예뻐서....”

 

“아 정신 차려! 오늘 같은 날 자기가 정신을 놓으면 어쩌자고!”

“자기... 이거 입고 신혼 여행 가면 안 되나....?”

 

“.................... 정신 차리시라구요 얼른”

 

태형의 이런 호들갑이 오히려 좋다. 세상에는 수십억의 인구가 있다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그 가운데 가장 행복한 존재가 자신이 아닐까 석진은 생각해 본다.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데 앞으로 더 그 정도가 치솟을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할 지경이다.

 

 

 

 

 

 

 

 

 

 

“이로써 김태형 군과 김석진 군이 오늘부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이 사회자가 대신 선언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박수!!”


왜 이렇게 눈이 뜨거울까. 석진은 바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물론 조명이 밝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인 것 같았다. 눈의 바깥이 뜨거운 것이 아니라 저 깊은 아래에서부터 뜨겁게 무언가가 끓어 오르는 것 같다. 설마 눈물인가. 석진은 오늘 결코 울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그것을 온 힘을 다해 누른다.

지금 석진과 함께 팔짱을 겪고 서 있는 태형도 마찬가지다. 눈 앞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얼굴이 모두 환한 빛에 가려 한 덩어리로 보인다. 분명 자신을 향해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그 웅장한 소리들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눈도 귀도 가로막힌 그에게 오직 느껴지는 거라곤 석진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체온뿐이다.

정말 결혼한 거라고? 진짜? 아직 믿을 수가 없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태형은 결혼 준비를 하면서 결혼식을 올리는 꿈을 여러 번 꾸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옆에 닿아 있는 석진의 존재감이 너무도 생생하다.

이제야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손수건으로 눈을 닦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마이크 앞에 서서 씨익 웃고 있는 지민의 모습도 보이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박수를 치는 정 선생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태형은 고개를 돌린다. 자신을 웃으면서 바라보는 석진의 모습을 눈에 반드시 담아야 한다. 이 장소, 이 순간이 남은 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빛나는 추억거리가 될지 안다.

 

사랑해 -

 

석진이 입모양으로 조그맣게 속삭인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것이다. 오로지 그의 옆에 서 있는 태형만이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다.

 

내가 더 사랑해-

 

태형이 석진과 똑같은 방식으로 화답한다. 어쩌면 눈이 이렇게도 뜨거운 이유는 반사되는 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손가락에 끼워진 똑같은 모양의 반지. 그 반지가 빛을 무성하게 반사해서 그들의 얼굴 쪽으로 쏘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끝내면 재미가 없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네에!!”

 

“우리가 확인을 안 한 게 있습니다”

 

“박지민 저거... 뭐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금?”

 

그러나 행복감에 도취된 것도 잠시. 이대로 순탄하게 예식을 끝낼 수 없는 지민의 반격이 시작된다. 태형에게는 전혀 예고되어 있지 않았던 멘트. 태형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지만 석진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가려 웃음을 막는다.

 

“신랑이 과연 신랑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야? 뭔데? 아무 말도 없었잖아....?”

 

“아 김태형 군은 조용히 하세요. 이미 김석진 군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에............?”

 

“석진 씨, 김태형 씨가 요즘 하체 스쿼트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맞습니다”

 

자기야? 태형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석진을 쳐다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민의 입가에 웃음기가 넘실거린다는 건 곧 그가 태형을 짖궂게 괴롭힐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분, 신랑 자격 확인 원하십니까?!”

“네에!!”

 

“좋습니다. 김태형 군. 준비하시죠”

“뭐...뭘요?”

 

“뭐긴 뭐에요. 당신은 이거 통과 못하면 결혼 무효에요. 제대로 해요”

“...............”

 

지민이 아까 대기실에 들어 와서 석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었다. 오늘 김태형 괴롭혀도 돼요? 마지막인데 - 지민이 너무나도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기에 석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민이 태형을 짖궂게 놀리는 일이 오늘로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지민에게 이래저래 고마운 것이 많은 석진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둘 작정이다.

 

“김태형 씨. 석진 씨 안으세요”

“아.. 안으라고?”

 

“공주님 안기 알아요 몰라요?”

“.............”

 

“자신 없어요?”

 

그제야 상황 파악이 완료된 태형은 눈에 불을 켜고 지민을 노려 본다. 그러나 이미 빠져 나갈 구멍은 모두 봉쇄된 상태다. 태형은 이를 바득 깨문다. 두고 보자 박지민 니가 끝까지 이런 식으로 - 하지만 태형이 지민에게 복수할 길은 요원하다. 태형은 석진에게 눈짓을 보낸다. 하겠다는 뜻이다. 석진은 웃으면서 태형에게 몸을 맡긴다. 태형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자세를 낮춰 석진의 몸을 들어 올린다. 어차피 석진은 가벼워서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가뿐하게 석진을 안아 올린 태형. 박수가 쏟아지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본다. 그러나 지민의 요구는 여기에서 그칠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하나, 하면 내려 가면서 김석진”

“예?”

 

“둘, 하면 올라 오면서 사랑해”

“예에?”

 

“하체 스쿼트 부지런히 하셨다면서요. 아 멘트 진부하다. 다른 멘트 없나?”

“아 그냥 할게! 한다고!”


“굿 초이스. 그럼 시작합니다?”

 

석진은 태형의 품에 안긴 것이 꼭 구름 위에 얹힌 것과 같다고 느낀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조명은 태양이고 여기저기 장식된 꽃의 빛깔들은 모두 무지개다. 하나! 하고 지민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자, 김석진! 을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외치는 태형의 목소리. 그것은 파란 하늘에서 울려 나오는 천상의 노랫소리 같다.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가 다시 위로 치솟는다. 그 동작이 반복될수록 기분은 한층 더 몽롱하게 젖어간다.

사랑해! 귓전에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커다란 목소리는 비가 와도, 벼락이 내리쳐도 자신을 든든하게 덮고 있을 것 같다.

 

 

 

 

 

 


“얼굴 좋아 보인다 둘 다”

“네. 좋아요. 괜찮아요”

 

“다행이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늘 똑같지. 아 이번에 뉴스 봤어. 재판이 꽤 길어질 것 같더라?”

“애초에 이럴 것 같았어요”

 

“재판 길어지면 힘 많이 들 텐데”

“저희보다는 아버지가 많이... 그만 하시라고 하고 싶은데. 말을 안 들으세요. 화가 풀릴 때까지 계속 물고 늘어 지실 건가봐요”

 

“대표님이 좀 악바리 근성이 있으시지”

 

벌써 일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재판은 진행 중이다. 어차피 한 번 시작하면 지루한 싸움이 될 거라는 건 예측했었다. 그러나 일 년이 가깝도록 결판이 나지 않는 데에는 태형도 석진도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한 번은 석진이 시아버지에게 간청을 했다. 우린 정말 괜찮으니 이제 그만하시는 게 어떠냐고. 그러나 돌아 온 건 역시 침묵뿐이었다.

그래서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아버지가 하고 있는 싸움은 단순히 이기기 위해서 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공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태형이는 내 아들이며 나는 태형이의 아버지라는 사실. 그 진심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태형도 석진도 그에게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도 확정된 것은 없다. 싸움이 얼마나 더 오래 갈지 누구도 장담을 못 한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이 싸움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태형과 석진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석진 씨 살 쪘네?!”

“아...저 쪘어요?”

 

“응. 지난번 볼 때보다. 우리가 지난번에 언제 봤었지?”

“한 석 달 된 것 같은데요”

 

“어, 그때보다 훨씬 얼굴 좋아 보여. 괜찮아”

“태형 씨가 자꾸 야식 시켜 먹어서 그래요... 한 입 두 입 같이 먹다 보니까”

 

“근데 왜 쟤는 치사하게 안 찌는데?”

“어우, 선생님 제가 왜 안 쪄요... 저 지금 배 나와서 죽겠어요....”

 

“그것도 배라고....”

“그래서 요즘은 야식 안 먹어요”

 

“결혼하면 남자들 다들 살 찌더라. 희한하지 참”

 

 

결혼하면 저도 모르게 배가 나와 있다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었는데, 정말로 결혼을 해 보니 그렇다. 물론 그 전에도 거의 함께 지내다시피 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붙어 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물론 살이 붙은 만큼 싸움도 많이 했다. 태형과 석진은 부부 싸움이라는 것이 남의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보니 남의 얘기라는 건 없었다. 다른 부부들과 똑같은 이유로 다투고, 그러다가 화해하고 하하호호 웃고 떠들고.

때로는 정도가 심하다 싶을 만큼 싸운 적도 있지만 결혼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살아가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걔 지금 있어요?”

“아... 그 애 말하는 거지?”

 

“네”

“근데 그 애는 왜?”

 

“그냥 한 번 보고 싶어서요”

“그래....?”

 

오늘 태형과 석진이 서울대공원 맹수사를 찾아 온 이유는 따로 있다. 얼마 전 태형과 석진은 색다른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서울대공원 맹수사에 꼭 태형과 같은 케이스가 한 건 더 발생한 것이다. 새끼 사자 하나가 수인으로 발현했다. 물론 사자 수인은 특별 관리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뉴스에 나오거나 하는 등의 떠들썩한 일은 없었지만, 꼭 어릴 적 태형과 비슷한 경우여서 정 선생이 태형에게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근데 애가 지금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오늘은 못 봐. 지금 안에서 자고 있어”

“아 그래요? 많이 아파요?”

 

“아니, 아기들은 감기 걸리면 자칫하면 폐렴이 되어버리니까. 그게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거지”

“아아....”

 

태형과 석진은 무언가 할 말을 감춘 듯한 표정이다. 정 선생 역시 그걸 눈치 채고 그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오늘 여기에 찾아 오기까지 태형과 석진에게는 꽤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석진이었고, 그런 석진의 의견을 받아 들이는 데까지 태형만의 시간도 필요했었다.

 

“두 사람 나한테 뭐 할 얘기 있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널 삼십 년을 봤어. 그걸 몰라?”

“아 그게.... ”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부모님에게도 넌지시 의견을 물었더니 ‘깊이 생각해라’는 말만 돌아 왔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충분히 깊은 숙려를 거친 것 같다.

 

“그 아이, 저희가 입양할까 해서요”

“뭐....?”

 

정 선생은 무척 놀란 표정이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석진은 난임 치료를 무사히 끝냈고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입양이라니? 말이 쉽지 결코 함부로 속단할 문제가 아니다. 이 판단의 무게를 태형과 석진에게 일러 주고 싶은 정 선생의 표정은 심각하다.

 

“태형아”

“이 사람이 먼저 저한테 얘기하더라구요. 엄마랑 아버지랑도 의논해 봤고....”

 

“어머니랑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디”

“그냥 생각 깊이 잘 해 보라구요”

 

“그렇게만?”

“네”

 

“.................”

“저도 처음엔 자신이 없었는데. 엄마랑 아버지가 저한테 해 주신 것대로만 하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태형과 석진은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높은 이상만 갖고 입양을 결정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어떠한 문제들이 있을지는 이미 부모님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태형은 깨달았다. 아, 부모님이 이런 고민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를 길렀구나. 가슴이 뭉클했다. 태형은 어린 시절을 낱낱이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고충들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었던 탓이다.

 

“세 달 정도 생각을 해 봤거든요”

“당장 급한 거 아니니까 좀 더 생각해 봐도 돼”

 

“그 애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아직은 저 혼자 걷지도 못하고 이제 겨우 기어 다녀. 그러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해”

 

“그때 사진 보니까 너무 예쁘던데”

“애 키우는 게 어디 예쁜 걸로 끝인 줄 알지?”

 

“에이... 알죠. 얼마나 힘든지”

“그러니까 잘 생각하라는 거야”

 

“넵. 그럼 좀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응. 그동안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좀 알아 봐야겠다 나도”

 

물론 생각을 조금 더 한다고 해서 결론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선택인 만큼 태형도 석진도 좀 더 신중을 기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창 밖으로 새빨갛게 노을이 지는데 서울 하늘의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싶다. 두 얼굴을 온통 홍차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을 보면서, 태형과 석진은 아직도 자신들에게 행복의 정점은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짙어져가는 저 노을처럼 행복은 아직도 더 빨갛게 짙어질 일만 남았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덴데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