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국 대학밖에 안 다녀봐서요.. 분명 파이브랑 벤인데 한국에서 사는 듯 합니다..ㅋㅋㅋㅋ








수강신청에 실패했다며 컴퓨터를 붙잡고 엉엉 울었던 날이 벌써 먼 옛날의 이야기 같았다. 보기만해도 마음이 맑아지는 청록빛의 나뭇잎들이 조금씩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성숙한 몇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중이었다. 

"난 낙엽이 싫더라. 괜히 걸리적거리잖아."

궁금하지 않았는데요. 누가 물어봤나요? 생각했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또 다시 그의 수첩에 박제될 것이 분명했음으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늘의 색마저 바꿔버릴 정도로 화려하게 변한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홀로 사색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날씨 좋고, 바람 적당하고. 어디 놀러갔으면 좋겠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별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 수 십권을 쌓아놓고 책을 읽으며 먹을 간단한 간식거리들을 준비하는 나. 근처에서 벽난로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고 있어도 좋겠고, 주변 풍경을 담기 위한 커다란 채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도 좋겠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 이외의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있다간 수업 시간에 늦을텐데. 성적에 출석 점수도 중요한거 몰라? 지각 한 번 했다간 시험 문제 세문제는 더 맞춰야 할 걸?"

친구들 사이에서 부처라 불릴 정도로 벤은 욕망과 욕심이 적은 편이었다. 얻어도 그만, 못 얻어도 그만인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고작 해봐야 그 동안 자료가 없어 읽지 못한 소설의 속편 정도였다. 때문에 벤은 현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욕망의 소용돌이가 낯설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화가 나도 되는건가? 싶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고 그가 옆에 없으면 가슴 한 편이 아팠다.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는 벤은 상대적으로 또래 사람들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었다. 예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몸상태를 확인하고 벤은 말로만 듣던 스트레스성 위염에 걸린 줄 알았다. 영업시간이 아닌 병원에 쳐들어가 응급 진료를 받는데 비싼 돈이 들어갔다. 뭐, 결과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으니 돈이 아깝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할거야. 아까는 미안했다니까."

계획에 없던 돈을 쓰게 만든 장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 화가 났다. 내가 당신 때문에 새벽에 응급실까지 달려갔는데..! 도끼눈을 하고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파이브를 째려봤다. 파이브는 황급히 두 손을 들어올리며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같이 다닌 시간이 시간인 만큼 벤은 그가 순식간에 수첩과 볼펜을 뒷주머니에 숨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런 뻔뻔한 자식 같은..!!

그러고보니 벤이 파이브에게 화가 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파이브의 말을 대놓고 안 들리는 척 하는 현재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이 사건은 오늘 낮, 학생 식당에서 일어났다.




벤은 학교 근처에 위치한 비싸고 화려한 맛집들보다는 학교 내에 있는 저렴한 학생 식당을 선호했다. 싸고 맛있다는 장점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는 학교 도서실과 가깝다는 장점에 더 끌렸다. 우주 공강에 대처하는 벤의 자세는 다음과 같았다. 도서실에서 재밌어 보이는 신간 도서를 빌린다. 읽는다. 도중에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다시 책을 읽는다. 책에 몰두하다보면 밥 먹는 것을 까먹거나 강의 시간을 놓칠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벤은 그런 것들은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오늘 아침,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나기 몇 시간 전 벤은 새로 들어온 신간 도서들을 살피고 있었다. 며칠 전 새로 바뀐 도서 담당은 아무래도 벤과 취향이 엇갈리는 듯 했다. 아직 때가 타지 않아 반짝이고 있는 표지들은 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 듯 했다.

신간 도서들 중에 읽을 것이 없다고 슬퍼할 벤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읽고 싶은 책의 이름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기에 그것들 중 하나만 꺼내 읽으면 될 일이었다. 다만 그 책들은 모두 본관 도서실이 아닌 별관 도서실에 있었기 때문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이 걸어야 한다는 점이 유일한 문제였다. 본관 도서실에서 별관 도서실로 가려면 일단 본관 도서실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실내 구름다리를 만들어달라는 건의만 벌써 6번째 내봤지만 학교 측은 언제나 그런 대규모의 공사를 할 돈과 시간이 없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물론 다 헛소리였다. 본관 도서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시끄러운 공사소리가 벤을 덮쳤다. 도서실 근처 호수에 새로운 수생식물들을 심고 있는 소리였다. 수생식물들을 심기 위해서는 호수에 있던 물을 빼내고, 땅을 파고, 식물을 심고, 새로운 흙을 덮고, 비료를 뿌리고, 단단히 굳힌 후, 다시 물을 넣는 작업을 해야 했다. 단순히 시간만 많이 드는 작업이 아니었다. 저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도서실 구름다리를 짓는 비용과 비슷할 것이라 벤은 확신했다.

"돈과 시간이 없긴 개뿔."

벤이 다니는 대학교의 이사장은 학교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에만 관심이 많았다.

"난 둘 다 많은데."

학생들의 건의를 모두 꽃으로 바꿔버리는 미친 이사장이 운영하는 학교니 그곳에서 일하는 교수도 미친 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꽃을 좋아하는 이사장이니 머리에 꽃 단 사람을 좋아하나보다. 벤이 파이브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약 한 달 전 벤에게 자신의 관찰 실험체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했던 파이브는 벤이 그 부탁을 거절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벤의 거절을 실험의 시작으로 여기는 듯 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그래, 그래야 내 실험체답지. 중얼거렸다. 벤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으나 앞으로 한 학기동안 매주 마주쳐야 하는 교수였기에 심한 욕은 하지 못했다. 심한 욕'은'. 이 정도면 욕이 아니라 일상어지. 싶은 수준의 욕은 해주었다. 아니, 미친 거 아니에요? 지금 시발 뭐하는거에요? 전 이 실험에 참가한다고 한 적 없어요! 그러자 파이브가 대답했다. 상관없어. 너가 허락하든 말든.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벤은 다시 한 번 헛웃음이 나왔다. 하! 그것은 분명 그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파이브는 묘하게 기뻐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헛웃음을 치기 전에 파이브가 농담 비슷한 것을 한 것 같았다. 아, 시발. 아무래도 파이브는 벤이 자신의 말장난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절대 당신의 개그에 웃은 거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다 포기하기로 했다. 귀신보다 자신의 뒤를 더 잘 밟는 또라이 교수를 말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본래 계획대로 별관 도서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도서실?"

"아, 네."

'실험체는 또래보다 도서실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라는 문장은 이미 파이브가 벤의 스토킹을 시작한 첫날에 수첩 속으로 들어갔다. 새로울 것이 없는 정보에 파이브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들고 있는 펜을 이리저리 돌리며

"뭔가 새로운 일 좀 해봐. 며칠 째 수첩이 그대로야."

뻔뻔하게 말했다. 스토커면 스토커답게 몰래 지켜보기만 하던가. 이 파이브라는 스토커는 대놓고 자신을 따라다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명령까지 하기 시작했다. 벤은 파이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싫어요. 제가 왜요? 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거예요. 제가 질리면 다른 사람 쫓아다니시던가요."

"그건 내가 싫어."

파이브 또한 만만찮게 단호했다.

"너만큼 특이한 놈은 흔치 않거든."

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평범하다는 말만 들어온 벤에게 있어 파이브의 반응은 불쾌하면서도 신기했다. 나 같은 놈 쫓아다녀서 뭘 하겠다고.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논문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으면 그 불똥이 자신에게도 튈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 외에도 여러 감정들이 들었지만 긍정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불편하고, 짜증나고, 민폐였다. 벤은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브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지만 파이브의 경우는 정반대인 모양이었다. 날이 갈수록 벤이 파이브의 미소를 목격하는 일이 늘어났다.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 학생들에게 짓는 비웃음 가득한 미소가 아닌, 보는 사람까지 간질거리게 하는 따뜻한 미소. 벤은 파이브가 그런 미소를 짓는 것이 싫었다. 그의 이 모든 행동들을 용서해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튼 저 도서실에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파이브가 벤의 스토킹을 그만두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다. 벤이 하교를 할 때, (다행히 그는 학교 외부까지 쫓아오진 않았다.) 그리고 도서실에 들어갈 때. 첫 번째 경우는 학교 밖에서까지 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고, 두 번째 경우는 벤이 아닌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파이브의 스토킹을 떼어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에 벤은 그 사실을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우주 공강이든 짧은 쉬는 시간이든 남는 시간엔 무조건 도서실에 가기. 벤의 활동영역이 본관 도서실에서 별관 도서실까지 넓어진 원인이었다.

"별관? 거기 오늘 문 닫았어."

"…네?"

"페인트 칠 다시 하느라 일주일동안 이용 안된다고 공지 올라왔던데, 못 봤어?"

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오늘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을 때…  뭔가 팝업창이 뜬 것 같긴 했는데…. 습관적으로 다시 보지 않기를 눌러버린 탓에 자세히 읽지 못했었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려보니 확실히 별관 도서실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세한 내용은 불확실했기에 벤은 파이브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도서실 못 가게 하려고 거짓말 하는 거 아니죠?"

"…설마." 1)

파이브의 대답이 늦은 것이 영 수상했다.

"정 의심스러우면 직접 가보던가."

"… 아뇨. 이번 한 번만 믿어줄게요."

그러나 직접 별관 도서실에 올라가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본관 도서실과 별관 도서실은 학교 지도 상으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지만 건물들의 위치만 나와있는 간략한 학교 지도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게 만드는 엄청난 경사로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파이브의 말에는 신뢰성이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파이브에 말이 사실이라면, 별관 도서실로 가는 그 엄청난 경사로를 아무런 소득 없이 올라가는 생고생을 하게 되는 것인데 벤은 평소 운동을 즐겨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렇게 햇빛이 따가운 날에는 더더욱. 파이브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기 싫었기에 벤은 별관 도서실에 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본래의 계획이 없어지니 갑자기 커다란 자유시간이 생겨버렸다. 벤은 다음 일정을 생각해내기 위해 괜히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어디 연락 온 데 없나, 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진 않은가. 그러나 벤의 핸드폰 속 일정표는 깨끗했다. 아 망했다. 자신이 한가하다는 사실을 파이브에게 들키면 또 어떤 이상한 일을 강요당할 지 몰랐다. 벤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야. 야. 지금 한가한 사람? 대답해라. 빨리. 지금 당장.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언제나 원하지 않을 때만 나타났다.

"보아하니 한가한 것 같은데."

아닌데요. 라고 말할 용기가 차마 없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벤은 거짓말에 능숙한 타입이 아니었다. 올 것이 왔구나. 눈을 질끈 감은 채 파이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밥이나 먹을래?"

의외의 제안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학생 식당을 가리키고 있는 파이브가 보였다. 벤이 평소에 애용하던 곳이었다.




"평소에도 학생 식당에서 먹어요?"

"그럴 리가. 오늘이 처음이야."

그 말을 증명하듯 파이브는 식당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평소 실험체가 어디에서 밥을 먹는지 수첩에 적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벤은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이것 또한 실험 관찰의 일부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벤은 여러 가지 음식을 제안하는 식단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식권을 뽑았다.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막상 음식 냄새를 맡으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얼른 들어가자며 파이브를 재촉하려 했으나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 설마… .

"… 식권 안 뽑아요?"

"… 그게 뭔데?"

아무래도 이 교수님은 공부말곤 다 젬병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스마트폰도 잘 못 다루는 것 같던데… . 벤은 '신은 공평하다.' 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파이브에게 다가갔다.

"저기 보이는 게 식단표에요. 오늘 날짜가 적힌 곳에 쓰여 있는 메뉴들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거기에 맞는 식권을 뽑아야 먹을 수 있어요."

"…."

"…그냥 제가 하나 뽑아드릴게요."

대신 맛 없다고 투정부리지마요. 교수님이 안 고른거니까. 파이브를 알게 된 후 처음 보는 조용한 모습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국물 먼저 한 숟가락 마셔 본 벤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파이브의 눈치를 봐야 했다. 모든 학생 식당이 그러하듯 싼 가격에 맞는 싼 맛이었다. 자신 혼자 먹는 것이라면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누가봐도 입맛이 까다로워 보이는 남자였다. 맛 없다고 식탁 뒤집어 엎으면 어떡하지. 파이브가 반찬 하나를 집어 그것을 입 안으로 집어 넣는 모습을 시험을 칠 때보다 더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어찌나 긴장되던지 그 모습이 느리게 보일 지경이었다.

벤의 예상과 다르게 파이브는 군말없이 밥을 삼키고 있었다. 맛있다는 말은 안 했지만 그렇다고 맛 없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기에 대충 합격점 정도는 되는 듯 했다. 의외네… 맨날 스테이크만 썰 것처럼 생겨가지곤…. 이렇게 벤은 파이브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이쯤 되면 파이브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파이브를 관찰하는 수준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관찰해보자. 다짐한 벤이 파이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색깔도 스타일도 비슷비슷해서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닌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옷장에 저런 옷밖에 없나…  궁금해졌다. 열심히 밥과 반찬들을 입으로 옮기고 있는 파이브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또래 남성들보다 유난히 큰 손이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하얀 분필을 쥔 것만 봤던 그 커다란 손이 자신과 같은 식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다가왔다. 분명 같은 제품인데 파이브 손 안에 있는 것이 더 작아보이는 현상이 웃기게 느껴진 것이라 판단했다. 괜히 큰 소리로 식기를 내려놓았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안 먹어? 내가 먹여줘?"

"아뇨! 먹어요!"

몰래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밥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파이브와 눈이 마주치면서 가장 관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눈에 담아버린 탓이었다. 벤은 두 눈을 꼭 감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파이브는 너무 잘생겼다. 그 안에 들어있는 쓰레기 같은 인성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얼굴이었다. 파이브의 성격을 모른다면 바로 반해버렸을 지도 몰랐다. 아니, 실제로는 성격을 알고도 반해버리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저기 봐! 파이브 교수님이야!! 세상에 진짜 잘생겼다!! …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 학생 식당 안은 조금씩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파이브를 보고 기뻐하는 듯한 반응이었고, 남학생들은 대부분 그가 이곳에 있는 사실이 혼란스러운 듯한 반응이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리에 집중하던 벤은 갑자기 학생들의 주제가 바뀌기 시작했음을 감지하고 빨리 밥을 마셔버리고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했다. …근데 파이브 앞에 쟤는 누구야?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게 된다면 오늘 학교 익명 커뮤니티는 모두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라? 야, 벤!!!"

황급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려 노력하는 벤에게 한 남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말을 걸었다기보단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벤은 식도로 넘겨야 할 국물을 기도로 넘겨버렸다. 황급히 기침을 하여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국물 중 일부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으로 입 주변을 가리며 남학생에게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어..! 안녕."

학기 초부터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 귀찮게 굴던 녀석이었다. 벤은 파이브가 소리 없이 건넨 휴지를 집어들어 입가를 닦았다. 아직 기도 안에 있는 자잘한 국물들을 빼내기 위한 얕은 기침들이 이어졌다.

"마침 잘 만났다! 야! 오늘 같이 술 마시자!!"

얘는 무슨 술 안 마시면 죽는 귀신 붙었나… 벤은 눈치 없이 굳어버린 입을 휴지로 가렸다. 대신 눈만은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본능에 가까운 사회생활이었으나 아무래도 녀석은 잘못된 해석을 한 듯 했다.

"좋지? 애들한테 너도 온다고 말해둔다?!"

아직 간다고 확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녀석은 언제 어디에서 만날건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주 큰 소리로. 목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벌써 술 한 잔 하고 왔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녀석의 입을 막는 것이 먼저인 듯 했다. 식당 안 학생들의 대화 주제가 또 다시 바뀌었다. 쟤 뭐야. 아, 학생 식당 혼자 쓰나. 아무래도 오늘 익명 커뮤니티의 핫 게시글은 '파이브와 함께 점심을 먹은 학생'이 아니라 '학생 식당에서 시끄럽게 떠든 민폐 학생' 이 될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지 않은 벤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녀석의 입을 막을 좋은 방법을 떠올려야만 했다.

"아, 시발 존나 시끄럽네."

철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들려온 파이브의 목소리는 녀석을 포함한 식당 안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식탁에 바짝 붙여놓았던 의자를 뒤로 밀며 고개를 들고 나서야 녀석은 파이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이브..!"

녀석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가 천천히 내쉬며 뒤늦게 호칭을 붙였다. …교수님.

"여기 니가 전세냈냐?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식당에선 조용히 해야 한다고 부모님께 배운 적 없어?"

꼰대! 벤은 도도하게 녀석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파이브의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인생을 다섯 번 산 것 같은 말투와 행동으로 파이브라는 별명을 얻을 만한 전형적인 꼰대의 잔소리였다. 저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시대에 맞지 않은 늙은이 주제에 말이 많다며 속으로 분노를 삭히고 있었을테지만 평소 꺼려하던 상대에게 향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통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신기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녀석이 저렇게 꿀 먹은 벙어리 꼴이라니! 다시 한 번 입을 닦는 척 하며 휴지를 들어올렸다. 표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학생 식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민폐 학생을 혼내는 교수. 식사 예절도 지키고, 개인적인 원한도 풀고. 일석이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만 문제는 파이브의 뒷문장이었다.

"싫어하는 사람 억지로 술자리에 끌고 가려고 좀 하지마라."




"아니,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몇 분만에 회상을 끝낸 벤이 냅다 소리쳤다. 어차피 수업 시작 1분 전이니 자신처럼 땡땡이치는 학생이 아닌 이상 지나갈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인 즉, 마음 놓고 파이브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파이브에게 대드는 간 큰 학생. …어쩐지 아침서부터 이상한 제목 형식의 문장이 자주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 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이브는 벤이 드디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줬다며 (정확히는 소리를 쳤다.) 드물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술자리에 가고 싶었어?"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뭐가 문제야. 다신 술자리 권유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줬으니 오히려 고마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벤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의도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하자, 벤. 상대는 파이브다.

"…교수님. 사회생활 해본 적 없죠?"

"하고 있잖아. 너랑."

"…다른 사람이랑은요? 해본 적 있어요?"

"굳이? 해야 하나? 남의 비위에 맞춰주는 걸?"

그럼 그렇지. 벤이 생각했다.

"저는 교수님과 다르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서요…. 아무리 싫어도 싫다고 딱 잘라 말하면 제 사회생활이 엉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살짝 이마를 짚은 벤의 머릿속에 아까의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파이브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녀석은 동그래진 눈동자에 눈물을 살짝 머금은 채로 벤을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시도때도 없이 술자리를 권유하는 만큼 외로움을 많이 탔고, 상처를 쉽게 받는 여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벤이 속해진 과의 대표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 최고 독설가에게 상처를 입은 친구 많은 여린 녀석이 학생 식당 밖으로 뛰쳐나간 후 어떤 일을 할까. 안 봐도 비디오였다. 파이브와의 관계에 대한 말도 안되는 소문에 휩싸이게 될 상상을 끝낸 벤의 입에서는 세상 다 산 듯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난 너가 왜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어."

"걱정 안 하셔서도 곧 알게 될거예요. 이제 슬슬 학교 익명 게시판에 저와 교수님에 대한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글들이 마구잡이로 올라올테니까."

"나랑 엮이는 게 싫은거야?"

파이브의 표정은 정말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일그러졌다. 화가 났다기보단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대체 뭐 때문에? 이유야 간단했다. 다만 그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벤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대체 나랑 엮이는 게 뭐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의 차이가 극명했다. 마음 같아선 생각한 그대로를 전하고 싶었으나 저 얼굴 앞에서는 차마 불가능했다. 얼굴에 피를 잔뜩 묻히고 도끼를 들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 없을 표정이라고. 벤은 슬쩍 시선을 돌려버렸다. 사회생활이다… 이건 사회생활이다…. 주문을 외우듯 생각했다.

"그래? 그럼 됐고."

뒤에서 들리는 파이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들떠있는 것처럼 들렸다. 벤은 애써 고개가 뒤로 돌아가지 않도록 온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피가 얼굴에 몰리는 듯 했다. 몸 전체가 시원한 그늘 아래에 있음에도 열이 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어디서 느껴봤더라, 이 기분. 일단 분노나 슬픔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감정이었다. 벤은 살짝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 그래 생각났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거짓말을 한 후에 딱 이런 기분이었다.





1) 도서실이 닫혀있다는 건 진짜였지만 벤이 도서실에 못가게 하려던 것 맞다.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고 건의한 사람이 바로 파이브..





+ 파벤 대학생 AU 캐해석에 관해...

쓰다보니 아니 이건 더 이상 파이브가 (벤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적어보는 제 캐해석..

일단 전 예전에 썼던 썰에서도 말했듯이.. 파이브는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캐릭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멸망을 막는데에 열중한 나머지 욕도 하고 시바 형제들 다 죽어버려 ㅗㅗ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가족들을 사랑하는 파이브. 그래서 엄아카 일원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썰에서도 만약 멸망을 막는 데에 성공한다면 파이브는 그동안 숨겨왔던 사랑을 아낌 없이 표현할거라 생각했습니다.

파벤 대학생 AU의 파이브 교수로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멸망이 없는 세계의 파이브는 좋아하는 것엔 잘해주고 싫어하는 것엔 가차없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 내에 파이브가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벤.. 벤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런 벤에게 자신의 마음을 거침없이 밀고나가는 그런 캐릭터로 설정했습니다만.. 그렇다보니 엄아카 드라마 파이브랑 너무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드네요... 하지만 파이브 교수도 싫어하는 것에는 원작 파이브만큼 까칠합니다.. 다만 이야기 내에서 보여지지 않을 뿐..

벤의 경우도.. 원작에선 클라우스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였던 만큼 이 이야기에선 '누구보다 자유를 원하는 캐릭터'로 설정했습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싫어하는 건 안 하고.. 이런 점은 파이브 교수랑 똑같네요.. 다만 파이브 교수는 좋아하는 걸 손에 넣는 타입이고 벤은 그럼에도 자유는 보장해달라 시위하는 타입ㅋㅋㅋ 둘의 사랑이 순탄할 리 없습니다....

현재 파이브와 벤은 쌍방 통행 중이지만 벤은 그 마음을 애써 부정하고 있습니다.. 근데 파이브는 이미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ㅋㅋㅋ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며 더더욱 들이대는 중ㅋㅋㅋㅋㅋ

어휴.. 해설이 길어질수록 못 쓴 글이라던데..흑흑

암튼 원작 파벤과 캐해가 좀 어긋난 것 같아 변명처럼 붙여본 사담입니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존못이라 죄송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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