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그렇게 시작의 운을 트는 조그만 동화를 밤잠 설치며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었던 어머니는 언제나 명문 중의 명문이던 가문의 일로 바빴기에 저를 돌봐주던 유모나 전속 시녀가 양손에 책을 한가득 들고 자신의 방으로 찾아왔었다. 어릴적부터 유달리 책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그를 위한 주변이들의 배려 속에서 다이무스는 온갖 이야기들을 들으며 잠에 들곤 했다.


그렇게 읽혀진 책의 수가 두자리를 넘어 세자리에서 자리잡을 때 쯤, 그의 유모는 '읽어준 것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동화' 가 무엇이냐며 물어본적이 있었다. 그것에 어린 다이무스는 몇번이고 생각을 곱씹으며 그동안 그녀가 들려준 동화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가 어지러이 짜집기 된 그 동화들 속에서 다이무스가 가장 인상 깊게 골랐던 것은 그맘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피터팬' 이나 '알리바바와 40명의 도적들' 같은 새로운 곳에 대한 모험이나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우누이 전."



이곳과는 너무도 머나먼 이국의 전래동화. 시차는 꼬박 10시간이 넘는 그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는 곳 어딘가의 나라에서 제법 유명한 동화는 다이무스의 사고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년들의 모험 이야기보다 어딘가 으스스하고 기이하게 들렸던 그 동화의 섬뜩한 내용은 다이무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쁘고 아름다워서 모두가 귀애 했다는 사랑스런 누이동생이 사실은 사람의 간을 파먹고자 하는 여우였다니. 소의 간을 끄집어 삼키고, 부모님과 제 오빠들마저 해쳐, 탐욕스레 그들의 살코기를 취했다는 요물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오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가족이라 생각한 그것이 사실은 모두를 죽인 원흉이었다 라는 뜻 자체가 어린 다이무스에게는 너무도 무섭게 들렸다. 오죽하면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며 잠을 설쳤던 것이 기억났다. 


그 동화에서 가장 소름끼쳤던 부분을 손꼽자면 글쎄, 셋째 홀로 끝까지 잠의 유혹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목격했던 그 밤을 생생히 묘사한 장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곱디 고운 제 아랫누이가 살아있는 소의 간을 내어 파먹어 버리고는 살금살금 돌아갔던 그 대목. 아침이 되자마자 셋째는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가족들은 누명을 씌운다며 오히려 그를 배척한다. 저 멀리서 그들의 누이가 피범벅이 된 제 입을 핥아내리는 것도 모른채.



".......왜 가족들은 셋째 아들의 말을 믿지 못한거야?"



그맘때 어린아이들이 그러하듯, 부수적인 상황의 여건을 전부 이해할 수  없던 다이무스는 못내 답답하여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것에 그의 유모는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모호하게, 그러나 아이들의 눈높이에 최대한 맞춘 현명한 답을 해주었었다.



"글쎄요. 그 누이가 너무나도 예뻐서, 아름다워서, 곱고 사랑스러워서─ 그만 홀린 게 아닐까요."


"홀려?"


"동방에서 여우는 사람을 홀리는 짐승이라고 부르니까요. 여우의 유혹에 빠져서 정신을 못차린거죠. 아니면......."



뒤에 무어라 더 덧붙여 주던 유모는 결국 그것을 끝으로 자, 여기까지! 이런 동화는 아직 도련님이 읽으실 거리가 못되어요. 라고 얼버무리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어린 그에게 정서상 별로 좋지 않다고 여겼던 까닭인지 그 뒤로 다시는 그 여우 누이의 이야기를 읽어주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무스는 그 동화책을 들으며 잘 수 있는 시간마저 촉박해져 버렸다. 홀든가 가주의 후계자나 다를바 없는 위치의 그였기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상당한 양의 공부와 검술 실력이 요구되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숨가쁘게 지나가는 나날 속에서, 다이무스는 그 책을 머릿속에서 잠시 지울 수 밖에 없었다.








"형!"



무척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막내동생의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지친 얼굴임에도 옅은 미소를 그리며 배웅 나온 막내 동생을 끌어안았다. 붙임성이 많았던 이글의 재잘거림 속에 반가움과 그리움이 잔뜩 배여나오고 있었다. 저에 비하면 어리디 어린 동생의 애정표현을 느슨히 받아주며 다이무스는 가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동생들의 목소리마저 까마득하게 잊혀지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길디 긴 성인식을 마치고 집의 문턱을 밟은 셈이었다.


홀든가의 모든 이들은 만 18세에 성인식을 치른다. 여자들은 그때가 처음으로 자신을 사교계에 대뷔시키며 아름답게 피어날 시간이며, 남자들은 자신들만의 검법을 위해 혹독한 상황에서 그들의 검을 시험에 치른다. 그리고 검의 명문가 답게 남자들의 성인식은 매우 고되며, 자칫 한발짝이라도 잘못 내딛으면 곧장 바닥으로 추락하게 되는 외줄타기에 비견되었다. 시험 도중 죽는 이들도, 반인불구가 되는 이들도, 크게 다쳐 사경을 헤메는 이들도 많았다. 엄격하고 가차없이 이루어지는 그 성인식이 오늘날 홀든가를 명문가로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견이나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홀든가의 차기 가주로 지목되는 다이무스의 성인식은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혹독했으며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잔악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내쉬며 다이무스는 성인식을 완벽하게 통과했다. 그렇기에 너무도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집에서 그는 편안하게 가족들과 휴식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로울 것이다, 라는 근거없는 자만심을 내세운 그 휴식은 매우 짧았다.








"형아, 있어?"


"...벨져."



미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손질되어 있는 방문은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밀려져 열렸다. 잘 다듬어진 문틈 사이로 불쑥, 얄상한 몸을 내딛는 제 아랫동생을 보며 다이무스는 의아함으로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무슨일이지, 하고 재차 용건을 묻기도 전에 벨져는 평소처럼 고아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소리야? 다시 떠난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저를 쳐다보는 아랫동생은 평소처럼 단정한 이목구비를 뽐내고 있었다. 여자와도 비견될 수 있을 정도의 얇은 선에 큰 눈. 수려하게 비틀린 입매. 오똑하니 솟은 코. 신이 정성들였다고도 감히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그 아름다운 외모는 가까이서 응시하기가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다이무스는 늘 그랬듯이 벨져의 그 얼굴을 손으로 슬쩍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다. 가문의 안정과 부흥을 위한 차선택이 그것 뿐이더군. 다른 나라에 어느 정도 발판을 만들고 진출하는 것도 전망이 나쁘지는 않고 말이다."


"적게 잡아도 10년 정도 유예가 필요한 일이잖아. 이미 차기 가주로 지정되었으면서 가문을 그렇게 비우는 건."


"외국으로 간다 한들, 가문의 일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니다. 이미 그것은 아버지와 상의가 끝났으니 걱정말거라, 벨져."



딱 잘라 말을 매듭짓는 제게 벨져의 입술이 단단히 맞물렸다. 평소와 같은 고고한 무표정이 아닌, 어딘가 일그러져 비틀린 기묘한 표정에 다이무스는 하던 일까지 멈추고 벨져를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일렁이는 그의 눈이 조금씩 무언가에 침전되기 시작했다. 그 예전, 다이무스에게 '미인은 화내는 표정조차 예쁘다' 라고 누군가가 농 삼아 지껄여대는 것을 흘려들은 적이 있었는데 역시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었다고 무심코 생각했다. 누가 봐도 완벽한 미인의 상인 벨져가 지어버린 표정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것 중에 제일 섬뜩했으니.



"그 발판을 만들고 진출한다는 것에, 정략결혼 같은 너절한 계약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


"하. 이글의 말이 맞았군. 그 망나니가 가끔은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어."



헛웃음을 치며 픽, 냉소를 짓던 벨져가 다이무스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었다.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온 그 아름다운 얼굴을 직시하게 된 다이무스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제꼈지만, 그보다 한발 앞선 벨져의 손이 다이무스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올려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은 천하의 다이무스라 해도 미처 대처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주 잠깐 굳어버린 제 형을 보며 벨져는 온화하게 웃었다.



"내 형아는 대체 언제까지 나를 믿고있는 걸까."

 


치켜뜬 고양잇과의 눈매가 새초롬하게 접혀, 푸르게 고혹적인 눈웃음을 그린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그의 입술은 모난 곳 없이 예쁘다. 나른함을 한껏 드러낸 미인을 보며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어여쁘디 어여쁜 동생이지만 지금만은 무언가 섬뜩했다. 마치 그 예전, 동방의 이야기에서 자신을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던 여우처럼.


여자의 손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섬섬옥수는 나긋나긋하게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다이무스는 그 외향에서 절대 짐작못할 악력이 거세게 드러나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희고 고운, 늘씬하게 잘 빠진 그의 손가락이 조금씩 자신의 어깨를 파고들며 묵직하게 짓눌러대 고통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것을 저지하려 든 손은 이미 벨져의 다른 손에 막혔다. 여리게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내비치는 손아귀의 힘은 상당히 강했다.



"십 년."


"......."


"십 년을 기다렸어. 저 이글보다도 먼저. 다른 누구보다도 나만큼 기다린 사람은 없겠지. ...그 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그런 나한테 이제 또 얼마나 기다리라는 걸까."



샐쭉하게 웃는 벨져의 얼굴은 그 누구라도 시선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예쁘다. 수줍게 피어나는 봄의 새하얀 백합 마냥 청초한 얼굴로, 그 어떤 이들이라 해도 한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곱디 고운 미소를 덧그리며, 가장 달콤한 목소리를 자아내, 그야말로 한순간에 녹아내릴 듯이 절절한 어조로 다이무스에게 매달렸다.




"알고 있잖아. 내가 형아를────."


"벨져...!"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라. 

암묵적으로 잘려나간 다이무스의 말은 더 이상 벨져에게 닿지 못했다. 동생으로  부터 조급하게 시작된 키스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느낌으로 뒤섞였다. 안을 진탕시키며 끈적하게 얽혀, 숨을 막아내는 그것에 다이무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맞물린 입술을 기어코 밀고 들어오더니 부드럽게, 혹은 강하게 리드해 나가는 순간,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만 허락된 달콤함은 끝났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처철한 비린내가 벨져의 심기를 단단히 거슬렀다. 깨물린 자신의 혀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핏물이 입 밖을 비집고 흐르는 것에 벨져는 토막난 웃음을 흘렸다. 거칠게 입을 닦으며 평소와 같은 어조로 나가라. 하고 축객령을 내리는 다이무스에게 작은 날붙이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또 도망가는 거야, 형아?"



표표한 눈을 들어 똑바로 저를 직시하는 그 푸른 시선을 마주볼 수 없어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외면했다. 바짝 붙어와 매력적인 얼굴로 고고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 미묘한 냉기가 섞였다. 턱이 잡혀 억지로 당겨지고, 그것은 피내음과 함께 끊어졌던 키스로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도 밀어내려는 자신에게, 문득 벨져의 시선이 얽혔다. 그 누구보다도 어여쁜 미인이 진한 웃음을 그으며 자신을 끌어안는 것에 다이무스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문득 어린 시절, 왜 여우에게 가족들이 홀린거냐며 던진 자신의 질문에 유모가 난처하게 웃으며 이었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쳤다.



'여우의 유혹에 빠져서 정신을 못차린거죠.'

'아니면.......'

'알고서도 넘어가주었다던가.'



식구들의 눈을 가려 간을 파내고, 그것으로 이젠 나까지 탐하는구나.

그 웃음으로, 그 얼굴로 나를 홀리는구나. 

네가 내 정신을 좀먹더니 이제는 기어코 나를 잡아먹는구나.



"형아가 그렇게 싫다면 이 자리에서 날 내쳐내도 상관없어."



그 말에도 도저히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동생이다. 처음으로 생긴 동생이며, 자신에게 형 이라는 호칭을 선물해준 이다.

곱디 곱게, 어여쁘게, 사랑스럽게.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키운 동생이다.


...그런 그를 내친다는 것은 다 이무스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사실을 벨져 홀든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쓰게 맺힌 한탄이 가슴을 쳤다. 포기와 체념으로 얼룩진 제 형의 표정을 보며 새파란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야살스레 파낸 심장을, 간을 입에 물고 기뻐한다.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은 어여쁜 여우누이가 충족감에 젖어 새빨간 웃음을 덧그렸다. 가시지 않은 피내음이 조금씩 달뜨는 공간 위로 희미하게 퍼져나갔다.










야금야금 잡아먹고 갉아먹게찌.

동화의 끝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니라 잡아먹혀 버렸습니다~ 로 끝나고.

꿈도 희망도 없군.

사퍼 / 다무른 애정합니다♥ / 마이너틱 왼쪽도 다무가 오른쪽이라면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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