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ain










그날 이후 정국을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궁금하지 않다. 다만 묻고 싶다. 왜 나였는지. 왜 하필 나였는지 묻고 싶다. 좋아했었냐고 묻는 말에 좋아했었다고 대답하는 게 우스울 정도다. 그저 일주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정국이 계주를 1등으로 들어와 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을 보고 반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남자를 보고 동하는 마음 자체도. 처음이지만 그런 상대에게 이토록 빠르게 마음을 내어준 것도 처음이라 그때 당시를 떠올리면 솔직히 정국의 아버지에게 들킨 순간보다 입술을 부딪힌 그 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뛸 정도니.


지나가는 말로 관심 없는 척 정국에 대한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갑자기 말도 없이 전학을 간 것치고는 화제성은 당연히 없었다. 정국은 평소에도 친구를 가까이 두는 애가 아니었고 애들이 아는 정보란 공부 잘하는 뿔테안경이었다. 그나마 체육대회 덕분에 달리기를 잘하고 사실은 좀 생겼다 정도가 추가된 게 다였다. 정말 정국의 집안에 대해서는 지민만이 알고 그렇게 지민만 알 수밖에 없게 됐다. 돌연 사라져버린 정국에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잘 사는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는 사람 없고, 공부를 잘하고 내세우고 다닐만한 얼굴을 가졌지만 가면을 쓴 듯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가지는 클리셰의 무게가 내가 함부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인정하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리긴 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사실은 정국은 나를 계획적으로 이용했다는 거다. 나를 이용하면서 정국은 뭘 얻었을까.


















전 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텁텁한 공기, 도로를 질주하는 수많은 차들, 낮은 건물은 찾을 수 없는 높은 건물들과 상가들을 지나 유난히 그 사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정국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시선들 하나하나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듣진 않았다. 그냥 일종의 사람들을 차단하는 방식일 뿐 다른 목적을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정국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두꺼운 뿔테는 온데간데없었고 높은 콧대와 굉장히 큰 눈이 누가 봐도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이목구비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자리 잡고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마의와 넥타이, 그리고 조끼까지 교복에 해당되는 것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착용한 모습은 전과는 다른 점이 아니었다. 그건 정국의 성격과 동일시되는 성향이기 때문에 별로 달라질 부분이 아니니.



전학 온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그날 이후 집안은 정국이 원하는 대로 돌아갔다. 바람 나서 집을 나간 아버지를 오랜만에 봤고 보자마자 뺨을 맞았지만 눈물이 나기는커녕 웃음이 났다. 거울을 보는 느낌이었겠지. 아버지가 바람난 상대는 남자였다. 아픈 엄마를 두고 흥미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건 엄마보다 정국이 먼저 알았고 대놓고 아버지와 그 남자를 관음 했다. 남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아버지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맞지 않는 시력 안경을 끼고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 최고를 향해야 했던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던 걸까. 애초부터 자신의 여자와 자신의 자식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걸 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말을 술에 취해 방으로 들어와 고해성사하듯 읊조린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흐느끼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오선지로 삼아 듣는 아버지의 말은 지옥에서 만든 음악과 같았다. 하지만 흐느끼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슬프진 않았다. 정국에겐 부모님은 사랑에 마지않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형에 불과한 정국은 인형인 주제에 그들을 사랑하지도 사랑을 원하지도 말아야 했다. 그렇게 태어난 존재니까. 그래서 이용했다. 박지민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남자와 가장 비슷한 남자였다. 피부가 하얗고 웃는 눈이 예뻤다. 인정한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남자는 아름다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난 사람이라는 걸 흘리고 다녔고 아버지는 그에 홀려 그 밖에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집안이 흔들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 집을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는 공식적으로는 자상한 아버지이며 외조를 잘하는 사업가였으니. 그 안에서의 일말의 루머도 존재해서는 안 됐다. 문제 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궁전 같은 집 안에 도우미란 존재할 수 없었고 일주일에 한 번 온 가족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어야만 아버지의 사람들이 들어와 정리를 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는 다양한 고액의 과외 선생님들 말고는 우리 집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불쌍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름 눈에는 눈 이에는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일주일에 일곱 번은 다른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들과 잠을 잤고 넓은 집에 엄마와 그 남자의 신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가 고작 정국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학생 안 타?”




정국은 얼떨결에 진짜 음악을 듣는 사람과 같이 보였다. 마치 음악에 심취해서 버스가 온 줄도 모르고 멍 때린 것처럼 보였겠지. 정국은 곧장 버스에 올라탔고 아이들의 시선을 여전히 한 몸에 받으며 맨 뒷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창문을 보는 순간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떤 선율도 들리지 않아 뺄 필요 없는 이어폰을 나도 모르게 한 번에 잡아당겨 뺐다. 그리고 시선을 뗄 수 없이 그렇게 천천히 작은 인영이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어, 쟤 박지민이다”



맞네 박지민이다. 그때와 다를 거 없이 똑같은 박지민은 이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학교 축제 때 동네 학교들이 서로 바꿔서 장기자랑을 했는데 그때 지민이 이 학교에 와서 춤을 췄다고 했다. 공부만 했던 나는 알 리가 없었던 사실이다. 뭐든지 다 잘하는데 착하기까지 하다며. 착하긴 하지. 그 짓을 했는데 이렇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거 보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연락을 해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확실히 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그렇게 지민을 보내고 나서 작정하고 꼬실 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좋아하는 건 아닌데 예상했던 레퍼토리로 전혀 흘러가지 않아서. 그래도 전학 가기 전 얼굴을 볼 줄 알았다. 좋은 형태로든 나쁜 형태로든 당연히 후자였겠지만. 그러나 틀렸다. 당연한 건 없었다. 그래도 피해오는 게 없으니 싱거우면서도 깔끔한 전개인 건 확실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동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어느덧 수능날이었다. 지민은 아침 일찍 일어나 든든한 아침을 먹고 한 시간 일찍 배정된 학교로 들어섰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복도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많았다. 교실을 확인한 뒤 수험 표를 확인받고 교실로 들어서는데 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위아래로 완벽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이 신기했다. 지민은 잠깐 훑은 뒤 하나둘씩 들어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마음을 비우기 위해 멍을 때렸다. 어젯밤 문제집을 다 버리고 왔더니 명상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툭




지민은 눈앞에 떨어진 지갑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주워 교실을 나서는 남자를 붙잡았다. 붙잡고 보니 그 교복이다. 그리고 지민은 지갑을 주려는 손에서 지갑을 주기는커녕 다시 떨어뜨리고 말았다. 




“안녕”



익숙한 얼굴이 아님에도 알 수 있었다. 지민이 한눈에 반했던, 계주 선을 뛰어넘었던 그때의 정국이었다. 정국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떨어진 지갑을 주웠고 안녕이라는 말을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지민의 대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닌 듯 다시 교실을 나섰다. 머릿속이 하얬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수능을 치면 무조건 망할 정도로.















시발. 진짜로 망쳤다. 제대로 망쳤다. 시험지 위로 떠다니는 정국과의 키스부터 낯간지러운 짓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렸다. 그 상태로 박차고 안 나간 것만으로도 대견스럽다가도 재수강이라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아주 조울증이 따로 없었다. 한 번뿐인 인생 재수 한 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속 편한 소리를 하며 소주를 따르는 석진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다들 합격 소식은 물론 입학 날 뭐 입고 갈지 쇼핑하러 다닐 때 지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청승맞게 혼술을 하는 건 더 하기 싫어서 불렀는데 그냥 혼자 마시는 게 나을 뻔했다.


 

“야 지민아 어차피 형네 학교는 한 번에 못 와”

“화연전 아니야? 연화대는 아직 화양대에 못 미치지 서울대는 뭐 생각도 안 했었고”

“야 인마. 연화전이지 무슨 화연전이야. 1학년 때 연화대 갈 거라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으면서”

“형 있어서 싫어”



석진은 괜히 짓궂게 구는 지민이 결국 오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수능을 망친 건지 입을 열지 않아서 모르지만 실수만 없다면 거뜬히 합격하고도 남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지민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 없어야만 하지만 문뜩 정국은 어느 대학을 골랐는지 궁금했다. 




“형 우리 고등학교 3학년 때 계주 1등 기억나?”

“얘가 진짜 맛이 갔나. 그땐 난 이미 연화대 신입생이었는데 알겠냐”




석진은 혼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는 지민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갑자기 뜬금없이 고등학교를 언급하는 거 보면 분명 대학교랑 연관이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여자라고 하기엔 지민은 대부분 가볍게 만나고 짝사랑만 했던 걸로 안다. 만나면 안 되는 애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물어볼 이유는 없을 텐데 섣부른 추측이라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아 그랬지 석진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사실 자존심 세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태형의 문자를 씹었었는데 꼴에 연화대를 넣었단다. 그래놓고 아직도 석진의 술 마시자는 연락까지 안 보고 있는 거 보면 합격은 못했나 보다 그럼 뭐 같이 재수 준비해야지 뭐 어떡해.라고 생각하자마자 멀리서 머리를 휘날리며 우리 쪽으로 뛰어오는 김태형이 보인다. 입이 귀까지 걸렸는데 설마,




"뭐야 안 올 것 같더니"




석진은 얼른 태형이 앉을 의자를 빼줬고 태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앉더니 말은 고사하고 물인 지 술인 지도 모를 투명한 액체를 벌컥벌컥 마셨다.




"악 ! 써, 물인 줄 알았어..."

"뭔 지나 말하지?"



석진의 물음에 지민도 덩달아 태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 추가 합격 마지막 날이었는데 알바하는 순간에도 휴대폰을 머리에 붙이고 했단다. 며칠을 그러고 알바했다는 태형의 말에 지민은 힘이 빠지면서도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하는데 합격해야지. 추합은 무조건 악바리 정신으로 버티는 거라고 했다. 태형의 말에 소주 한 병을 더 시키는 석진에 반면 지민은 가볍게 축하의 인사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정국은 첫날부터 아이들의 시선을 떼어놓기는 힘들었다. 실용음악과라 고등학교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흥미로웠지만 그 흥미로움은 오래가진 않았다. 정국은 개강 총회 때 그 누구보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문득 종종 같은 반 여학생들끼리 심지어 남학생들까지 다른 학교인 박지민이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을 건지 토론하는 걸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연화대를 그렇게 많이 언급했더랬다. 그래서 여기로 썼다는 건 아니고 실용음악으로 워낙 유명했으니까 근데 박지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거 보니 다른 곳 갔나 싶다.




"어 거기 잘생긴 친구!"




자기가 잘생긴 건 모르는 것 같은 애가 다가오더니 덥석 말부터 걸었다. 어딘가 낯이 익다. 같은 반이나 뭐 그런 거였을까. 태형은 대답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정국에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왔다. 정국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고 그 상태로 개총이 이루어지고 있는 술집을 유유히 나왔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정국은 한 번 더 괜히 뒤를 돌아보며 술집 안을 빠르게 훑는다.

그들이 온 곳은 다른 술집이었고 알고 보니 석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이미 개총에서 몇 번 마주친 얼굴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2차를 온 모양이었다. 이왕 벌어다 주는 거 같은 학교 선배님 가게 장사를 벌어다 주는 게 어떠냐며 이미 짱친은 된 것처럼 정국에게 맞장구를 유도하는 태형이다. 석진은 또 누굴 데리고 온 거냐며 이젠 좀 그만 데리고 오고 술이나 마시라며 말하기도 전에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다.

신기한 놈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인싸력에 거부할 타이밍도 놓쳤다. 그렇다고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태형을 보며 어째서인지 고3 체육대회 때 지민이 다짜고짜 찾아와 계주를 시킨 게 떠올랐고 정국은 자기도 모르게 지민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본 태형은 정국을 힐끔 쳐다보더니 먼저 술잔을 채웠다.



 "무슨 생각 해요?"

"아까 거기보단 낫네요. 여기가"




태형의 질문은 가볍게 패스하고 말을 돌리는 정국에 태형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재밌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둘은 어느새 시시콜콜 대화를 하면서 서로의 전공은 어떻게 되는지 별로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대화가 끊기지는 않았다. 슬슬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파하고 택시를 부르고 각자 갈 길을 갈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




"실용음악과 면 우리 종종 보겠네요! 제 친구도 이번에 합격했으면 좋았을 텐데"

"친구도 연영과?"

"친구는 무용과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거든요"

"아, 혹시 어디 고등학교,,"



"태형아 형 이것 좀 도와라 그냥 가기만 해라"




정국은 뒤에서 태형을 부르는 석진의 부름에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태형에게 이만 가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느덧 모두가 학교에 적응할 무렵 대학교의 꽃인 축제 기간이 왔다. 태형은 집에 박혀서 공부만 하는 지민에게 오랜만에 바깥공기도 마셔보고 먹고 마시고 하기 싫은 거면 체육대회라도 보고 가라고 난리였다. 지민은 내키지 않았지만 체육대회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태형을 따라 그렇게 합격하고 싶었던 학교를 아직 합격도 하기 전에 발을 들였다. 지민은 당연히 다양한 경기 중에서도 계주를 보고 싶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여러모로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열정이 가득했던 그때를 온몸으로 느껴보고 그 기운으로 재수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등학교 때와 다를 거 없이 응원 하나는 끝내주게 하고 다니는 태형을 맥 없이 따라다녔다.


얜 무슨 만나는 사람마다 다 인사를 하고 1분 이상은 기본으로 대화를 나누냐. 그러다 계주 진행을 얼떨결에 맡게 됐다는 석진의 모습이 보이자 자연스럽게 태형에게서 벗어나 석진에게로 다가갔다. 석진은 생각지도 못한 지민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몸짓은 멈추지 않고 고개만 겨우 들어 지민에게 눈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석진은 지민을 앞에 두고 정확히 10분 뒤에 있을 계주를 위해 선수들의 인원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뭐야 한 명 어디 갔어”

“아, 3번 레인 윤재형인데 아까 급똥이라면서 화장실 뛰어갔는데,,”

“10분 안에는 오지?”

“어.. 그게.. 그건 저도 잘,,”



석진은 정확하지 않은 답에 답답한 듯 머리를 털어댔다. 그러다 문득 뻘쭘하게 서 있는 지민을 보더니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부딪혔다. 그런 석진에 지민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했고. 혹시 나냐는 눈빛을 이해한 석진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기 학생도 아닌데 내가 왜 뛰어??”

“학생 겁나 많아서 아무도 몰라. 야 지민아 형 한 번만 살려줘라”

“한 명 못 뛴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야 너 그렇게 어마어마한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석진은 뒤돌아 가려는 지민을 굳이 다시 잡아와 기어이 3번 레인에 세워뒀다. 지민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어느새 옆에 와서 웃어젖히는 태형과 만족스럽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지민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석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사실 뛰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학생도 아닌데 뛰었다가 이기는 거면 모르겠지만 만약 진다면 그거대로 짜증 날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나 애들 수준을 다 알고 있어서 자신감이라고 넘쳤지. 지금은 생판 모르는 남들과 나란히 뛰는 건데 이길 확률이 질 확률보다 낮을 게 뻔했다. 

이대로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석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도망갔어도 아까 석진이 붙잡았을 때 뿌리치고 갔어야 오히려 뒤끝이 안 남았을 거라. 이미 늦었다.


















정국은 비몽사몽 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물통을 컵에 따르지도 않고 몇 번의 목 넘김으로 물통에 담겨 있는 물을 거의 절반은 비워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 오늘 축제였지. 원래 참석할 생각도 없었지만 너무 애매한 시간에 일어나서인 지 평소 같았으면 관심도 안 갔을 축제가 궁금하긴 했다. 전 날 무조건 축제 오라고 옆에서 끊임없이 말했던 태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친구도 데리고 올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도 귀에 딱지가 질 정도로 얘기를 했던 지라 이미 아는 애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귀찮은데…”









정국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학생들에 정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멈칫하단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들어내고 있는 태형의 모습에 진짜 대단한 새끼라는 생각을 하며 태형에게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보이며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정국은 확인한 태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국에게 달려왔고 5분 뒤에 제일 재밌는 거 하는 거 어떻게 알았냐며 곧장 캠퍼스 주차장 다음으로 큰 운동장으로 데리고 갔다. 




“3번 레인에 서 있는 애 보여?? 제가 내가 말했던 내 친구!”

“……..”

“못 찾았어? 잘 안 보이나?”

“아니. 너무 잘 보여”



뭐야. 쟤 박지민이잖아. 정국은 지민이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채고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꽤 재밌는 상황임은 분명한데 쟤가 왜 계주 레인에 서있는 거지. 


정국은 태형이 가자고 하기도 전에 이미 몸을 움직여 지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뭐가 불만인 건지 죄 없는 땅을 연신 비비고 있는 지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땅만 보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드리운 사람의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고 거짓말처럼 서 있는 정국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웃고 있는 정국을 보고 마냥 똑같이 웃어 보일 수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기분이다. 




“너..!”

“응 나 전정국”



지민은 여유로워 보이는 정국의 모습이 갑자기 화가 났다. 엄연히 시험을 망친 게 이 자식 때문인데 내가 얘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필요가 없잖아. 지민은 아까 전 석진을 노려보던 표정을 다시금 짓더니 이번 타깃은 정국이었다. 정국은 그런 지민의 표정에 재밌다는 듯 웃음을 잃기는커녕 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금방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 그대로 정국의 두 손을 모아 가둬 잡아 올리더니 금방이라고 울 것 같은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것이다. 




“진짜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아니 그냥 들어줘. 기억나지? 너 달리기 되게 잘하잖아”

“무슨 ㅅ,,”

“아 정말?? 정국이 네가 대신 뛰겠다고?? 진짜 고마워!!”

“뭐?”



정국은 붙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해봤지만 지민은 그럴수록 정국의 손을 더 세게 잡아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곧 지민의 말을 들은 석진이 둘에게 다가오더니 지민을 대타로 세워뒀을 때 지었던 뿌듯한 표정보다 더 뿌듯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봤고 그에 지민은 정국의 손을 놔주면서 3번 레인에서 벗어나 정국을 그대로 밀어버린다. 




“형 얘 진짜 빨라 내가 장담해”

“한다고 한 적 없,,”

“어어 이제 뛰어야 된다! 박지민 안 뛸 거면 김태형 옆에 가서 구경이나 해 경로 방해다 이제부터”




석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정국에게 다가가 따봉을 해주며 이왕이면 1등 해달라는 말과 파이팅이라는 말과 함께 준비 자세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정국은 그 순간 고등학교 때와 지금이 오버랩 되는 기분을 느꼈다. 지민의 부탁으로 계주를 뛰었던 그때와 지금은 분명 많은 게 달랐지만 다르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19살 한여름 가운데 서 있었다.














 😊정국이는 어쩌다 운동선수가 되었을까요~~~‼️❓

비온 뒤 맑음은 반드시 있어. 그 끝엔 무지개가 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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