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중편/



상우가 그걸 발견한 건 늦은 오후였다. 그때 상우는 여름의 뙤약볕이 느적느적 낮을 끌고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해변에 편한 차림으로 나와 앉아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의 표면엔 끝없이 물결이 일어 파도가 일렁였다. 하나하나는 어지러우나 멀리서 보기엔 정연한 움직임이었다. 흐름이란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혼란스럽지만 오래 바라보면 규칙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그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상우는 생각했다. 천제를 관찰해서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를 알 수 있고 밀물과 썰물의 때를 알아 현명한 규율을 만들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낮과 밤이 오가는 것을 막을 순 없는 것처럼. 

해안선까지 밀려 나온 파도가 모래톱을 갉작였다. 파도 거품의 끄트머리에 퇴적물이 쌓였다. 바캉스철도 아니고 이곳은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지라 모래사장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가로운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상우가 그만 슬슬 돌아갈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막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자신이 멍하니 바라보던 바다에 어떤 사람이 휘적휘적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작지만 나쁘지 않은 모래사장이 있는 붐비지 않는 해변이라 성수기에는 알음알음 사람들이 제법 찾는 곳이기에 젊은 사람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자체는 이목을 끌만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모습은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적어도 상우의 시선을 잡을 정도는 되었다. 해변에 도착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냥 모래 위에 서서 바다를 구경했고 물에 들어가는 경우엔 수영복 등 바다에 들어가기 적합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온 사람들을 돌아보거나 부르거나 발을 일단 적신 뒤에 물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거나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곳에서 상우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들을 아주 많이 봐왔다. 그러니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어도 그 남자가 어딘가 기묘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직감이었다. 육감이 무언가를 알아봤는데 그게 명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상우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파도에 밀려 휘청거린 순간을 제외하고선 아무런 망설임도 속도의 변화도 없이 일직선으로 바다로 들어간 사람의 형상이 파도에 가려 안 보일 정도가 되자 결국 고민을 멈추고 보고 있던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게가 실리면 푹푹 파이는 무른 펄 같은 모래가 달려가는 상우의 발목을 잡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상우는 그런 것에 잡히기엔 너무 가벼운 동작으로 날래게 모래밭을 달려가며 신발과 옷을 벗어 던졌다. 모래 위에 허물을 남겨둔 채 쏘아진 살처럼 상우가 경계를 넘었다. 맨발이 어둡게 젖은 모래를 밟고 파도가 채 발등을 다 쓸기도 전에 물방울을 튕기며 밀어닥치는 파도에 밀려나지도 않고 해안선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허벅지에 부딪힌 파도에서 물이 확 튀었다. 상우가 빨려 들어가듯 바다로 뛰어들었다. 유난히 높은 파고가 일었다. 바다가 그의 몸을 삼키고 목구멍으로 넘기듯 상우의 모습이 수면 위에서 사라졌다.

곧 수면 위로 나온 상우가 바닷물이 몸을 감싸는 익숙한 부력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바다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우는 어느 정도 깊이까지 들어간 뒤부턴 방향을 잃은 것처럼 자주 망설였고 다급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운인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일렁이는 파도 사이로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입고 있던 옷이 몸에 감겨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으며 물살이 일렁일 때마다 수면 아래로 자꾸만 잠겨 들었다. 상우가 천천히 사람을 발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잠깐 상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수영과는 담쌓은 사람이라는 게 보일 정도였다. 반사적인 허우적거림은 기름에 빠진 가마우지가 검게 엉겨 붙어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앙상한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상우는 그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그렇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망설이다 천천히 헤엄쳐 물에 빠진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제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상우는 훈련된 구조대원이 아니었다. 만약 상우가 이런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물에 빠진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물에 뜨는 튜브 같은 것을 가지고 바다로 들어왔을 테고 물에 빠진 사람에게 자신이 왔으니 안심하라고, 당황하지 말고 자신을 따라 천천히 뭍으로 나가자고 말을 걸었겠지만 상우에겐 지금 이물질이 함부로 떠다니는 바닷물과 자신의 몸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바다에 빠진 사람은 수면 위에 옷자락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잠겨 들었다가 다시 가까스로 물 위에 허우적거리는 손을 내놓고 있었다. 

그가 다시 사라졌다. 상우도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바닷속은 흐리고 깊고 뿌옇고 거리감이 없었다. 그 속에서 뿌리에서 뜯어진 커다란 해초 같은 무언가가 떠 있었다. 바닷속을 떠다니는 이물질은 투과율이 낮아 사람의 형상은 검고 어둡게 보였다. 상우는 몸을 빠짐없이 감싸는 바다의 감각 속에 빠져들어 몸을 움직였다. 상우가 부드럽게 물 속을 가르며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는 이를 향해 다가갔다.

양팔을 겨드랑이 아래에 넣어 발로 물을 차고 허릿심으로 몸 전체를 이용해 물살을 가르려고도 해봤지만 너무 느렸다. 마음은 급하고 힘은 부족했다. 상우는 물먹어 무거운 짐 덩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몸에 한쪽 팔을 걸고 다른 한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 열심히 헤엄쳤다. 악전고투 끝에 겨우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여기까지 끌고 온 남자도 호흡할 수 있게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늦었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으므로 그가 물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었다. 

바닷물이 허리 아래로 내려갈 정도 깊이가 되자 상우의 힘으로는 이동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사지의 무게가 상우를 잡아당겼다. 물에 빠졌다 구명 당한 남자는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허우적거렸고 이는 그를 뭍으로 끌고 올라가려는 상우의 의도를 담은 행위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신 차리세요. 이쪽으로 가야죠!"

"안 돼! 안 돼……. 안 돼요. 이거 놔주세요. 제발……."

상우는 그 순간 남자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바닷물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상우가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남자의 옷을 움켜쥐고 힘껏 뭍을 향해 끌어냈다. 두 사람은 파도가 다리를 잡아채듯 이리저리 당겨대는 곳을 지나 물거품이 발목을 간질이며 모래를 휘젓는 곳까지 겨우 나갈 수 있었다. 계속된 파도에 평평하게 쌓여있던 젖은 모래가 두 사람의 발아래에 치여 흐트러졌다.

"여기까지 나왔으니까 이제 본인 두 발로 걸어요!" 

바다 밖에 나온 몸은 무거웠다. 뭍의 중력이 사지를 잡아당기고 무릎이 모래에 처박혔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의 몸을 마른 모래턱에 집어 던진 상우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는…… 저는 가야 해요. 바다로 가야 한다고요."

 몸에 뚫린 구멍마다 짠물 실컷 마시고 죽을 둥 살 둥 사람을 모래밭까지 끌어내어 기껏 구해줬더니 하는 소리가 이거였다. 상우가 지금 당장 쓰러지기 직전으로 숨을 헐떡이는 사이에도 남자는 머리를 풀고 우는 벤시의 흐느끼는 울음소리처럼 계속해서 바다로 가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지금 옷도 그렇고! 쿨럭,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들어가면 죽어요." 

입으로 말리긴 말리는데 안타깝지만 이제는 상우도 막을 힘이 없었다. 숨이 턱에 찼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쪽도 힘 다 빠져서 다시 가진 못하고 물거품처럼 너저분하게 경계에 쓰러져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가 다시 바다로 뛰어들어도 상우에겐 두 번 구해줄 힘이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의 목숨줄엔 다행인 일이었다. 남자는 해안에 밀려온 해초처럼 널브러져서 뜻 모를 소리를 하다가 소리 내 울기까지 했다. 상우는 좀 똥 밟은 심정이 되었다.

그래도 방금 죽을뻔한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기엔 상우는 좀 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겨우 어찌저찌 달래서 얘기를 걸어보니 바다에 들어간 사람의 이름은 도현으로 어쩌고저쩌고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는 상우도 아는 모 대학교 학생이라고 했다. 도현이 늘어놓는 신상명세를 듣자 하니 아주 무난하고 평탄한 인생이었다. 누가 듣더라도 그렇게 평할만했다. 심지어 최근에 딱히 극적으로 인생이 꼬인 각별한 사건도 없는 것 같았다.

상우가 그래서 어쩌다 바다에 들어갔냐니까 도현이라는 남자는 머리에서 소금기 있는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식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저지른 격한 운동에 상우가 놀란 몸을 진정시키는 시간 내내 도현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별다른 뾰족한 이유는 없었고 그저 '이렇게 해야만 했다'는 똑같은 말의 변주를 중언부언 읊조릴 뿐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좋은 일도 많고…… 인생을 살다 보면 나쁜 일도 있지만, 반드시 좋은 날도 오게 되어있어요. 우린 아직 나이도 젊고 사지도 멀쩡한데 좀 더 살아봐야죠."

도현은 상우의 말에 소처럼 천천히 눈만 껌뻑였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에 맺힌 물기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얘기를 나누는 중에 감정이 진정되어 지금 그의 눈가를 적시는 건 지난 감정의 여운 정도였다.

"그래도 하나뿐인 인생인데 삶을 귀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우의 입을 통해 나온 건 어느 공익광고에서도 안 나올법한 문구였다. 하지만 주먹까지 불끈 쥔 상우는 진지하기만 했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고 일반화된 말인 만큼 누구에게나 쉽게 통용될 것 같은 얘기였지만, 상우의 말을 들은 도현의 인상이 불쾌감으로 찌푸려졌다. 도현은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자살 같은 거 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도현은 진심으로 불쾌해했다. 그런 도현의 반응에 상우는 마음의 짐을 던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파도 끄트머리에서 거품이 하얗게 터지듯 허공을 울렸다.

"그건 다행이네요. 그런데 아무리 죽기 싫어도 그렇게 바다에 들어가면 그쪽은 죽습니다."

도현은 입을 달싹이다가 그냥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는 도현의 얼굴이 뚱했다. 속으론 무어라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으므로 상우는 그가 하는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고 그러므로 다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상우는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는 호흡에 어깨를 천천히 올렸다 내리며 도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뭍으로 끌고 나오면서도 절실히 느꼈듯이, 도현은 키가 무척 커서 얼핏 나이가 어느 정도 있겠구나 착각하기 쉬웠지만 성인이긴 해도 그리 많지는 않은 나이였다. 이렇게 가만히 얼굴을 보니 도현의 나이가 꽤 어린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세파를 겪기엔 아직 너무 보송한 얼굴이었다. 도현은 방금 바다에 빠져 죽을뻔하면서 잔뜩 집어삼킨 물을 그만큼 열심히 토한 걸 참작하자면 굉장히 건강해 보였다. 삶의 수준이 일정 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또한 젊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어렸다. 상우 또한 사회의 기준으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정신을 차렸는지 도현은 주섬주섬 자기 몸을 살피며 주머니를 뒤지고 물 먹어 무거운 옷에서 바닷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이제 바다로 뛰어들 생각은 일단 접은 것 같아 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로 달려가며 벗어 던진 옷과 신발을 찾아 모래 위를 걸었다. 돌아가는 길엔 천천히 걸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져 내내 휘청였다. 


도현의 현재 상황은 상당히 처참했다. 물에 들어가서는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옷이 바닷물에 폭삭 젖었고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도 바닷물에 같이 입수해 그동안의 동행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지갑도 흠뻑 젖어 집어 들자 아래로 물이 주르륵 흘렀다. 도현은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소지품들을 바라보았다.

도현의 가방은 모래밭에 있었다. 내던져둔 가방을 상우가 자기 신발이랑 옷을 주우면서 찾아왔다. 파도가 닿는 곳에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야트막한 모래턱 위에 오도카니 앉은 도현을 본 상우는 꼴이 말이 아니라며 자기 집이 근처니 가자는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그건 너무 민폐 같은데요……."

"폐 될 것도 없어요. 진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거든요. 어디 가려고 해도 물 뚝뚝 떨어트리면서 갈 순 없을 텐데, 소금물 씻고 좀 말리기라도 합시다."

"그래도 좀……."

"일단 가보고 별로다 싶으면 그냥 갈 길 가면 되죠.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도 없는 데다 진짜 바로 앞입니다."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미심쩍었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근처였다. 

도현이 장신이기는 했으나 도현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냥 마당이 다 들여다 보일 만큼 낮은 담장이 상우의 집을 두르고 있었다. 그나마 모래사장과 바로 맞닿은 쪽은 담을 높여두어 해변을 찾은 사람이 안을 보는 걸 조금은 막고 있었지만 체면치레 수준이었다. 도현은 지적에 경계를 긋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실질적인 역할도 없을 것 같은 페인트칠한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안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태풍이라도 오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집이었다. 

마당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다. 깨지거나 하진 앉았지만 미장이의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 좀 울퉁불퉁했다. 낮은 턱으로 구분된 수도에서 상우가 긴 호스가 연결된 수도의 물을 틀어 신발을 헹구어 턱에 기대어 놓고는 호스 끝을 도현에게 건넸다. 도현이 몸에 아무렇게나 휘감긴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상우는 미리 물을 담아둔 대야에서 물바가지로 담수를 퍼 올려 자신의 몸에 끼얹었다. 소금기 있는 물과 모래를 빠르게 씻어낸 상우가 도현의 옷을 받아 물에 담가 주물럭거린 다음 꺼내 꾹 눌러 짰다. 

마당 한쪽에 장대를 세우고 허접하고 낡아 보이는 지붕 배수관에 나일론 끈을 묶어 빨랫줄로 쓰고 있었다. 상우가 거기에 도현의 옷을 널었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현이 생각하기에도 이 옷들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는 요원해 보였다. 다른 옷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우는 도저히 많은 물건이 들어있을 것 같지는 않은 도현의 가방을 흘끗 보더니 건물 쪽을 손짓했다.

"마를 때까지 입고 있을 옷 드릴 테니 들어오세요."

상우는 거기서 혼자 사는 게 확실해 보였다. 딱히 누가 지나가지도 않을 것 같고 쳐다볼 사람도 없었지만 도현은 주택 마당에서 헐벗고 있기가 좀 부끄러워져서 더 사양하지 않고 상우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친절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바위 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다른 건물에 기대어 붙어있는 듯한 모양새로 지어놓은 건물은 방으로 올라가는 턱이 엄청 높고 방문의 세로 길이가 짧아서 도현은 거의 몸을 반으로 접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바닥에 물을 떨어트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한낱 객인 도현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서랍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뒤적이던 상우가 적당한 걸 찾았는지 옷을 꺼내 주었다. 편히 있으라며 상우가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꺼내준 옷을 입고 나니 품이 작진 않았지만 도현에겐 조금 짧기는 했다. 품에 맞게 옷을 입으면 기성복이 원래 약간씩 짧기는 했다. 좋은 집은 아니지만 자기 집처럼 편히 있으라는 말에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하죠."라고 예의상 말했지만 상우의 집은 그 정도 수준도 안 되어 보였다. 상우의 방은 좁지만 깔끔했다. 그뿐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상우가 수돗가에 두었던 도현의 가방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요."

상우가 들어와 앉자 도현은 일면식도 없던 사이에 그 사람의 옷을 입고 방에 단둘이 오도카니 앉아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상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부드럽고 밝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었다.

상우의 설명에 따르자면 상우는 근처 가게에서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보이는 그대로, 많이 버는 건 아니고 정말로 근근이 먹고살 정도. 상우도 도현처럼 여기 사람은 아니고 부모님은 본래 살던 지역에서 따로 잘 지내신다고 했다. 어쩐지 억양이 여기 사람들보단 도현과 비슷하더라니. 예전에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나름 괜찮은 직장에 다녔다. 이름을 들으면 다들 아는 대학도 나왔다.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여기서 살게 된 지는 몇 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도현은 평범하게 보통 사람이 할만한 선택이 아니라고, 상우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도현이 하품을 했다. 상우는 웃으며 조금 전에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진이 빠질 만도 하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상우가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도현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도현은 검푸른 바닷속으로 끝없이 잠겨 들었다.


바로 옆에서 울리는 파도 소리에 꿈에서 벗어나고도 그런 줄 몰랐다. 도현이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밤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환한 달빛이 창문 모양대로 방 안을 훤히 밝혔다. 천천히 주위를 보니 상우는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이부자리 잘 깔고 자고 있었던 걸 보고 그렇게 되는 동안 설핏 깨지도 않았다는 데 황당함을 느꼈다. 하긴 파도치는 바다에서 익숙하지도 않은 악전고투를 했으니 완전히 곯아떨어질 만도 했다.

창밖은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가 뭍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어둠 속에 묻혀 방울 소리같은 파도 소리가 온통 그득했다. 유리창 너머가 온통 바다였다. 달 위를 지나는 구름 그림자를 따라 조용히 속삭이는 바다, 바다, 바다였다.


상우가 아침에 일어나 발견한 건 바다를 보고 있는 도현이었다. 키가 큰데 몸이 얇아서 역광 속에서는 그림자가 가늘어 그대로 줄어들어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소지품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없어서 서늘한 상상이 떠올랐는데 다행히 바로 앞에 멀쩡히 있었다. 상우가 눈을 떴을 때 이부자리는 벌써 정리되어 있었고 사람이 있던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 도현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침부터 바다에 뛰어들겠다든가 하지는 않겠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상우는 슬리퍼를 신고 아직 공기가 달궈지기 전인 오전의 공기를 마시며 도현에게 다가가 옆에 나란히 섰다.

"아침부터 그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합니다." 

"상관없어요. 제가 어떻게 보이든 남의 일에 왜 나서는지 모르겠는데요." 

"저희 집에 온 손님이니 당연한 일이니까 나서는 겁니다. 그리고 손님을 굶기는 건 집주인에게 큰일 아닙니까? 사람들한테 제가 손가락질당한다니까요."

그렇게 황당한 소리를 하며 상우는 반쯤 강제로 도현을 하얀 따개비 같은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식사 준비가 되어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도현은 방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도현이 기다림에 지쳤을 즘에야 아침밥이 차려졌다. 된장국이랑 계란 후라이, 토스트에 땅콩버터가 병째로 옆에 놓여있었다. 좀 괴상한 조합이었다. 이상한 조합은 척 봐도 있는 재료로 할 수 있는 메뉴를 일단 다 해온 느낌이었고 도현은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는 않을 거란 확신을 느꼈다. 

식사를 거르면 안 된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 물론 이건 빵이지만 어쨌든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건 중요하다는 얘기를 늘어놓지만 도현이 보기엔 상우부터가 전혀 그러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설득력은 없었다. 차린 아침을 예의상 먹으며 조심스레 물어보니 상우는 일하는 곳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해결하는데 근무하는 시간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를 했다. 상우가 차려 온 게 라면이 아닌 게 다행인지 아닌지 도현은 의문이었다. 허기가 아니었다면 입에 대기도 꺼려졌을 것 같은 조합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상우는 오늘은 오전에 나가서 점심을 거기서 먹는다며 도현의 끼니를 걱정하더니 집에 있는 건 다 써도 된다고 하고 주위에 싸고 괜찮은 식당을 얘기해주고 심지어 돈까지 주려고 해서 도현이 만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상우는 출근하면서 돈을 협탁 위에 놔두고 나갔다. 도현의 머릿속에 밥 시켜 먹으라고 식탁 위에 지폐 놔두고 나가는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상우가 혈연이나 가족이 아니라는 걸 빼놓는다면.

여기에 계속 있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당연히 있을 거라고 확정하는 태도가 어이없었지만 도현도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없긴 했으니 피장파장이었다. 도현은 협탁 위에 둔 돈을 보고 오지랖도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은 엉망진창이라기보다는 사용을 거의 안 하는 느낌이었다. 어둡고 좁았다. 방금 사용을 했을 텐데도 온기 없이 황량했다. 왜 라면이 아닌가 했는데 봉지라면이 딱 하나 놓인 걸 발견하고 도현의 의문이 풀렸다. 활기차고 명랑하기까지 한 상우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도현은 이 공간이 파란 하늘과 구름 사진으로 만든 직소 퍼즐에 들어 있는 빨간 조각 하나처럼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날 밤 조금 늦은 시간에 상우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 어서오세요." 

방 안에서 자기 물건들이 잘 말랐는지 보고 있던 도현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분명 나갈 때는 도현이 당연히 있을 거라는 식으로 굴었던 상우는 정작 도현이 아직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듯 잠시 멈춰 섰다. 

"제가 돌아오면 도현 씨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떠나려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가려는 것처럼 보였던가? 그래놓고선 당연히 머무를 거라는 식으로 행동했다니 도현은 갑자기 아무도 약속을 하지도 어기지도 않았는데 우롱당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도현이 서둘러 말했다.

"그냥 갈 걸 그랬네요. 아무래도 제가 있으면 불편하실 텐데."

"아닙니다. 그냥 집에 누가 있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불편하게 생각하실 거 없어요."

도현이 보이는 민망함과 후회하는 기색에 상우는 조금 당황한 낯으로 애써 뭘 그러냐고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하며 눈알을 굴려 화젯거리를 찾았다. 문득 배터리까지 다 분리해서 놓아둔 도현의 핸드폰에 시선이 닿았다. 침수된 건 살리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일단은 시도를 해보는 것 같았다.

"핸드폰은 괜찮던가요? 물 들어가서 고장 난 거면 그냥은 안 될 텐데."

"그러게요. 바닷물이 들어가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걱정하는 도현의 안색이 상당히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화제를 돌리는 것엔 성공했다. 도현이 조심히 배터리를 끼우고 핸드폰 전원을 눌러 켜보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먹통이 된 핸드폰에 도현이 알아보기 쉽게 좌절했다. 축 늘어진 도현의 어깨를 보던 상우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연락할 곳 있으면 제 거라도 쓰십쇼. 저는 쓸 일이 없어서……. 아, 여기 있네요."

상우가 친절히 서랍을 뒤져 본인의 핸드폰을 건네었지만 요금이 밀려 발신 정지 상태인 것만 알아낼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 어느 누가 핸드폰을 서랍 안에 넣어놓고 요금이 밀려 발신 정지가 될 때까지 방치를 한단 말인가? 상우는 정말로 그랬다. 도현은 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관리 소홀로 실수로 연체가 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쪽이든 칠칠찮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더군다나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정부 부처에서도 앱을 내놓고 가정통신문도 앱으로 학부모가 확인하게 만드는 정보화 시대에 말이다.

"일하는 곳에서 오는 연락은 어떻게 받는 거예요? 갑자기 시간이 바뀌거나 하면…… 연락을 해야 하잖아요?"

"바로 근처라서 직접 와서 얘기하거든요. 저도 찾아가서 말을 하고요. 참, 저녁은 드셨습니까?"

상우가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시장에 가서 식재료 사 와서 간단히 먹었어요. 부엌을 멋대로 썼네요." 

"부엌이 좀…… 뭐가 없죠? 혼자 살다 보니 잘 해 먹지 않아서 부엌이 좀 방치되어 있었을 겁니다."

상우가 자진해서 실토했지만 도현이 보기엔 정도가 심했다. 냉장고에 언제 넣어놨는지 모를 당근인지 뭔지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여백의 미를 극한으로 보여주었으며 냉동실에는 음식물보단 얼음과 언제 넣어둔 것인지도 모를 비닐뭉치나 아이스팩이 더 많을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냉장하지 않는 식자재도 정말 기본적인 수준만 있었고 자주 쓰거나 손이 닿은 느낌이 아니었다. 도현이 음식물 쓰레기 처리에 관해 물어보다가 시간이 늦어 그냥 자기로 했다. 늦은 시간에 여기서 따로 더 할 것도 없었다.

불 끄고 자리에 누운 뒤 귓가에 파도 소리가 감겨 온 뒤에야 도현은 저녁 내내 바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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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가 있지만 평화로운 분위기의 전연령 현대 판타지 중편 BL 소설일 예정입니다. 지난 번에 쓴 것보다 더 현대문학 같을지 아니면 그것보다는 장르 소설 같아질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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