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평화와 고통이 공존하는 아침이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슬며시 잠에서 깬 것과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포근한 햇살 속에서 맞이한 일요일 오전. 자신을 포근히 덮은 이불이나 맞닿은 따듯한 체온은 분명 이상적인 주말 아침의 풍경이었다. 그런 감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끔찍한 숙취만 없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이대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기엔 너무나 아까운 순간임은 분명했다. 이렇게 늘어지게 늦잠을 자며 맞이하는 아침이 1년에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끔찍한 갈증이 밀려오는 와중에도 오이카와는 꿋꿋이 제 옆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꽉 껴안았다.


“오이카와, 일어났나.”

“조금만 더…….”


역시 상대는 이미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제 얼굴을 감쌌다. 자신보다 조금 더 높은 체온과 맞닿자 이불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사그라졌다. 어차피 물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을 갈증이야 잠깐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을까. 따듯한 체온의 상대를 꽉 껴안고 있자니 두통은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젠장, 어제는 어쩌다 이렇게 마셨지. 분명 처음 술잔을 기울일 때는 이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마지막엔 간신히 집에 들어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우시지마를 보았고…. 그다음은 떠올리지 않아도 아직 저릿한 감각이 남아있는 아래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다.”

“…숙취 때문이야.”


물론 숙취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만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 곱게 잤다면 적어도 지금 몸이 이렇게 늘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군데군데 끊긴 기억 속에서도 어젯밤의 일은 분명 서로의 합의가 있었으므로, 일단 그 부분은 덮어두기로 했다.


“물이라도 마시는 게 나을 것 같다만.”

“으응,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래.”


오이카와의 안색을 살피던 상대가 다시 베개에 눕는 반동이 느껴졌다. 우시지마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오이카와의 응석을 받아주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흔하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서 우시지마에게도 분명 현명한 선택이었다.


조금 더 몸을 파고들자 우시지마가 팔을 벌려 오이카와를 꽉 껴안았다. 성인 남자치고도 체구가 큰 편에 속하는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안길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는 우시지마의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잘 정리된 부드러운 털이 손안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에 비로소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그래, 언젠가는 이런 평화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침이 있었다.


“오이카와, 아침부터 그렇게 만지면 곤란하다.”

“그냥 꼬리 만지는 건데 뭐 어때.”

“내 꼬리를 만지면서 어딜 더듬는지 알아줬으면 좋겠군.”


물론 상대가 이런 행동을 쉽사리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우시지마가 꼬리를 움직여 가볍게 오이카와의 손을 쳐냈다. 어차피 응석 부리는 김에 조금 더 시도해볼까 싶어 다시 손을 뻗는 순간 상대가 제 손목을 낚아챘다. 이윽고 우시지마가 순식간에 오이카와의 위쪽으로 몸을 겹쳤다.


“반대로 내가 이렇게 해도 곤란할 텐데.”


그 말에 반문할 새도 없이 우시지마의 손이 불쑥 오이카와의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갑작스런 자극과 꽉 주이지는 힘에 반사적으로 히익,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닥쳐오는 위기감에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 항복, 항복!”


다행히 우시지마의 손놀림은 오이카와의 외침과 함께 뚝 멈췄다. 상대도 이 이상 강행할 생각은 없는지 멀뚱히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어제 빼두길 잘했지. 뒤늦게 찾아온 안도감에 오이카와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꼬리 좀 만진 것 가지고 너무하네.”

“고작 꼬리만 만졌다면 나도 별 상관은 없었다만.”


아무튼 말 한마디라도 지는 법이 없지. 모처럼 느긋하게 아침을 즐기려던 계획이 파탄 난 덕분에 괜히 우시지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분명 우시지마는 본인 꼬리가 얼마나 좋은 감촉을 가졌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오이카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건지, 홱 꼬리로 손을 쳐버렸던 게 미안했던 건진 몰라도 우시지마 또한 조용히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예민한 아침에 마저 꼬리를 더듬으라며 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깐 고민에 빠졌던 우시지마가 이내 제 머리를 오이카와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이쪽이라면 만져도 괜찮다.”


잠시 그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오이카와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다시 의아하단 눈빛으로 바라보는 우시지마를 보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이 천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지금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쓰다듬어달라는 게 아니라 쓰다듬어도 괜찮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와중에도 이어지는 꿋꿋한 반박에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어쨌든 제가 들이민 머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상대를 꽉 껴안고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자 쫑긋 솟은 삼각형의 귀가 움찔거렸다.


“역시 와카 쨩밖에 없네.”


만족할 정도로 머리카락을 헤집고 귀를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지만 일단 오이카와의 표정이 풀어졌다는 점에서는 참고 넘길 모양이었다.


“근데 지금 몇 시야?”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10시 15분이었다.”

“진짜?!”


이래서야 지금 우시지마를 껴안고 밍기적거리고 있을 틈도 없었다. 맛키랑 같이 점심 먹기로 했는데! 벌떡 몸을 일으키자 다시 두통을 동반한 숙취가 올라오며 머리가 울렸다.


“…죽겠네. 일단 씻어야겠다.”

“오늘도 일이 있나?”

“점심에 맛키랑 약속 있어. 금방 들어올 거야.”


축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이끌고 욕실로 들어섰다. 속옷 하나 걸칠 정신도 없었다니. 어제의 나도 어지간히 인사불성이었나 보구나. 그 와중에 우시지마와의 격렬했던 기억은 남아있는 게 용할 뿐이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사람 몰골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일단 씻자. 우시지마와 하나마키도 구면인 관계로 우시지마를 데려갈까 하다가, 상대가 꽤 급한 일이었던 것 같아 다시 마음을 접었다. 점심 정도는 알아서 챙기겠지. 알음알음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을 본 순간 오이카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윽고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시 욕실 문이 열렸다.


“와카 쨩, 내가 몸에는 흔적 남기지 말랬잖아!”

“최대한 살살 깨물었다. 아예 자국을 남기지 않는 건 너와 치아 구조가 조금 달라서 불가능하다.”

“그럼 깨물질 말아야지!”

“어제는 너도 분명 좋아했다.”

“퍽이나 어제 그 정신에 널 말렸겠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떳떳한지 우시지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이카와의 말을 받아쳤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는 목덜미부터 가슴팍에 이르기까지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남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잇자국들을 포함해서.


“젠장, 이번 생에 장가가기는 틀렸어.”

“근래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반가운 소식이군.”


기어코 넋두리에까지 따라오는 대답에 오이카와가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이 푸념이 마냥 농담은 아니었다. 같이 사는 수인과 이렇게 볼 장을 다 보고 있는데 세상에 어떤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일단 저 눈앞에 있는 녀석을 먼저 장가보내지 않는다면 결코 불가능할 일이었다. 불행히도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보다도 먼저 의사가 없음을 못 박아버렸지만.


“아무튼 한번만 더 이러면 알아서 해!”


할 말을 다 쏘아붙이고 나서야 오이카와가 다시 욕실 문을 쾅 닫고 들어왔다. 차라리 깨문 자국만 남았으면 좋으련만, 여기저기 남은 흔적에 오늘도 꼼짝없이 목을 가려야 할 판국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키스 마크나 손자국 정도는 양호했다. 친한 친구인 만큼 제 사생활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넘어가 줄 테니.


하지만 잇자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누가 봐도 수인이 남긴 게 분명한 흔적을 줄줄이 달고 차마 하나마키를 만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자신이 처음 대형견 수인을 보호하기로 했을 때 도와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린다면 더더욱 그랬다.


‘…맛키한테 걸리는 건 절대 안 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가리고 나가면 괜찮겠지. 괜히 보이지도 않는 우시지마 쪽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야 오이카와가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밥만 먹고 바로 들어올게. 점심은 알아서 챙겨 먹어.”

“알겠다.”


정 심심하면 혼자 운동이라도 다녀오라고 덧붙일까 고민하다, 이내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싶어 오이카와도 마주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 일요일 아침은 꼭 둘이서 로드워크와 운동을 하곤 했다. 어제 회식에서 진탕 술을 퍼마시지 않았거나 오늘 점심 약속만 없었더라면 분명 그럴 터였다.


“…최대한 금방 올 테니까 얼굴 좀 펴.”

“……알겠다.”


때문에 상대의 시무룩한 표정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거울을 통해 한 번 더 옷차림을 꼼꼼하게 확인한 오이카와가 현관으로 나섰다. 신발을 신고 우시지마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상대의 얼굴이 풀어졌다.


“다녀올게.”


하나마키와 단둘이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전에 우시지마의 보호 절차를 밟을 때 너무 질리도록 봤던 탓이었다. 다행히 우시지마도 오랜만의 약속을 따라나설 생각까진 없는 모양인지 순순히 손을 흔들어줬다. 그럼에도 축 처져 있는 꼬리 때문에 역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마저 모를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 씨의 견주일기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이맘때 즈음, 막 실업 리그 선수가 된 지 2년 차가 된 시기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꽤 외로움에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정하자면 그 전까지는 외로움을 느낄 필요조차 없는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가 있었고, 대학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외로움은커녕 조용할 틈조차 없었다.


그렇게 ‘외롭다’라는 생각을 실업 리그에 들어가고 나서야 처음 실감했다. 비로소 소망하던 배구선수가 되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자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시합과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집은 항상 불이 꺼져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빈 공간을 홀로 따듯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고향 혹은 다른 지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야기에서 대학교를 졸업해 회사에 취직한 이와이즈미는 통화할 시간조차 맞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렇다고 가족들과의 연락을 늘리자니 불필요한 걱정만 심어줄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은 싫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처음부터 수인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배구 시즌 중에는 리그에, 오프 시즌에는 소속된 실업 구단의 업무 처리며 훈련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국가대표 배구팀으로 선발되었고, 덕분에 당시에는 애인을 사귀는 것보다 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벌이는 건 정말 질색이다. 그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분야라면 더더욱. 예나 지금이나 그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정확히 그 범위 안에 수인(獸人)이 포함됐다.


수인(獸人), 반은 짐승이고 반은 사람인 존재. 그 반절을 차지하는 종(種)에 따라 특성도 천차만별로 달랐다. 공통적인 특성은 사람의 외형을 하되 자신이 속한 종의 특징적인 신체 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인류에 비해 월등히 빠른 성장 속도를 자랑한다. 쥐나 햄스터 같은 작은 동물의 수인은 태어난 지 2년이 조금 넘으면 성체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 수인은 어린 시절 보호자를 만나 성장기를 보호자와 함께 보낸다는 점에서, 오이카와는 자신을 그 ‘보호자’로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시즌 중에는 리그 때문에 정신이 없고, 오프 시즌에는 훈련이니 합숙이니 일주일씩도 집을 비우는 자신이? 그건 보호가 아니라 방치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 터였다.


‘이번에 너한테 딱 좋을 것 같은 파트너가 있어.’


그런 와중에 우시지마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친구인 하나마키의 공헌이 컸다. 수인 보호 에이전시에서 법무사로 근무하는 하나마키는 오래전부터 이런 오이카와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순종 셰퍼드 수인, 우시지마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대형종 수인의 특성상 인간과 비등한 지능을 가졌고, 성체가 되고 나서야 적합한 보호자를 찾는 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의 수인을.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지금은 우시지마와 너무 잘 지내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그래, 너무 잘 지내서 문제지. 애꿎은 옷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진한 잇자국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하나마키를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휴대폰으로 한 번 더 흔적이 완전히 가려졌음을 확인한 오이카와가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


“맛키!”

“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하나마키가 환하게 웃으며 오이카와를 반겼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미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개진 채였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밀려오는 죄책감에 괜스레 다른 말을 덧붙였다.


“오이카와 씨 얼굴을 TV에서 못 봤단 말이야?”

“TV를 볼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냐?”


그 말이 그저 농담은 아닌 듯 하나마키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요즘이 한창 바쁠 때였던가? 그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웃어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만나러 온 와중에 서류가방까지 챙겨온 거로 보아 이후에도 또 일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점심은 종종 함께 갔던 중국식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오랜만에 고교 동기를 만나 신나게 떠드는 것은 오이카와의 몫이었다. 얼마 전에 끝난 이번 정규 시즌이 어땠고, 다음 국제 시합이 언제고…. 얼마 전에 맛층과 연락했는데 요즘은 이렇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하나마키는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무리 봐도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계산은 내가 할게.”


계속되던 위화감은 하나마키의 그 한마디로 인해 확실해졌다. 바득바득 우겨 계산서를 챙기는 하나마키를 바라보던 오이카와가 끝내 비스듬하게 팔짱을 꼈다. 친구를 만나러 나왔다고 하기에는 피곤함에 찌든 몰골. 내내 다른 곳으로 쏠린 정신. 그리고 이 어색한 친절까지. 계산을 끝낸 하나마키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졌다.


“맛키,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오이카와 씨를 속일 수 있을 리가. 고교 시절부터 함께한 이 친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줄줄 읊을 수도 있었다. 일단 제 고교 동창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차라리 가장 돈을 잘 버는 사람이니 밥이나 한 끼 사라며 등을 떠밀었을 놈들이지.


아니나 다를까 오이카와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하나마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상대 또한 그간의 시간을 모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친구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이카와. 우리 친한 친구 맞지?”

“뭐 그런 아니라고 하면 섭섭할 소리를.”

“그럼 친구가 곤경에 처하면 도와줄 수 있는 거지?”

“……맛키, 무슨 보증이라도 필요해?”


일단 얼마인지 들어보고 생각할게. 장난스럽지만 반쯤은 진담인 그 말에 하나마키가 다시 낮은 한숨을 뱉었다. 다크서클이 만연한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쉬는 친구를 보니 그제야 정말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나마키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줄 의사가 있었다.


“밥은 내가 샀으니까 커피 한 잔 사줘.”


그렇게 말하며 하나마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의아한 표정으로 하나마키를 따라나서긴 했지만, 여전히 무슨 일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이번에 문제가 생긴 대형견 수인이 있어.”

“어쩌다?”

“보호자가 3개월 만에 파양했거든.”


허. 하나마키의 말에 반사적으로 혀를 짧게 찼다. 보호 절차를 밟기부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데, 그걸 3개월 만에 파양하는 사람도 있다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고작 그 정도 책임감이면 처음부터 왜 보호한 거야?”

“모르지. 근데 제일 큰 문제는 그게 아냐.”


하나마키가 이제는 습관처럼 보이는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보는 건지 모를 모습이었다.


“그 수인이 파양당한 게 이번까지 3번째야.”

“뭐?”

“소위 말하는 귀염성이 없다는 거지. 왜, 강아지한테 흔히 기대하는 그런 거 있잖아.”


하나마키가 괜스레 멀쩡한 아메리카노를 휘적거렸다. 그럼에도 얼굴에 가득한 착잡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예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에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사다난한 직장이라고 듣긴 했지만, 하나마키가 직접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은 처음이었다.


“…난 귀염성 있는 대형견 수인 자체가 상상이 안 가는데.”


머릿속에서 짧게 우시지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고작 그런 이유로 파양을 한단 말이야? 애초에 귀염성을 원한다면 강아지 수인이 아니라 강아지를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닌가. 오이카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뭐, 다른 종 수인보다 성장기 개 수인이 애교가 많은 편인 건 사실이야. 그 부분에 대한 선호도도 무시할 수 없고. 그래도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확실히 그러네.”


한 번 겪어도 힘든 일을 세 번씩이나.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사건의 제삼자인 하나마키가 쩔쩔거리며 걱정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대형견 수인을 보호하는 입장으로서 듣고 있는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컸다.


“그래서 일단 우리랑 협약한 보호소에서 임시 보호 중이야. 근데 지금 문제가, 음…. 나이가 좀 애매하거든.”

“몇 살인데?”

“사람 나이로 치면 14살 안팎 정도?”


확실히 어정쩡하네. 일단 그 말은 담아둔 채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하나마키는 제 앞에 있는 컵에 입 한 번 대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도 알겠지만 보통 대형견 수인은 완전히 어릴 때, 아니면 성체가 되고 나서 보호하기를 원하거든.”


예전에 우시지마를 보호하기로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도 같았다. 수인이라고 해도 본인이 가진 종의 특성이 남아있는 만큼, 대형견의 특성상 충성심을 위해 아주 어릴 때부터 보호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보통 그들을 보호하는 목적이 경호인 탓에 더더욱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 있는 성체가 되고 나서 보호하고, 우시지마가 이런 경우에 속했다.


물론 이 이야기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대형견 수인은 따지자면 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마냥 어릴 때부터 보호한다고 충성심이 생기나?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렇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오이카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충성심’이라는 감정을 명명하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대형견 수인에게 충성심이 전혀 없다고 단언하기엔…. 우시지마가 지금 오이카와와 지내며 자신의 혼사조차 거부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음 보호자가 결정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다른 상황보다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상황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아까부터 컵을 꽉 쥐고만 있던 손에 힘이 실렸다. 이제야 오이카와도 슬금슬금 상대가 하려는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너한테 임시 보호를 부탁하고 싶어.”


역시. 하나마키가 이렇게까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쉽지 않은 부탁이라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선 친구의 곤경은 발 벗고 뛰어들고 싶지만, 지금은 또 경우가 달랐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하나마키와 오이카와만의 이야기가 아닌 탓이었다.


“…일단 맛키가 하는 이야기는 잘 알겠어.”


그렇기에 이 일은 확실히 해야만 했다. 단언컨대 자신은 우시지마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수인을 보호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만 내가 왜 우시지마를 보호하기로 했는지 맛키도 잘 알고 있잖아?”

“…물론 그렇지.”

“난 솔직히 직업 특성상 수인을 보호하기엔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집도 자주 비우고, 한 번에 몇 주씩 못 들어갈 때도 있으니까. 당장 다음 달만 해도 국가대표 전지훈련이 있고.”


물론 우시지마는 이야기가 달랐다. 솔직히 오이카와 같은 보호자 없이 혼자 사회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녀석이었으니.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집을 비워도 죄책감은 있을지언정, 그에게 직접 피해가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같은 대형견 수인이라도 나이가 적다면 절대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 나이로는 14살 안팎이라며? 한창 정서적으로 중요할 시기잖아. 그럴 바엔 나처럼 계속 집을 비우는 사람보다야 차라리 보호소가 낫지 않을까? 그쪽에서는 전문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돌봐주는 거잖아.”


혼자 사는 남자가 성장기 수인을 집 안에 내버려 두는 건 이웃 주민으로부터 고소나 당하지 않으면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실제로도 정도에 따라서는 명백히 학대에 속하는 일이었으므로.


물론 지금은 오프 시즌이고, 이럴 때는 상대적으로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시즌이 끝난 직후인 요즘 같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다음 달부터 줄줄이 훈련이며 합숙이 시작될 테고, 그게 끝나면 다시 정규 시즌이 개막한다. 두 명씩이나 되는 수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는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사진이라도 좀 볼래?”

“맛키, 난 지금 사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번만 봐줘.”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그 수인의 얼굴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많은 보호자가 수인을 보호하는 데 있어 외모를 본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적어도 오이카와 토오루가 지금 문제 삼는 부분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하나마키의 제안에 명백히 인상을 찌푸렸음에도, 상대는 꿋꿋이 제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하나마키가 그것을 내미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종이를 받아들였다. 간략하게 적힌 프로필에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바로 옆에는 하나마키가 말했던 사진이 붙어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종(種)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미리 대형견이라는 정보를 받지 않았더라도 분명 그랬을 터였다. 동글동글한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길쭉한 삼각형의 귀가 이상적인 도베르만의 것이었다. 그래, 이상적인 ‘도베르만’의.


“……단이(斷耳)를 했네.”


다시 말해 그건 도베르만 수인이 아닌, 그저 평범한 도베르만의 모습에 불과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베르만은 귀와 꼬리를 잘라낸 모습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냥 대형견이라면 모를까, 수인이 단이(斷耳)나 단미(斷尾)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본인 의사가 아니었다면 불법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장 보호자가 없는 처지에선 고소하기도 쉽지 않아.”


아마도 그게 하나마키가 굳이 자신에게 사진을 보여주려고 했던 이유인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을 본 오이카와의 표정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이건 상대를 사람이 아니라 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절대 불가능할 일이었다.


“다음 보호자는 그 부분에 대한 것까지 고려해서 찾아볼 생각이야.”


하나마키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보호자에 대한 고소까지 감수할 수 있는 새 보호자. 그제야 아까 전 신중하게 보호자를 찾고 싶다는 하나마키의 말을 더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쪽 분야의 외부인인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하나마키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불편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장본인에게도 힘들 터였다. 이윽고 아까보다 확연히 내려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수인은 종에 따라서 발달 정도에 굉장한 차이가 나. 지금 넌 수인을 거의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건 네가 보호하고 있는 수인이 우시지마고, 인간보다 더 월등한 체격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거든, 나는.”


이어지는 하나마키의 설명에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딱히 우시지마가 아니더라도 난 수인은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분명 하나마키가 자신보다 전문가였다.


“물론 대형종 수인의 보호자로서는 바람직한 태도야. 문제는 대부분의 수인은 소형종이라는 거지. 이를테면 토끼 수인이 대형견 수인인 우시지마만큼 똑똑하진 않아.”


토끼라는 구체적인 예시에 어렵지 않게 그 경우를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토끼 수인은 성체가 돼도 사람으로 치면 중학생 정도의 외형에 불과했다. 발달 정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상생활에는 전혀 무리가 없지만, 홀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다. 그게 대부분 수인이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보호소에 있는 수인들도 대부분 소형종이야. 솔직히 대형종 수인의 정서와 지능발달에는 별로 좋지 않아.”

“…….”

“거기에 거듭된 파양으로 굉장히 예민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상태거든. 보호소 생활이 맞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수인들의 발달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야. 대형종은 대형종에 걸맞은 사회생활이 필요해. 유대를 형성할 사람과, 비슷한 종의 수인을 만나볼 필요성이 있어.”


그제야 하나마키가 주변의 많은 사람을 제치고 굳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주변에 잠깐 임시 보호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자신 말고도 많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대형견 수인과 충분한 애착을 쌓은 전적이 있고, 현재도 함께 사는 사람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형견 수인은 선호도가 굉장히 높으니까, 성체가 되기 전에 보호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그 애를 보호소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6개월, 아니, 3개월 만이라도 좋아. 다음 보호자를 찾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어 주면 안 될까?”


그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야기를 여기까지 듣고 나자 거절하고 싶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3개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시즌이 개막하기도 전이고, 잠깐 집을 비워도 우시지마는 있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하나마키와의 우정은 차치하고서라도, 차마 이 이야기를 듣고 모른 척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다. 하나마키 또한 자신이 가장 적임자이기에 이렇게 부탁하는 거겠지. 애초에 상대가 이렇게 절박하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다.


“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형견 수인을 두 명이나 보호하려면 오이카와 씨라도 허리가 휘청거린다고.”

“에이, 이번에 스포츠음료 CF도 찍으신 국가대표 스타 배구선수께서 왜 그러실까.”

“……TV 볼 시간도 없다더니.”


아무래도 이런 부분까지 이미 계산에 넣은 모양이었다. 수인 한 명을 보호해도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한데, 거기다 한 명을 더 추가하라니. 제아무리 오이카와라고 하더라도 같이 사는 가족이 자신 하나뿐인 처지가 아니었다면 정말 휘청거렸을 터였다.


“자, 그럼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서류부터 처리할까?”

“그것까지 준비해왔던 거냐고!”


하나마키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방의 정체를 알게 될 줄이야. 약속이 끝나고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일을 만들 속셈이었구나. 이번에도 결국 보기 좋게 당해버렸다.


“아, 이거 끝나면 오늘 만나러 갈래?”

“뭐, 오늘 당장?”

“이왕 결정한 거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 추진력이 대단한 녀석이었던가? 자신이 알던 하나마키 타카히로가 맞나 싶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보다 싶어 결국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마키의 말마따나, 결정한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얼굴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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