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여름 방학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여름 방학 계획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학교가 꽤나 소란스러웠다. 그 무렵 문예창작과 1학년 임창균 군은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다 게시판에서 무언가를 본 이후로는 틈만 나면 그 앞에 가서 시간을 빼앗기곤 했다. 게시판 앞에 서 있는 창균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어느 순간 진지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문창과 임창균 군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전해주기 위해 실용음악과 2학년 채형원 군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느 때와 같이 옥상을 가려던 참에 저 멀리서 동그란 뒤통수가 유독 눈에 들어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채형원 군은 그대로 아무 기척 없이 임창균 군의 뒤로 몰래 다가갔다. 창균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던 터라,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했다. 형원이 창균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 자신의 시선 또한 옮긴다. 게시판에는 어떤 포스터가 하나 붙어있었다.


 ‘청소년 단편 영화제’


그렇다. 임창균은 저 포스터를 처음 발견한 이후 부터는 변덕이 죽 끓듯 반복되었다. 참가한다, 안 한다. 심지어 준섭은 창균이 공책 한 페이지를 조금씩 뜯으며 저런 말만 반복해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단편 영화를 만들겠다던 그 패기 넘치던 임창균은 어디 갔을까. 그 자식 내가 감금시켜놨어. 한숨을 내쉰 창균이 교실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을 때, 그대로 채형원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혔다. 형원이 창균의 어깨를 붙잡고는 눈을 마주쳐온다. 괜찮아? 제 앞에서 안그래도 큰 그 눈망울을 더 크게 뜨며 물어오는 채형원 덕분에 임창균은 갑자기 제 심장이 마구잡이로 스파크를 내뿜어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는 되려 임창균이 채형원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 묻는다.


“형, 나 좀 도와줄래?”

“어떤 거?”


내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줘. 고민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그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연극영화과 2학년 최정미 양의 말을 빌려보자면, 그 대화를 들었을 때 임창균이 채형원에게 청혼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로맨틱한 대사인가. 최정미 양의 두 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 말에 오히려 자리를 벗어난 건 최정미 양이었다. 아무튼 지금 임창균이 꺼낸 말은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었다. 본인이 쓴 시나리오에 채형원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라. 비록 단편영화라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 상상해 본적은 없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배우가 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런 창균의 말에 형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싫으면 거절 해도 돼.”


그렇다고 무턱대고 강요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채형원의 과거는 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배우였지만, 현재 채형원은 배우가 아니거든. 아마 채형원이 거절 의사를 밝히는 순간 임창균은 또 다시 참가한다, 안 한다를 중얼거리며 정신 나간 상태가 지속될 예정이었지만. 딱히 형원에게 부담감을 떠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창균이 형원의 어깨 위로 올린 손에 살포시 힘을 준다. 채형원은 마치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그 커다란 손이 창균의 양손 위로 겹쳐진다. 더 이상 입에 올리기도 아픈 그 잘생긴 얼굴이 창균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다.


 진작 말을 하지.


그 날 이후부터 임창균은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전보다 동아리방에 모습을 비추는 횟수가 급격히 적어졌고, 채형원이 굳이 연락을 해봐도 돌아오는 건 바쁘다는 단답 뿐이었다. 아마 지금 임창균은 제일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20분 이내 분량의 영화라.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아무래도 지금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외주 스태프들을 섭외하는 건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금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제약이 많은 편이었기에 최소한의 것들만 가지고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담아내야만했다. 내용을 구상할 때 쯤의 임창균은 마치 상상의 바닷속에서 월척 하나를 잡아 올리기 전까지는 육지로 절대 돌아오지 않는 그런 노련한 어부의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그 아무도 임창균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제일 먼저 채형원의 얼굴을 떠올린다. 적당히 미성년과 성년 그 경계에 있는 분위기. 보통은 시나리오를 쓰고 그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섭외하는 게 보편적인 단계였지만, 임창균은 채형원에게 시나리오를 맞추기로 했다. 어쩌면 채형원은 본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패였기에.


아무리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해봐도 무언가 떠오르지가 않아 임창균은 채형원을 찾아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는 동아리방에 있었다. 가운데에 위치한 책상에 자리를 잡은 임창균이 채형원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한다.


“가장 좋아하는 게 뭐야?”

“갑자기?”

“아무래도 형한테서 해답을 찾아야겠어.”

“음… 담배?”

“그래. 계속 대답해줘. 그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글쎄. 생각이 안 나네.”

“한 번 더 생각해 봐.”

“아직 안 온 것 같은데.”

“그러면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은 있어?”


채형원은 나름 머리를 쥐어짜 내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임창균은 대충 보고 있던 종이 한가운데에 크게 ‘채형원’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고는 그 주변에 채형원이 대답했던 키워드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담배… 비록 쓸모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씩 모으다 보면 원하던 것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임창균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채형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갔는데,

결국 못 보게 됐어.


그렇게 말을 하는 채형원의 목소리가 나름 무미건조해서, 임창균은 바다라는 단어를 적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잠시동안 고민했다. 바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힘을 주어 적어 내려갔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바다와 채형원. 적당히 비릿한 바다의 냄새가 난다. 채형원과 바다. 창균이 고개를 들어 형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에게는 잔잔한 물결과도 같은 모습이 있었다.


“바다를 못 본 게 후회가 돼?”

“응.”


그럼 같이 보러 가자.






방학이 시작 되었다. 채형원과 임창균은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종종 만나고는 했다. 이민혁은 방학 동안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신나게 여행 계획을 떠들어대던 민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채형원 임창균 이민혁이 속해있는 단톡방은 정확히 민혁의 출국날부터 비행기 타는 시간, 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울려댔다. 민혁이 형은 떨어져 있으면 더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애. / 얘 이거 다 자랑하는 거야. 카톡. 민혁의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민혁이 어제 함께 놀았다던 이탈리아 친구들과의 셀카를 보내왔다. 이 형 이탈리아에서 선거 나갈거래? 형원이 웃는다. 대충 민혁에게 답장을 해주고 그들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사는 많이 안 넣었어.”

“좋네.”

“굳이 대사가 많이 필요 없더라고.”


임창균은 기어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러니까, 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먼지 쌓인 창고에서 중학교 2학년 때쯤 생일 선물로 받았던 카메라를 찾아냈다. 처음 받았을 때에는 항상 손에 들고 다니며 무언가 괜찮아 보이는 풍경들을 찍으며 다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딱히 손이 가지 않아 창고 신세가 되어있었다. 작동은 잘 하네. 사실 고장이 나 있으면 어쩌나 싶긴 했다만 소리를 내며 제대로 작동하니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창균은 대충 창고 정리를 한 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예전에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의 임창균은 생각보다 시시콜콜한 걸 좋아했나보다. 전봇대, 길고양이, 하늘, 거리, 영화 포스터, dvd 케이스 등등. 나름 귀여웠네. 창균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찰칵. 괜히 천장을 한 번 찍어본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갔는데. 결국 못 보게 됐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으로 가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른다.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채형원 혼자만 나오는 영화. 타닥타닥. 타자를 치는 소리만이 방 안 전체를 감싼다.


 나는 바다에서 왔어.


문득 이런 대사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창균은 그렇게 막힘없이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완성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이 머릿속에는 모든 장면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고 있을 때, 채형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왜? / 잘 돼가나 해서. / 안그래도 갑자기 머릿속에 뭐가 막 떠올라. / 다행이네. / 그래도 아직 멀었어. / 다다음 주 화요일에 가기로 한건 잊은 거 아니지? / 응, 아마 그전까지는 완성 될 거야. / 유명해져서 나 아는 척 안 하는 거 아니야? / 뭐래. 완성되면 연락할게. / 쉬엄쉬엄 해. 대충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끝이 났다. 옆을 보니 아까 떠다 놓은 얼음물이 이미 다 녹아버려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음, 머리 좀 식힐까. 그대로 물기가 서린 컵을 들고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한 번 읽어 봐.”


창균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정확히 가리킨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늘 파도의 노래가 들려왔다.

어딘가에 누워 잠에 들면 늘 바다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제야 나는 확신이 들었다. 아, 저 바다가 나를 부르고 있구나.


말 그대로 국어 지문을 읽는 듯했다. 창균이 제 이마를 짚은 채 실실 웃고 있는 형원을 노려본다. 장난 칠래? 채형원은 제 컵에 담긴 콜드브루를 마시며 푸스스 웃었다. 티 났어? 창균은 이번엔 다른 대사를 가리키며 형원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그 무렵, 나는 그대에게 질문을 던질 수가 있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찰나의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좋아. 창균의 만족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형원은 한동안 본인의 대본집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어렵네. 형원이 턱을 괸 채 창균을 빤히 쳐다본다. 어떤 내용이야? 저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어오는 형원에게 창균은 짤막하게나마 시놉시스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김이 서린 물컵으로 살짝 목을 축인 창균이 입을 연다. 어떤 소년이 바다를 보러 가는 내용이야. 그 소년은 자신이 바다에서 왔다고 생각하든. 그런데 그 바다는 그냥 단순한 바다가 아니지. 사실 그 소년의 태초의 기억이었어. 형원은 영화 얘기를 할 때에 꼭 눈빛에 생기가 도는 창균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만 쓰려니까 힘들더라. 제약이 꽤 많아.


귀엽네. 신나서 조잘거리는 임창균의 작은 입을 바라보니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난데없이 혼자 웃어버리는 채형원에 임창균은 의아했다. 왜? / 아니야. / 재미 없어? / 완전 재밌어. 형원은 어느덧 바닥을 보인 음료를 기어코 빨아들인다. 빈 컵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정갈하게도 손목시계가 자리 잡고 있는 임창균의 손목이 눈에 들어온다. 채형원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당긴다. 풀어 봐도 돼? 손목시계를 만지작 거리며 묻는다. 임창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시계를 풀어내자 일전에 봤던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상처들은 여러 갈래로 뻗어있어 잘 빠진 나뭇가지를 연상시키게끔 했다. 형원은 창균의 손목을 받친 채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상처들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형원아, 나는 네가 저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 언젠가 잊고 살았던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파도가 밀려들어 오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신발을 고이 벗어둔 채 지원과 형원은 그 하얀 눈밭과도 같던 모래에 앉아 있었다. 저 멀리 넓게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지원이 나즈막이 말했다. 그 소리는 얼마나 작았던건지, 하마터면 파도 소리와 함께 섞여 그대로 사라질 뻔한 크기였다. 형원이 묻는다. 무슨 뜻이야? 어린 형원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지원은 그런 형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지원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생각 해?”

“별거 아니야. 그냥 뭔가 잊고 있던 게 떠올라서.”


싱겁긴. 창균이 잡혀있던 제 손목을 거두고는 다시 손목시계를 찼다. 아무튼, 내일부터 시간 좀 많이 내줘. 본격적으로 내일부터 촬영에 들어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형원이 창균의 앞에 있던 컵을 가져와 본인의 입으로 가져간다. 나 몸 값 비싼데. / 내가 살게. 형원이 얼음을 씹어 먹으며 웃는다. 아그작. 입안에서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창균은 이전에 미리 봐두었던 장소 몇 곳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테이블을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자, 데려다줄게.






준비는 다 했어?

응, 지금 밖에 나왔어.

나도 다 와 가.


저 멀리서 채형원이 살짝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강원도 동해시. 그 곳이 그들의 목적지였다. 수 많은 바다 중 그 곳을 고르게 된 이유는 순전히 채형원네 집 별장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날 임창균이 바다 여행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그곳에서 촬영 또한 해야 했기에 하루로는 모자랄 것 같아 숙박 할 만한 곳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성수기라 그런가 엄청 비싸네. 임창균은 문득 제 지갑 사정을 떠올리며 보고 있던 곳의 가격을 확인하고는 가차 없이 창을 닫았다. 그렇다고 다 무너져가는 곳에서 잘 수는 없잖아? 벌레가 나오는 곳은 죽어도 싫었다. 채형원은 더욱이 싫어할 것이었다. 임창균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한번 검색을 하기로 한다. 아, 너무 늦었다. 이미 모든 방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나마 찾은 곳들은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쌌다. 이미 성수기인데 이제서야 방을 찾으려는 행동만큼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네.”


어쨌거나 모든 계획을 세운 건 임창균 본인이었고, 채형원은 그저 본인을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굳이 채형원에게 같이 방 좀 찾아보자며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충동적으로 계획한 게 아닐까. 자고로 임창균은 원래 사전에 모든 계획들을 철저히 계획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스타일이었다. 철저한 계획수립형 인간. 허나 이렇게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진행하게 되니 첫 단추부터 꼬이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봐봐.”


채형원은 임창균이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북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방이 다 나갔네. 늦었나 봐… 그제서야 이실직고를 한다. 채형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강릉으로 가려고?”

“그건 아니고. 그냥 이곳저곳 보는 중이야.”

“동해는 별로야?”

“동해도 이미 봤어. 극성수기라서 괜찮은 곳이 하나도 없더라.”

“동해에 안 쓰는 별장있는데. 거기는 어때?”


빛. 빛. 빛. 그저 빛이었다. 하마터면 몸만 간신히 뉘일 수 있는 그런 방에서 머물 뻔했다. 그러니까, 담배 찌든내가 퀘퀘하게 풍겨오고, 벽 곳곳에는 누군가 담배를 지져 끈듯한 자국이 곧이곧대로 남아있는 그런 곳. 유난히 깔끔을 떠는 것만 같아 보이지만, 남들이라고 해서 그런 곳에 누가 머물고 싶겠는가? 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드는 생각에 창균이 제 크로스백 앞끈을 꾸욱 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그들은 현재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동해 얘기가 나왔을 때 채형원이 양 기사님 차를 타고 가자며 먼저 말을 꺼냈지만, 가는 길에 찍어야 하는 씬들이 몇 개 있었기에 굳이 버스를 타고 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대로 여행 분위기 좀 내보자고.


“물 줄까?”


자리를 찾아 착석을 하고 숨 좀 돌리려니 채형원이 방금 전 편의점에서 산 물을 꺼내서 임창균의 눈앞에 흔들어 보인다. 응. 그래도 빵빵하게 나오는 에어컨 덕분에 금세 더위가 가시는 것만 같았다. 채형원은 뚜껑을 열어 임창균에게 물을 건넸다. 형은? 너 먼저 마셔. 그렇게 서로 물을 몇 모금 나눠 마시고는 한동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열기를 가라앉혔다. 그들을 태운 기차는 안내 방송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창균이 무언가 떠오른 듯 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태까지 찍은 거 볼래?


그동안 채형원과 임창균은 나름대로 꽤나 바쁘게 촬영에 임했다. 하루는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찍었고, 또 하루는 번화가에 나가서도 찍었다. 또 언제는 저기 강 앞에서도 찍었고… 그렇게 하나하나 다 나열하면 괜히 뿌듯해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분량은 이미 많이 확보한 상태였다. 임창균은 별장에 도착해서도 틈틈이 편집을 하기 위해 애써 노트북까지 꾸역꾸역 챙겨왔다. 아무래도 오늘 찍을 장면들이 거의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이번 바닷가 촬영까지만 마치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었다. 창균이 어떠한 폴더를 열었다. 그곳에는 이제까지 찍은 씬들이 한곳에 모여있었다. 제일 맨 앞의 파일을 클릭한다. 어느새 채형원은 임창균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노트북 속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트북을 채형원 쪽으로 가까이 밀어주었다.


화면 속 채형원은 한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있었다. 그 곳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밖에서도 채형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턱을 괸 채, 밖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 카메라는 밖에서 그 장면을 담아내고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그저 가만히 앉아 가볍게 다리를 떨고 있는 채형원의 낡은 컨버스가 함께 화면에 걸친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한참을 카메라와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무표정이지만, 멍 때리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눈에 어느 정도 힘이 실려있어야 해. 그렇다고 부담스러우면 또 안 돼. 아마 임창균은 채형원에게 저런 부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딱 원하던 느낌이야. 형은 어때?”

“너무 어색해.”

“어떤 게?”

“내 모습이.”


되게 낯간지럽다. 채형원이 코를 긁적이며 말한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준다 하면 딱히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카메라에 담긴ㅡ정확히는 동영상 속 움직이는ㅡ자신의 모습이 꽤나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불편한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잘 하던데.”

“아무래도 배우의 피가 흐르고 있나 봐.”


대충 칭찬 하나 던져주니 채형원은 그새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방금 건넨 말이 예의상 한 칭찬은 아니었고, 임창균의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니까 채형원은, 자신이 만들어 낸 캐릭터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싶었다. 물론 그 캐릭터 또한 채형원의 여러 모습 중 일부에서 나온 거지만. 둘은 엄연히 달랐다. 결국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건 채형원이었기 때문에.


“이때 먹었던 거 기억나?”

“우리 뭐 먹었더라.”

“쿼터 파운더 치즈.”


문득 임창균은 그 당시 촬영을 끝낸 뒤가 떠올랐다. 아마, 거기서 바로 햄버거를 시켜 먹었던 것 같은데. 둘 다 쿼터 파운더 치즈를 먹었다. 평상시에 햄버거를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오랜만에 먹으니 꽤나 맛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파리에선 쿼터 파운더 치즈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난데없이 임창균이 질문을 한다.


“이름이 달라?”

“로열 위드 치즈.”

“그게 더 맛있어 보인다.”


둘 다 똑같은 건데.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 웃어댔다. 그리고 이내 창균이 다음 영상을 클릭한다. 아, 진짜 보기 힘든데. / 그냥 계속 봐봐. 세상에 모니터링 안 하는 배우가 어딨어? 그렇게 그들은 한동안 촬영 결과물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영상들을 감상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목적지까지는 약 한 시간 가량 밖에 남지 않았다. 채형원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임창균에게 보여준다. 줄이 달린 이어폰이었다. 같이 노래 듣자. 당장이라도 주머니에서 에어팟 프로를 꺼내 들어 보이는 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를 가져놓고선 줄 이어폰을 흔들어 보이고있었다. 그래도 나름 잘 어울리네. 창균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원이 제 손으로 창균의 오른쪽 귀에 이어폰 한 쪽을 꽂아주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에어컨 바람이 뼛 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창균이 미세하게나마 몸을 떨었다.


“추워?”

“응, 살짝.”

“이거 입어.”


채형원은 제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셔츠를 받아든 임창균은 딱히 마다하지 않고 셔츠를 그대로 걸쳤다. 거기엔 아직 채형원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음, 딱 좋네. 형원이 남은 한쪽 이어폰을 자신의 귀에 꽂는다. 어떤 장르 좋아해? / 별로 안 가려. / 의외네. 엄청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형원이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손가락으로 내리며 훑어본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노래 되게 잘 어울린다, 지금이랑.”

“지금이 어떤데?”

“그냥. 그런 게 있어. 머릿속에 막 떠올라.”


임창균은 채형원이 고른 노래가 꽤나 듣기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햇빛이 유독 눈이 부시게 느껴졌다. 엄청 밝네. 형원은 그런 창균을 한 번 쳐다보고는 역시 창밖 풍경을 쳐다 보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무 편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형원은 나름 이런 분위기가 꽤나 좋았다.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던 손에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길래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니 임창균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창균아, 자?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닌 느릿느릿 비틀대는 창균의 몸이었다. 채형원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형원은 조심스레 창균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어놓았다. 귓가에선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 옆에는 임창균이 있었다. 그러니까, 채형원은 나름 이런 분위기를 꽤나 좋아했다.



 



완결이 얼마 안 남았네요

채군과 임군이 기차 안에서 들은 노래는 ‘DPR IAN - No Blueberries’ 입니다

뭔가 들으면서 여름에 바닷가 놀러가는 채군과 임군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구요

시간 나신다면 한 번 들어보시는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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