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폭력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는 일요일에는 별장의 여름 보수로 일이 바빠서요."

 "거짓말이야."

 "네, 거짓말입니다. 아가씨도 이제는 열 여섯이시잖아요. 조금은 강해지셔야죠."


 유즈루는 건조한 투로 저를 마주보고 있었다. 토리가 이를 꼭 물고 유즈루를 올려보았다. 투정을 부려도 들어먹히지 않겠지. 하교길에 몰래 차를 세우고 고무나무 숲 속으로 가서 그런 일들을 하며 놀아 달라고 했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굴뚝을 타고 지붕 위로 납치해 달라고 했을 때, 유즈루의 방까지 찾아가서 그가 혼자 마시는 술을 빼앗아 먹으려고 했을 때 유즈루는 꼭 이런 눈빛으로 저를 보았다. 터무니없는 요구이자 일말의 협상의 여지도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내려다보는 눈. 그 앞에서 아가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한껏, 품위 없다고 잔소리가 나올 만큼이나 한껏 제 얼굴을 찌푸러뜨리는 것밖에 없었으나 물론 유즈루는 그도 싹 무시하고 돌아서 버릴 것이므로. 토리는 여섯 살짜리처럼 입을 부루퉁하게 해서 구시렁거렸다. …그야 유즈루가 지금까지 많이 돌봐 줬으니까 못 다녀올 일은 아니지만.


 "착합니다."


 그제서야 빙긋이 휘는 눈, 머리 위로 올라가는 손바닥에 또 사르르 마음이 풀어져 아기 고양이처럼 토리가 기분좋은 모양을 하고 유즈루의 손 아래 정수리를 비볐다. 애를 다루는 것 같군. 유즈루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을지 모를 일이나 딱히 상관없었다. 매 달 아가씨의 가족 모임에 수행을 다닌 것도 벌써 십 년에서 절반이 넘었고, 그 때마다의 분위기란 아는 바였지만 어쨌든 영영 그렇게 뒷방에서 울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달래 줄 사람이 없어도 자라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유즈루는 그렇게 생각했고 짧게 친 머리를 하고 뻔한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아가씨도 그의 의도를 납득한 모양인지 퍽 순순하게 본가로 향하는 차의 좌석에 올랐다.


 "다녀오시면 드실 수 있도록 주방에 이야기해서 케이크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오페라로요."


 유즈루가 다녀오시라며, 육 년만에 처음으로 차의 바깥에서 고개를 숙이자 히메미야 토리 아가씨가 생글 웃으면서 차창을 붙잡고 손을 흔들었다. 응, 이따가 봐, 유즈루! 시간은 오전이었으며 그때 하늘은 아직까지 태평양 연안의 맑은 푸른색이었다. 아가씨가 도로 좌석으로 폭 앉고 치맛자락을 모으자 라이트를 켤 필요 없는 차가 정원이 이어지는 별장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흐읍. 높다랗게 선 히메미야 저택의 철문을 앞에 두고 히메미야 토리가 다붓 숨을 들이쉬었다. 실상 그 철문이란 이미 양측으로 저택 부지를 둘러싸고 우거진 전나무 숲과 팔백 여 헥타르에 달하는 사유지의 경계선을 넘어, 이미 출입을 통과받은 방문자들이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마주하는 두 번째 문일 따름이었으나 먹구름으로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 우뚝하게 솟은 문의 커다란 창살들이 마치 저를 압도하고 찔러대는 듯하여, 히메미야 가 저택의 앞에 선 그녀의 이름은 히메미야 토리였는데도, 마치 안녕을 애걸해야 하는 방문자처럼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앞으로 발을 딛으면 안에서 이미 보고 있었던지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토리는 들어서면서 시야의 오른쪽에서 붉은색으로 번쩍이는 빛을 보았다. 그쪽에 카메라가 달려 있던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오셨군요."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시녀장이 맞이했다. 반 이상 센 머리를 뒤로 틀어올린 그녀는 지난 대의 당주, 토리의 조부 되는 사람이 히메미야를 이어받던 시절부터 사용인으로서 저택의 살림을 보았다고 하는데 본가 저택의 사람들 중에서는 토리에게 그나마 가장 친절한 편이었다. 핀으로 고정하고 레이스 캡을 씌운 머리 모양부터 발목까지 오는 하얀 에이프런, 세 개의 단추를 꼭 채운 검고 좁은 소매까지 모든 외모가 사용인의 모범 같은 시녀장이 토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9시에 출발하셨는데 시간이 꽤 늦었습니다. 오시는 길에 도로가 막혀 있었다구요. 미끄러질 것처럼 기름을 먹여 잘 닦인 복도를 역시 소리도 없는 걸음으로 앞서 나아가며 시녀장이 하는 말에 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 보일 리가 없었다. 별로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닐 테다. 분홍색 가디건과 무릎 아래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은 히메미야 아가씨 토리의 발걸음이 바닥을 때렸다.


 "본래 도착하셔서 식사를 하실 수 있는 예정이었지만, 지연이 생겨 버려서 곤란합니다. 모임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해서 응접실에 간단히 드실 것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시녀장은 그녀의 머리가 까맣던 시절부터 줄곧 이 저택에서 살면서 작은 아가씨의 탄생도 후계의 기대가 박살나는 그때도 모두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에게 하는 것처럼 사모님에게도, 서재에서 대강 여자애 이름을 적어서 내보낸 당주의 붓글씨에도 똑같은 거리의 존중을 보였을 터이다. 토리는 걸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말 때문인지 시녀장의 걸음은 다소 빠른 것 같았고 토리는 시녀장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 할 정도였다. 저택의 일 층은 계단으로 이어지는 다른 층들보다도 층고가 높아 서양식을 흉내낸 궁륭을 일본식 목재로 마무리한 천정 구석구석마다 어둠이 드리우고, 흐린 날이면 오후부터 전기를 넣는 등불에서 지는 그림자가 교수형을 당한 사람의 목주머니처럼 흔들거렸다. 우글우글거리는 불투명 유리 위로 얹히는 덩굴 무늬 창틀, 새어들어오는 희미하고 음침한 빛. 토리는 시녀장을 따라가 복도 옆의 응접실로 갔다. 두 명이 넘는 손님을 맞이하려면 협소할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위에 유리를 덮은 크로셰 테이블보는 오래된 것의 냄새를 풍겼으며, 그 테이블 위에 토리를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은쟁반이 있었다. 이십 분 후에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시녀장이 까닥 인사하고는 문을 닫았다. 앞에 있는 것은 흰 빵의 샌드위치 세 조각과 주스였다.






 모임의 드레스들을, 이전에는 토리의 사이즈에 맞추어 본가에 준비되어 있던 것들을 입었으나 스스로 옷을 고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별장의 옷방에 보관하고 있어서 모임 때마다 차의 좌석 아래에 실어다가 보냈다. 지금도, 자신과 함께 차를 타고 본가까지 와서 본가 비서의 손에 전해지고, 다시 이 방까지 배달되어 온 드레스를 들고 토리가 보았다. 그러고보니 유즈루가 저택으로 동행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옷을 입는 시중까지 전부 들어 주고 있었던지라 본가에서는 토리를 위한 사용인을 따로 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유즈루가 없는데. 육 년만의 사정을 미리 알아채고 배려해 줄 리가 없었다. 토리는 드레스를 들고 보다가 가디건을 벗고 블라우스 목 뒤의 진주 단추를 풀었다. 어차피 혼자 입을 수 있는 옷이고. 지금 와서 사람을 불러 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 음산하고, 자신에게 친절할 기미라고는 가장조차 하지 않는 세계에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면서 지나가는 낯선 사용인을 부른다니. 필요한 절차라면 연례의 일이라도 기막힐 정도로 능숙하게 해낼 그들은 달에 한 번씩이나 찾아오는 아가씨의 얼굴을 항상 그런 게 있었느냐는 태도로 대했다. 아가씨, 주인의 일가라는 이름조차 옳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녀는 히메미야의 이방인이며 그저 외지인을 배척하는 마을에 들른 행상과 같이, 멀찍한 거리에서 기웃거리는 호기심만을 받으면서, 자신이 떠돌이라면 그러므로 그러한 시선들도 무례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고, 애써 여기면서 히메미야 토리는 도망치고 싶었으나 인력에 이끌려 차마 우주의 저편으로 떠나가지 못하는 속박된 위성같이 저택의 빈 방들을 맴돌았다.


 토리가 머리를 매만지고 귀고리를 달았다. 푸른색 사파이어로 된 티어 드롭의 귀고리는 오늘 그녀의 엷은 푸른색 드레스와 잘 어울려, 호수의 요정같이 귀 아래를 반짝거리며 장식했다. 가슴 아래가 꼭 조이는 드레스는 아래로 떨어지는 미카도 실크의 위로 반투명한 시폰이 한 겹을 더 덮었으며 앞판의 가슴과 뒤를 연결하는 레이스 원단이 어깨의 삼각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이제, 토리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웃으면. 입끝을 끌어올린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히메미야 가의 완벽한 영애. 열 여섯의 토리가 굽이치는 머리의 물결을 뒤로 넘겼다. 아가씨, 이 빛깔은 플루메리아 루브라랍니다.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가닥들을 스치면 그 정원의 아득한 향기가 불러와져 히메미야 토리는 웃을 수 있었다. 하루 저녁의 일이다. 이것은 겨우 하루 저녁의 일. 그렇게 생각하면 눈총을 버티지 못하고 방으로 도망쳤던 일도 거기서 유즈루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울었던 일도 다 그가 있어서 그러했던 어리광처럼도 느껴져서, 그래, 겨우 하루 저녁의 일. 몸과 눈을 아플 정도로 비추는 밝은 불빛과 담소의 칼들을 조금만 지나서, 그것들이 일제히 꺼지자마자 나는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 히메미야 토리는 잔잔한 미소 띤 표정으로 손잡이를 밀었다. 이윽고 히메미야 저의 가장 화려하게 마련된, 쏟아지는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불빛이 젖빛 대리석 타일에 반사되는 연회장으로, 유리 구두가 발을 딛었다.




 자그마치 육 년간의 기다림이었다. 실패한 쭉정이인 히메미야 토리를 시라하마 정의 별장에 유폐해 버리고, 풀기운이라고는 없었던 황무지에서 느티나무 싹이 돋아나기를 바라보듯이 목을 매던 히메미야 가 사람들에게도 기적이 찾아왔다. 히메미야 토리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이미 한 번 빈 선물상자를 뜯어 본 쓴 경험이 있기에 노심초사하면서도 내심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또 자꾸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흘금거리던 수많은 형착(詗捉)의 시선 끝에, 그루마다 식재의 가격이 붙어 있는 전나무 숲 가운데에서 히메미야 저는 마침내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탄생을 얻었다. 장차 가문의 대를 이을 아이. 해갈의 환희가 눈물겹도록 저택 안에서 사는 모든 생명들을 감쌌다. 그리고 그 감격은 이후로 십 년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아서 히메미야 가는 후계자이신 도련님을 떠받들고 살았다. 요람에서 방석으로, 방석에서 낮잠 의자로, 의자에서는 발 밑에 두고 걸을 깔개까지 일생 발로 차가운 것을 겪어 본 적 없는 그런 제멋대로의, 히메미야 토리의 남동생이 새파란 눈을 하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련님, 어찌 저렇게 안 자라실까, 한구석에서는 또래보다도 오 센티미터는 작은 키를 보면서 걱정스럽게, 말뿐만이 아니고 의사를 불러다가 영양과 발육에 대한 상담까지 하면서도 본인의 눈귀 닿는 곳 안에서는 그조차 사랑스럽다느니 귀엽다느니 하는 꿀 발린 말들만을 일삼아 거스르는 것이라고는 무엇도 없었다. 히메미야 토리의 남동생은 그녀와 똑같이 히메미야의 곱슬거리는 분홍색 머리칼이었지만 눈동자의 색만은 얼음 호수를 닮은 깊은 파랑이었다. 가죽으로 알맞게 조인 서스펜더, 실크 셔츠 위로 곱게 매어진 리본 타이에 소년다운 니 삭스를 신긴 열 살의 그 애는 명분뿐의 전시품인 아가씨 토리와 달리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부터 모임에서 온갖 주목과 애지중지하는 손길들이 가득 쏠리는 대상이어서 토리는 동생과 거의 마주보고 있을 일도 없었는데, 그러나 곤란해라. 이렇게 아주 잠깐, 환영받을 만한 '큰' 손님이 악천후에 지체를 맞아 도로에서 타이어를 간다며 반여 시간을 늦게 들어올 때, 그래서 좌중이 호들갑스럽게 고생에 대한 위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음해 주신 방문에 대한 치사를 주고받을 때,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이런 순간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다.


 "안 돼요."


 토리가 짐짓 엄한 눈길로 내려보았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도 아직 모자란 아이와는 삼십 센티미터 이상 눈높이의 차이가 났다. 그 정도가 되자 상대적으로 제가 많이 어른인 것처럼 느껴져서, 토리는 고집스러운 입술이 뻗는 손길의 앞으로 발을 옮겨 테이블의 앞을 막아섰다.


 "줘!"


 히메미야 토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버릇이 없어도 정도껏이지. 방금 지른, 저런 문장도 안 되는 외마디의 소리는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더라도 예의를 안다면 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자그마한 동생이라는 것은 주위에서 얼마나 어르고 달래기만 했으면, 토리의 저지를 저지라고 생각지도 않고 골 난 표정으로 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발이라도 구르겠다. 토리가 표정을 찌푸리면서 어깨를 넘겨보았다. 그녀의 뒤에 있는, 그러니까 고집 부리는 동생으로부터 그녀가 차단하고 있는 것은 연회의 축하를 위한 회장 가운데의 메인 테이블로, 그 위에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가족 내의 사교 모임에 걸맞은 사 층짜리 샴페인 타워가 반짝이고 있었다. 데미 섹에 백포도로만 담근 와인 잔들은 익기 전의 밀알처럼 뽀얗고 연한 연둣빛을 띤 채 연회장의 불빛을 받아,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배치의 주역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시선이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토리 자신도 그 반짝임에 홀려 하나를 집어들어 보고 싶지 않던 것 아니오, 에덴의 과실처럼 달고 선악의 이름만큼 시큼할 것 같은 그 액체를 목 안으로 넘겨 보고 싶지 않던 것 아니나,


 "술이라니까. 어린이는 안돼."


 토리가 무릎에 손을 짚고 얼굴을 가까이 해서 속살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 입구에서 젠체하고 있는 저 사람을 기다린다고 아직까지 건배식을 시작하지 않았거든. 말하자면 행사 이전의 세팅이니까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이후에도 녀석이 계속 징징 졸라 대어서, 호기심이 귀엽다고 또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면서 누군가가 품에 안아올려, 맛을 보여 주는 건 어떻겠느냐고, 칭얼거리는 입술에 플루트의 끝을 대어 주거나 말거나 하는 데까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히메미야 토리는 실상 남동생의 안위 따위는 관심도 없고 그때쯤이면 이미 자신은 꽃처럼 피어나는 웃음소리 아래 시든 받침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늘진 회장의 한구석에서 부조처럼 서 있다가 가끔, 도망가지 않고 거기 있다는 것만 확인시켜 주면서 지루한 형의 선고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겠지. 그러니까 괜한 말썽 부리지 말고 딱 오 분만이라도 얌전히 있어 봐. 남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토리가 고운 얼굴에 슬쩍 짜증을 섞을 때였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 무언가 옆구리를 툭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더니 그 공기와 깃털 같던 찰나에 바로 곧이어.


 빛과 엉겨 있던 서른 개의 샴페인 글라스가 히메미야 토리의 위로 쏟아졌다.


 그 순간 토리는 아찔함을, 한구석의 아찔함을 느껴 쏟아지는 샴페인 타워를 피하려고 발을 헛디뎌 접질렀는데, 그녀가 연회장의 대리석 타일 위로 엎어지고 서른 개의 술잔들이 와장창 바닥으로 쏟아지며 액체를 토해내고 유리가 바닥과 자기들끼리 부딪혀 박살이 나는 때에, 악, 새된 비명과 무언가 다른 넘어지는 소리, 바닥을 짚어 부글거리는 단 거품 위 유리 조각에 손바닥과 팔꿈치가 파고드는 아픔, 허공에서 산란하는 빛, 무슨 일이야! 하고 누가 외치는 목소리와 소동을 감지하고 일제히 이쪽으로 내리꽂히는 수십 관중의 시선들에, 세차게 바닥을 찧은 꼬리뼈 위로 찌르르 타고 오르는 통증에 그만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것에도 불구하고,


 "저, 저, 얘……."


 왕왕 울리는 귓가. 번개가 거듭 내리치는 것처럼 희번득한 시야 안에서―웅성거리는 소리들, 분명 이제는 모두가 이 광경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있겠지, ― 히메미야 토리는 분명 저를 밀치고 기어이 샴페인 타워의 테이블로 달려들려고 했던 히메미야 도련님, 제 남동생을 찾았다. 안 돼. 당혹과 공포가 뒤섞인 예감이 머리에서부터 뱃속까지 주르르 흘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무어든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연유나 과정은 따져볼 것도 없이 모든 화살은 히메미야 토리 자신에게로 꽂힐 것이 분명했다. 가장 평화로운 날에도 온갖 미움과 눈총을 받는 그녀인데 이런 사안에서 오죽할까. 벌벌 떨리는 손이, 몸 안으로 발작하는 불꽃을 삼킨 것처럼 섬짓하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동생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토리가 황급히 다가앉았다. 술과 유리 조각이 나뒹구는 바닥에서 구원줄이라도 찾는 것처럼 붙잡고는 하염없이 뺨을 쓸어내렸다. 괜찮니? 괜찮아? 피가 흐르는 것은 오히려 토리의 손이었고, 보송한 아이의 뺨에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솟아나는 진한 피가 문질러져 주홍으로 눈물에 희석되어 비벼졌지만 그것도 모른 채 토리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


 눈치를 보며 둘러싸고 수군거리는 팔들 사이를 황급한 발소리가 뚫었다. 그것은 달려와서 힘도 속도도 조절하지 않고 히메미야 토리를 와락 밀쳤다. 삽시간에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토리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드레스가 풀썩 날았다.


 "너, 이 년이 기어코……."


 토리를 밀치고 히메미야 도련님을 껴안은 것은 저택의 안주인이었다. 그 눈은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 증오와 경악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샴페인의 바닥에서 토리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시선에 적중당하여 얼어붙, 어,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새삼스럽게 마주한 그 감정은 아주 날것의 것으로, 그런 논리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증오를 받아내는 사람은 그만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다. 그러므로 이 경련은, 온도만의 혹독이 몰아치는 것이 아니라 가공할 만한 물리적인 폭음의 파장도 동시에 되는 것이어서 몸이 떨려, 히메미야 토리의 그만 얼어붙은 몸마저 잡고 못 견디게 흔들어대고,


 "뭐 하는 짓이야. 쭉정이 같은 잡년이라도 그래도 히메미야의 이름을 달고 있다고, 모임마다 매번 불러다 세워놓기까지 하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이 따위 미친 짓을 벌여?"


 아 니. 토리가 굳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해명. 해명 같은 것이 먹힐 것이라고는 생각도 않지만.


 "아니, 아니…… 어, 머니……."

 "나가!"


 쩡하니 울리는 고함 소리에 다시 한 번 온 몸이 마비되었다. 그녀는 입이 도무지 움직이지 않아서. 손, 의 끄트머리부터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나가, 당장 나가! 마귀 같은 년, 팔자 좋게 별장에 처박아 두었더니 얌전히 앉아 있지는 못할망정 제 동생을……. 너 따위 것을 보자고 데리고 앉았다니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주인이 따로 별장을 짓는다고 할 때도 나는 탐탁잖았는데, 그래도 꼴 보기 싫은 것을 눈앞에서 치울 수 있다는 점만은 좋아서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지.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영원히 그 촌구석에서 그 끔찍한 머리조차 못 내밀게 했어야 했는데!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 들어오더니 결국 사달을 내는구나!"


 신록은 불로 타오르는 숲. 히메미야 토리의 눈은 모친의 것을 닮아, 그녀를 쳐다보는 채로 악에 받친 말을 쏟아내는 그 눈은 자신과 같은 초록이었고, 가지 사이사이마다 열기가 요동쳐 물 품은 나뭇잎들을 태워 증발시키면서 울컥울컥 수증기가 일고 있었다. 그때 훌쩍거리는 아이의 손이 가증스럽게도 들어올려져 모친의 팔을 쥐었고, 어머나, 세상에 상처가 이렇게 베어서, 수습할 것 가져와요. 당장. 걱정 가득하게 돌아오는 것 같던 이성과 그러나 죄송해요…… 하는 황망한 사죄에 안고 있던 아이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길 것 같은 기세로,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 어디라도 가서 그대로 죽어 버리라고! 아아. 그 창날들은 진짜였다. 히메미야 저에 들어올 때에 보았던 그 철문에 솟았던 검은 살들이, 그녀의 배로 날아와 온통 꽂히고 있었다. 토리는 손을 짚고 일어났다. 접지른 발목이 휘청거렸다. 어느 사이에 귀고리는 한 쪽을 잃어버렸는지, 머리카락은 샴페인에 젖어서 뚝뚝 흘러내리고, 팔과 손바닥, 어질러진 바닥으로 다시 한 번 넘어지면서 박히고 긁힌 샴페인 글라스의 조각들이 연한 푸른빛의 드레스 위에 상한 양귀비물 같은 울긋불긋한 곰팡이를 드리우고 있었다.

 토리는 일어섰는데, 분명 받지 않는 편이 나았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고, 그저 옷을 차려입은 뒷모습으로 친척과 다른 내빈들에게 머쓱한 척을 연기하며 사과하기에 바빴다. 발목이 욱신거려, 젖은 드레스가 허벅지에 달라붙고 군데군데가 따가운 것을 무시하고, 토리는 이대로 걷기도 힘든 구두를 벗어 팽개치고 가려다가, 다시 휘청, 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달려 벽에 기댄 시점에. 그제서야 저의 숨이 덥다는 것을 깨닫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눈가가 만수선까지 차오르고 이가 떨린다는 것을, 혹한에 눈밭 속에 조난당한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토리가 발을 딛었다. 쿵 하고 몸뚱이의 무게가 대리석의 바닥을 치면 힘줄을 타고 세로로 뜯어먹힐 듯한 고통이 올랐다. 그리고 또다시 다음 발. 짐승의 아가리에 연약한 발목은 혈관이 보이도록 헤쳐지리라. 쿵. 진동이 전신을 찌르르 울렸다. 사라져 버리라는 환청 같은 비명. 뒤에 달라붙는 수군거리는 소리. 아리도록 찬란한 연회장의 불빛이, 히메미야의 저택이, 근본에서 도사리는 허영이, 가장할 시간도 모자랐던 무르익은 증오가 그를 찢고 할퀴고 삼켰다. 오직 생존에 대한 압박으로 토리가 비틀비틀 걸어나갔다. 악으로 발을 끌어갔다. 여기서는 더 있을 수 없다. 바깥까지 아주 바깥까지. 이 불빛을 지나 교수대 같은 복도를 통하고, 마녀의 머리채같이 스산하게 번뜩이는 두터운 전나무 숲의 수해와 톱날 같은 잔디들을 전부 넘어서라도. 돌아가야 해. 이 밤에 한 순간도 더 여기에 있을 수 없다.


 찢어진 야회복 피 흘리는 요정의 차림으로 저택의 문을 뒤로 뿌리치고 나오면 질식하도록 몰려온 어둠에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이는 저 한 순간에 보인 곳으로 달려나가자. 시데 조각이 마름모로 흩어지고, 낱낱이 볼 안의 살점보다도 작게 떨어져 말려가는 나여.





 새벽이었다. 오전 여섯 시 이십 분에, 어디서 무언가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에 유즈루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후부터 날씨는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저녁부터는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시라하마 별장의 사용인들은 일 층의 현관 창부터 삼 층의 복도와 건물 양 끝에 위치한 탑의 입구까지들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잠자리에 든 이후였다. 이런 시각에 뭐지? 유즈루는 제자리에서 눈을 끔벅였다. 잘못 들었다기에 쿵, 쿵 하는 그 소리는 멀지만 들릴 수 있는 크기로, 끊기지 않고 간헐적으로 계속 들려왔다. 유즈루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는 편이 낫겠는데……. 헝클어진 뒷머리를 누르면서 유즈루가 옷장에서 베스트를 집어들었다. 그는 잠옷으로 무지의 흰 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만일 밖에서부터 들리는 소리라면, 셔츠만의 차림은 보일 수가 없으니까 그랬다. 지붕 위까지 뒤덮었을 폭풍우의 먹구름으로 인해 박명 따위 없이 실내는 습하고 둔중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유즈루는 서랍에서 라이트를 꺼내었다. 작게 하품을 하고, 단추를 잠그면서, 그는 자신의 방을 나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쿵, 쿵. 아직도 세차게 내리고 있는 모양인 빗소리에 섞여서도 소리는 묻히지 않은 채 들려왔고, 복도로 나가서 걸으며 보니 미세하게 울리는 느낌 또한 들어, 아마도 소리의 진원은 어디선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 듯했다. 현관이 맞는 것 같다. 짐작이 닿은 유즈루가 발걸음을 빨리해 별장의 주 현관까지 다다랐다. 쿵……. 문이 바람에 덜걱거리고 있었지만 방금 전의 것은 바람의 손길 정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누구 있습니까? 유즈루가 틈새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귀를 대어 보아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어 봐야 하나. 다시 두드리려나. 고민하던 와중에.


 그때 속에서부터 무언가. 그제서야 무언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힐책하고 싶을 정도로 비바람과 흔들리는 문과 스며드는 녹물 같은 어둠 속의 어느 부재(不在)에 생각이 미치며, 불길하고도 터무니없는 예감이, 그때서야 유즈루에게 닿아 왔다. 설마……. 유즈루가 옆으로 라이트를 놓았다. 맨손으로 현관의 잠금 장치를 풀어 문을 열어젖혔다.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차게 젖은 채 몸처럼 안으로 쓰러졌다.





 "아가씨."


 유즈루가 몸을 흔들었다.


 "아가씨, 토리 아가씨."


 히메미야 토리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꺼풀은 지난 아홉 시간여의 계속된 비에 무겁게 젖어서 아직까지 물이 다 빠지지 않고 그래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둔중한 의식과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밤새 내리치던 번개가 아직까지도 눈앞에서 멀금거리는 것 같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전신을 쏘다니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습기에 차고 더운 것 같았는데, 하얗고 번들거리는 타일과 노란 조명을 보아 이건 욕실인 것 같은데, 차게 식었다가 덥혀진 몸에서 새로이 아픈 감각들이 솟고 있었다. 하지만 피로 때문에 손 끝 하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가물거리는 시야가 무겁다. 무거워서, 이대로 도로 감아 버리고 싶어…….


 그러나 토리는 힘을 써서 눈꺼풀을 붙잡고 있었다. 수증기와 김 속에는 지난 수 시간 동안 환각을 보는 것만큼이나 거듭해서 보던 바라던 그 얼굴이 있었다. 까마귀의 깃털 같은 짧게 쳐 올린 머리칼, 그 또한 자신처럼 비에 젖었는지 물에 젖었는지 번들거리는 빛을 띠고, 곱게 빠진 턱선과 드러난 목에서 물방울을 똑똑 흘리면서 그의 유즈루가 이쪽으로 보고 있었다. 아……. 소리를 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입만 벙긋거렸을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나 보다. 유즈루의 표정은 무언가 발견했다는 것처럼 미세하게 변화가 있었는데 아마도 아가씨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확인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더운물에 담그고 빗물과 흙과 피를 씻어낸 토리의 몸을, 유즈루가 수건으로 쥐어 보듬듯이 닦았다. 한 번 감쌀 때마다 흰 수건이 한 움큼씩 물기를 덜어냈다. 몸통과 가슴, 목과 어깨. 상체의 이후에는 다리도 조심히 들어올려서 허벅지와 그 안까지, 구석까지 보송하게 닦고, 그리고 토리는 자신의 몸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유즈루는 아가씨를 침대 위로 안아다가 시트를 덮어 주고 뉘었다. 그리고 그는 아가씨의 몸에 난 자국들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약함을 열고 소독액과 연고를 꺼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목 안까지는 그의 수건이 미치지 못해서, 아직까지 열과 물이 남아 있는 숨소리를 히메미야 토리가 혼자 노래하듯 골랐다. 하, 흡, 하아……. 몰려오는 피로와 감각과 생각들. 그렇지만 가장 그립던 것이 여기에 있어. 바로 곁에 있는 거야. 그래, 유즈루는 그녀의 옆에 있었다. 유즈루에게 팔을 내어준 채 토리는 노란 보조 조명이 얼룩얼룩 비추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가라앉은 채 제가 다루고 있는 것을 응시하는, 마치 작업하듯 이 생채기에서 다음 생채기로 옮겨가는 그의 눈길은 무심할 정도로 차분하여서, 이제는 슬슬 밝아야 할 해가 아직도 뜰 기미조차 없는 이유는 그의 그 살풍경한 눈이 먹어치워서 그런 것처럼, 히메미야 토리는 속눈썹이 떨릴 뻔 했다. 토리는 유즈루에게, 그런 유즈루의 모양에 다시금 속이……


 그래서 히메미야 토리가 목소리를 내었다.


 "유즈루."

 "……네, 아가씨."


 유즈루는 토리의 팔뚝 아래의 깊게 벤 상처를 들여다보고 검지 끝에 연고를 묻혀다 바르느라 대답이 늦었다. 찢어진 상처를 벌리는 아픔에 토리가 작게 신음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떨었으나 그의 태도는 가만한 그대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거야?"

 "동행하지 않아 드려 죄송합니다."


 유즈루의 답변은 짤막했다. 그때 유즈루의 옆얼굴은 미약한 조명이 비추는 좁은 사각의 영역에서 벗어나 별장의 그늘에 잠겨 있었다. 다물린 입술의 분홍이 그 안에서는 마가목 열매처럼 식은 자줏빛으로 보였고 빗줄기가 반사하는 적은 광량으로는 도무지 거기에서 무엇도 끌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즈루는……. 시트에 몸을 감싼 채, 유즈루가 놓아 준 수건에 머리를 기댄 채, 유즈루에게 제 왼 손목을 내맡긴 채, 토리가 낮게 허덕이는 의문을 문장으로 뱉어냈다.


 "유즈루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비에 젖은 어린 새처럼 떨리는 목소리. 후시미 유즈루는 이 목소리까지는 말릴 수 없었다. 수건은 사람의 목 안까지 닿지 않고 그는 손을 집어넣지 않는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마주서지도 받지도, 최선이라 불리는 것조차 양심에 거스를 그의 모심이란 국한하는 의무와 그리고 아주 조금 벗어난 도덕률에서, 지지 않는다고 믿어지며 이루어진다고 믿어지는 허상을 좇을 뿐이다. 그는 아가씨가 듣지 못하도록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를 행해 주는 것뿐이다. 그가 대비하는 것은 전쟁이며 그의 갈 길은 불 속이다. 마음을 방화의 검은 광택으로 번쩍이게 남겨두기 위해서는 소매를 접어 걷어올리는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팔꿈치에서도 반 뼘 아래. 아가씨가 꿈꾸는 모든 물과 열과 애절함이 타고 흐를 수 있는 것은 오직 거기까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가씨의 목소리가 슬프게 물었다. 나는 너를 알 수가 없어. 유즈루의 눈길이 내리깔린다. 약함과 전등이 놓인 침대 옆의 협탁, 제가 앉은 의자의 아래로 다리마다 짙은 그림자가 담벼락 뒤의 파이프나 남몰래 맞은 채찍 자국처럼 져 있었다. 유즈루, 나는 강하게 있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전부 부서졌어. 유즈루는 내리깐 눈을 들지 않은 채 아가씨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애는 자기가 뭘 가졌는지도 모를 거야. 자기 다리 사이에 달린 것이 얼마나 제 운명을 결정했는지조차 모를걸. 그 애도 만약 그 유일한 보고이자 방책을 가지지 않았다면, 글쎄. 그 애는 태어나자마자 보자기도 못 두르고 수챗물에 버려졌을지도 몰라. 둘까지는 아무도 감당하고 싶어하지 않을걸. 유즈루는 가만히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가 다 뒤집어쓸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 정도로 미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나는 낯설지 않도록 얼굴을 아는 데조차 몇 해가 걸리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나를 미워한다는 점이 우습지 않아? 아가씨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유즈루는 눈을 맞추고 아가씨의 말들을 들었다. 이 또한 이 오래된 별장, 그네툼과 고무나무가 숲진 사이 덩굴손이 벽을 타고오르는 정원의 안에서였기에 가능할 뿐인 이야기다.


 그래서 아가씨는 밤에 저택을 뛰쳐나와, 부은 발목이 못 쓰게 될 것 같았지만 톱날 같은 잔디들을 피하려고 구두를 벗지 못한 채 달렸다고 한다. 생전 처음의 밤의 도쿄의 기차역에서 길을 묻고, 문을 닫은 편의점 간판과 껌벅이는 전광판을 지나 흘금거리는 시선들을 넘어 표를 손안에 구기고, 도쿄에서 나고야로, 나고야에서 다시 키노쿠니 선을 타고, 밤 기차에서 아뜩아뜩하는 정신을 졸아 가며 손잡이를 붙잡고 차창 너머로 흐르는 드문드문한 암흑 물의 선을 그리는 비를 보면서, 시라하마 역에서 내려, 그때즈음은 다섯 시가 넘어 있어서 그녀를 귀신 보듯 할 다른 사람들도 없이 불 꺼진 승강장 앞으로 나와서는 망연하게 역전을 헤매고 있었다. 별장까지는 버스가 없다. 걷는다면, 가늠이 안 되지만 얼마나 더 걸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비추는 가로등은 저의 몸체에도 빗줄기를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십 여 분을 그 자리에서 배회하던 그녀를, 일찍 일을 나온 택시 기사 하나가 발견하고 태워 주었다고 한다. 토리는 정문에서 내려 혼자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래도 유즈루, 나는 울지 않았어. 턱끝까지 이렇게 차올랐지만 울지 않았어. 칼에 찔리고 발이 뜯기고 번개와 비로 두드려맞아도, 아무도 등 토닥여 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우는 일은 너무 아프기만 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저택에서도, 그곳을 뛰쳐나오면서도, 경찰서에 전화를 걸겠다던 역무원의 앞에서도 울지 않았어. 유즈루. 유즈루. 나는 너를 만나서 울려고, 너를 기다려서. 네 앞에서 울려고…… 찾아왔어. 구름이 비를 품을 때 이런 기분일까."


 유즈루의 손을 쥔 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여잡는 갈구. 목소리의 끝은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고 이미 코끝까지 잠겨 있었다. 아가씨가 다가왔다. 아가씨가 유즈루에게 몸을 기울여 오며 보면서, 곧 터질 씨앗의 주머니같이 오그라든 어깨는 벌써 떨리고 있었다. 유즈루는 아가씨가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고 그 절절하고 약한 아가씨의 인력(引力)에 대해서도 들었다. 유즈루는 그 말에. 다가오면서 그를 찾는, 아아, 그런 일이 있으셨나요. 이제 괜찮아요. 이제 제가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이리 오세요. 등을 다독여 드릴게요. 당신을 안아 드릴게요. 안고, 입을 맞추어 주고, 그리고 이후로는 영영 당신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라는, 그런 꿈처럼 무너질 기대의 말 가운데 어느 것도 행하지 않았다. 유즈루는 몸을 가까이 해 주지도 토리의 입술을 제 몸 가까이 끌어들이지도 않은 채, 마주친 눈으로 그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이.

 하……. 암흑으로 떨어진 틈새가 빠끔거리는 토리의 입술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너는 움직이지 않는다. 너는 다가오지 않는다. 너는 밤의 꽃처럼 열리지도 않고 향을 풍기지도 않으며 음악을 들려주지도 않고 그저 목석같이, 제자리에 서서,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 주고 있을 뿐.


 그것이 이렇게나 슬픈 이야기였던가?


 태어나 수천 개의 단어를 배우는 데에 사전이 필요없듯 이 마음 또한 규정이나 정의, 알려주는 이 하나 없이 오직 스스로 배웠다. 이러한 종류의 뭉클거림을, 이러한 종류의 안타까움을, 이러한 종류의 원함과 닿지 않는다면 심장을 뜯어내어서라도 내밀고 싶은 갈급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후시미 유즈루는 아가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키스해 줘."


 유즈루가 고개를 내밀어 입술을 겹쳤다. 아가씨가 유즈루의 목을 끌어안자 그의 손도 아가씨의 등 위로 얹혔다. 고개를 틀고, 묽은 것들이 닿고, 아가씨는 혀를 부비면서 헐떡이며 울었다. 예비한 울음이 아니었다. 파도처럼 새로이 이는 감정의 폭발 같은 스콜이었다.


(계속)


에농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