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큐 마이너 합작에 올린 오이카와x야마구치 글입니다! 존잘님들의 다른 좋은 연성들은 아래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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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앉은 야마구치는 이어폰을 두 귀에 꽂은 채 한창 공부에 빠져든 참이었다. 이제 겨우 대학교 1학년.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점 따기 어려워질 테니 긴장 풀지 말고 바싹 공부해두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고 또 들은 참인지라 야마구치는 술을 마시러 놀러 다니지도 않고, 성인이 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데 시간을 쓰지도 않은 채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들릴락 말락 한 낮은 음악 소리는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잠을 깨워주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펼쳐 놓은 전공서적 위로 갑자기 시커먼 무언가가 휙 날아들었다.


"흐아악!"


제 엄지손가락만 한 벌레의 모습에 너무 놀라 팬까지 집어 던지고 몸을 웅크리는데, 벌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어딘가 이상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웬걸, 야마구치가 보고 놀란 것은 벌레가 아니라 종이에 시커먼 팬으로 벌레 모양을 그려 오린 것이었다. 이게 뭐람. 황당한 마음에 눈만 끔뻑이며 그 모습을 보다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휙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오이카와 씨!"

"아하하, 너무 웃겨, 야마구치 군!"


오이카와가 배를 붙잡고 허리를 꺾어가며 웃고 있는 참이었다. 이 정도면 위협이 될까 싶을 만치 눈썹을 구겨보는데 저 이에게는 제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웃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야마구치는 그 어설픈 장난감을 구겨 책상 밑 쓰레기통에 버리고 물었다.


"저 진짜 놀랐단 말이에요."

"그러게 누가 이어폰 들으면서 공부하래? 사람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거 들으면서 하면 공부 안된다?"

"아니, 저는…."

"게다가 우리 야마구치 군은 이렇게 겁이 많아서 어째? 종이를 왜 무서워하는 거야, 대체?"

"아니, 겁이 아니라! 오이카와 씨도 뭐에 집중하고 있는데 눈앞에 뭐가 불쑥…!"

"종이 한 쪼가리에 이렇게 무서워하다니, 오이카와 씨가 지켜줘야겠네?"


겁이 많다는 말에 아니라고 항변하려는데 오이카와가 어깨에 큼직한 손을 올리며 닭살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장난스레 던졌다. 야마구치는 그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 저렇게 말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데. 괜스런 불만만 속으로 외는데 그런 야마구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얄밉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벌이야. 오이카와 씨가 연습경기 보러 오라 했는데."

"그건 제가 못 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과제도 있고, 또…."

"그 과제 2주나 남았다며? 아, 몰라, 됐어. 야마구치 군 탓이야. 오이카와 씨는 야마구치 군한테 무시당한 바람에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커서 오늘 경기도 망쳤답니다."

"네? 졌어요?"

"야마구치 군,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이겼지.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거야. 죄다 망한 기분이었거든."


오이카와의 말에 야마구치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탓이었다. 경기에서 이겼지만 망친 기분이었으니 경기를 망친 거라니, 저게 무슨 개논리람.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하는데 오이카와가 허리를 숙여 야마구치와 눈을 맞췄다. 가까이서 보기엔 너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라 부담스러워 등허리를 뒤로 쑥 빼려는데 어깨를 짚은 큼직한 손에 힘이 들어간다. 꼼짝없이 붙들린 채로 그 잘생긴 얼굴과 눈을 맞췄다. 샤워를 하고 온 것인지 샴푸 향이 코끝에 스쳤다.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이 되어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다음 주 금요일, 오후 3시. S 대학이랑 연습시합."

"…."

"그날 수업 없는 건 이미 알고 있고. 이번에도 바람 맞힐 거야?"

"바람이라니요, 오늘은 오이카와 씨가 일방적으로…."

"아아, 그래서, 또 바람 맞힐 거라고? 오늘은 오이카와 씨가 워낙 대단해서 실망스러운 기분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열심히 했지만 다음 주에는 진짜 슬퍼서 경기를 제대로 못 뛸지도 몰라? 감독님이 뭐라고 하면 야마구치 군 때문이라 말할 거고. 진짜 안 올 거야? 응?"


아니, 그게 어떻게 저 때문인데요. 그렇게 말해야 하나 싶어 입술이 달싹이는데 오이카와가 환한 미소를 짓더니 재차 물었다.


"올 거지?"


얼굴이 이 정도면 반칙이다, 반칙. 이렇게 잘난 얼굴로, 이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말하면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거절을 하라고.




*




별다른 인연 없이 스쳐 지나갔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 입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하면서였다. 행정처리의 문제로 기숙사 신청에서 떨어졌음을 뒤늦게 알아 부랴부랴 구한 쉐어하우스, 그곳에 이미 입주하여 지내면서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하고 있던 이가 바로 오이카와였다. 솔직한 말로 야마구치는 오이카와가 저의 룸메이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른 집을 알아볼까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잠시 보았던 것뿐이지만 그때도 이미 오이카와는 위세가 대단한 남자였다. 게다가 카게야마로부터 들은 소리라는 게 배구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좋은 소리가 없는지라. 하지만 풀옵션 오피스텔에 도쿄에서 비교적 월세가 저렴하여 쉽사리 발을 돌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를 보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야마구치 군! 하고 제 이름을 외치며 동향 사람이라 반가워하는 오이카와가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던 탓에. 그렇게 입주를 결정하여 오이카와와 룸메이트로 지낸 것이 벌써 여섯 달, 이제 2학기를 맞이한 대학생활은 제법 익숙해졌건만, 오이카와 토오루 이 사람은 좀처럼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만 있다 하면 야마구치 군, 야마구치 군, 야마구치 군. 하루에 한 번은 사람 속을 뒤집어놔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는 건지 매번 야마구치를 불러서는 어느 날은 야마구치의 콤플렉스인 주근깨에 대해 집요하게 이야기하기도 했고, 미용실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펌을 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정수리의 삐쭉 솟은 잔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이건 더듬이냐 놀리기도 했으며, 야마구치가 주장으로 있던 시절 아오바죠사이와의 경기에서 카라스노가 졌던 것을 실시간으로 봤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렇게만 했더라면 아, 이 사람 이지메하는구나 생각하고 상대를 않았거나 다른 집을 찾아 들어갔을 텐데, 문제는, 그렇게 야마구치를 놀려 먹으면서도 꼭 야마구치 군, 야마구치 군, 야마구치 군. 야마구치 군, 신입이라 돈도 없을 텐데 오이카와 씨가 냉장고에 채워놨으니 뭐 먹을 때마다 오이카와 씨 생각해야 해? 야마구치 군, 경영학과에 친구가 있어서 귀하디귀한 족보 구해왔는데 시험 잘 보면 오이카와 씨한테 한턱낼 거지? 야마구치 군, 오이카와 씨 경기하는 거 보러 와야 해!


밉살맞게 굴었다가 다정스레 굴었다가.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 야마구치가 만난 사람은 세상에 딱 세 부류뿐이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모르거나 혹은 동네 슈퍼 아줌마처럼 애매하게 아는 사람. 그래서 야마구치는 오이카와가 당황스러웠다. 밉살맞게 굴었다가 다정스레 굴었다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태도를 바꿔대는 게. 이건 도대체 뭔가 싶어 카라스노 단체 채팅방에 고민이랍시고 올렸더니 카게야마는 그 사람 원래 남 골리기를 좋아한다 말했고, 히나타는 역시 대왕님 무서워! 라고 대답했으며, 스가와라는 이 자식 지금 우리 야마구치한테 끼 부리는 거냐 화를 냈다. 그리고 저를 가장 잘 아는 친구인 츠키시마는 뭐랬더라. 야마구치, 잘생겼다고 막 넘어가지 마.


짐짓 농담처럼 보이는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에 뼈가 있음을 야마구치는 잘 알 수 있었다. 츠키시마의 말대로, 야마구치는 잘생긴 얼굴에 약했다. 제 얼굴의 주근깨를 가지고 하도 약을 올려 미워졌다가도 오이카와가 그 잘생긴 얼굴을 들이대며 그래도 야마구치 군은 귀여우니까 하고 한 마디 해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눈 녹듯 스르르 풀어지고는 했다. 말하자면, 좋아졌다는 거다, 그 오이카와가. 야마구치 군 하고 부르며 성가시게 굴고 약을 올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달콤한 다정스러움을 보여주는 그 잘생긴 얼굴에 야마구치는 어느새인가 홀딱, 아주 홀딱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짝사랑이라는 게 이런 것임을 야마구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린애 감정으로 하는 풋내기 사랑이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야마구치의 눈꺼풀에 아예 들러붙어서는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을 감아도 오이카와가, 눈을 떠도 오이카와가 보이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짝사랑의 열병이 심해질 때면 야마구치는 츠키시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야마구치, 잘생겼다고 막 넘어가지 마. 그 메시지 뒤에 츠키시마는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내 한 마디를 덧붙였더랬다. 그런 사람 좋아하면 너만 고생이잖아.


그래, 츠키시마의 말대로, 오이카와는 안될 사람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야마구치와는 정반대의 타입. 주변에 미남미녀가 차고 넘치는 저런 사람 눈에 저가 들 일이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저런 타입과는 설사 잘 된다 해도 백 퍼센트 이쪽이 마음고생일게 뻔했다. 그래서 새 학기에는 거리를 둬보자 했다. 방학을 맞아 본가에 내려갔다 돌아온 뒤에는 부르면 셋 중 한 번은 거절을 해보았다. 같이 밥 먹자거나, 연습경기를 보러 오라거나, 집에 같이 가자는 말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정신을 차려보면 꼭 오이카와 옆이었다. 거절하면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사람 좋게 웃어 보이거나 비 맞고 엄마 잃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두 번 던진 거절 중 한 번은 꼭 실패를 해서.


그래서, 오늘도 거절은 실패하고 말았다.


야마구치는 체육관 2층 명당자리에 앉아 오이카와가 속한 T대와 S대의 연습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연습경기를 보러와라 내내 성화를 부리던 오이카와가 오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으면 경기를 안 해버리겠다 배짱을 부린 탓이었다. 오이카와에 의해 처음 체육관에 들어왔을 때, 무용과 건물처럼 체육관도 체대 학생들만 출입 가능한 줄 알았던 야마구치는 아주 기겁을 했다. 체대생도 아닌데 여기가 어디라고 제가 와요! 하고 말하는데 오이카와가 내놓은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뭐, 어때, 오이카와 씨랑 친하다고 하면 돼지. 아니면 애인이라고 말하던가.


생각해보니 한숨이 절로 나와, 야마구치는 무릎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랬다. 아침부터 사람을 깨워 연습 경기 꼭 보러 와야 한다 약속을 몇 번이나 받아내기에 왜 꼭 저가 가야 하는 거냐 물으니 오이카와는 예의 그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듯 가볍게 대꾸했다. 그야, 야마구치 군이 봐주고 있으면 더 힘이 나니까. 누가 보면 얼굴만큼 말도 예쁘게 하는데 뭐가 문제냐 할지 모를 일이었으나 야마구치 입장에서는 문제였다. 아주 큰 문제. 왜냐하면….


"꺄아!"

"오이카와 선배, 힘내요!"


2층 난간 바로 앞자리,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 몇 명이 들어와 앉아 있다가 꺄악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연습경기를 앞두고 몸을 풀던 오이카와가 어느샌가 2층 난간 앞으로 다가와 여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야마구치가 앉아있는 쪽에 시선이 닿자, 여학생들에게 흔들어주던 손의 방향을 바꿔 야마구치에게도 흔들어주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는데 어느새 뒷모습이 보였다. 짧은 인사를 던지고 냉큼 돌아선 오이카와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가 스트레칭을 하거나 스파이크를 치고 있는 선수들 틈에 섞여들었다. 오이카와 선배 너무 멋있는 거 같아! 선물 가지고 왔는데 경기 끝나고 줄 수 있을까? 오이카와의 인사를 받고 신난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야마구치는 잠시 쭉 폈던 허리를 숙이고 다시 턱을 괴었다. 그래, 정말로 큰 문제였다. 오이카와의 얼굴만큼이나 예쁜 말이, 알듯 모를 듯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다정함이 저만을 향한 것이었다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그가 만인에게 친절한 남자였기에 그의 말과 행동은 야마구치에게 큰 문제였다. 아침에는 야마구치가 있어야 경기를 더 잘할 수 있으며 바람 맞히지 말라 애걸복걸하더니, 막상 경기장에 와서는 여학생들에게 걸쳐 스치듯 인사 한 번 해주고 저렇게 휙 돌아서 버린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한 번은 이 세상천지에 야마구치밖에 없다는 듯 굴다가, 또 한 번은 너랑 나랑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느냐는 듯 쌩하게.


경기가 시작되고, 첫 번째로 서브를 치게 된 오이카와는 그 커다란 키로 마치 날듯이 뛰어올라 공을 내려쳤다. 눈으로 좇을 새도 없이 빠르게 상대편 코트로 날아간 공은 라인 안쪽을 아슬아슬하게 찍고 천장 높이 튕겨 올려졌다. 환호가 튀어나오고, 팀 동료들로부터 박수를 받던 오이카와가 별안간 뒤를 돌아 2층 난간 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멋있어! 여학생들의 감탄이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그 멋있는 얼굴을 보는 야마구치는 심사가 복잡했다. 아침에 야마구치 군이 봐줘야 더 힘이 난다 말했을 때만 해도 좋았는데, 지금은 저 잘생긴 얼굴이 밉다. 사랑이란 게 원래 이런 건지, 두 번째 서브를 성공하고 오이카와도 팀원들도 앞자리의 여학생들도 모두 행복한데, 야마구치의 얼굴만 우울했다.




*




"…야마구치 군, 술 마신 거야?"


밤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온 야마구치는 현관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저에게 묻는 오이카와를 빤히 쳐다보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제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연습 경기 끝나고 함께 집에 돌아가자는 말을 들어놓고도 혼자 체육관을 나서버렸으니 화가 났겠지. 또 야마구치 군이 오이카와 씨를 버리고 갔어! 라며 우는소리를 하려나. 하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기분이 울적해 친구를 끌어내 잘 마시지도 못한 술을 진탕 마신 뒤였다. 술이 올라 눈앞이 핑글, 세상도 핑글거렸다. 야마구치는 비틀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따라 오는 오이카와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금이 몇 시라고 벌써 이렇게 술에 취해? 내 문자도 무시하고, 전화도 다 씹고!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 뭐 하는 거야?"


오이카와의 물음에 야마구치는 옷장에서 옷을 끄집어내던 손을 멈추고 오이카와를 돌아보았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야마구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옷장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 집 나가요."

"…하?"

"나가라구, 아니, 나가려구요."


그렇게 말하고 야마구치는 다시 옷장에 걸린 옷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나간다고 말했지만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계획은 없었다. 단지 어서 오이카와에게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야마구치, 잘생겼다고 막 넘어가지 마. 그런 사람 좋아하면 너만 고생이잖아. 똑똑하고 또 똑똑한 제 친구는 언제나 맞는 말만 했다. 잘생겼다고 넘어가면 안 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내 마음만 고생하니까. 그런데 저는 어쩌자고 저 잘생긴 얼굴에 홀랑 넘어가 이렇게 홀로 마음고생인지. 술에 취한 머리는 논리를 놀라울 정도로 압축하는 능력이 있어, 야마구치는 그렇다면야 저 얼굴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가면 될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가려면 짐을 싸야지 하는 생각에 무작정 옷을 끄집어내는데 손목을 붙자는 손길이 느껴졌다. 왜요, 왜, 또 뭐 하는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선 오이카와의 얼굴이 보였다. 늘상 능글맞게 생글거리던 얼굴이 오늘은 굳어 있었다. 와, 저래도 잘생겼네.


"나가다니, 어딜?"

"나가서 사, 살 거예요."

"…뭐?"

"오이, 오이카와 씨랑 안 사라… 안 살아요."


꼬인 혀로 더듬더듬 대답하며 잡은 손을 뿌리치려는데 오이카와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나랑 안 살겠다고? 갑자기? 왜?"

"갑자기 아니구…. 오이카와 씨랑, 힘들어서…."

"뭐가 힘든데?"

"…."

"뭐가 힘드냐고 묻잖아, 야마구치."


화가 났는지 오이카와의 표정이 금방 매서워졌다. 그런데 그걸 보는데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서운하고 속상한 감정이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아니, 오이카와 씨가 왜 화를 내요, 화내고 싶은 사람은 난데.


"…야마구치, 울어?"

"오이카와 씨가 힘들게 하잖아요!"


코끝이 찡해져 코를 찡긋거리며 야마구치는 그렇게 말했다. 야마구치의 대답에 오이카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이 한 번 터지니 그동안 마음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못생겼다고 놀리고!"

"내가?"

"잔머리 있다고 놀리고!"

"…야마구치 군, 잠깐만. 그건…."

"근데 그렇게 놀려놓고 또 금방 야마구치 군 하고 이름 불러서 같이 밥 먹자, 같이 집에 가자, 경기 보러 와라…."

"…."

"야마구치 군이 봐줘야 경기가 더 잘된다구 그랬으면서…."


술 먹고 울면 진상이랬는데, 달아오른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서러운 눈물은 제 뜻과 달리 멈추지를 않았다. 야마구치는 기어코 오이카와가 잡은 손을 뿌리친 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츳키가 오이카와 씨 같은 사람은 좋아하면 안 되는 거랬어요."

"…."

"나만 마음고생 한다고…."

"…."

"근데 오이카와 씨 얼굴 보면, 또 이름 불러주면, 자꾸 좋아지니까…. 그러니까 이제 오이카와 씨랑 안 살…. 아야, 아허요, 오이카아 시!"


술로 달아오른 양 뺨에 고통이 느껴진다. 오이카와가 꼭 꼬집어 양쪽으로 잡아당긴 탓이었다. 놔달라고 손목을 붙잡았지만,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오이카와는 한참이나 야마구치의 양 볼을 꼬집고서야 손에서 힘을 빼주었다. 얼얼한 아픔에 양 볼을 감싸 쥐고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억울한 건 이쪽이건만 어째 저쪽이 더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야마구치 군은 참 거짓말도 서툴러서 좋아하는 티를 못 숨기지."

"에?"

"이름만 불러주면, 아니 이 오이카와 씨 얼굴만 봐도 헤벌쭉해지고, 눈도 못 맞추고, 발그레해지고, 막. 그렇지?"

"…?"

"아닌 척해도 놀리면 금방 시무룩, 그러다가 눈 마주치면 또 좋아서 금방 헤벌쭉. 그러잖아, 맞지?"

"제, 제가 언제…."

"금방 시무룩해지는 게 귀여워서 좀 놀리긴 했어도 오이카와 씨가 언제 못생겼다 그랬어, 어?"

"그치만 오이카와 씨가 저 주근깨 있다고, 막…!"

"주근깨 있다고 막! 귀엽다 그랬지! 오이카와 씨만 보면 쑥스러워서 이쪽저쪽으로 괜히 고개 돌릴 때마다 위에서 같이 춤추는 머리카락도 귀엽고, 오이카와 씨 배구 하는 거 보면서 반짝거리는 얼굴로 지켜보는 것도 귀엽고. 귀여워서 놀렸기로서니 뭐? 내가 못생겼다고 놀려서 집을 나가시겠다고요, 야마구치 군?"

"…."


이건 또 뭐지. 내가 술을 너무 마시긴 했나. 안 그래도 발아래 땅이 자꾸 울렁거리며 흔들거려 정신이 없는데, 오이카와가 하는 말이 머리에 제대로 입력이 되지를 않았다. 딱 한 가지, 귀여워서. 그 말만 빼고.


"그래, 야마구치 군 마음도 모르고 놀려 먹어서 미안하고, 좋아하는 게 빤히 보여서 언제쯤 우리 야마구치 군이 마음 고백을 해주려나 기다리고 있던 참에 이렇게 고백을 해줘서 고맙긴 한데."


오이카와의 너른 손이 얼굴을 감쌌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야마구치는 어쩔 도리 없이 오이카와와 눈을 맞추어야 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떨리는, 같이 사는 동안 보고 또 보았지만, 여전히 자꾸만 반하게 되는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잘생겨서 가까이서 보는 거 부담스럽다니까요, 참.


"야마구치 군을 좋아하는 오이카와 씨 마음을 이렇게 오해하면 오이카와 씨 아주 슬퍼?"

"…."

"그래서 어떻게, 아직도 나가고 싶어? 오이카와 씨랑 같이 살기 싫어?"

"아, 그, 아니, 그러니까…."

"오이카와 씨는 야마구치 군이 그냥 얌전히 여기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오이카와 씨랑 같이. 이왕이면 앞으로도 쭉."

"…."

"야마구치 군 생각은 어때?"


핑글핑글 돌던 세상도, 발밑에서 울렁거리던 땅도 딱 멈춰 섰다. 차라리 취해주면 좋으련만, 갑자기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든다. 여기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오이카와 씨랑 같이. 이왕이면 앞으로도 쭉. 저가 들은 말을 정리하느라 잠시 멍하니 그 얼굴만 바라보는데 오이카와는 그 새를 못 참겠는지 야마구치의 얼굴을 흔들며 대답을 종용했다. 야마구치 군, 어떡할 거야, 응? 마치 비 맞고 엄마도 잃어버린 강아지같이 처량한 표정으로. 얼굴이 이 정도면 반칙이다, 반칙. 이렇게 잘난 얼굴로 말하면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거절을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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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처음 써보니 캐릭터 잡기가 어렵더라구요ㅠㅠ 부족한 점은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라겠습니다ㅠㅠ 그래도 한 번쯤 오이카와x야마구치 써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를 빌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고생해주신 주최님, 참여해주신 존잘님들께 감사드리며, 합작에 좋은 연성들 많으니 가서 많이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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