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이잖아.”

 

그간의 사정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지민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썸 아니라니까?”

“그게 썸이 아니면 뭔데? 단둘이 놀러 다니고, 단둘이 플레이리스트 공유하고, 단둘이 얘기하잖아. 와 씨 생각해보니까 괘씸하네. 멤버라고 꼴랑 7명인데, 감히 막내 둘이서 이 형님들을 왕따 시켜?”

 

지민이는 제 트레이드 마크인, 앞머리를 연신 쓸어 넘기며 두 눈을 부릅떴다. 저렇게 떠도 안 무섭다고 몇 번을 말했건만, 녀석은 좀처럼 저 표정을 포기하지 못했다.

박지민은 내가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얘라면 괜찮지 않을까, 신중하게 생각을 한 끝에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 전정국이 좋아죽겠는 그 마음이 좀처럼 주체 되지 않던 날 술을 마셨고, 하필 그때 같이 있는 게 박지민이었다. 잔뜩 졸아든 어묵탕에 찬물을 들이붓다 말고 말했다. 남자를,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전정국을 좋아한다고. 술김에 한 말이라고는 해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괜히 정신 사납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내게 박지민은 덤덤하게 말했다. 심지어 날 쳐다보지도 않고, 새 수저로 어묵 탕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쩐지.”

 

기겁하며 ‘너 미친 거 아니야?’ 소리를 지른다거나, 게이는 더러우니 말도 걸지 말라고 할거라 생각했던 내 극단적인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녀석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윗입술에 묻은 하얀 거품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고, 꼬치에 꽂힌 고기 몇 점을 쏙쏙 빼 먹을 때도 그랬다. 어찌나 태연하던지 오히려 커밍아웃한 내가 더 놀라서는, 혹시 이거 몰카 아냐?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박지민은 미어캣처럼 쉴 새 없이 고개를 휙휙 돌리는 내게 지저분한 물티슈를 던지며 짜증 난다는 어투로 말했다.

 

“존나 티 났거든.”

“티낸 적 없거든?”

“아, 예예. 퍽도 그러시겠어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뭐가 그렇게 티 났는데? 하고 묻는 내게 박지민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휴, 등신아.”

 

나쁜 새끼 그거 말해주면 뭐 닳는다고. 어쨌든 그 날 이후로 박지민은, 전정국으로 꽉 막힌 내 마음에서 유일한 숨구멍이 되었다. 말이 좋아 숨구멍이지, 대나무 숲이나 다를 게 없었다. 지민아 정국이 머리 저렇게 한 거 너무 귀엽지 않니? 지민아 너 아까 정국이 사진 찍은 거 카톡으로 보내 봐. 짐나 정국이 자는 거 존나 귀엽지. 그 결과, 박지민은 나와 눈만 마주치면 귀를 틀어막고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정국이한테 확신을 못 줬나? 그래서 고민 중이고… 그런 걸까?”

“그야 모르지. 그거 알면 내가 박지민이냐? 전정국이지.”

“…개새끼야.”

“그래서 앞으로 어쩌게?”

 

어릴 땐 문제집 풀다가 도통 모르겠으면 엄마가 뜯어다 몰래 숨겨놓은 답지를 펴보면 되던, 그때가 좋았다. 내게 전정국은 답지 없는 문제집이라, 답을 내기 전까지는 이게 맞은 건지 틀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가정을 늘어놓는 지민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와중에도 전정국 생각만 가득했다. 전정국은 내 머릿속 한가운데에 크게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가 망부석이야 뭐야. 제멋대로 무단침입 했으면서 쓸데없이 되게 당당하네.

 

“다시 질러봐야지.”

 

너가 안 움직이니까, 내가 마음을 접을 수가 없잖아.

이게 썸이 아니면 대체 뭐야? 심지어 뽀뽀도 했다. 애들 장난 같은, 심지어 유치원 다닐 때도 이런 식으로는 안 했지만… 어쨌든 뽀뽀는 뽀뽀다. 전정국은 피하지 않았고, 그저 불편해 보이던 자세를 고쳐 누웠다. 싫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나, 하다못해 싫은 표정이라도 짓는 게 보통의 반응인데 전정국은 오히려 몇 마디 더 재잘거리다 그대로 잠들었다. 그 덕에 전정국이 깰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 있다가,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꽤나 고생하긴 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간단했다. 날 향한, 그리고 내 마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는 거.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은 불가능했다. 막말로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그동안 한 건 다 뭐냔 말이다. 우리가 한 게 친한 형 동생들이 하는 거라면, 난 친한 형 동생 같은 거 없단 말이지. 하다못해 핏줄인 남동생이랑도 안 하는 걸 전정국이랑은 다 했는걸.

그 순간, 어떤 노래 가사 한 소절이 떠올랐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사실 아주 잠깐, 내가 취향이 아닌 건가? 하고 말도 안 되는 고민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취향이 있고, 그러니 모든 사람이 꼭 잘생긴 얼굴만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아주 만약에 전정국 취향이 우락부락한 근육 빵빵일 수도 있는 거였다.

 

“진짜 잘생겼단 말이지.”

 

근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잘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전정국 취향이 뭐가 되었든 이 얼굴이면 다 깨부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정도껏 잘생겼어야 호불호 선상에 오르는 거지, 거울 속 내 얼굴처럼 이래도 될까 싶을 만큼 잘생기면 호불호의 영역을 넘어서게 되어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말하시길, 내 미모는 다 죽어가는 자에게 숨을 불어넣는 그런 미모라고 했다. 그러니 제 취향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 거절할 리가 없다는 게, 나의 깔끔하고 완벽한 결론이었다.

 

“으, 왕자병.”


애니메이션을 본다며 옆 침대에 엎드려 있던 정국이가 몸을 일으키며 날 바라봤다. 두 귀에 콩나물 대가리, 그니까 에어팟이 끼워져 있길래 못 들을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잘생겼다는 자화자찬 외에 이상한 소리를 안 한 게 다행이었다.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서 새침하게 눈을 흘기자, 정국이는 뭐가 그리 웃긴지 저 혼자 키득거리며 웃다가 뒤로 넘어갔다. 배꼽 빠지겠네. 퉁명스러운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윗니, 아랫니 모두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귀여워서요.”

“잘생긴 거야.”

“뭐… 그것도 인정.”

 

인정은 무슨. 입을 삐죽이며 꿍얼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지금 다시 얘기해볼까? 멤버들이 숙소에 있다고는 하지만 안 될 건 없었다. 윤기 형이랑 남준이 형은 작업하다가 새벽 늦게 들어왔으니 세상 모르게 자고 있을 테고, 빡지는 약속 있다며 놀러 나갔다. 호석이 형과 석진이 형은 카트라이더 배틀로 밥 사주기 내기한댔으니, 거기에 정신 팔려있을 게 분명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정국은 그새 드러누워 있었다. 보통 영화 같은 거 보면 고백할 때 상대의 눈을 보고 하던데.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두 눈 똑바로 보고 말할 깜냥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완벽하진 않겠지만 원래 고백이라는 건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것 중 하나니까, 결과만 좋으면 아무렴 상관없다.

큼, 작업실에서처럼 괜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 일인지 정국이는 그 작은 소리에도 뒤를 돌아봤다. 평소 같으면 볼륨 잔뜩 키워놓고 있을 녀석이라 옆에서 요란스럽게 방울을 흔들며 굿을 해도 모를 것 같았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소리를 줄여놓은 모양이었다.

 

“정구가.”

“넴.”

 

아, 방금 발음 이상했어.

 

“그… 잘생긴 형이랑 만나볼래?”

 

애꿎은 턱만 만지작거렸다. 저번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던 거 같아서, 그래서 정국이가 도망간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황급히 바꾼 노선이었다. 근데 기왕 말하는 거 고개 좀 들고 말할걸. 내뱉은 말과 다르게, 하는 행동은 멍청이나 다를 게 없다. 내 말에 정국이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흐흥 하는 콧소리를 냈다. 강약 조절을 못 한 탓에 이번엔 너무 가벼웠나 하는 고민을 하는 사이, 정국이가 말을 꺼냈다.

 

“형, 나는 이런 거는 풍선 같아서 싫더라고요.”

“…엉?”

“꼭 풍선 같잖아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점점 커지다가….”

“…….”

“펑, 터져버리는 게.”

 

그 말을 하는 정국이의 표정에 장난기가 없어서, 아기자기한 표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이라 무슨 말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멍청한 표정으로 아… 하고 듣는 거였다. 그러다가 안 그래요? 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저 개구진 얼굴에 또 한 번 마음이 일렁거렸다.

전정국이라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머릿속에 박혀있는 것도 모자라서, 가슴에는 큰 파도가 사는 모양이었다. 남들은 좋아하면 콩닥거린다는데, 어떻게 나만 이래. 해외 여기저기를 가도 전정국 보다 큰 파도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철썩이며 미친 듯이 몰려오기만 하는 파도는 세계 어딜 가도 없을 거다.

 

“정국아.”

 

도로 누우려는 정국이의 옷자락을 황급히 붙잡았다. 왜 얘 하고만 있으면 난 이렇게 항상 조급한지 모르겠다. 쟨 지금도 저렇게나 여유로운데.

 

“풍선이 안 터지면?”

 

내 말이 정국이는 코를 한 번 찡긋이더니, 여전히 개구진 얼굴로 웃으며 대꾸했다.

 

“형, 안 터지는 풍선이 어딨어요?”

“그, 내가… 이제, 안 터지게 노력하면….”

“그런 건 없어요.”

 

풍선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덤 앤 더머 같은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정국이는 내 손에 잡힌 제 옷자락을 빼내더니, 우리가 무슨 얘길 했냐는 듯 암시롱도 않은 얼굴로 애니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고새 볼륨을 키운 모양인지, 이런저런 대사와 효과음들이 에어팟을 뚫고 새어 나왔다. 아리송한 말로 뭔 말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보는 건 순정 만화라니. 그 순정 만화 같이 찍어줄 사람이 여기 있는데 말이다.






“…모르겠어.”

“그럼 다시 뽀뽀해.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땐 나랑 키스해. 내 진심이 느껴질 때까지 해줄게.”

“만약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요?”

“그럴 일 없어. 너도 나 좋아하니까.”

 

탁. 두 배우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박지민이 스페이스 바를 눌러버렸다. 아아, 누가 봐도 키스할 타이밍인데! 귀한 장면을 놓쳤다는 생각에 눈을 흘기자, 박지민은 그게 아니라며 두 번째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신이시여, 이 멍청한 중생을 용서하소서.’ 기독교와 불교가 반반 짬뽕된 이상한 멘트를 하며,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내 죄가 먼데?”

“멍청한 거.”

 

야, 이 새끼야! 소리를 빽 지르자, 박지민은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녀석은 침대에 바짝 엎드리며, 한쪽 팔을 접어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날 빠안-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을 해.”

“이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어?”

“느끼는 거?”

“연상의 고백엔 저런 박력이 있어야지. 아휴 이 멍청한 새끼야.”

“한 번만 더 멍청하다고 하면 죽인다.”

“…전정국이 남자 좋아하는 건 확실한 거지?”

“웅.”

 

정국이가 미성년자이고 나는 지금과 조금도 다를 거 없이, 한결같이 술을 못 마시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대뜸 술이 먹어보고 싶다 길래, 기왕 마시는 거 어른 흉내 제대로 내자며 빈 숙소에서 연신 소주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에 식도가 다 타버릴 것 같다며 호들갑 떠는 나와 다르게, 전정국은 묵묵히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너 처음 마시는 거 아니지? 내 물음에 조용히 웃어 보이기만 하더니, 종국엔 그렇다고 실토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무슨 일 있구나 싶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녀석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빈 잔을 채워주는 거였다.

 

“저 헤어졌어요.”

“…….”

“그것도 남자랑.”

 

여기서 내가 놀란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남자랑 사귀었다는 거고, 두 번째는 연애 중이었다는 거. 정확히는 얘가 게이라는 것보다 연애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나랑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대체 언제 했다는 말이지? 주로 집이나 연습실에만 붙어있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눈이 맞아서 연습했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게이는 아니고, 양성애자에요.”

“아 그래?”

“그거나, 그거나 똑같이 싫겠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싫어서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말을 내뱉는 정국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니 그 뭐랄까… 약간 놀라긴 했는데, 너가 게이라는, 아니 양성애자라는 것보다… 이제, 그 연애를 했다는 게 신기해서….”

 

혹여나 상처가 될까 싶어서 횡설수설하며 말하자, 정국이가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떻게 형은 그게 더 신기하냐며 말이다. 한 잔 더 입에 털어 넣는 정국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왜 헤어졌어? 그러자 정국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는 툭 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하고 말했다.

 

“덜 좋아해서요.”

“그 사람이 널?”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어화둥둥 곱게 키운 우리 정국이를 안 좋아 할 수가 있지? 술과 안주가 있는 곳을 피해 바닥을 쾅 내리쳤다. 물론 손 아플까봐 좀 살살 쳤다.

 

“아뇨, 제가요.”

“근데 왜 속상해?”

“애초에 사귀지 않았으면, 헤어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정국이의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 하고 대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친한 형 동생 사이었던지라, 별생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한다고 한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나보다 먼저 정국이와 연애했다는 그놈이 좀 부러운 것 정도? 물론 그렇다고 유치하게 질투하고 그럴 생각은 없다. 그건 연상답지 못하잖아.

그리고 이번엔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심지어 정국이에게 나와 같은 확신이 없다면, 내가 얼마든지 심어줄 수도 있을 만큼 많다. 그러니까 전정국이 그냥 좀, 나만 보고 따라와 주기만 하면 다 될 텐데. 그게 영 되질 않는다.

 

“갑자기 왜?”

“그냥 뭐. 별 이유 있겠어? 아아, 남준이 형이 호석이 형 업고 들어오는 거 싫다고 집에서 먹자더라.”

 

다 같이 모여 술을 먹는 날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술 보다는 콜라 같은 탄산 파였고, 호석이 형은 알코올 쓰레기 중의 알코올 쓰레기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7명 중 벌써 2명이나 못 마시는데 분위기가 제대로 살 리가 없으니까. 거기에다 오늘따라 술이 안 받는 거 같다는 다른 멤버가 합세하는 순간, 그걸로 술자리는 쫑이었다. 술 안 먹는 내가 봐도, 그런 술자리는 분위기가 영 꽝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 같이 술 마시기보단, 술 먹을 줄 아는 멤버끼리 옹기종기 모여 잔을 부딪히는 일이 더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콜라병에 빨대를 꽂고는 쫄래쫄래 따라가긴 했지만.

 

“오늘도 콜라야?”

“아닝. 자몽에 이슬.”

 

역시 어른이라면 가끔 알코올도 섭취해주고 그래야지. 내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한 건데 박지민은 으, 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저 술맛을 모르는 놈.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박지민은 젊은 꼰대 같은 말을 했다. 전에도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장난인 줄도 모르고, 자몽에 이슬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코올 특유의 쓴맛이 적어서 부담감이 없다는 둥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박지민이 어찌나 웃던지. 너 사실 주류 회사 아들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의심과 함께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 제꼈다. 이젠 아닌 걸 알면서, 나 놀린답시고 뻑 하면 저 소리를 했다.

 

“짐나, 꼬집히고 싶어?”

 

손까지 뻗으며 눈을 흘기자, 박지민은 그제야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그래 봤자 문고리를 붙잡고 또 한참을 킥킥거리며 웃었지만. 하여간 저것도 친구라고. 내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박지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불거리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리는 어떻게 해줄까? 아~ 옆자리?”

“아니거든. 끝과 끝으로 앉을 거야.”

 

다 안다는 표정으로 놀리길래 욱해서 말한 건데, 어쩌다 보니 내뱉은 대로 되어버렸다. 이게 다 박지민 때문이야. 이따 자기 전에 베개 뺏어버려야지. 이쪽 끝과 저쪽 끝. 그래도 다행인 건 마주 보고 앉는 자리라 정국이 얼굴이 보인다는 것과 멤버가 7명이라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멤버들끼리 마시는 거라 다행이었지, 사내 회식이었다면 이 정도 거리감은 턱도 없었을 거다. 성득 쌤, 피독 형, 슬로우래빗 형 등등. 회식했다면 참여했을 라인업을 떠올려보니 벌써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접혔다. 나중에 사내 회식하게 되면 눈치고 뭐고, 무조건 정국이 옆에 앉겠다고 우겨야지.

식탁 위엔 온갖 종류의 안주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족발, 닭강정, 과자, 계란찜, 주먹밥 등등. 보나 마나 호석이 형이 멤버들 취향 다 고려한답시고 죄다 주문한 모양이었다. 초인종이 쉴 새 없이 울리게 만든 안주가 어느 정도 도착하자, 석진 형이 냉동실에 잠시 넣어두었던 술을 꺼내왔다. 테이블 정 가운데에 소주, 맥주, 콜라, 그리고 자몽에 이슬이 올라왔다. 헐 내꺼!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술인지라 괜히 마음이 들떴다. 술 취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과 내가 술에 취하는 건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킥킥거리며 두 팔을 뻗자, 병이 아닌 페트병이 내 손아귀에 닿았다.

 

“형 꺼.”

 

콜라를 내민 건 다름 아닌 정국이었다. 응? 하고 되묻자, 정국이는 내밀었던 콜라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형은 콜라니까.”

 

그러면서 예쁘게도 웃었다. 전정국이 쥐고 있는 게 콜라인지, 답도 없는 내 마음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고. 차가운 페트병 하나를 사이에 놓고 어설프게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아닌가? 내 손이나 정국이 손이 뜨거워서 뜨겁게 느껴지는 건지, 정국이 때문에 홧홧해진 마음 때문에 뜨겁다고 착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손가락 몇 개가 맞닿은 게 뭐라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어… 나는 자몽에 이슬 먹을 건데.”

“아 그래요? 여기요.”

 

괜한 말로 멋쩍게 만들었나 싶은 내 걱정과 다르게, 정국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들고 있던 콜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몽에 이슬을 건네며 말했다. 다른 멤버들에겐 안 보이게 나만 보이도록. 입모양으로 말했다

 

‘조금만 마셔요.’

 

7개의 잔은 쉴 새 없이 부딪혔다. 이따금 씩 쉬엄쉬엄 마시는 윤기 형과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호석이 형의 잔이 건배에서 빠지긴 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진 않았다. 무리해서 참여했다가 별꼴을 보여주는 것보다야 몇 배 나았다. 오래 알고 지내는 동안 서로 별꼴 다 봤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두 번 다시 안 보고 싶은 모습들은 있는 거니까. 다들 얼굴에 홍조 하나씩 띄우고 또렷한 눈빛이 점점 게슴츠레해지자, 남준이 형이 슬쩍 말을 꺼냈다.

 

“연애 중이거나 썸 타는 중인 사람 있어?”

 

일종의 정보 공유였다. 지금 누구 만나는 중인지 매니저 형이나 회사에 시시콜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소한 멤버들끼리는 서로 알고 있는 게 낫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남준이 형의 말에 몇몇이 손을 슬쩍 들었다가 내렸다.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으며, 안 보는 척 곁눈질로 정국이를 쳐다봤다. 나초를 집어 먹고 있는 걸로 보아 정국이는 손을 안 든 모양이었다. 하긴 우리가 썸이 아니긴 하지. 좀 전까지 달짝지근하던 술이 왜인지 쌉싸름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정국이를 쳐다본 게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옆에 앉아있던 석진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비어있던 정국이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우리 JK는 뭐 없어?”


그 말에 정국이가 날 흘끔 쳐다보더니, 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 네.”

“맘에 드는 사람이 없는 거야? 아니면 짝사랑 중인 거야?”

“그냥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

 

그 마지막 말에 멤버들이 시선이 모두 정국이에게로 쏠렸다. 아, 박지민만 빼고. 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봤다. 멤버들의 반응이 이럴 줄 몰랐던 건지 정국이는 민망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너나 할 거 없이 마구잡이로 질문을 쏟아내는 형들 틈에서 정국이는 맥주잔에 가득 채워져 있던 소맥을 시원하게 비워냈다.

정국이의 맥주잔이 비워지고, 정국이가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는 동안 내 잔도 두 번이나 비워졌다. 아랫입술을 깨물다, 맞은편에 앉은 지민이와 눈이 마주쳤다. 덩달아 표정을 굳힌 지민이는 몸을 살짝 일으키더니 내게 앞 접시보다 더 가까이 있는 술병을 제 쪽으로 가져갔다. 술을 목구멍에 두 번이나 털어 넘겼건만, 목구멍이 콱 막힌 듯한 느낌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답답함에 연신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호석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막내 뽀뽀는 해봤지?”

“해봤죠. 더한 것도 했는데요 뭐.”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나와 지민이만 못 웃고 있었다.

 

“그럼, JK는 스킨쉽도 싫어?”

“스킨쉽은 괜찮은데, 연애가 싫어요. 그냥… 그래요. 생각 없어요.”

 

잠깐 시선이 스친 정국이의 말은 한없이 단호했다. 이번엔 고백한 것도 아닌데 왜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시선이 스친 거 같은데, 정국이는 마치 나와 눈이 마주친 적 없는 것처럼 굴었다. 넋이 나간 나와 다르게, 포크로 꾹 찌른 닭강정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 먹느라 바빴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아까 전부터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더 세게 물었다. 물고 있는 자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소주잔과 굳게 앙다문 입술이 부딪히지 않았다면, 내가 물고 있는지도 몰랐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정국이가 지금 한 말은… 신곡 가사를 외울 때 빼곤 좀처럼 쓸 일 없는 머리를 삐그덕거리며 굴린 탓인지,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다. 덕분에 엄지손가락으로 움푹 파인 양쪽을 꾹꾹 눌러야 했다.

 

“먼저 들어갈래?”

 

지민이가 물 잔을 가까이 밀어주며 물었다.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어른들 말처럼, 속 대신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잔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단숨에 비워냈다.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나도 모르게 또다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러다 입술에 생채기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좀처럼 가만 냅둘 수가 없었다.

애꿎은 아랫입술만 연신 괴롭히다가 슬쩍 고개를 들자, 올곧은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정국이와 눈이 마주쳤다. 애초에 도둑 고양이 마냥 몰래 곁눈질로 훔쳐보려던 나와 다르게, 정국이는 놀라지도 않고 묵묵히 시선을 맞춰왔다. 내 얼굴을 가만 쳐다보던 정국이는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제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술을 건넬 때처럼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프겠다. 깨물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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