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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흘렀다. 열심히 사는 그들에게는 몇 번의 계절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 해가 흘렀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도 겨울은 왔다. 그들의 첫 만남이었던 겨울, 밖에서는 처음으로 나는 겨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풍경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요즘,


"나 갔다 올게!"

"아침은?"

"늦잠 자서 시간 없어. 가서 챙겨 먹을 수 있어! 잘 있어 자기."

"깨울걸 그랬네."

"아니 괜찮아. 아 어제 입었던 옷 좀 빨아줄래? 애기가 토해놔서."

"어어. 다녀와."


온 집안일은 지원의 몫이었다. 농사일을 돕는 지원은 겨울에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베이비 시터로 일하는 진환이 나간 다음에는 혼자서 손에 익지 않은 집안일을 했다. 그나마 요리는 적성에 좀 맞는 모양인데 그 외 일들은 한다고 하는데도 영 늘지 않는다. 싸구려 재질로 만든 얇은 벽을 타고 겨울의 외풍이 숭숭 들어오는 집 안에서 진환의 아침으로 구워놨던 토스트를 먹던 지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집안이 추워서 그런지 따뜻하게 구워놨던 게 금방 식고 딱딱해졌다.

이런 건 힘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넓고 외로운 집과 많은 사람들의 은근한 무시, 괄시, 외면 같은 것 보다야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주는 이 옆에서 여름엔 덥게 겨울엔 춥게 나는 게 나을 거라 믿었다. 지금이라고 그 믿음에 변함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이런 생활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인정해야 했다. 좋든 싫든 저를 보호해 주었던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가렸던- 울타리 밖으로 나오자 먹고 사는 문제가 피부로 와 닿았다. 단 한 번도 걱정해 본 적 없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스트레스란. 진환은 저택에서의 생활을 잠깐의 별세계라 생각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원은 가끔 문득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의미로. 지금은 처음보다야 이런 저런 가난과 궁핍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건 그간 몸이 고되서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서였다. 겨울이 되어 농사일에서 벗어나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몸이 편했던 과거 생각이 났다. 마음은 지금이 훨씬 편하지만, 원래 인간이란 현재의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것만을 크게 보는 법이니까.

잠깐 상념에 빠졌던 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자. 자기연민에는 끝도 없다는 걸 지원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 * *



매일 하는 일인데도 매일 집에 오면 진이 빠져 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더더욱. 그 당연한 사실을 오늘도 절감하며 진환은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 일을 무사히 마쳤고 내일은 쉬는 날이라는 만족과 노곤함에 차서 지원을 부르기도 전에 머리를 치는 타는 냄새에 부엌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빵을 언제 불 위에 올려놓은 건지 끝부분이 타다 못해 바스러지고 있었다. 불은 빵에 이어 부엌을 삼킬 기세로 타오르는데 집 안 어디에서도 지원은 보이지 않았다.


“앗, 뜨.”


당황해서 빵을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화기에 놀라 손을 뺀 진환이 옆에 있는 물통의 물을 끼얹었다. 노기를 띤 불이 고약한 냄새를 내며 잦아들었다. 치이이- 꺼지면서 나는 소리는 무슨 경고음 같았다. 불이 완전히 잦아 든 걸 본 진환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불이 날 뻔 한건 처음이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진환, 왔어?”

“…….”

“이게 무슨 냄새야?”


뒷문으로 들어온 지원의 손에는 빨랫감이 들려있었다. 집 뒤쪽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불을 올려놓고, 잊은 채로.


“뭐가 탔어? 아, 빵.”

“내가 껐어. 괜찮아. 이제 저녁 먹자. 이건 많이 타서 새 빵 다시 구워야 할 것 같아.”

“그 빵이 마지막인데.”

“…….”


지원과 진환은 빵을 가운데에 둔 채로 마주 앉았다. 바싹 탄데다 물을 뒤집어쓰기까지 해 씹으면 양잿물 맛이 날 것 같은 빵을 반으로 자른 진환이 더 많이 탄 쪽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손은 왜 그래?”

“아까 빵 꺼내려다 살짝 데었나봐.”

“제대로 봐봐. ‘살짝’이 아닌데?”

“괜찮아. 이거 먹을 수 있어?”


지원은 붉은기가 올라와 한 눈에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 진환의 손과, 제 앞의 탄 빵, 그리고 진환 앞의 더 탄 빵을 천천히 건너다보았다. 괜찮다고? 빵을 다 태워먹은 것도, 그러다 제 손이 다친 것도 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고작 이런 것 따위를 괜찮다고 하게 만들려고 진환과 나온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그 전에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입 안이 써진 지원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걸 어떻게 먹어.”

“그래도… 여기 탄 부분 잘라내고 먹으면 안 탄 부분-”

“됐어. 너 먹어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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