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유신 의원실 비서관 윤재희의 하루

 


보좌관 (補佐官)

[명사] 상관을 돕는 일을 맡은 직책. 또는 그런 관리.

 

 

윤재희, 만 29세.

소속 차유신 의원실, 직급 6급 비서(관).

담당직무 상임위 정책 및 입법 전반.

5년 전 차유신 의원실 8급 비서(관)으로 보좌진 생활 시작.

 

의원실 내 별명.

측우기.

 

*

 

“윤재희!”

 

날카로운 외침에 귓바퀴가 바짝 섰다. 부족한 수면에 시달리며 키보드를 톡톡거리던 몸이 반사적으로 일으켜졌다. 입에서 커다란 응답이 터졌다.

 

“네, 형님! 들어갑니다.”

 

구둣발이 부리나케 나아갔다. 반쯤 열린 내실 문으로 직행하는 내내 윤재희는 습관이 된 고민을 시작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일까. 어제 퇴근 전 낸 보고서가 잘못됐나, 공청회 일정을 잘못 잡았나, 혹은 오늘 멘 체크무늬 넥타이가 거슬렸나. 큰맘 먹고 개시한 건데.

 

차유신이 윤재희를 부르는 호칭에는 삼단계가 존재했다. 단계별로 차유신의 기분을 유추할 수 있었다.

 

1단계, ‘재희야’. 차유신이 지극히 안정적이며 평온한 상태라는 방증이다. 다만 이런 경우가 드물어 실제 듣는 일이 적었다. 2단계, ‘윤재희’. 조금은 예민하고 날서있지만 어쨌거나 일상적인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차유신의 상태다. 그리고 3단계, ‘윤재희!’는.

 

대단히 불쾌하며 격양된 상태라는 뜻이다.

 

“들어왔습니다, 형님.”

 

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또박또박 말했다. 데스크 의자에 앉아 머리를 쓸어대던 차유신이 얼굴을 보였다. 가늘게 뜬 눈에서 심기불편한 기색이 역력하게 비쳤다. 윤재희의 목이 꼴깍거렸다.

 

“야, 윤재희.”

“네, 형님.”

“지난주 소위 때 내가 한 욕설, 의사과에 얘기해 삭제하라고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이후 즉시 처리했습니다.”

“뭘 처리했는데.”

“‘빌어먹을’ 1회, ‘젠장할’ 1회, ‘지랄하지 마시고’ 1회 각각 처리했습니다.”

“그게 다야?”

“예, 다인 걸로 압니다.”

 

최대한 정연하게 답했다. 차유신의 눈이 굴러갔다. 얼핏 비치는 모니터에서 오늘 오전 뜬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주 국토법안심사소위원회 속기록이 보였다. 속기록은 통상 위원회를 마치고 사흘에서 나흘 가량의 텀을 두고 업로드 된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될 만한 의원 발언 다수가 편집됐다.

 

“왜 그게 다야?!”

 

돌연 바락 하는 음성이 귀를 때렸다. 윤재희가 황급히 등을 곧추세웠다.

 

“어, 그… 정말로 그게 다인데. 왜 그게 다냐고 하시면….”

“‘그러니까 머리가 빠지지’ 이건 왜 안 뺐어?”

 

차유신이 데스크를 탕, 쳤다. 윤재희의 한쪽 눈살이 찌그러졌다. 조금은 벙한 질문이 나왔다.

 

“머리가 빠져… 요? 그게 무슨 말씀….”

“내가 대국민 박재철한테 말했잖아, 그러니까 머리가 빠지지, 라고. 이건 왜 안 지워지고 남겼냐는 얘기야.”

“박재철 의원은 실제로 머리가 벗겨졌으니까요.”

“아니, 내말은.”

 

차유신이 답답하다는 양 개탄했다. 이내 올곧은 속눈썹을 끌어올렸다.

 

“이 속기록이 우리 국민 사이에서 혹여나 논란이 되면 어쩔 거야? 우리나라 탈모인구가 천만이야. 그중에 이 대목 보고 속상해하는 국민이 있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어?”

 

언제부터 상임위가 탈모위원회가 됐냐. 윤재희가 허망한 숨을 삼켰다. 차유신의 집게손가락이 들렸다. 윤재희를 가리킨 그가 부르댔다.

 

“너 내가 이번 한번은 넘어가지만 다음에도 같은 실수하면 가만히 안 둬. 어?”

“시정하겠습니다.”

“넥타이 색깔은 또 왜 그래?”

“이거 형님이 주신 제 생일선물인데요.”

 

차유신의 눈이 까물거렸다. 그랬나, 한 그가 어물쩍 몸을 틀어 모니터를 봤다. 가라는 지시를 받지 않은 발이 오도 가도 못하고 바닥만 비비적거렸다. 다시 집중한 채 속기록을 살피는 차유신을 힐긋대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핸드폰을 꺼내 보좌진들만 있는 메신저 대화창을 클릭했다.

 

[진무원] 오늘 유신이 기분 어때? 나 오전 내내 밖이라 몰라

[한수현] 방금 측우기 들어감

[김운열] 엄청 나빠 보이던데요

[진무원] 추정되는 사유는

[한수현] 측우기가 파악해서 알려줄 예정

[김운열] 재희야 기다릴게♡

 

사람한테 측우기라니. 억울함에 젖은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차유신은 다른 국회의원에 비해 의원실 보좌진들에게 격 없이 구는 편이었다. 개중에서도 초선 때부터 인연을 지킨 진무원과 한수현, 윤재희, 김운열과 각별했는데 또 그중에서도 윤재희에게 유독 거침이 없었다.

 

이유는 추정 가능했다. 진무원은 차유신보다 일곱 살이 많아 일단은 형이고, 한수현은 아무래도 여자인지라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운열은 차유신 국회 공백기에 신인대 의원실에 있다온 전적이 있는데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 해도 의리를 중시하는 차유신 입장에선 못내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윤재희가 차유신에게 있어 가장 편한 비서관이 되었는데, 이걸 눈치 챈 의원실 사람들이 어느 순간 윤재희를 ‘차유신 측우기’로 부르기 시작했다. 윤재희를 대하는 차유신의 태도를 보면 그날 기분을 측정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여기에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정작 윤재희는 수시로 변화하는 차유신의 감정이 어떤 연유에서 온 것인지를 좀처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다는 것이다.

 

윤재희는 남자만으로 구성된 4형제 중 막내였고, 남중남고를 나왔으며, 대학 때 사귄 첫 여자친구가 2년 반의 연애 끝에 사실 본인이 양성애자였다고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군대는 해병대였는데 선임들이 괴롭히다 먼저 지쳤다. 윤재희가 자신이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어? 윤재희!”

 

정오가 넘도록 법률개정안 작업을 하다 늦은 점심시간 들른 국회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익숙한 부름을 들었다. 식판을 든 윤재희의 얼굴이 돌아갔다. 구석에 앉은 유해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점심을 늦게 먹….”

 

괜히 볼멘소리를 하며 나아가던 윤재희가 멎었다. 유해겸의 맞은편에 앉은 장대한 어깨의 남자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윤재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우태원.

 

우태원이 왜 여기서 이 시간에 밥을 먹고 있지?

 

“도서관에서 우리 토론회 했는데 늦게 끝났거든. 너 혼자야? 와서 같이 먹어.”

 

유해겸이 어서 오라는 양 손짓했다. 윤재희가 본능적인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난 그냥 혼자….”

“와서 같이 식사해요, 윤재희 비서관.”

 

묵직한 목소리에 귀가 얼었다. 윤재희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고개를 든 우태원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같이 먹자고 하지?

 

심지어 안 한다고 하면 어디 호수에다 담가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점심을 늦게 먹네.”

 

끝내 자포자기 한 걸음으로 유해겸의 옆자리에 온 윤재희를 보며 우태원이 말했다. 자리에 식판을 둔 윤재희가 어물거렸다.

 

“개정안 작업을 좀 하느라….”

“부동산보유세 조정하는 법안?”

“네, 맞습니다.”

“고생이 많네.”

 

우태원이 끄덕거렸다. 착석한 윤재희가 숟가락을 들었다. 맑은 국물에 푹 넣고 한 모금 삼키는데 좀처럼 목에 넘어가지를 않았다. 윤재희는 직감했다.

 

백 퍼센트 체한다.

 

지옥 불에서 먹어도 이것보단 잘 들어갈 거다.

 

“차 선배는 별일 없고?”

 

결국 새모이 만큼만 깨작거리는 윤재희에 대고 우태원이 또 물었다. 눈치를 본 윤재희가 답했다.

 

“그냥, 뭐… 평소와 같습니다.”

“아침에 혹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아침….”

미적미적 움직이던 윤재희가 입술이 멎었다. 눈망울이 스르르 굴러갔다. 아침, 썩 좋지 않았다. 애초에 차유신이 오전부터 기분이 좋은 일이 드물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심하긴 했지.

 

“다소 저기압이신 것 같긴 했는데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지?”

 

우태원의 고개가 비뚜름해졌다. 얼떨결에 맞본 윤재희의 턱이 덜컥거렸다. 뚫어져라 내리쬐는 눈발이 흡사 채찍으로 만든 화살 같았다.

 

설마 내 과실로 차유신 기분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나보고 책임지고 의원실 나가는 거지, 지금?

 

“저기, 의원님. 유신 형님 기분저하는 워낙 예측불가의 영역이라. 저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

“그럼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도 예측불가야?”

 

우태원의 눈매가 찌뿌듯해졌다. 미세하게 심각해진 표정에 윤재희의 눈이 덩달아 구겨들었다.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

 

그건 왜 궁금해 하지.

 

“유신 형님 무슨 일 있어요? 뭐, 없는 게 이상한 양반이긴 한데.”

 

혼자서 태평하게 식판을 비워가던 유해겸이 독언했다. 묵묵하게 물을 마신 우태원이 입을 다셨다. 손에 들린 컵이 꺼덕대다 내려갔다. 탁, 소리와 함께 우태원와 윤재희의 눈이 재차 맞았다.

 

“윤재희 비서관.”

“네, 의원님.”

“메신저 아이디 뭐야.”

“네?”

 

윤재희가 얼빠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태원이 고저 없이 말했다.

 

“아니, 그냥 내 거 알려줄 테니 오 분 안으로 방 하나 만들어.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

 

전 없어요.

 

윤재희는 속으로만 절규했다.

 

*

 

[우태원] 차유신 선배 저녁약속 있는지 한번 물어봐.

 

띵. PC 메신저에 새 메시지가 떴다. 망연자실하게 본 윤재희가 목을 젖혔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으로선 죽을 맛이었다. 갑자기 상관이 둘이 된 기분이다.

 

“저기, 형님.”

 

마침 사무실에 들어온 차유신을 보며 운을 뗐다. 재킷을 벗은 차유신이 이쪽을 설봤다.

 

“왜.”

“저녁약속 있으십니까.”

“왜 묻는데.”

“그게….”

 

괜히 머리를 긁적거리며 모니터를 일견했다. 그새 우태원으로부터 추가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우태원] 내가 물었다곤 하지 말고.

 

“물었다고 하지 말래서….”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그러니까. 그… 회식! 우리 방 회식이나 하면 어떨까 해서요.”

 

급하게 얼버무린 소리에 순식간에 의원실이 사늘해졌다. 자리에 앉아있던 진무원과 한수현, 김운열 등 보좌진들이 하나둘 얼굴을 보였다. 살그머니 그들을 둘러본 윤재희가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헐떡이는 숨을 쏟은 한수현이 상체를 낮추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걸 신호탄으로 보좌진 전용 대화방에 불이 붙었다.

 

[김운열] 지금 윤재희 뭔 소리 한 거야?

[한수현] 윤재희 미쳤어? 죽고 싶어? 기어코 나를 살인마로 만드는 거야???

[진무원] 재희야

[한수현] 윤재희 대답해

[한수현] 윤재희 대답해

[한수현] 윤재희 대답해

[한수현] 윤재희 대답해

[진무원] 수현아? 진정해줄래

[김운열] 윤재희 살인동의안에 찬성합니다

[진무원] 죽이진 마라

[진무원] 이따 옥상 데려가서 몰래 패

[한수현] 전기톱이나 드릴을 써도 되나요?

 

“오늘 저녁은 안 돼. 일정 있거든.”

 

딱 떨어지는 대답이 의원실을 울렸다. 곳곳에서 안도의 호흡음이 터졌다. 기사회생한 사람처럼 태식한 한수현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우승을 해도 저것보다는 덜 감격할 것 같았다.

 

[윤재희] 저녁약속 있다고 합니다

 

내실을 향해 걷는 차유신의 등을 보며 탁, 탁, 키보드를 쳤다. 바로 우태원의 메시지가 떴다.

 

[우태원] 누구랑.

 

야 이 새끼야, 그냥 직접 물어보라고. 끝내 윤재희의 어금니가 깨물렸다. 뭐라 욕도 못하고 바들거리다, 막 내실 문을 연 차유신 쪽에 눈을 뒀다. 다급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형님!”

“또 뭐.”

 

조금은 귀찮다는 양 차유신이 돌아봤다. 머무적거린 윤재희가 입을 열었다.

 

“그, 저녁약속은… 누구랑.”

“너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아니, 그냥….”

 

입이 마구 옴지락거렸다. 괜히 허공을 보고 난 뒤, 미적미적 말을 이었다.

 

“편하신 분과 하는 거면… 시간 되는 우리 의원실 사람들도 함께할까 해서요.”

“쿨럭!”

 

몇몇 보좌진 입에서 기침이 터졌다. 하. 짙은 숨을 뿜은 진무원이 눈두덩을 쓸었다. 이윽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뭔가를 적었다. 바로 보좌진 대화방에 새 메시지가 떴다.

 

[진무원] 운열아 전기톱 준비해라

[한수현] 드릴두

 

“너 뭐 하냐?”

 

문득 등 뒤에서 냉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거니 모니터를 향해있던 윤재희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기척도 없이 곁에 온 차유신이 윤재희의 PC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겁한 윤재희가 허둥지둥 화면을 가렸다.

 

“아니, 그… 이거 그냥 우리 보좌진끼리 편, 편하게 대화하는 방…!”

“그거 말고.”

 

다짜고짜 내려온 차유신의 손이 마우스를 쥐었다. 화면 속 커서가 원을 그리며 떠돌다, 구석에 박힌 메신저 창 하나를 끄집어냈다. 윤재희의 안면이 사색이 됐다. 자신과 우태원의 대화방이었다.

 

“하… 이것들이. 나 모르게 내 일정을 공유하려 들어?”

 

차유신이 냉소했다. 윤재희의 시야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캄캄해졌다. 완연히 작색한 차유신을 올려다보다, 뭉그적뭉그적 입술 틈을 만들었다. 애원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이거 동의 안 했어요, 형님.”

 

*

 

“뭐합니까? 거기서.”

 

메신저 창을 본 차유신이 자리를 박차고 향한 곳은 의원회관 5층에 있는 우태원 의원실이었다. 내실까지 들이닥치자마자 우태원의 멱살을 잡은 것과 동시에 안쪽 문이 닫혔고, 이후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알 수 없게 됐다.

 

괜히 걱정돼 따라온 윤재희가 전전긍긍하며 문에다 귀를 붙이고 있자니, 뒤편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최근 우태원 의원실에 온 남자보좌관이었다. 본래 국우일보 정치부 에이스로 불리던 기자 출신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것 아닌지, 걱정이 돼서. 죄송합니다. 남의 영감님 얘기 엿들으려 해서. 하지만 우리 의원님도 같이 계신 상황이라….”

 

윤재희가 급하게 사과했다. 허, 한 보좌관이 낯을 굳혔다.

 

“그걸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로 죄송합니다.”

“방법이 잘못됐잖아.”

 

끌끌거린 그가 정수기를 더듬거렸다. 옆에 붙은 빈 종이컵 하나를 뽑아, 윤재희의 손에 쥐여 줬다. 그가 충고했다.

 

“컵 대고 해야죠. 잘 들리게.”

 

역시 기자 출신. 저도 모르게 윤재희의 엄지손가락이 올라갔다.

 

“…나는 네가 나 몰래 위험한 일을 하려 한 게 정말로 이해가 안 돼. 화가 난 건 바로 그 부분이고.”

 

보좌관 말대로 종이컵을 문에 대니 아까보다 훨씬 잘 들렸다. 안에서 비어진 음성을 확인한 윤재희의 눈이 까막거렸다. 차유신 목소리. 그런데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아니에요, 선배.”

“뭐가 아니야? 나 몰래 대국민당 정형진 만나서 나 저격하려고 프레임 짠 거 들춰내며 그 대거리를 했어. 내 허락도 없이. 잘 해결되긴 했지만, 그러다 네가 위험해지면 어쩌려 했어?”

“저는 위험해져도 돼요. 하지만 선배는 안 되잖아요.”

“그런 게 어디에 있어? 너 또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선배 손은 항상 깨끗해야 해요. 더럽혀지는 거 싫어요.”

 

단호한 우태원의 한마디를 끝으로 내실이 부쩍 고요해졌다. 윤재희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갑자기 조용하지. 한창 싸우고 있던 것 아니었나.

 

쪽, 미미한 접착음에 귓바퀴가 구물거렸다. 윤재희의 눈이 조금조금 커졌다. 멍한 입이 벌어졌다.

 

뭐야, 방금.

 

키스하는 소리 아니지?

 

“그래서 아침부터 그렇게 화가 난 거예요?”

 

같은 소리가 적잖이 반복된 끝에 나른한 우태원의 물음이 들렸다. 약간의 텀을 두고 차유신이 답했다.

 

“어, 조금.”

“하여간 귀여워요.”

“닥쳐.”

“정말로 귀엽네.”

“닥치라고 했어.”

 

말은 험하지만 날이라곤 하나도 서있지 않은 목소리. 의아함에 찬 윤재희의 머리통이 갸웃거렸다. 뭐지, 어떤 연유로 차유신의 기분이 풀린 거지. 하나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이 짧은 우태원과의 대화로 인해, 아침부터 지속된 차유신의 분기가 녹았다.

 

찰칵. 내실 문이 열렸다. 화들짝한 윤재희가 물러섰다. 툭, 종이컵이 떨어졌다. 의원실의 보좌진들이 일제히 얼굴을 들었다.

 

“뭐야. 너 아직도 있었어?”

 

한 발짝 나선 차유신이 희한해하는 표정을 해보였다. 윤재희가 버벅거렸다.

 

“아니, 그… 형님이 걱정돼서.”

“걱정할 게 뭐있어. 의원실이나 들어가 봐. 너 할 일 많잖아.”

“형님은요.”

“난 우태원이랑 대화 좀 더 하다 가려고.”

 

우뚝 선 차유신이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내실 소파에 앉은 우태원이 비쳤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인영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둘을 번갈아 본 윤재희가 눈을 끔벅거렸다.

 

“하지만….”

“가라니까? 좀. 재희야.”

 

차유신이 손을 휘적거렸다. 윤재희의 눈 밑이 움찔했다. ‘재희야’. 명백한 1단계. 갑자기 3단계에서 1단계가 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차유신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꾸벅한 윤재희가 돌아섰다. 입구로 향하는 걸 본 유해겸이 손 인사를 했다. 고생했어. 윤재희가 진 빠진 대꾸를 했다. 그래, 너도 고생이 많다.

 

복도로 나선 뒤 엘리베이터를 향해 쭉 걸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어쩐지 길었던 오늘의 하루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곰곰이 곱씹은 윤재희의 입에서 탄식이 샜다. 힘 있게 감기고 난 눈이 번쩍 뜨였다. 혀를 타고 혼잣말이 너울거렸다.

 

“하… 뭐, 아무튼 오늘도 대충 수습했으니까 됐다.”

 

윤재희는 남자만으로 구성된 4형제 중 막내였고, 남중남고를 나왔으며, 대학 때 사귄 첫 여자친구가 2년 반의 연애 끝에 사실 본인이 양성애자였다고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군대는 해병대였는데 선임들이 괴롭히다 먼저 지쳤다. 윤재희가 자신이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차유신이 가장 편하게 활용하는 의원실 비서관이었다.

 

윤재희라면 차유신이 눈앞에서 우태원과 연애하는 걸 보여도 그게 연애라는 걸 모르고 넘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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