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지가 도착했다.


[나 오늘 바쁜 일 생겨서 못 가겠다. 둘이서 놀아.]


황현진은 그 메시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바빠서. 못 가. 둘이서. 그 말인즉슨, 저와 이필릭스가 단둘이서 무언가를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황현진은 옆에 멀뚱히 선 이필릭스를 바라봤다. 젖살이 빠지면서 조금 성숙해졌나 했는데 앞머리를 내는 통에 다시 어려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 시선을 느낀 이필릭스가 저를 보며 웃었다.


“둘이서만 노는 거, 처음이지.”


모를 줄 알았는데 알고 있구나. 황현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어, 그르네.”


안 그러려 노력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어딘지 들뜨는 단어다.




이필릭스에게 고백을 하고 어떠한 관계가 된 후에 한 번도 단둘이었던 적이 없었다. 먼저 단둘이 만나자고 하기엔 어딘지 두려웠거니와, 이민호가 둘이서만 있을 틈도 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니 오늘의 저 메시지는 과연 얼마나 큰 고민 끝에 보냈겠는가. 이민호는 세상에 둘도 없을 쿨한 남자였지만 이필릭스에 관해서 만큼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민호형 되게 속 쓰렸겠다.”

“형이? 왜? 아프대?”

“…아니, 아니야….”


그걸 또 이필릭스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제 속을 갉아먹었을까. 무심코 던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필릭스를 보고 있으니 제 속이 다 답답한데. 황현진은 가끔 이민호가 저보다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필릭스는 원체 좀 둔하고 눈치 없긴 하지만, 몇 년을 만나고서도 저 모양이라니 저 정도면 병이다. 저럴 거면 사람 꾀지나 말던가. 한여름 폭우처럼 온몸을 순식간에 적셔 놓고는 정작 자기만 모른다. 타고났네. 아주 난 놈이다. 황현진은 이민호의 지난 삼 년에, 그리고 앞으로의 몇 년에 애도를 표했다.


“우리 뭐할까?”

“어? 어….”


이민호가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어쨌든 황현진은 지금을 즐겨야 했다. 고백 이후 일 년만의 데이트였다. 조금 급작스럽긴 했지만, 크게 당황스럽진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이필릭스와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면 뭘 할지 수십 번도 더 상상해봤다. 이필릭스의 질문에 잠시 뜸을 뜰인 황현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녁 먹기는 좀 이르고, …영화나 볼래?”

“그래.”


전형적인 데이트 신청이었다. 이필릭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사람치고 집중을 하나도 안 했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안 한 정도가 아니고 아예 잤다. 황현진은 한숨을 폭 내쉰다. 동그란 머리통을 까딱이며 조는 꼴이 볼만했다. 내가, 앓느니 죽지. 그래도 고 동그란 머리통 조심스레 감싸고 제 어깨를 내어줬다. 스무 살을 맞아 탈색을 감행했던 머리칼은 이제 단풍 마냥 주홍빛을 띄었다. 작은 얼굴에 잔뜩 박힌 주근깨와 퍽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황현진은 조심스레 그 머리칼을 쓸어봤다. 상한 탓에 버석한 질감마저 단풍 같다. 그게 좋았다. 그것마저 좋았다.


“…좋아해.”


좋아한다.


“아직도.”


우리의 관계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엉망이지만.


스크린에서는 주인공들의 키스신이 한창이었다. 이 키스신을 보면서 작은 손을 꼭 쥐고, 동그란 두 눈을 감기고, 키스하려 했었는데.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내며 이필릭스의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제 한 손에 다 들어올 만큼 작은 손이다. 동그란 눈은 이미 감겨있으니 감길 필요 없고. 이제 키스만 하면 된다. 황현진은 이필릭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목의 각도가 요상하게 틀어졌지만 그런 건 별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너와 나의 입술이 맞물렸다는 것. 그게 비록 혼자만의 비밀이 될 일이라 해도.




“미안. 진짜 미안해.”


이필릭스는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이미 괜찮다는 말을 열 번은 한 것 같은데. 도대체 괜찮다는 말 말고 무슨 말을 더하면 좋을까. 황현진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게 하필 이민호라는 건 짜증마저 난다. 이민호. 이민호라면 이럴 때 뭐라고 했을까.


“…한 번만 더 미안하다고 하면 여기서 키스한다?”


이필릭스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황현진 역시 제가 말하고도 흠칫 놀랐다. 정말 지나치게 이민호 같은 말이었다.


“너 지금, 되게 민호형 같았어.”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똑같지, 응. 꼭 제 마음 같은 말을 내뱉곤 한껏 눈웃음치는 얼굴이 보였다. 쟤는 참. 사납게 생겨먹은 주제에 웃을 때면 꼭 저렇게 눈웃음을 쳤다. 기분 가라앉기도 머슥하게. 황현진은 괜히 제 목덜미나 주물렀다. 네가 자꾸 미안하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말을 뱉겠다는 건지 먹겠다는 건지 모를 중얼거림은 덤이었다. 이필릭스는 그냥, 웃었다.


“우리 쇼핑하고 밥 먹을까?”


네가 그러자면 그러는 거지, 내게 선택권이 어디 있어. 황현진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필릭스에게 있어 환장할 부분은 한두가지가 아녔지만,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이거였다.


“자, 선물.”

“어?”

“네 거야. 한 번도 안 써봤다고 했었잖아.”

“…….”

“처음을 선물해주고 싶었어. 음, 사과의 의미도 있고.”


바로 이필릭스가 쓸데없이 너무 로맨틱하다는 것.


이필릭스는 방금 결제한 쇼핑백을 제 손에 쥐여줬다. 선물할 사람이 있는데 고르기 어렵다면서. 너 생각하기에 제일 좋은 거 골라 달라 하여 심혈을 기울여 고른 바로 그 향수가 담긴 쇼핑백이었다. 황현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처음. 어딘지 설레는 단어를 선물 받았다. 사과의 의미 같은 건 하찮아 보일 만큼 너무 큰 의미가 담긴 거 아닌가. 얘는 그렇게 둔하고 눈치 없을 거면 로맨틱하지나 말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어야 사람을 이렇게까지 포기하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들고.


“혹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럴 리가. 엄청 좋아. …고마워.”


향수 한 번도 안 써봤어. 흘리듯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선 제가 받을 선물을 직접 고르게 하고 제 선물이라는 건 생각도 못 하게 만든다. 처음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는 말은 케이오 펀치. 미치겠다. 뭐 저런 생명체가 다 있지. 지금 당장 끌어안고 뽀뽀를 퍼붓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대신 그 작은 손을 꽉 쥐었다.


“이제 우리…, …배고파?”


순 헛소리. 이필릭스는 또 빵긋 웃는다.


“우리 집에 갈래?”


그리고 올 것이 왔다.




이필릭스의 자취방까지 걷는 길은 꼭 천릿길 같았다. 늘 걷던 길이 왜 이렇게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지는 하나님도 모를 터였다. 너무 긴장한 탓에 땀마저 줄줄 났다. 이 서늘한 가을밤에. 손에도 계속 땀이 차서, 제 옆에 나란히 걷는 작은 손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대신 몇 번이고 제 허벅지께에 손을 문질렀다.


“진짜, 괜찮아?”


도톰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목소리도 조금 떨린 것 같다. 이필릭스는 또 그걸 본 모양이다. 둔해가지고 눈치도 없는 게 눈썰미만 좋다.


“뭐가? 둘이서만 섹스하는 거 괜찮냐고?”


…정정한다. 눈썰미는 좋은데 원체 좀 둔하고 눈치 없는 이필릭스는, 꼭 이럴 때만 촉이 좋았다. 얄밉게. 빙글 웃는 얼굴이 시선 한 번 피하지 않고 제 눈을 마주해온다. 결국 황현진은 먼저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긴장이 됐다. 이필릭스랑 섹스, 그거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늘 하던 거에서 이민호 하나 없을 뿐인데. 그거 뭐 대단히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나. 심지어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잖아. 황현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곤 또다시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메시지를 보냈을 이민호.


“그냥, 둘이서 하는 건 처음이고….”

“그게 왜? 민호형 때문에?”

“어?”

“현진아. 넌 민호형이 불쌍해?”


이필릭스의 밑도 끝도 없는 말은, 정확히 지금 황현진의 생각을 읊어낸 것이었다. 얘는 무슨, 독심술을 하나. 황현진은 혼란스러웠다. 지금의 대화는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이필릭스는 원체 좀 둔하고 눈치가 없어서, 뭐가 됐든 그런 건 알 수가 없어야 하는데. 가령, 이민호가 쿨해지려고 부던 노력을 하는 것이나, 제가 그런 이민호를 가끔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나,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이필릭스는 알 리가 없어야


“현진아. 넌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하는데.


황현진은 얼빠진 표정을 했다. 도톰하고 예쁜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진심으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얼굴이다. 하하. 바보. 순진한 현진이. 모자란 현진이. 이필릭스는 넋 나간 황현진의 얼굴을 작은 손으로 감싸 쥐었다.


“현진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그리곤 제 뒤꿈치를 살짝 들어 꾹 입술을 맞댔다. 조금 벌어진 아랫입술을 쪽 빨기도 했다. 황현진의 몸이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더 벌어지는 입술. 그 기대에 부응하게 위해 혀까지 섞을까 하다가 아쉬우라고 이쯤에서 관뒀다.


“섹스는 다음에 하자.”


쪼끄만 몸이 홱 돌더니 한마디 인사 없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황현진은 끝내 한마디 못하고 멍청히 섰다. 그리곤 뒤늦게 숨을 내쉬는 것이다. 현진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되뇌이니 웃음이 팝콘처럼 터졌다. 와르르 쏟아진 것들이 도로를 뒹군다. 황현진은 그 위에서 한참을 더 웃다가, 결국 주저앉았다. 이필릭스의 목소리로 수도 없이 불리던 제 이름. 현진아, 현진아, …현진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야.


아-.

쟤도 진짜.

난 놈이다.


바보 같은 첫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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