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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다리 사이를 스치는 천 자락이 신경을 건드린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아봐도 이 일을 저지른 속 좁은 성운들을 건드릴 마땅한 방법이 없었으므로 딱히 원망을 토로할 곳도 없었다. 바앗..! 그나마 비유가 곁에서 힘내라는 듯한 움직임을 해주는 게 유일한 위로 거리였다.

그래그래. 비유 너밖에 없다. 김독자는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 치맛자락을 밑으로 내려주며 저가 이 꼴이 된 계기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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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 저희들의 성운과 계약하지 않았다고 치졸한 짓거리를 저지른 성좌들에게 있었다. 성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치졸하고 잔인하다. 그들은 그때 김독자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한가지, 유치하지만 확실하게 한 사람을 보내버릴 수 있는 계획을 세웠다. 피부에 딱 달라붙은 검은 차이나 드레스와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 가터벨트. 입고 있던 하얀 코트는 어디로 없애버렸는지 자고 일어나니 요상한 옷이 김독자를 휘감고 있었다. 그 덕에 김독자는 영문도 모른 채 동료들에게 변태 취급을 받으며 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김독자는 억울했다. 저의 취향이 차이나 드레스에 가터벨트가 맞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냥 정말로 순수하게 바라보는 입장에서였다. 맹세코 이딴 옷을 입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제 취향이 어느새 그 성좌들에게까지 퍼졌지.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범인은 뻔했으니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 페르세포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불편한 성좌였다. 제 머릿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구는 것도 그렇고, 능글맞은 웃음도 정말 불편했다. 하지만 언제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코앞으로 성큼 다가오기를 좋아하는 법. 이 저주 같은 옷을 벗기 위해서는 꼭 페르세포네를 만나야만 했다. 이 차림을 하고 페르세포네를 만나야 한다니, 김독자는 수치심에 조금 죽고 싶어 졌다.

아니, 그래도 이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몇 번째 이어지는 자기합리화인지. 단시간에 스킬의 숙련도가 쑥쑥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유중혁이 오기 전에 도망갔으니까 그건 조금 나은 일이겠지?"


그치? 그 자식이랑 마주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바앗. 복실복실한 도깨비의 털이 김독자의 얼굴 위로 비벼졌다. 그래. 비유 너가 있어서 다행이다. 김독자는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비유를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래 뭐 유중혁한테 이 꼴을 걸린 것도 아니고. 나머지 동료들은 저를 이해해 줄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는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불행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김독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 옷은 대체... 몇 번이나 상상해왔던,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낮은 음성이 목덜미를 느리게 훑었다. 유중혁? 머리가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에게 반응했다. 이, 시발. 하필이면 지금 유중혁을 만나냐. 아침에 일어나 한수영에게 그런 취향을 가졌냐고 놀림 받을 때보다, 하늘 위에서 즐거이 세상을 관람하는 성좌들이 제 취향을 다 알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치스러움이 얼굴을 붉게 달궜다. 여기서 뒤 돌면 안 된다. 여기서 뒤 도는 순간 내 인생은 끝이 나는 거다. 존나 유중혁 너는 필요할 때는 매번 늦어놓고는 쓸데없이 이럴 때만.

김독자는 일단 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 유중혁에게만큼은 동요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같이 다니면서 이미 못난 모습을 많이 보여 줬다지만, 그럼에도 김독자는 정말이지 유중혁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하, 중혁이 왔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데. 우리 중혁이 형 좋아해? 유중혁은 김독자가 이렇듯 말하는 것을 참 싫어했다. 김독자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찡그려지는 유중혁의 미간이 좋아서 언제나 이런 말투를 썼다. 김독자. 다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무리 김독자의 장난질에 쉽게 말려들던 유중혁이라 해도 검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김독자는 하나도 얄밉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답지 않게. 유중혁은 혀를 가볍게 차며 김독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네놈에게 성운이 수작질을 부렸다던데 왜 말하지 않았지. 또 모두를 버려둔 채 도망갈 셈이냐. 무감정한 소리 밑에 진득하니 깔린 애원에 김독자는 모호한 표정으로 웃었다. 몇 번, 구원의 마왕 칭호를 얻은 이후부터 유중혁은 이렇게 김독자에게 매달리는 듯한 말을 하고는 했다. 물론 그 유중혁이었기 때문에 크게 티는 나지 않았다. 아마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은 명백히 김독자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만, 김독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가 뭐라고. 김독자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양, 유중혁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는 주인공이고 자신은 한 명의 독자일 뿐이었다. 이 세계가 구원받는다면 금세 끊어질 인연.


"왜 그런 표정을 하지?"


꼭, 금방이라도 곁에서 사라질 것처럼... 유중혁은 하얀 얼굴을 물그러미 바라보다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그대로 대화를 나누면 김독자라는 인간이 서서히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래서 이 꼴은 뭐고, 그 개자식들이 네게 어떤 짓을 한 거지?"


결국 주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하... 내가 원해서 입은 건 아닌데... 김독자는 비굴하게 웃었다. 분명 자신의 말은 명명백백한 사실이건만 변명같이 들리는 까닭이었다. 아니, 야 그 치사한 성좌들이 이렇게 만든 거야. 정말 자고 일어났더니 이 꼴이 돼서 벗겨지지도 않는다니까?

유중혁은 분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건만 특유의 싸늘한 눈빛이 저를 향하자 김독자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돼서 격하게 변명했다. 야 유중혁. 너는 무슨 나를 변태처럼 쳐다보고 그러냐.


"옷 벗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믿을래?"


진짜 안 벗겨진다니까? 김독자는 새빨간 얼굴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래. 그럼 한번 벗어봐라. 되돌아올 리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 진짜?"


진짜 벗으라고?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것도 잊고 김독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유중혁이. '그' 유중혁이 뭐라고?


"벗어봐라."


네 말대로 그 개자식들이 너를 이 꼴로 만들었을지, 김독자 네 놈의 취향이 그 모양인 건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잘난 입꼬리가 슬쩍 들렸다. 유중혁은 이런 순간마저도 잘생겼구나. 아니, 잠깐만.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진심이야?"


진짜? 너가? 내가 아는 중혁이는 이런 애가 아닌데... 김독자는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드레스와 유중혁을 번갈아 보면서 혼란을 가라앉혔다. 일단, 일단은 벗자. 그러면 이 거지 같은 오해도 풀리겠지.

하지만 역시 벗겨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아도 이런 밖에서 옷을 벗기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진짜 여기서 옷을 벗으라고? 벌써 몇 번째 이어진 질문을 눈짓으로 전하자 빨리 하라는 듯 재촉하는 소리만 들렸다. 결국 김독자는 드레스의 끝자락을 잡고 위로 올렸다. 흰 다리를 가로지르는 가터벨트와 하얀 속옷. 옷은 끝까지 검은 주제에 속은 눈밭처럼 하얗기만 했다. 김독자의 손이 느리게 올라감에 따라 움푹 파인 배가 드러나고 마른 늑골이 두드러졌다. 야살스러운 장면이었다. 불그스름한 피부는 꼭 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보였다. 유중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김독자."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그게... 김독자는 당황스러웠다. 이게 왜 그냥 벗겨지지? 김독자는 힐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유중혁의 눈치를 봤다. 야, 이게 왜 벗어지지. 분명 아까는...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단단한 손이 김독자의 얼굴을 들어 올렸고 유중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잘생겼다. 생각하는 사이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조금 건조한 입술이 맞닿았고, 말랑한 살덩이가 입속을 헤집었다.

변명을 해보자면 김독자는 유중혁의 키스를 막을 수 없었다. 유중혁은 조금의 힘만 줘도 그대로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김독자가 10년을 읽어온 유중혁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얼굴을 하는 유중혁을, 김독자는 밀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울리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되뇌면서도 김독자는 유중혁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건 일종의 연민 같은 것이었다. 그 유중혁이 무언가를 바라는 눈으로 키스를 하는데 김독자가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둘은 아무도 없는 풍경에 기대서 격렬한 키스를 나눴다. 멈추는 방법조차 몰라서 격한 숨을 몰아쉬면서도 둘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빨간 경고등이 시끄럽게 울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중혁아. 김독자는 넓은 어깨를 붙잡고 유중혁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중혁아. 중혁아. 유중혁.

유중혁은 김독자의 하얀 몸을 제 코트로 덮어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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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는 알아서 상상하기...

@cu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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