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향 타는 소재가 많습니다. 약하게 오메가버스를 베이스로 삼고 있으며(후시구로를 오메가-음인이라 칭합니다), 남성 임신 소재가 나옵니다. 둘에서 출발하여 셋이 되는(…) 이야기이니, 이러한 소재가 취향이 아니신 분들께는 부디 주의를 요합니다.



산기슭에 외따로 주저앉아 있는 초라한 오막에 다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목격한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스쿠나는 그곳에 누가 살고 있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병에 걸려 마을에서 쫓겨난 남편의 병구완을 하던 여인이었다.

사내는 얼마 안 가 병을 못 이기고 죽었으나, 여인은 이미 부정을 탄 몸이었기에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뼈다귀만 남아 먹을 것도 없어 보이던 여인은 하는 수 없이 산밭을 일구어 근근이 목숨줄을 이었다. 내버려 두면 겨울을 못 넘기고 죽을 줄 알았는데, 여인은 그해 질기게도 살아남았다. 그 다음 해, 그 다다음 해에도.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넘기던 여인은 결국 이 산에 유일하게 거주하는 노파가 되었다. 산나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계절이면 종종 스쿠나와 마주치곤 했던 노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오막 뒤의 대나무밭에 꼬박꼬박 공물을 올려두곤 했다. 대개는 먹잘 것도 없는 푸성귀죽이었고, 그나마 형편이 좋을 때는 녹두죽이었다. 어쨌건 공물을 받는 입장이라 스쿠나는 노파를 해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사실, 피골이 상접한 노파는 그가 선호하는 먹잇감도 아니었다.

그런데 노파가 죽은 지 몇 년은 지난 오막에 무슨 까닭으로 다시 연기가 오르는 것일까. 지나가던 나그네의 소행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오늘 또다시 연기가 오르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 근방의 인간들은 문둥이가 살던 집이라며 저 오막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텐데. 호기심이 일어난 스쿠나는 어차피 한가한 김에 제 눈으로 직접 누가 오막에 불을 피우는지 알아보고자 나섰다.

“─하, 이것 봐라.”

산등성이를 날 듯이 내려간 것도 잠시, 그는 요 몇 년 사이 더욱 꺼진 것만 같은 오막을 내려다보며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눈 아래 펼쳐진 것은 꽤 긴 세월을 살아온 그로서도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재미있는 볼거리가 생긴 것 같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스쿠나는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게 찢었다. 만일 고만고만한 녀석이라면 한입에 삼켜 버리려고 작정했던 것은 벌써 잊었다.

그도 그럴 게, 들일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듯한 창백한 피부의 음인陰人이 낑낑거리며 쟁기를 만지고 있으니 말이다.

스쿠나는 킬킬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런 진풍경을 어찌 한번 쓱 보고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돌보지 않은 사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밭터에는 젊은 음인의 키만큼이나 웃자란 풀도 적잖이 있었다. 본래도 돌투성이라 늘 노파를 애먹이던 밭이었으니, 저 음인에게는 더더군다나 쉽지 않은 상대일 것이다.

이거 참,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건진 몰라도 낫 한 번 안 잡아봤을 법한 놈이 저길 갈아엎겠단 말이지. 스쿠나는 당분간 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놔둬 보기로 했다.

 

그날부터 오막에는 거의 날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뭘 하나 호기심이 일어 바로 근처를 어슬렁거려도 보았는데, 폐가가 다 되다시피 한 집은 ‒ 뭐, 지어질 당시에도 궁상맞은 꼬라지긴 했다만 ‒ 자주 비어 있었다. 아마 산 아래를 오가면서 식량이나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모양이라고 스쿠나는 추측했다.

쟁기를 만지작거릴 때부터 짐작하긴 했으나, 이 산에 죽으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니 별난 일이었다. 나병이 두려워서건 제가 두려워서건 자기 목숨이 아까운 사람은 이런 곳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이곳에 터를 잡은 걸 보면 필시 복잡한 곡절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으로선 그 곡절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곳으로 오는 것 이상의 위협이 존재했을 게 뻔했다.

저 쓰러져 가는 오막에서 빈손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만, 과연 이런 생활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스쿠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건 그렇고 저 가냘픈 몸의 음인이 여기서부터 꽤 떨어져 있는 민가를 어떻게 그리 자주 오가는가 했는데, 얼마 안 가 스쿠나는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흑! 이리 와!”

사람이 길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큼직한 덩치의 개 두 마리가 그 음인의 뒤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스쿠나는 한눈에 그것이 평범한 개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평범하지 않다는 건 단순히 크기나 생김새 따위를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다. 그 개들은 애초에 더운 피가 흐르는 짐승이 아니었다. 주술로서 부리는 식신, 그것이 개 두 마리의 정체였다.

한 놈은 입에 보따리를 물었고, 한 놈은 주인을 태우고 달렸다. 그러니 운신이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이다. 허름한 오막 앞에 다다른 두 마리 개가 주인과 짐을 내려놓고는 잠시 주인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그러고는 땅속으로 꺼지듯이 사라지는데, 가만 보니 그것들의 매개는 주인의 그림자인 듯싶었다.

그림자를 통해 식신을 불러내는 술식이라. 스쿠나는 그러한 술식이 내려오는 가문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 저이가 어느 집안 출신이리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그 피가 저 음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리라는 건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바였다.

분명 저 그림자를 통해 개 두 마리만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스쿠나는 호기심이 한결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따분하기 짝이 없던 근래에 이처럼 흥미가 동하는 일이 있었던가? 조만간 저 음인에게 직접 말을 걸어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음인은 여전히 밭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갈한 매무새로 밭에 나섰다. 그래도 요 며칠 흙투성이가 되어가며 꽤나 용을 쓴 덕인지, 밭은 드디어 근처의 풀숲과 구분이 가기 시작했다.

 

그날은 아침 댓바람부터 심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침 눈에 띈 하잘것없는 주령 두 놈을 수백 조각의 형체로 나누어 놓았음에도 찌뿌둥한 기분은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시큰둥한 얼굴로 제 영역 곳곳을 쏘다니던 스쿠나는 결국, 오늘도 그 변변찮은 오막집에 걸음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급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일단 갈 곳을 정하자 그는 저도 모르게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금방이라도 지붕이 내려앉을 듯한 오막에는 그러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울 때를 피해 일찍이 나갔을까?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스쿠나는 그만 실망하여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의 눈에 예사롭지 않은 흔적이 보였다.

그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잔예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 요사이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오막에서부터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는 그것은 분명 개의 형상을 한 식신 두 마리가 남기던 것이었다.

어느새 실망한 기색이 걷힌 그의 얼굴에 고상하지 못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재빨리 잔예를 따라 집 뒤로 이어지는 흔적을 추적했다.

 

잔예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집의 주인이 애당초 멀리 나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오막 뒤로 이어지는 불규칙한 대나무밭 가운데, 그 음인이 서 있었다. 대나무를 베어내는 중이었는지 한 손에는 낫이 들렸고, 그 뒤에는 예의 식신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먼저 감지한 쪽은 식신이었다. 대나무 줄기를 물고 끌고 가려던 듯했던 하얀 개 한 마리가 먼저 대나무를 내팽개치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놈도 뒤이어 슬금슬금 주인 곁을 맴돌며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두 놈이 일제히 태도를 달리하자 그 주인도 비로소 몸을 돌렸다. 왜 그래, 라며 달래는 듯이 말을 걸던 음인이 무언가 이상을 느낀 듯 흠칫 몸을 굳혔다.

스쿠나는 다가가지 않았다. 설령 저쪽이 도망친다 한들 놓칠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대신 그는 기다렸다. 자신을 발견한 음인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음인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쳐도 소용없으리라고 판단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상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스쿠나는 처음으로 그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역시나, 땅을 파먹고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 얼굴이었다.

두 쌍의 눈이 깜박임조차 뒤로하고 음인을 샅샅이 살폈다. 가늘고 섬세한 선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그리고 그 시선을 받아내는 내내 음인은 침착했다. 술식을 다룰 수 있다면 지금 제 앞에 선 자의 위압이 어느 정도인지 결코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아니면 혹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냉정한 눈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결국 올 것이 왔다’고.

유감스럽게도 스쿠나의 인내심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성큼성큼 그자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당장 그 식신을 물린다면 해치지는 않는다고 약속하지.”

성가시게 옷자락에 부딪는 식신 두 마리를 가벼운 발길질로 밀어내며 스쿠나가 지시했다. 아니, 실은 말이 지시지 누구라도 그것이 명령임을 알았을 것이다. 음인의 뺨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얻을 게 없는 이 상황에 식신을 내던질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가 식신에게 돌아가, 라고 명령했다.

개 두 마리는 이내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좋아.”

스쿠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그와 음인 사이의 거리는 불과 두어 발짝도 되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와 그에 대비되는 하얀 피부, 그리고 최근 손에 익지 않은 노동을 한 탓인지 야윈 몸이 인상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말랐어도 음인 특유의 나긋한 살 내음만은 옅어지지 않아, 막 베어낸 대나무의 풀내가 섞인 향이 대밭 사이에 부는 바람을 타고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아주 오래간만에, 식욕이 아닌 다른 강렬한 욕구가 불쑥 치밀어올랐다. 스쿠나는 번득이는 눈으로 음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너, 이름이 뭐지?”

시종일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음인의 눈이 처음으로 요동쳤다. 스쿠나는 이것 봐라, 라고 생각했다. 음인은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후시구로…… 메구미.”

후시구로라.

스쿠나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후시구로 메구미. 나와 같이 가자.”

마지막 남은 두어 발짝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스쿠나가 후시구로의 팔을 잡았다. 후시구로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스쿠나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팔은 그대로였다. 도리어 그 손에 의해 몸이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의 반대로 더 끌려갔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핏기조차 가시며 창백해졌다.

“잠깐…… 기다려!”

속절없이 끌려가던 후시구로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말에 스쿠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음인의 요구에 당황했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명백한 거부의 의사를 듣는 게 아주 오랜만이었던 탓이다.

“지금 뭐라고?”

스쿠나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그쪽의 여유로움과는 대조적으로, 후시구로는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난…… 난 가지 않아.”

“가지 않겠다고?”

이번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스쿠나는 한참을 껄껄거리며 웃었다.

물론 음인이 순순히 따라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두려움에 질려 딱딱하게 굳거나, 아니면 살기 위해 그저 엎드리거나. 그 정도가 그가 보아 왔고 또 용인할 수 있는 범위였다. 설마하니 비위를 맞추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의 비위에 거슬리면 그 자리에서 수천 수백 갈래로 나뉘어도 뭐라 할 이가 없는 이곳에서.

그런데 이 한낱 인간이 지금 제 앞에서 싫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스쿠나는 유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낄낄대며 물었다.

“감히 싫다고 했겠다?”

“……그래.”

창백하게 질린 주제에 대답만은 바뀌지 않았다. 스쿠나는 팔에 힘을 주어 그를 한 팔로 안았다. 반격할 수단도 없으면서 꿋꿋한 체하는 얼굴이 맘에 들었다. 이대로 억지로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후시구로 메구미가 온 힘을 다해 내뱉은 말이 그의 마음을 바뀌게 했다.

“……다면, 당신 뜻대로 하진 않겠어.”

“뭐라고?”

“당신이 날 멋대로 데려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당신 뜻대로 하진 않겠어. 당신과 한마디 말도 섞지 않겠어. 그래서 당신이 날 죽인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제 더는 갈 곳도 없으니까……!”

악문 잇새로, 후시구로가 외쳤다.

스쿠나의 눈이 두 쌍 모두 놀랍도록 커졌다.

“그래……?”

침묵이 흘렀다. 허나 그것은 잠시였다. 스쿠나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까 껄껄거렸던 것보다 세 배는 더 크게. 웃음은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가 가까스로 웃음을 거두었을 때에는 눈꼬리에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가엾게도 그동안 후시구로는 내내 스쿠나에게 안긴 채 새파랗게 질려 있어야만 했다. 그에게 스쿠나의 웃음은 억겁의 시간 동안 지속되는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마침내, 긴 한숨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정리한 스쿠나가 품 안의 피식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네 눈은 믿을 수 없게도 여전히 즐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럼 한 번은 봐주도록 하마. 너는 보기 드물게 재미있고, 그런 너와 얘기를 나누지 못한다면 데려가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내가 쉽게 이런 자비를 베풀 거라고 생각하진 마라. 봐주는 건 어디까지나 한 번뿐이야. 다음에 네가 또 내 말을 거역한다면 그땐 네 뜻대로 죽지도 못하게 해주겠다.”

입꼬리를 씨익 올린 그가 처음 붙잡았을 때처럼 가볍게 후시구로를 놓아주었다. 바라던 대로 풀려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후시구로는 이제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생사의 기로를 건넜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보자. 내 곧 찾아올 테니.”

스쿠나가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왔을 때와 같이 갑작스럽게, 그는 성큼성큼 폭이 큰 걸음으로 후시구로의 곁을 떠났다. 그의 모습과 걸음소리, 그리고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대나무숲에 완전한 정적이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무성한 대나무 잎새 사이를 바람이 한차례 휘몰고 지나갔다. 그제야 후시구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한발 늦은 떨림이 그의 온몸에 엄습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후시구로는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은 손을 들어 올렸다. 소맷자락이 내려가며 방금까지 붙잡혀 있던 팔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스쿠나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좀 전에 벌어진 일이 결코 꿈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스쿠나는 정말로 얼마 안 가서 다시 찾아왔다.

아니, ‘얼마 안 가서’는 매우 에두른 표현이고, 정확히는 이튿날 해거름이 질 무렵이 되자마자 후시구로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

후시구로의 손에 들려 있던 걸낭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좁쌀 두 되는 다행히 밖으로 쏟아지지 않았지만, 설혹 좁쌀이 쏟아졌더라도 후시구로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왜 놀라지? 내가 다시 오겠다고 했을 텐데.”

스쿠나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후시구로를 바라보았다.

후시구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이 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는 사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떠도는 풍문을 통해 얻어들은 몇 마디밖에 없었으나,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사내의 눈에 든 이상, 제 안위는 이자의 기분에 따라 손바닥 뒤집히듯 요동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에 당해낼 자가 없다는 저주의 왕.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스쿠나는 단지 강하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한 남자였다. 그는 강하고 호전적인 것만큼이나 지독히도 변덕스럽기까지 한 남자였던 것이다.

후시구로는 그가 아주 사소한 까닭으로 격노할 것이며, 동시에 별것도 아닌 일에 기분이 풀릴 수도 있는 사내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전까지 호랑이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짐승이라도, 호랑이와 마주치면 본능에 따라 생존을 강구하듯이. 그렇기에 후시구로는 이런 사내의 비위를 맞춘다는 건 쉽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위험천만한 도전일 것이리라고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효한 대응은, 남자가 변덕스럽게 굴수록 저는 더욱 침착하게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오더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데.”

그래서 후시구로는 떨어진 걸낭을 주우며 조용히 대꾸했다. 비록 걸낭을 주워드는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허리를 폈을 때 후시구로는 자신을 쏘아보는 네 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칠 수 있었다.

“그래? 손님 대접이 형편없기 짝이 없군 그래.”

역시나, 격에 얽매이지 않은 대답이 외려 그의 마음에 든 것인지 스쿠나가 비죽 웃었다. 말로는 형편없다고 꾸짖으면서도 그는 서슴없이 썩어가는 마루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하는 양을 보니 금방 돌아가진 않을 것 같아 후시구로는 내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버겁더라도 최선을 다해 장단을 맞춰 주지 않으면 한때의 노리갯감이 되어 벌레만도 못하게 농락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센 빗줄기 속에 젠인 가를 등지고 도망쳤을 때 각오했던 건, 분명 이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곳에 오게 된 게 그랬던 것처럼. 후시구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이 까다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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