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예감이라는 게 있다.

토니는 딱히 감이라는 에매 모호함을 신봉하지 않았다. 원인의 불분명함을 단순히 그냥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논리는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바보 같은 논리라고 생각해왔었으니까. 그런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불쾌하고 찝찝한 에매 모호함. 종일 불길한 예감에 날이 곤두섰던 날.

 

- 보스 꼬맹이 전화에요. 급해요.

 

모든 방법으로 가정한 최악의 날 속에 너만큼은 없길 바랐건만.

 

[차량 급발진 사고. 스파이더맨. 차아래 깔린 행인을 구조하려했으나 끝내 숨져.]

 

해피의 떨리는 목소리와 짤막한 문구들이 토니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반사적으로 뛰쳐나간 몸이 급하게 받아든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아이는 제대로 된 말도 하지못하고 울어댔다. 숨이 꺽꺽 넘어갈 듯 한 울음소리에 제대로 된 말도 잇지 못하는 피터가 본능처럼 토니의 이름만 되내이고 있었다.

 

- 스타크씨. 스타크씨 어떻게 해요. 구급차는 오고 있는데. 숨이. 피가 많이 나요. 어떻게 해요. 심폐소생술을 하는데, 그게 숨을 쉬지가 않아요. 저, 저는 구하려고 했는데.

- 괜찮아. kid. 일단 숨부터 크게 쉬고, 네 탓이 아니야. 내 목소리 들려? 내 목소리에 집중해. 제발 피터. 숨부터 쉬어봐. 내가 갈 꺼야.

 

토니는 지체 없이 아머를 타고 상공을 날았다. 광속으로 날아오르지만 도착하는데도 3분정도가 걸릴 예정이었다. 무선으로 이어진 전화 너머에는 피터를 겪으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절박한 울음소리가 숨이 넘어갈 듯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젠장할. 사람을 구하는 일에 뛰어들면 결국 피치 못하게 구하지 못하는 사람도, 감당 못할 힘에 부상을 입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건 어른의 몫이자 책임이지 아이가 짊어질 짐이 결코 아니었다.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했다. 토니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후회감을 곱씹었다.

 

프라이데이는 그 순간에도 빠르게 뉴스를 모니터링했다. 벌써 불길한 기사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입가에 씁쓸함이 맴돈다. 토니의 머릿속에서 펼쳐진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부디 들어맞지 않기를. 이번만큼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세상의 가혹한 잣대가 꼬마에게만큼은 예외이길, 가장 비관적인 상황을 추측해야하는 냉혹한 사업가는 그 순간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었다.

 

슈트를 통한 위치추적으로 찾아낸 장소는 아비규환이었다. 두 동강난 승용차 아래 깔려있었던 행인의 시신 앞 피터가 있었다. 구급차와 경찰차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상황에 우두커니 서있는 작은 몸이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슈트로 가려진 얼굴은 아마도 눈물범벅이겠지. 토니는 입술을 짓씹었다.

 

경찰들이 피터를, 정확하게는 스파이더맨을 에워쌌다. 상황을 막론하고 결국 피터는 이 사고의 개입자였으니까. 바보 같은 아이는 스스로를 책망하느라 순순히 제 손목을 내밀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번쩍이는 수갑이 피터의 손목에 드리워지는걸 보는 순간 토니는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튀어나간 몸은 이성을 거쳐나가지 않고 이미 피터의 앞을 막아섰다.

 

- 스파이더맨을 구속하려면 저희 쪽 법무팀을 먼저 만나셔야 할 겁니다.

 

피터는 그날 제 앞에 드리워진 커다란 등을 보았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메이라는 어른 외에 자신을 지켜주는 어른의 등 말이다. 넓은 어깨너머로 흘깃 보이는 토니는 표정은 한번도 본 적 없던 가장 고압적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찰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하의 토니 스타크다. 쉬이 건드리지 못하는 분위기속에서 피터는 토니의 속삭임을 들었다.

 

-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속삭여주는 토니의 말은 피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경찰들의 항의에도 토니는 그대로 피터를 안고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차가운 아머의 품에 안겨 날아올랐을 때. 피터는 어렴풋이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안락함을 느끼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따듯하고 든든한, 세상의 끝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 다들 이런 따듯함을 누리고 사는 것일까? 처음으로 느끼는 안락함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따듯했다. 차가운 금속도 따듯할 수 있구나. 피터는 나지막이 생각하며 푸른 아크리액터에 머리를 기댔다.

 

피터에게 토니는 랩실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화면의 푸른빛이 얼굴에 서려 있는 채로 토니는 장난스럽게 이거 이해해? 하고 물어보곤 했고 피터가 대답하면 토니는 여느 때는 놀란 눈으로, 또 여느 때는 흐뭇하다는 눈으로 웃어주기도 했다. 그랬던 토니가 삼일 내내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대부분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거나 뚫어져라 화면을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다. 충혈된 붉은 눈은 이따금 피터와 마주치면 피곤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힘없이 웃는 얼굴의 토니는 가장 지친 얼굴로 되려 저를 걱정했다.

 

- 잠은 잤어? 금방 해결될 꺼야. 조금만 참아

- 피곤해 보이세요. 스타크씨.

- 괜찮아. 직장인은 늘 고단한 법이지.

- 저 때문이시잖아요.

 

피터의 대답에 토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겨진 와이셔츠도, 충혈된 눈도 모두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피터가 아는 토니는 언제나 흔들림 없는 강인함 그 자체였다. 완벽함의 정의 같던 남자는 지금 피곤함에 지쳐있었다. 피터의 심장이 꽉 옥죄어왔다. 눈앞에서 사람을 잃은 것 과는 다른 죄책감이었다. 자신의 영웅이 괴로워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다.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넌 내가 책임져야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모든 걸 걸고 책임지실 필요는 없으세요.

 

아이는 말하고 싶은 거다. 당신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다고. 피터의 눈동자 안에 숨어있는 올바른 뜻을 토니는 잘 알고 있다. 지나치리만큼의 선함은 피터의 무기였고 토니는 그런 피터의 선함을 사랑했으니까.

 

토니는 피터의 어깨를 토닥였다. 묵직하지만 따듯한 손길에 피터는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 나도 너처럼 눈앞에서 누군가를 잃은 적이 있었지.

- 스타크씨는 어떻게 견디셨어요?

 

동그랗게 뜬 피터의 눈이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눈동자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죄책감이 서려 있다는 것에 토니는 목이 막혔다. 토니는 아이가 영웅의 길을 걸으면서도 피터만큼은 저런 눈은 하질 않길 감히 바래왔었다. 언제나 천진하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랬다. 과한 욕심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눈앞에 막상 닥치고 보니 그런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렇게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이지 않은가.

 

- 견디는 법은 없어.

 

너만큼은 이런 눈을 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튀어나올 뻔 한 말을 속으로 삼켜내며 토니는 말했다.

 

- 나도 너처럼 매일 밤 악몽을 꿔.

 

그러니 너 만큼은 적어도 내 앞에서는 힘들다고 말해. 두터운 손가락이 갈색 빛 곱슬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무심하리만치 무뚝뚝한 말투 안에서도 피터는 이제 다정함을 읽을 줄 안다. 그날은 내내 희생자의 시신을 마주하는 악몽에서 벗어나 피터가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었다.

 

언론들은 이미 도를 넘어서 스파이더맨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고 이제 자연스럽게 흐름은 토니 스타크를 향했다. 심지어 스파이더맨은 협정에도 서약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협정의 상징이던 토니에게 대중의 비난이 빗발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잔뜩 엉켜버린 실타래의 끝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국무장관의 지리멸렬한 비난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토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소코비아 사태의 재림. 그 가운데 선 아이언맨. 얼마나 물어뜯기 좋은 소재인지 토니도 잘 알고 있었으니 각오는 되어있었다. 차라리 협정에 묶인 자신이 처벌을 받아 사태가 무마될 수 있다면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줄 각오도 되어있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가? 라는 질문에 답할 자신은 없었지만 토니는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토니는 피터가 울지 않기를 바랬다. 순진한 얼굴이 그저 제 곁에서 해맑게 웃는 모습이 좋았으니까. 토니가 피터에게 가진 감정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는 없지만 어느 감정보다도 순수하고 간절했다.

 

 

[소코비아 협정에 근거하여 현 시간부로 어밴져스 소속 토니 스타크에게 스파이더맨의 체포를 명함. 협정 위반 시 해당 기점으로 범죄자로 분류되어 국가단위로 처벌을 받으실 수 있으며..]

- 뮤트해.

 

지끈거리는 머리에 토니는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내뱉었다.

엿이나 먹으라지. 빌어먹을.

 

수면을 취하지 않은지 50시간이 지났다는 뻔한 경고를 무시해버린지 얼마 되지 않아 피터가 찾아왔다 똑똑. 빼꼼히 고개를 내민 피터는 파자마 차림이었다. 손안에 들린 머그컵을 쭈뼛거리며 내놓는 게 퍽 귀여웠다. 한잔 드세요. 달큰한 초콜릿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코코아라니 어쩜 자기 같은 것만 내놓는지

 

- 저 사실 다 듣고 있었어요.

 

피터의 목소리에 코코아를 마시던 토니의 손길이 찰나지만 잠깐 멎는다. 그러나 금새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표정의 토니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스타크씨.

- 안돼.

말도 꺼내기전에 자르듯 피터의 말을 가로막은 토니가 뒤이어 말했다.

- 무슨 말하고 싶은지 내가 모를 것 같아?

- 저 때문에 스타크씨가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아요.

 

토니의 말에도 물러섬 없는 아이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냥 순진한 얼굴은 이따금 누구보다 강인한 얼굴을 했다. 토니는 피터의 강함이 때로는 바라보기 눈부실 만큼 벅찼다. 저건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빛이다. 피터의 가장 강한 무기였다.

 

- 괜찮아요 스타크씨. 그냥 저를 정부에 넘기세요.

- 피터 제발..

 

언제 챙겼는지 모를 수갑이 피터의 손끝에서 반짝였다. 두 손목을 모아 토니 앞에 쑥 내미는 피터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저 잡아가세요. 스타크씨.

 

- 저는 걱정 안해요. 스타크씨가 저를 지켜주실꺼잖아요.

 

저런 잔인한 부탁을 하는건 반칙이었다.

 

타워 앞에는 이미 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수갑을 찬 스파이더맨이라니, 그걸 인솔하는 아이언맨이라니. 얼마나 자극적인 소재겠는가. 무차별적인 플래쉬가 쏟아졌고 뒤따르던 토니는 피터가 놀란 듯 가늘게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괜찮아. 다정히 속삭여주는 것만이 토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스파이더맨. 소코비아 협정에 서약하다. 참사사고의 책임과 협정위반으로 인한 재재로 3년간 위치추적 명령 선고. 피해자의 유족들은 희생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라며 항의. 신원공개와 함께 법적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이는 기각되었음. 세간에서는 토니 스타크의 법무팀이 총력을 다해 나선 것에 의문을 품는 시선들이 있어..]

 

약 이틀 뒤 피터는 국무장관과 함께 업스테이트에 나타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편한 니트와 면바지를 입은 말간 얼굴이 어색하게 웃었다. 스타크씨. 반가운 목소리에 토니는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대로 몸을 굳혔다. 이틀 동안 기다려 맞이한 아이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딱 한군데 다른 곳이 있었다. 바로 목. 흡사 개처럼 알 수 없는 금속 목걸이를 한 피터가 토니의 앞에 서있었다. 영락없는 범죄자 취급이다. 딱하게 얼굴을 굳힌 토니에 국무장관은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분노는 오히려 뜨거워지기보다 차가워진다. 지금의 토니처럼.

 

- 위치추적기는 보통 발목에 하지 않습니까.

- 그렇지. 그런데 이건 형벌의 의미도 있지 않은가. 스파이더맨도 동의 했네 그렇지?

 

국무장관은 흡족한 웃음과 함께 굳어있던 피터의 등을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피터의 위치추적기는 목에 있었다. 그래. 마치 개나 할 것 같은 목걸이 말이다.

 

누가 봐도 죄인이라는 낙인마냥. 그런 신세로 피터는 어떻게든 웃었다. 차리리 울지 그랬어.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지 그랬어. 뼈저린 무력감에 토니는 이를 갈았다. 자신은 결국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날부터 피터는 집에 돌아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 낙인처럼 채워진 목걸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몰골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리 만무했으니 당연한 선택인지 모른다. 목의 반을 덮는 듯한 쵸커를 기어이 채운건 아마 기를 쓰고 피터의 신원공개를 막아낸 토니에 대한 나라의 분풀이일 것이다. 흰 피부아래 이따금 붉은빛을 내뱉는 검은색 금속이 끝없이 증오스러웠다. 이따금 토니가 피터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다 무너질 듯 일그러질 때면 피터는 오히려 제쪽이 토니를 위로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 말 한마디가 오히려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는지도 모르고. 차라리 분노에 휩싸여 모든 걸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토니를 막는 것은 우습게도 피터의 죄책감이었다. 피터는 스스로 이 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그 죄책감의 무게를 절실히 아는 것 또한 토니였다.

 

피터의 쵸커는 상징적이다.

 

소코비아 협정의 상징이던 토니가 암묵적으로 이를 위반했던 스파이더맨을 비밀리에 보호하던 행동의 경고. 그리고 아직도 암암리에 활동 중인 히어로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좋은 표현으로는 피터가 나라의 소속이라는 증명이었다. 이를 사람들은 속된말로 이렇게 칭한다.

 

스파이더맨이 나라의 개가 되었다고.

 

피터가 업스테이트에서 수트를 벗을 수 있는 공간은 사생활이 보장되는 특별보안구역 뿐이다. 그 외에는 수트를 입고 돌아다니거나 피치 못할 경우에는 얼굴만이라도 가렸다. 혹여나 피터가 갑갑해할까 토니는 입버릇처럼 피터에게 말하곤 했다. 익명성은 피터 너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무기야 명심해.

 

대부분은 어수룩한 피터의 말투나 작은 체형, 목소리로 스파이더맨이 어림을 짐작했지만 인명사고를 낸 초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에 선뜻 피터에게 다가가진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서 피터는 처음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괴물. 그런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삭막한 공간에 저를 평범한 아이로 여기는 것은 토니 뿐이었다. 괜찮아. 피터는 끝없이 스스로를 다잡았다. 별거 없는 하루다. 신체검사 좀 하고, 훈련받고, 훈련받다 다치면 치료받고. 별일 없는 평범한 하루잖아 피터 파커.

 

긴 하루가 끝나고 겨우 샤워를 마친 피터는 바스 가운만 걸치곤 공동 거실 쇼파위로 널부러지 듯 쓰러졌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몸이 무겁다. 훈련의 강도가 생각이상으로 너무 높아져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피곤한 몸은 파자마로 갈아입는 것조차도 버거워 결국 이렇게 흐물한 핫케이크마냥 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어밴져스 공동 구역인 공간을 현재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건 피터와 토니뿐이니까. 심지어 바쁜 토니 탓에 이 구역 전체를 피터 혼자 쓰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다 벗고 다녀도 누가 알겠어.

 

- 이곳 생활은 어때 인턴?

 

취소. 토니는 꽤 자주 머물렀다. 토니의 짓궂은 질문에 피터는 힘없이 웃었다. 그냥 하는 거죠 뭐. 훈련이 제일 재미없어요. 전직 군인이라는데 무뚝뚝하고 말도 무섭고. 재잘거리는 목소리로 늘어놓는 푸념에 토니는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 조금만 참아. 그 재수없는 목걸이부터 빼줄게.

 

위로하듯 건네는 콜라캔을 받아들며 피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청량감에 머리를 식히고 피터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 학교에서 저는 소코비아 협정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배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젖은 앞머리가 평소보다 더 곱슬거려 이마를 가린 피터는 더 앳되보였다. 평범한 십대의 소년이다. 목에 위치추적기가 낙인처럼 달린 것만 빼면 말이다. 갓 샤워를 마쳐 보송한 얼굴이 물끄러미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 그간 저는 어떻게 협정에서 자유로웠던 거예요?

- 알잖아. 의외로 윗분들은 일을 안 해.

- 말 돌리지 마시고요. 스타크씨.

 

피터의 말간 눈이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이런 피터의 얼굴에 약했다. 순진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선한 눈동자는 때론 무엇보다 강하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눈매가 살풋 휘어지며 눈꼬리가 접혔다.

 

- 스타크씨. 덕이지요?

 

고마워요. 피터가 말에 토니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아이는 웃고 있지만 저는 그러하질 못했다. 죄책감과 무능함으로 인한 자기혐오감이 치솟았다.

 

토니는 언제나 피터가 더러움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이길 바랬다. 알고 있다. 이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얼마나 허황된 소원인지를. 다만 토니는 자신이 노력한다면 피터가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날이 늦춰질 수도 있다고 믿었었다. 그렇게 되길 간절히 원했으니까. 조금만 더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피터는 모를 것이다. 토니가 피터를 선택한 그날부터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부었는지를. 이 감정을 무엇이라 명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토니에게 피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확실했다.

 

업스테이트에 머물며 토니는 시간이 된다면 피터의 잠자리를 지켜주었다. 아직도 희생자에 대한 악몽을 꾼다는 것은 이미 프라이데이에게 보고 받은 뒤였다. 피터가 노곤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으면 토니는 다정한 손길로 피터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굵은 손가락이 제 머리칼을 헤집다 쓸어 넘기면 어김없이 피터의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졌다. 뭘까 이런 기분은.

 

- 보통 아버지와 아들사이에는 다들 이럴까요?

- 모르겠네. 나도 거의 아버지가 없다시피 자라서 말이야.

 

순간 동그랗게 떠진 눈이 퍽 귀여웠다. 놀란 눈이 어찌할 바 모르고 데굴데굴 굴려대는게 퍽 우스워 토니는 픽 웃음 지었다.

 

- 잘 자. Kid.

 

어쩌면 토니는 피터와 자신이 어설픈 부자관계를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만 서로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인지라 남들이 보기엔 기괴해 보이는 어떤 관계.

 

 

#

 

피터는 조금씩 제 상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감을 체감했다. 미숙한 초인으로써 힘을 파악하고 전술을 습득한다. 이건 피터 스스로도 동의했던 일이다. 하지만 오늘 훈련은 달랐다.

 

-이건 사람을 죽이는 법이잖아요!

-싸우다보면 제압해야하는 경우는 반드시 있어.

-아뇨.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절대로요!

 

피터에게 가르치는 체술은 어린 피터가 보기에도 인명구조용이나 제압용이 아니었다. 목뼈를 부러뜨린다던가 척추를 꺾는 것들은 누가보아도 살상기술이다. 이건 자신이 스파이더맨이 되고자한 이유와 명백히 다른 길이지 않은가. 피터는 처음으로 훈련을 거부했다. 교관의 윽박지름과 비아냥이 귓가를 찔러댔지만 피터는 완강했다.

 

- 뭐라고 하셔도 전 거부할꺼에요.

- 그래서 어디 토니 스타크에게 쪼르르 달려가 아양이라도 떨건 가? 토니가 키우는 애완거미라고 소문이 자자해. 그 인간이 너를 얼마나 끼고 사는지는 몰라도 여기선 안통해.

 

노골적인 어조와 함께 잔인한 손가락이 가슴을 꾹 찔렀다. 추잡한 비난에 피터는 되려 입을 닫아버렸다. 저속한 비난에 동조하면 결국 일만 커진다는 걸 피터는 잘 알고 있다. 익숙한 일이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 늘 겪는 편파적인 시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자신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토니에게 미안한 죄책감이 들 뿐이었다.

 

- 오늘은 훈련 쉴게요.

- 네 주제를 파악 못하나본데 너는 범죄자야. 제어권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고.

 

교관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며 웃었다. 순간 피터는 속이 울렁이는 불길함이 온몸을 뒤덮은 감각으로 몸이 쭈뼛거렸다. 갑자기? 어째서? 불안함에 교관의 얼굴을 마주하려던 순간 피터는 목을 타고 흐르는 전류를 느꼈다.

 

- 으...아!! 아읏...! 악!

- 어때 굉장하지? 일반 사람들이면 벌써 죽었을 고압전류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피터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시야가 멋대로 번쩍거렸다. 윙윙 울리는 센서가 오히려 귀가 멍해질 정도로 울려 정신이 없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목에서부터 흐르는 전류에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다.

 

위치추적기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어쩐지 무식하게 크더라. 그 와중에 스친 쓸데없는 생각에 피식 웃을 찰나 전류가 멎음과 동시에 무심한 구둣발이 바닥에 엎어져있던 몸을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갈비뼈에 제대로 맞은 몸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무렇게나 굴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작은 몸에 올라간 구둣발이 척추를 꾹꾹 눌러 비볐다.

 

- 우리 군인이나 경찰들 위신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알아? 토니스타크나 너 같은 것들 말이야.

 

우악스러운 남자의 손이 피터의 목걸이를 훅 잡아 올린다. 억지로 들어 올려진 가벼운 몸이 대롱 흔들렸다. 어릴적 타던 그네마냥 시야가 붕붕 돌아갔다.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목이 조여져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팔도, 버둥대는 다리도 모두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피터의 절박한 몸짓에도 교관은 잔인하게 목걸이를 더 잡아당길 뿐이었다.

 

도대체 왜? 왜 이런 분노를 받아야하는거지? 왜 우리는, 스타크씨는. 부족한 산소에 시야가 아득해지면서도 피터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목걸이를 거칠게 흔들 때마다 세상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정말 개가 된 것 같네. 비참한 스스로의 몰골을 상상하는 피터가 자조적으로 웃을 때였다.

 

- 당장 그 더러운 손 놔.

 

토니의 목소리였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순간 교관이 몸을 던져버리는 통에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버려 제대로 말도 잇지를 못했다. 간신히 풀려나 트여진 숨통에 헛구역질이 연신 나왔다. 그 와중에도 또각거리는 구둣발소리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 토니의 구두다.

 

토니가 정말 화났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피터는 어렴풋이 자신이 유람선을 두동강 냈을때를 떠올렸다. 정말로 화가 났을때 토니는 분출하기보다 차갑게 가라앉는 사람이었다. 토니는 이번에도 침착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피터가 해방감에 헛구역질을 반복할 때도 이 사람은 분노에 가득 찬 핏발서린 눈으로 상대를 노려볼 뿐이었다. 얼마나 큰 분노로 가득 차 있는지 피터는 가늠도 할 수 없었다.

 

- 전기충격기가 내장되어있다는 건 못 들었는데.

- 초인을 다루는 일입니다. 자칫하다 저도 죽이면 어떻게 하라고요

- 얜 사람을 못 죽여.

- 그건 그쪽 생각이시죠. 쟨 강철도 한손으로 뚫는 괴물이라고요.

 

빠드득. 토니가 어금니를 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괜찮아요. 스타크씨. 저 멀쩡해요. 간신히 일어난 몸으로 피터는 토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 오늘 스파이더맨의 훈련은 취소야.

- 토니 스타크씨는 이 일에 관여할 명분이 없으십니다.

- 명분이 없어? 저 애는 내 아이야! 너희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내 아이라고!

 

토니의 날선 목소리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까딱하다간 토니마저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걸 눈치 챈 교관은 입을 닫았다. 무식했지만 자신이 살고자 하는 길은 귀신같이 아는 속물이었다.

 

- 저 스타크씨.. 다들 보는데 손 좀 놔주세요.

- 오해 하라면 오해하라고 해. 나 지금 다른 사람 신경쓸 여유 없어.

- 스타크씨이.. 저 괜찮아요. 진짜에요.

 

피터의 애원에도 상관없이 피터의 손목을 붙잡은 토니는 업스테이트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걸어갔다. 수군거리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오해 따위 마음대로 하라지. 이 녀석이 제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차라리 쉽사리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가 병기 취급을 받고, 인간도 아닌 대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토니는 몸이 차게 식었다. 뭐가 책임을 지겠다는거야. 지키지도 못하고선. 자책감이 온몸을 감싸 자기혐오감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멍청한 토니 스타크. 씁쓸함에 토니는 혀를 찼다.

 

가장 높은 보안단계에는 토니의 랩실이 있었다. 대부분이 출입을 할 수 없는 가장 최상위의 보안구역. 토니는 랩실에 도착한 뒤 피터의 손목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피터. 목소리에 응답하는 눈 조리개가 꿈뻑인다. 수트로 얼굴을 가린 덕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 안타까웠다.

 

- 얼굴 좀 보여줘. 여기서는 괜찮아.

 

아까와는 다른 사뭇 다정한 어조에 피터는 망설임 없이 슈트를 해제했다. 슈트 뒤에 드러난 어린 얼굴에 토니는 심장이 비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생리적인 아픔에 충혈된 눈가는 물기에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어린것을 도대체 왜 다들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괴물이라. 착해빠져서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가? 자기가 구하지 못한 사람에게 미안해 스스로 저 재수 없는 목걸이도 차고 있는 애였다.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토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 이제 여기서 나가. 지금 목걸이 부숴버릴꺼니까.

 

아마 시끄러워지겠지.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스쳤지만 눈앞의 아이가 전기충격에 몸을 떠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단 다 나은 선택이었다. 의자에 앉힌 피터가 무어라 말도 하기 전에 핸드아머를 양쪽에 가동시킨 토니가 완강히 피터의 목걸이를 움켜쥘 때였다.

 

[ 죄송합니다만 sir. 피터 파커의 위치 추적기에서 고성능의 열 에너지가 측정됩니다.]

 

프라이데이의 경고에 토니의 몸이 굳는다. 열에너지. 고성능. 짧은 단어에 토니는 답을 도출해내고 피터앞에서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것들. 도대체 왜 이 정도까지? 슬프게도 지나치게 영민한 아이는 짧은 내용으로도 현재의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다.

 

- 이 목걸이가 그러니까 폭탄이라는거죠?

[네. 기계가 훼손되거나 원격으로 발동될 수 있습니다.]

 

해체시 자동으로 작동되는 폭탄. 그것도 초인의 머리하나쯤은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는 살상용이 탑재되어있다. 이 빌어먹을 생각을 도대체 누가한 것인지. 토니가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바로 날아가 그 사람에게 당장 리펄서를 날렸을 것이다. 도대체 협정이 뭐라고, 저 아이를 괴물 취급하는 건가.

 

- 저는 괜찮아요 스타크씨.

 

피터는 예전처럼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방금 전의 학대 같은 체벌에 여전히 젖은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있는 주제에도 말이다.

 

- 꼭 여기서 너를 꺼내 줄께. 걱정 하지마.

 

작은 손등위에 손을 올리면 따스한 체온이 그 위로 퍼졌다. 여린 손을 꼭 움켜쥐며 토니는 다짐했다. 반드시 이 아이를 꺼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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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기간 본가에 갇혀 트위터 업로드용으로 스마트폰으로만 써내려간 글이다보니 평소의 방식과 쪼금 다릅니다. 살도 덧붙이고 설정을 조금 수정한게 있습니다.


늘 생각해보는데요 소코비아 협정으로 인해 시빌워까지 일어난 세계관에서 피터는 어째서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나 하고요. 아마도 토니의 보호아래 있었기 때문이겠죠? 협정을 가장 앞장서서 동의한 사람이 토니였다는걸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관점 같아요.


재미는 없지만.. 저는 재밌었습니다..

난 왜이렇게 파는게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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