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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쬐는 햇빛과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멍하게 수평선을 바라봤다. 이미 상처의 피는 제 멋대로 엉켜 굳어 버린 지 오래.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지쳐갔다. 그 누군가가 단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공간에 대한 감각은 점차 흐려지고, 상처의 고통마저 상쇄되어 가고 있었다. 처한 현실이 마냥 우습지만 더 이상 웃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태양이 아닌 달이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주는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어리석게도 이렇게 살아가나 싶었다. 가만히 있다 보면 지친 몸이 회복되고, 몸을 일으켜 걸어 나갈 수 있겠지. 흐린 사고 속에서 얼마 있지 않아 깨달은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거였다. 마침 떠오르는 얼굴이 현이라니. 여주는 그저 허망했다.

 


‘내일은 좀 늦을 거 같은데.’

 


늦어도 너무 늦어서. 그런 현의 말을 믿고 있었던 건지 뭔지… 아무렴 좋다. 이렇게 된 거 모 아니면 도인 거지. 차라리 이대로 죽어서 내 시체조차 아무도 못 찾는다면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아무도 김여주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을 테니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여주가 구름에 가리는 법 없이 밝게 떠 있는 달을 바라봤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계속 잠이 몰려오는 걸 보니 피로 누적인가. 감히 예상하건대 아직 죽으려면 먼 거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자신도 웃긴 지 여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미친 듯이 찾았는데…”

“…”

“웃고 있네.”

“…”

“다행인 건가.”

 


거짓말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주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현이었다. 고장 난 로봇처럼 그저 멀뚱히 현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여주에 현이 여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 같은 상처를 다시 얻은 여주의 손에는 천이 아무렇게나 휘휘 감아져 있었다.

 


“…일찍도 오네.”

“…”

“늦는다고 말하면 다야? 기다리는 사람 엿 같게.”

“…계속 찾았어.”

 


현의 말에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켜낸 여주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땅을 짚은 손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는 고통과 갑작스런 움직임에 근육의 긴장이 더해져 몸이 휘청였다. 그런 여주의 팔뚝을 잡아 지탱한 건 현이었다.

 


“업혀.”

“…됐어. 혼자 걸을 수 있어.”

 


방금까지 죽니 사니 하던 김여주는 더 이상 없었다. 꼴에 자존심은 남았는지 입만 살았다. 사실 한 걸음 내디딜 힘조차 없어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게 다였지만, 왠지 현의 도움을 받기 싫었다. 여주 또한 자신의 행동이 쓸데없는 고집이란 걸 알고 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엉엉 울면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심통이 났다.

 


“그 꼴로,”

“…”

“걷겠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여주의 억지에 현은 이골이 났다. 양손은 물론이고, 발 또한 성치 못했다. 잔뜩 긁히고, 찢어진 상처들로 가득했다. 현의 시선이 자신의 발로 향하자 그건 또 무슨 눈치인 건지 발가락을 움찔거린다.

 

누가 여주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진즉 알아차렸다. 자신과 여주가 지내는 영역 안에 발을 들인 이상 현이 모를 수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서도 느껴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짐승의 냄새와 더불어 짙게 밴 피 냄새. 그래도 어딘가로 도망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여주가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당연히 죽음을 맞이해도 모자랐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집 안을 다 뒤져도 여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에 제 측근인 마루와 하루를 향한 분노를 뿜어내고 싶었지만, 어딘가에 여주가 분명 살아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 현은 그렇게 여주가 흘리고 간 피 냄새를 따라 숲을 다 뒤졌다. 어느 순간 끊겨버린 혈향에도 여주를 찾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죽어버릴 여자라고 생각했다면, 이터널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해가 지고는 더욱 힘에 부쳤다. 이미 종적을 감춰버린 혈향.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근방의 숲을 다 뒤졌다. 그럼에도 여주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아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사실 한낱 제너럴,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상관없었다. 계획이야 늘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죽어버리면 다른 제너럴을 데리고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이 여주를 놓을 수 없었던 건, 목숨까지 상납해가면서 자신을 구해주고, 이터널에 발을 들인 아주 멍청하고 미련한 인간이니까. 자신에게 목숨 내던진 만큼, 그만큼 살리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현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묵직하게 자리한 어떠한 감정에 휘말린 탓도 있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그 감정에 이끌려 기어코 여주를 찾아낸 거다. 멀리서 달빛을 멍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는 여주의 움직임에 온몸의 경직된 근육들이 풀린다. 살아있어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저 여자는 이터널 두 명을 상대로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듯 초연하게 고개 숙인 여주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여주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수백 번 고민했다. 가까이 마주한 여주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마주한 두 눈은 공허했다. 세상 센 척 다하더니, 아주 웃긴 여자였다.

 


“업히라면 좀 업혀.”

“…”

“여기 그대로 두고 가기 전에.”

 


결국 이렇게 업힐 거면서. 여주가 어떤 두려움을 가졌는지 알고 있다. 현이 알아내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만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도 여주의 두려움이 드러난다.

 


“나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

“맞는데.”

“근데 왜 두고 가. 싸가지 없게.”

“말을 안 듣잖아.”

“…”

“…”

“…고마워.”

“…”

“그냥 놔뒀어도 며칠은 더 살았을 거 같긴 한데… 어쨌든 구하러 와줬으니까.”

 


여주의 가장 큰 두려움은,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고요한 집무실. 잔뜩 흐트러진 책상, 단정하지 못한 옷매무새를 한 민석의 한숨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뒤돌아서는 여주를 붙잡지 못하고 보내버린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간 민석이 이토록 흐트러진 적 없었다. 어떠한 일이든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았고,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업무에 지장이 가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민석에게 여주만큼은 달랐다. 여주의 일에 있어서는 도저히 무감하게 굴 수가 없었다.

 


‘여긴... 제너럴은.’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잖아.’

‘찾지 마, 제발. 나 이제… 숨 좀 쉬게. 응?’

 


여주가 했던 말들 하나하나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 지지가 않았다. 여주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그저 외면하고 있었던 걸까. 항상 평범한 공주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던 것들이 오빠를 둘이나 있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황태자 전하께서 모든 이들에 대한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를 보러왔을 뿐이야. 비켜.’

‘송구하나, 이 이상은 황실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된 걸까. 두 동생을 아래에 두고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지금의 리가 되기까지 자신의 영향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부터 리의 비교 대상은 항상 민석이었고, 리는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능력치가 높은 민석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그 열등감은 선의의 경쟁이 아닌 삐뚤어진 질투심과 욕망으로 물들었다. 그런 리를 민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관계 회복을 위한 모든 말들이 리에게는 기만으로 다가갔고,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래서 민석이 택한 것이 여주였다. 둘을 모두 지킬 수 없다면 여주라도 지켜야 한다고.

 


“아버지… 대체… 대체 제가, 제가…”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는 거죠.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황태자라는 무게를 견뎌내라고 해서 그렇게 하였고, 리의 탐욕에 오른팔을 잃어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건 여주밖에 없었는데… 그랬는데 여주마저 놓쳐버렸습니다. 항상 제게 말씀하셨죠. 제국의 아들로서 때론 포기하더라도 손에 넣은 것들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다고. 그런데 저는 이제 제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공작님. 황실에서의 전언이 왔습니다. 황실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

“…다음으로 미루,”

“차 대기 시켜.”

“네. 알겠습니다.”

 

혹은 제가 애초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걸까요.

여주를 지켜야 할 자격마저…

 







 






“아아…”

“엄살은.”

“엄살 같아 보여? 존나 아프다고!”

 


여주의 펼쳐진 손바닥 위로 약이 펴 발린다. 여주의 맞은편에 무릎을 굽힌 채 치료하는 현의 실력은 서툴기 그지없었지만 여주는 그런 현을 보며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피는 이미 한참 전에 굳어 따뜻한 물로 닦아내기까지의 과정이 꽤 까다로웠다. 눈물 찔끔 나올 만큼 아파, 지금 현에게 잔소리하면 되레 현이 여주의 엄살 아닌 엄살을 놀릴 게 뻔했다.

 


“안 아프게 치료해줘.”

“충분히 안 아프게 하고 있는데 엄살 부리는 거잖아.”

“아! 저번에는 나 자는 사이에 치료해줬잖아.”

“…”

“그거 어떻게 한 건데.”

 


붕대를 감다 말고 현의 고개가 들였다. 여주와 눈을 맞추곤 아무 말 없이 지그시 쳐다보기만 한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괜스레 고개를 뒤로 뺀 여주가 먼저 현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픽하고 웃음을 흘린다.

 


“어떻게 한 건지 알고 싶어?”

“…알려주기 싫음, 싫다고 말해. 뭘 묻고 있어.”

“그때도 싫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내가 만져도 되냐고 하니까 싫다며.”

 


현을 슬금슬금 피하던 여주의 눈이 다시 현에게로 향한다. 이터널로 출발하기 전날 밤. 냉큼 침대 위로 올라왔던 현이 한 말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가 침대 위에 올라와서 손 좀 만져도 되냐고 하는데 너 같으면 알겠다 하겠어?”

“흠…”

“그러고 보니 일어나서 봤을 때 상처 없었으니까… 나 자는 동안 만졌다는 거지? 이 미친!”

 


여주의 그라데이션 반응에 현이 결국 웃음을 빵 터트렸다. 얼굴이고 몸이고 성한 데도 없으면서 쫑알거리며 신경질 부리는 게 여간 웃긴 게 아니었다. 아깐 다 죽어갈 듯한 얼굴로 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군다.

 


“그래서 어떻게 해줄까?”

“…뭐?”

“안 아프게 치료해달라며.”

“…그렇지…?”

“해줄 수 있는데, 그렇게.”

“…”

“어떡할래?”

“…”

“응, 여주야?”

 


쥐고 있던 붕대는 이미 손에서 놓은 지 오래, 감기다 만 붕대가 느슨하게 여주의 손바닥 위를 타고 내렸다. 현의 집요한 시선은 여주에게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여주는 현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듯 말문이 턱 막혀 대답을 종용하는 현에도 아무런 말도 뱉어낼 수가 없었다. 현은 그런 여주를 잘 아는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여주의 손목을 쥐고 제 얼굴 가까이 올린다.

 


“어떻게 치료하는 건데…?”

“보면 알아.”

“미리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응.”

 


현의 완고한 대답에 여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 낫기 전까지는 양손 다 쓸 수 없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치료라는 그 신기한 광경을 직접 목도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해줘.”

 


여주의 대답에 현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순식간에 여주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왔다. 현이 여주의 손목을 붙든 손을 놓지 않은 채, 여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주의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감으며 여주의 상처 난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으…”

 


손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생경한 감촉에 여주가 순간 몸을 움찔거리며 움츠렸다. 현의 혀가 여주의 손바닥을 잔뜩 적시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여주는 아무런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미친 듯이 야릇한 행위의 목적이 치료라는 것을 잊게 했다. 감은 눈으로 똑 떨어지는 현의 속눈썹을 멍하게 보던 여주가 자신의 손바닥에서 타고 올라오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그만할래...”

“아파?”

“...아니 아픈 게 아니라...”

“아니면?”

“느낌이 이상하잖아. 안 해. 손 놔.”

 


여주가 손을 확 빼려고 하자, 현은 더욱 힘을 주곤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주의 시선이 잔뜩 방황하다 현의 번들거리는 입술에 고정된다. 이런 미친. 지금 무슨 생각을...

 


“느낌이 어떤데?”

“뭐...?”

“느낌이 어떻게 이상하냐고.”

“...”

“구체적으로 말해야, 내가 해결해주지.”

 


미칠 노릇이었다. 어떤 느낌이냐고? 이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아주 입꼬리를 올린 채 묻는 현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자신을 골려주기 위함인 것을.

 


“아직 왼손 남았어.”

“됐어. 오른손만 해도 충분해.”

“또 말 안 듣네.”

“진짜야. 이제 왼손도 안 아픈 거 같아.”

 


현은 여주의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상당히 당황한 듯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오른손을 힐긋 보니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자신의 오른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여주에 현은 잽싸게 여주의 왼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가볍게, 그리고 조심히 여주의 왼쪽 손바닥에 입을 맞추곤 놓아줬다. 여주는 제 왼손을 휙 빼내며 감싸 쥐었다.

 


“너…너…!”

“피곤하겠네. 늦었다. 얼른 올라가서 자자.”

“장난,”

 


그 순간 여주의 말허리가 잘리고, 몸이 붕 떠올랐다. 여주를 안아 든 현이 잔뜩 당황한 듯 어버버 거리는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곤 걸음을 옮겼다. 여주는 발버둥 쳤지만, 곧 포기하곤 현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너 진짜 짜증 나.”

“난 안 그럴 거 같아?”

“순 지멋대로야.”

“넌 안 그럴 거 같아?”

“아 진짜!”

 


여주의 방문을 열곤 여주를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은 현은 덧붙이는 말 없이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에 입술을 달싹이던 여주는 결국 입술을 닫았다.  뭐라 할 말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을 찾아 온종일 헤맸을 현을 더 붙잡아 두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오른손을 펼쳐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왼손은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었지만, 아픔은 무뎌져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터널에게 특별한 능력이 존재했던 걸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며칠 사이에 휘몰아쳤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여주는 몸을 눕히곤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살아남은 게 아직 믿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자신을 찾기 위해 쉼 없이 달렸을 현을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도 자신에게도 잘못은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언젠가 현에게 짐이 되어 필요 없어진다면… 익숙해졌던 혼자만의 시간이 다시금 두려워지는 순간이었다.

 










눈을 떴을 땐, 겨우 익숙해졌던 천장이 아닌 낯선 곳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여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사이에 납치라도 당한 걸까? 하지만 납치당한 것 치고는 포근하게 감싸오는 이불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적대하던 마루와 하루를 생각하면 어디 창고에나 박아놨을 텐데… 그럼 대체 누가…? 눈을 뜨는 게 두려워질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여주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저벅거리는 걸음 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깬 거 같은데. 자는 척하는 건가?”

 


여주가 깨어 있다는 걸 뻔히 알고 빈정거리는 목소리. 익숙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팍 뜬 여주가 몸을 동시에 일으켰다.

 


“현!”

“응, 나 여기 있는데.”

“…그건 아는데, 여기 어디야. 나… 대체…”

“여긴 내 방. 전혀 기억 안 나나 봐?”

“기억…?”

 


현은 여주의 어깨를 밀어 눕히곤 다시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주었다. 그리곤 자신은 앞에 자리한 책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휙 꼬곤 여주를 바라본다.

 


“하루 동안 눈도 못 뜨고 끙끙거렸는데.”

“…내가?”

“응. 김여주가.”

“기억 안 나…”

“하도 안 나와서 들어가 봤더니 다 죽어가는 행색으로 있길래 데려온 거야.”

“…”

“나도 일이 있어서 계속 왔다 갔다 하기는 힘들거든.”

“그럴 리가… 내가 하루를 내리 누워있었다고…?”

“한 번에 알아듣는 법이 없네.”

 


사실 여주가 멀쩡한 게 이상한 일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초월한 힘을 받아내고, 그만큼의 피를 흘려댔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다음 날 기척조차 없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여주에 현이 방으로 발을 들이고,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정신 차리지 못하는 여주를 발견했다. 누군가를 병간호해야 하는 것은 처음인 현은 그 앞에서 한동안 꽤 안절부절못한 듯 주춤거리다 결국 여주를 제 눈에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대충 어디서 보던 대로 물수건을 이마 위에 올려두기도 해보고, 자꾸만 흐트러지는 이불을 다시 당겨 덮어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여주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제 좀 살만하겠지만, 가만히 누워있는 게 도와주는 일이야.”

“알아서 할 거니까, 니 할 일이나 해.”

 


여주의 뻔뻔한 목소리에 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책상에 어지럽게 펼쳐진 종이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여주 눈에는 항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널널한 후계자 정도로 보였겠지만, 사실 현은 항상 방에서 쌓인 탄원서들을 읽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단지 그 모든 일은 자신의 공간인 방에서만 해결하기에 여주가 모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

 


“힐끔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

“…바쁜 것처럼 굴 땐 언제고.”

“그렇게 힐끔거리는 게 더 신경 쓰일 줄은 몰랐지.”

“…”

“그리고 미안하게 됐어.”

“…뭘?”

“이틀 전 일 말이야.”

“…”

“내가 제대로 주의를 시켰어야 했는데. 요즘 너무 풀어준 탓이겠지.”

 


현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제 하루 여주를 간호하는 데에 온 신경을 쓴 탓인지 꽤 피곤한 듯했다. 여주가 깨어나고, 멀쩡한 것을 확인하니 더욱 피로가 몰려오는 듯한 느낌은 덤으로.

 


“됐어. 너한테 사과 안 바라.”

“그 새끼들한테 와서 사과하라고 할까?”

“…”

“응, 여주야?”

“됐어. 걔들도 충분히 이유가 있으니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거잖아. 용서는 못 하겠지만, 이해는 가니까.”

“그걸 왜 이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뭐?”

“넌 일방적으로 당한 거야. 니가 제너럴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터널이 해를 가해도 괜찮다는 건 없어. 평화협정에도 당연히 명시되어 있는 내용인데다가, 너를 이터널로 데려온 건 나야. 널 죽이지 않겠다 그들 앞에서 말한 것도 나고. 그런데 내 말을 어기고, 너에게 해를 가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단 거야.”

 


현이 차분하게 말을 쭉 이어나가자 여주는 입술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현의 말이 모두 맞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이터널에서 이방인에 불과하다. 썩 달갑지 않은 게 당연할뿐더러 현이 자신을 데리고 왔다고 해도, 몇백 년이나 지속되어 오던 그 감정이 쉽게 씻겨 내려갈 리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날 마루가 한 말을 돌이켜 보자면, 여주의 존재가 현의 자리에 상당한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 자리까지 현이 어떻게 올랐는지 아냐는 그 말은 마치 이때까지 현이 쌓아놓은 것들을 자신이 건드리고 있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물론 현이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은 맞다. 협박, 강요당했지만 결국 여주, 자신의 선택으로 온 것도 맞다. 타의로 원인이 발생했지만, 자의로 결과를 택한.

 


“난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어. 사과한다고 용서하지도 않을 거니까.”

“…”

“현, 니가 기분 나쁜 것만 알아서 걔한테 말해. 나한테 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라는 거 없으니까.”

“뭐가 두려운 거지?”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 김여주가 무언가 두려워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닌가?”

 


현의 말에 여주는 숨을 확 들이켰다. 현은 생각보다 더욱 눈치가 빨랐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조여오는 압박감에 여주는 이불을 거두어내고, 빠르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방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아...”

 


하지만 발을 한 발 내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발바닥에서부터 찌릿하게 타고 올라오는 고통에 놀라 순식간에 흐트러져버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쪽팔려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어느새 다가와 여주의 한쪽 팔을 잡아 올려 여주를 일으킨 현이 여주를 안아 들어 다시 침대에 눕혔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될까?”

“...”

“난 그래도 말을 좀 잘 들었던 거 같은데.”

 


현은 자신이 다쳐 여주가 치료해주었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벗어나려 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여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비죽 내밀었다.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현은 그런 여주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침대 밑을 빙 돌아 여주의 옆으로 난 자리에 몸을 눕혔다.

 


“미쳤어?!”

“안 건드려.”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김여주 병간호하느라 한숨도 못 잔 나 좀 배려해줘.”

 


현은 여주와 한참 동떨어진 자리에 누워있었지만, 여주는 쉽사리 이 상황에 대해 인정해줄 수가 없었다. 그야... 여주는 이 모든 것들이 처음이니까. 전에야 여주가 너무 피곤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정신도 없이 잠들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달랐다. 온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컷도 남자라 했다. 멀쩡한 정신으로 남자와 같은 침대에 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이...

 


“닿기만 해 봐...”

 


너무나도 가슴 떨려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한 시간 십분, 이십 분.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흐르고, 하루를 내리 누워있던 여주는 잘 거 다 잔 사람 마냥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 끄트머리에는 현이 등을 돌린 채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는 걸 보아 확실하게 잠이 든 것 같았다. 한참 떨어져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왜 주체할 수 없이 자꾸만 심장이 벌렁거리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데엔 누구보다 무감할 거라고 장담한 자신인데. 황실에 있을 때, 어디 어디 백작, 어디 어디 영식이 와서 구애해도 감흥 하나 없었던 여주인데… 이상하리만큼 현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 계속 현과 붙어먹었고, 이틀 전에는 현이 치료를 목적으로 이상야릇한 행위까지 했다. 그전에는 죽을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었고, 아파서 정신 못 차리는 자신을 내내 간호해줬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종합해 봤을 때, 이건 그저 현에 대한 고마움과 그에 따른 호감일 뿐.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아닌 그저 친절을 베풀어 생긴 호감.

 

투둑- 투둑- 끼이이익-

 

그때 문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주는 현이 깰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정체불명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을 깨워야 할까? 망설이던 찰나 문손잡이가 돌아간다. 그리고 서서히 문이 열리는 듯하다, 벌컥 거세게 열리고 순식간에 여주의 위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올라탔다.

 

그르르르르릉-

 

늑대. 여주의 몸 위에 올라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늑대였다. 그 위압감에 목소리조차 낼 수 없어 침을 꼴깍 삼킨 여주 옆으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 내려와.”

-크으으으앙!

“걔 내 친구야. 이리 와.”

-끼이이잉…

“얼른.”

 


현의 말에 이름이 카이인 늑대는 여주의 얼굴을 한 번 훑는 듯하더니 현에게로 뛰어들었다. 현은 뛰어든 카이에 억 소리를 내며 카이를 두 팔로 안았다.

 


“잘 갔다 왔어?”

- 왕!!

“나중에 얘기하자.”

 


카이는 마치 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현의 볼을 마구 핥았다. 그 옆에서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여주가 몸을 움직이자 카이의 시선이 다시 여주에게 닿았다. 그러더니 앞발로 현의 몸을 꾹꾹 눌러댄다. 마치 해명하라는 듯이

 


“제너럴이야. 나를 도와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고.”

-그르르릉…

“니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끼잉…끼잉….

 


현의 말에 카이는 안절부절못한 듯 침대 위에서 종종걸음 했다. 그에 현이 상체를 일으켜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할 수 있지? 카이.”

-끼이잉…

“응?”

-아우우우우

“그래, 고생했어. 밥 먹을까?”

-왕!!!!

 


현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현이 몸을 일으키자 카이가 여전히 누워있는 여주에게 다가와 여주의 볼을 살짝 핥았다. 그에 놀라 움찔거린 여주가 카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현이 픽 웃으며 침대를 빙 둘러 여주 앞으로 다가왔다.

 


“사과하는 거야. 아까 미안했다고.”

“아…”

“배고프지? 내려가자. 뭐라도 먹게. 카이 밥도 줘야 하고.”

“…난 생각 없는, 아악!”

 


여주가 식사를 거절하기도 전에 현이 여주를 안아 들었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그 뒤로 쫄래쫄래 카이가 따라붙었다. 식탁에 여주를 앉힌 현이 냉장고를 열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료를 꺼냈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익숙해진 여주에게 현이 요리하는 모습은 생소한 장면이었다.

 


“첫 끼니까 가볍게 먹는 게 좋겠지.”

“별로 배도 안 고프다니까.”

“그렇겠지.”

“사람 말 존나 안 믿어.”

“이때까지 먹은 것들은 입맛에 맞았나?”

 


현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팬을 들어 계란을 깨트렸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현은 냉장고를 다시 열어 생닭을 꺼냈다. 도마 위에 올리고는 칼로 생닭의 배를 쩍 가른 후, 카이에게 던져주었다. 카이는 꼬리를 마구 흔들며 생닭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뭐든 잘 먹어. 가리는 거 없이.”

“다행이네.”

 


그렇게 둘 사이에 오가던 말들이 사라지고, 카이가 생닭의 뼈를 와그작와그작 씹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곧 여주 앞에 계란후라이와 과일이 담긴 접시가 내밀어졌다.

 


“현, 너는 안 먹어?”

“응. 난 안 먹어.”

“배 안 고파?”

“응. 난 나중에 나가서 먹으면 돼.”

“오늘 나가나 보네.”

“아마?”

“내일이야.”

“뭐가?”

“나 데리고 마을인지 성인지 가주겠다고 한 거.”

“그런 건 또 잘 기억하는군.”

 


여주는 무심하게 방울토마토를 입에 집어넣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걸 잊을 리가 없지. 이 답답한 곳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한 줄기의 희망 같은 약속이었는데. 현의 턱을 괴곤 여주의 식사를 감상했다. 여주는 그런 현을 힐끔 보고는 마지막 남은 음식까지 입에 넣었다. 허하던 속이 채워진 느낌이라 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마을에 가는 건 하루만 미루지.”

“싫다면?”

“그럼 그 발을 하고 밖을 나가겠다고? 기어 다니게?”

“…”

“모레면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될 테니까 내일까지 쉬도록 해.”

 


젠장. 여주는 현의 말에 반박할 말을 도저히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도 오기로 충분히 걸을 수 있지만, 찌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은 걷는 데에 지장이 갈 수밖에 없었다. 되는 일이 없어, 하여간.

 


“카이는 당분간 이 집에서 같이 머무를 거야. 그러니까 내가 없을 땐 카이랑 놀아.”

“놀긴 뭘 놀아. 말도 안 통하는데.”

-그르르르릉…

“카이가 기분 나빠 하는군. 여주 너는 알아듣지 못해도 카이는 알아들어. 그러니까 둘이 놀아.”

“하…”

 


생닭을 다 먹은 카이가 고개를 들어 현과 눈을 맞췄다.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 여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이 닮은 듯 꽤 좋은 콤비가 될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에 현이 낮게 웃었다.

 

 









“카이! 빨리 와!”

“천천히 해도 안 늦어.”

“내 마음이야.”

 


여주의 부름에 카이가 뛰쳐나왔다. 나란히 여주 옆에 서 있는 카이를 본 현이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둘이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해대더니 자신이 잠시 성에 다녀온 사이 아주 친해졌더랬다. 여주도 카이도 쉽사리 타인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는데 의외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 여주 니가 해야 할 행동이 뭔지는,”

“아, 알고 있어.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니 옆에 꼭 붙어서 너를 호위하는 거잖아. 맞지?”

“그래.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여주는 현의 옆에 서서 현의 발이 닿는 데로 따라 움직였다. 현의 말대로 어제까지 쉬니 상처로 가득해 땅을 디딜 때마다 찌릿했던 발이 괜찮아졌다. 힐끔 조금 앞서 걷는 현을 본 여주가 조금 걸음을 빨리해 현 옆으로 나란히 걸었다. 그 옆으로는 카이가 따라붙었다.

 


“카이랑 어제 재밌게 놀았나 보지?”

“응. 너랑 있을 때보다 훨씬 재밌게 놀았는걸?”

“그거 참 다행이군.”

“현, 카이는 너처럼 인간의 모습으로는 변할 수 없는 거야?”

“그래. 카이는 수인이 아니니까.”

“아- 그럼 이터널에는 수인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거네?”

“응.”

“수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구나.”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처음 안 사실이었다. 제너럴에도 당연히 동물들이 존재했기에 이터널에도 없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수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동등한 관계로 말이다.

 


“그럼 카이는 너랑 친구야?”

“따지고 보면 친구인 셈이지.”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없었잖아.”

“카이에게 부탁한 게 있어서. 카이는 성에서 내 부탁을 들어주고 온 것뿐이야.”

“아…”

 


현은 어쩐지 자꾸만 카이에 대해서만 질문하는 여주에게 불만을 느꼈다. 고작 어제 처음 본 사이에 온종일 하는 질문이라는 게 마을에 대한 것도,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닌 카이에 대한 것들뿐이라.

 


“섭섭하네.”

“뭐가?”

“나에 대해서도 관심을 좀 가져달라 했을 텐데.”

“뭐 관심을 가지면 알려주기나 해?”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그 말 들으니까 더욱 관심이 없어지네.”

 


여주의 말에 현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여자가 웃기지도 않았다. 한편으로는 마을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과연 그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과 별개로 여주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다. 결국 모든 건 여주의 목숨과 직결될 거고, 그때마다 여주의 옆에 자신이 있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하지만 이런 걱정 또한 쓸모없었다. 결국 이러한 위험부담을 끌어안고 여기까지 온 건 현, 자신과 여주니까.

 


“오늘 마을에 가서 너를 내 호위라고 말할 거고, 너는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 누가 시비 걸어도 대꾸하지 말고, 위협을 해도 내가 옆에 있는 이상 나서지 않는 게 좋아.”

“가자마자 나를 죽이려 드는 놈들이 득실거릴 텐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 진 모르겠네.”

“카이도 옆에 있잖아.”

 


현의 말에 카이가 콧잔등으로 여주의 다리를 툭 쳤다. 그에 여주가 손을 내려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이 집에 없는 시간 동안 카이와 여주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꽤 통하는 것이 많은 카이와 여주였다. 이를테면, 싸움에 대한 거라든지… 현의 뒷담 같은 거 말이다. 어제 카이와 나눴던 것들을 생각하니 여주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카이는 아마 나랑 마음이 잘 맞아서 좋은 파트너가 될 거 같아.”

-아우우우

“…허. 어쨌든. 단단히 긴장하도록 해. 어리바리한 거까지 내가 신경 써줄 순 없으니까.”

“그렇게 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야, 어떻게 나를 데려올 생각을 했대? 기분 좀 나빠지려 하네.”

“…그야, 생각했던 것보다 여주 니가 좀 멍청한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뭐???? 뒤질래, 진짜??”

“이제 곧 마을 초입이야.”

“아놔. 진짜. 집에 가서 마저 얘기해. 이거 그냥 못 넘어가.”

 


곧 마을 입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입구를 지키는 늑대들이 양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주의 냄새를 맡고 잔뜩 경계하며, 달려들 자세를 취하던 늑대들이 현을 발견하곤 꼬리를 내렸다. 그리곤 안절부절 몸을 꼬았다. 은근히 입구를 막는 듯한 늑대들의 몸짓에 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내 앞길을 막는 건가.”

-그르르릉… 끼이이잉…

“들었을 텐데. 내가 제너럴을 데려왔다고. 그런데도 막는다는 건… 나를 무시한다는 걸로 알아도 되겠지.”

-끼이이이잉…

“현, 거기까지 해.”

“…마루.”

“우리가 어디까지 이해해주길 바라는 거야? 마을까지 제너럴을 데려오다니. 잡아먹으라고 판 깔아주는 거야, 뭐야?”

“그런 거 아니니까, 비켜.”

“못 비켜. 저딴 걸 마을에 들일 수 없어.”

 


마루는 현의 옆에 선 여주를 잔뜩 노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을에서의 여정이 꽤 힘들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마을 입구에서부터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다. 여주는 입이 근질거렸지만, 현의 말대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켰다.

 


“나와. 김여주는 그냥 제너럴이 아니라, 내가 데려온 내 호위니까.”

“인정 못 해!!! 한낱 제너럴 따위가 이터널을 호위한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저거보다 니가 더 강한데, 누가 누굴 지키는데!!”

“오늘 너한테 볼 일 없어. 마루야, 시간 없으니까 나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앞을 막고 있는 마루에 현은 마루를 비켜 지나쳤다. 그에 따라 여주가 걸음을 따라 옮겼고, 마루는 자신을 지나친 현의 앞을 다시 막았다.

 


“절대 안 돼. 우리 마을에, 제너럴을 들이다니… 절대 있을 수 없어. 너… 너 다 잊은 거야? 제너럴이 우리 이터널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다 잊은 거냐구!!”

“…”

“그걸 잊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걸 알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럼 마루야. 내가 뭐 하나만 물어보자.”

 


마루로 인해 결국 또다시 앞이 막힌 현은 한숨을 푹 내쉬곤 허리를 굽혀 마루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순간 끼쳐오는 막강한 기운에 마루는 숨을 참았다.

 

“너랑 하루가 김여주에게 한 짓을,”

“…”

“내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

“이제 할 말 끝났으면 비켜. 대답 충분히 됐을 거라 믿어.”

 

그렇게 현이 다시 허리를 펴곤 마루를 지나쳤다. 그 뒤를 따라 여주와 카이가 스치고, 그제서야 마루는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이터널 최강자의 힘에 심장이 꽉 눌린 듯했다. 현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압도당했다. 순간 숨통을 죄어오는 기운에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을 옥죄여 오던 모든 것들이 탁 풀리는 듯했고, 끝내 마루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정할 수 없어. 절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현의 뒤에 바짝 붙어 걷는 여주 옆으로 카이가 바짝 붙어 주변을 경계했다. 제너럴의 냄새를 일찍이 맡은 이들이 여주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눈으로 좇았다.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둘러본 여주는 이내 자신에게 향한 시선들에 침을 한 번 삼키며 앞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현은 이 수많은 시선을 모르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현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여주 때문에 말을 쉬이 걸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오고 싶다던 마을에 와 보니, 어때.”

“…다들 쳐다보는 게, 환영해주는 거 같고 좋네.”

 


여주의 대답에 현이 입꼬리를 당겨 픽 웃었다. 그래, 그래야 내가 데려온 제너럴으로 마땅하지. 오늘따라 아무도 제게 말을 걸지 않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옆에 여주가 있으니 그런 듯했다. 이미 마을에는 현이 제너럴을 데려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을 사람 모두 쉬쉬거리며 수군거리지만, 그 누구도 현이 듣고 있는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현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목이 물어뜯길지도 모르니까.

 


“어, 우리 후계자님이 웬일이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에이- 내가 틀린 말 했어?”

 


현은 막사처럼 천막이 쳐진 곳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책상에 다리를 얹고, 펜을 인중에 올린 한 남자가 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겼다. 둘의 짧은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여주에게로 남자의 시선이 향한다. 그 시선에 긴장한 여주 옆으로 카이가 바짝 붙는다. 이 남자도 내게 해코지하려나. 눈치를 살피며 간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얘가 니가 말한 제너럴이야?”

“응.”

“와~ 꽁꽁 숨겨 놓은 이유가 있었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미모라는 말은 안 했잖아?”

“반, 조용해.”

 


남자의 이름은 반인 듯했다. 현의 한숨 섞인 말에도 개의치 않고, 여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반은 카이의 으르렁거림에 그제야 알겠다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래서 여기에 온 이유는?”

“할배는.”

“장로님? 오늘은 집에 계실 텐데?”

“알겠어. 수고해.”

“어어, 벌써 가? 나 제너럴이랑 얘기해보고 싶은데!”

“나중에.”

“매정하긴… 저기! 다음에 보면 인사해요~”

“…네.”

“네는 무슨 네야. 가자.”

 


현은 미련 없이 뒤돌아 막사를 나왔다. 그 뒤에 여주가 따라붙어 현의 발걸음에 따라 다시 맞춰 걸었다. 반은 자신에게 전혀 적대감을 느끼지 않는 듯해, 여주는 왠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적대를 느끼지 않는 이터널이었으니까. 제너럴에도 이터널을 적대적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듯이 이터널도 그러한 수인들이 있구나. 항상 을은 이터널이었다고 생각했기에 조금은 의외인 부분이었다. 물론 현의 행동에는 아직 의문을 품은 것들이 많지만.

 


“저 이터널은 나한테 적대적이지 않네?”

“뭐, 이터널 모두가 제너럴을 혐오하는 건 아니니까.”

“…흠, 제너럴도 그래.”

“…”

“제너럴도 모두가 이터널에 대한 적대를 품고 있는 건 아니라구.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래, 하지만 반 같은 이터널은 그렇게 많지 않아. 오히려 제너럴을 적대하는 자들이 더 많으니까 안심하진 마.”

“알아. 무슨 멍청이로 알아, 사람을.”

“아닌가?”

“야!”

 


현의 약 올림에 여주는 현의 등을 퍽 치며 짜증을 냈다. 아까부터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여주였다. 알 건 다 아는 성인에게 말이다.

 


“이터널에는 수장과 장로가 있어. 장로는 이터널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살아온 수인이지.”

“지금 그럼 장로에게 가고 있는 거야?”

“그래, 그 장로 할배는 어떨지 모르겠군.”

“오랜 역사를 살아왔다면…”

“그래, 100년 전의 전쟁에도 참전한 이터널이야.”

 


100년 전의 전쟁이라면, 제너럴과 이터널의 역대 전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그 전쟁은 역사서에 그대로 나와 있듯이 제너럴이 승전했다.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 갔다. 그리고 지금 여주가 만나러 가는 장로는 그 전쟁에 참전했던 이터널. 그 말은 그는 절대적으로 제너럴을 싫어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이다.

 


“뭐야, 왜 집에 불이 꺼져있어.”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산 초입의 큰 집에 선 현은 불 꺼진 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주를 힐끔 뒤돌아보곤 현관문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이내 덜컥 열어버린다.

 


“카이, 여주랑 밖에서 기다려.”

 


현은 그렇게 집 안으로 종적을 감추고, 여주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장로라... 이터널은 불사를 손에 쥔다고 들었는데... 그럼 장로는 영생하는 존재인 건가. 현의 이야기에서 뭔가 힌트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직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자네가,”

“...?”

“그 제너럴인가?”

“!!”

 


순식간이었다. 엄청난 존재의 기에 눌려 숨이 탁 틀어막혔다. 단지 목소리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뒤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이터널 장로라는 것을.






제가 좀 늦었죵? ㅎㅎ

급하게 올리느라 퇴고를 못했는데...! 

모쪼록 재밌게 보셨으면 :)


저 빨리 졸시 끝내고 올게요...

더 활기차게.... 


날씨가 엄청엄청 많이 추워서 제 주변엔 다 감기더라구요... 저 포함...

무서워서 코로나 검사까지 받으러 부랴부랴 갔었습니다 ㅋㅋㅋㅎㅋ

다행히 그냥 단순 감기였지만, 요즘 감기 독하네용... 

독자님들도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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