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엷게 날리던 머리통이 결국 좁고 반듯한 책상 위로 고꾸라진다. 적적한 교실 안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갔다. 시간은 남자조차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마왕은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순간을 만족했다.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르는 종이 울리자 교실 안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둘을 제외하고 이제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남자는 카게야마가 당부한대로 외딴성처럼 홀로 남은 그를 바라만보았다. 카게야마가 단호하게 한 말을 거스르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선생님 옆에는 있지마요. 깜짝깜짝 놀라고 방해되니까. 그럼 여기 있을래. 바로 옆에도 앉지 마세요. 제 짝꿍 자리예요. 그럼 내 자리는 어딘데. 교실 제일 뒷 편. 저기 서 있으라고? 네. 마왕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입을 한참 다물고 카게야마와 사물함을 번갈아보던 남자는 결국 한 발 물러섰다. 그 이후로 그는 체육관을 제외하고는 교실에서 카게야마의 뒤통수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화를 냈다. 이제 깨워도 되겠지. 지난 번, 카게야마를 한번도 깨우지 않고 바라만 보자 카게야마는 점심 시간이 지났다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짜증을 내며 허탈한 표정을 짓는 카게야마의 옆에서 그가 체육관에 갈 때까지 눈치를 봐야 했다. 마왕성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토비오쨩.”

“…….”

“토비오쨩.”

“…….”

“토비오.”

마지막으로 부른 세 번째, 장난스럽게 붙이던 호칭을 떼고 세 글자를 속삭이자 카게야마가 뒤척였다. 마왕은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귓가에 소리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바람에 까만 머리결이 흩날리면 드러나는 단단한 이마를, 활 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 풍향을 바꾸면 바로 뒤를 돌아보는 눈을, 어디에서 이름을 불러도 움직이는 귀를 사랑했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한 낮은 미성에 음영진 눈꺼풀이 열리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나자 마왕은 안심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는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보석이었다. 

네가 다시 눈을 감으면, 영원하지 않은 너의 살결 위에 입을 맞춰야지. 네가 눈을 뜨지 못한 후, 나는 내 몸이 굳어지도록 오랫 동안 너를 안고 네 눈꺼풀 위로 입을 맞췄다. 

그러나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카게야마는 마왕의 말을 듣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잔뜩 미간을 구기며 마왕을 노려보았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낮잠을 깨운 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의 모든 게 싫다. 도자기로 빚은 것처럼 매끄러운 남자의 피부도, 자신에게 손 하나 대는 것도 무서워하는 남자의 마른 손가락도, 가시가 돋혔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도. 모든 게 그를 떠올리게 했다. 

“너는 안 가?”

“뭘요.”

꿈에서 오이카와를 보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 이젠 눈앞에도 오이카와가 있다. 조용한 교실의 풍경에 서서히 자각이 든 카게야마는 뿔이 난 오이카와를 보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뿔은 두 명의 오이카와를 구별하는 중요한 단서였다. 그거 있잖아. 너 다른 방 가는 거. 이동 수업. 응, 그거 같아. 아, 왜 안 깨웠어요! 자신을 마왕이라고 소개한 오이카와가 나타난 지 보름 째, 카게야마는 이제 마왕에게도 슬슬 짜증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왠지 남자의 머리 위, 뾰족한 뿔이 서운하게 치솟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카게야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게야마가 복도를 달리는 동안 남자는 태평하게 뒤를 쫓아 걸었다. 오랜만에 달리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그때 숲에서 토끼를 잡던 카게야마의 두팔은 억셌고, 비탈길을 달리던 카게야마의 다리는 튼튼했다.  

음악 시간에 남자는 지루한지 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거나 팔짱을 끼며 비스듬하게 기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귀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바이올린의 고음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아주 괴로워했다. 토비오. 내가 인간들의 학교에 직접 와본 적은 없는데, 로 시작하는 남자의 투덜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이올린을 엉망진창으로 연주하면서 왜 뿌듯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리고 아까 그거 들었어? 첼로가 울고 있더라. 자기를 놔달라고. 음악 선생님은 분명 좋은 오케스트라 영상을 틀어주신 것 같은데 남자의 까다로운 안목에는 충족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수업과 부활동이 모두 끝난 후, 교문을 나선 카게야마는 아까부터 계속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요즘 남자가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어서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배구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는 건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첫 만남 때부터 집에 눌러살겠다던, 뻔뻔했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던 마왕도 입술을 열었다. 남자는 카게야마를 한없이 조심스러워 하다가도 가끔씩은 오랜 시간 맞댄 사람처럼 심술궂게 굴었다.  

“뭐.”
“왜 자꾸 봐요.”
“보기만 하는 것도 안 되냐.”

“네. 안 돼요. 배구해야 하니까.”

“또 그거 타령이네.”

집에 돌아온 남자는 익숙하게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홍차 줘. 여기에 둔 꽃은 어디갔어? 토비오 집은 못생겼어. 이 방도 못생겼어. 네가 못생겼다는 건 아니야. 근데 여기가 좁은 건 너도 인정하지?

“시끄러워요. 여기요.”

카게야마는 물이 펄펄 끓는 전기주전자를 건넸다.

카게야마의 집에 나타난 첫 날, 홍차와 꽃을 찾는 남자에게 그런 건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자 다음 날 카게야마의 집엔 꽃병이 생겼다. 꽃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내가 직접 꺾었어. 주위에서 이런 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네가 눈길을 안 줬나보지. 그래서 안 보인 거야. 어여쁜 꽃을 외면하다니. 바보, 토비오. 넌 바보야. 남자는 고집불통이었다. 그랬던 남자는 꽃병을 바라보며 갑자기 생긴 찻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내가 늘 바라는 건데, 찻잔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이 찻잔으로 며칠 째 계속 마시는지 알고 있어?”

찻잔? 그런 건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대충 부엌으로 끌고 가 찬장 앞에 데려다줄 때까지, 그는 첫날 티룸도 없냐는 듯이 끔찍한 표정을 지었을 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찻잔이 아니야!

“아아, 너는 정말 무심해.”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남자는 꼭…어린왕자에 나오는 장미 같다. 끝없이 어린왕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장미. 아마도 장미는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없어도 충분한 것들을 계속 요구했던 것 같다. 장미가 원하던 유리덮개처럼, 카게야마에게 지금의 찻잔이 그랬다. 찻잔 하나 정도 없어도 오이카와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찻잔이 부족하다는 사실 하나로 카게야마를 몹시 괴롭혔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불러올 참사를 예상하지 못한 채 무턱대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꼭 어린왕자에…”

“뭐? 내가 어린 왕자라고? 난 마왕이야, 토비오. 고작 인간 세상의 왕자라니. 게다가 어린 왕자라고? 내가 그렇게 어려보여? 대체 언제까지 날 모욕할 셈이야.”

“장미 같다고요.”

남자가 쏟아내는 말에 현기증이 난 카게야마는 변명하는 대신 남자가 장미를 닮았다는 것으로 말을 일축했다. 나 장미 좋아하긴 해. 네, 앞으로도 좋아하세요. 카게야마는 꽃병에 매달린 장미 꽃잎 하나를 몰래 떼어냈다. 그 나름의 사소한 복수였다.


카게야마가 저녁을 먹는 동안 마왕은 홍차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없겠지만 최대한 구해라도 볼게요. 식욕이 없는 남자가 안쓰러워 카게야마가 한번 물었을 때 남자는 가볍게 대답했다. 네 입술, 네 살결, 네 숨. 그 뒤로 카게야마는 식사를 하지 않는 남자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너 오늘도 그거 볼 거지?”

“그게 뭔데요?”

남자는 검지를 곧게 펴서 카게야마의 아이패드를 가리켰다. 저녁을 먹고 2층 방에 올라온 뒤, 카게야마는 언제나 배구영상을 보았다. 같이 보면 되잖아요. 오이카와 씨도…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러삼킨 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네.” 

“보지마.”

“이거 안 보면 뭐하는데요?”

“나랑 얘기해.”

“무슨 얘기 할 건데요.”

“…….”

봐. 아무 말도 못하면서. 

뭐가 억울한지 잔뜩 심술과 분함이 서린 남자의 얼굴을 보고 카게야마가 의자에 앉아 패드를 켰다. 내 토스를 받아주기를 해, 나랑 놀아주기를 해.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말이 사라진 남자는 카게야마의 침대 모서리에 앉아 다시 카게야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나 네 뒷모습만 보는 거 싫어.”

“그럼 앞으로 오시던가요.”

“싫어. 네가 방해된다고 안 좋아하니까.”

“잘 알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기다려요.”

“어, 나 기다리는 거 잘해. 내가 몇백 살 같아? 기다림으로 보낸 세월만 오백년이야.”

“…….”


오백년동안 기다렸다는 남자는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카게야마를 불렀다.

“토비오.”

카게야마는 대답하는 대신 남자의 얼굴을 향해 눈을 돌렸다.

“내가 그거 불태우면 화낼 거야?”

“…라이터 있어요?”

남자는 손가락 위로 작은 불꽃을 터트렸다. 이거 불태우면 쫓아낼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카게야마의 말에 남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는 정말 너무해.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손님 대하는 법을 하나도 모르는구나. 손님은 무슨. 불청객이겠지. 심심해서 부리는 투정이 분명했다. 배구는 커녕 이대로라면 스트레칭도 못하겠다. 카게야마는 쉬지 않고 떠드는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궁리를 했다. 패드의 홀드 버튼을 누르고 남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자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마주보았다. 시커먼옷이나 입고 다니고. 저 입에 뭘 넣어야 좀 조용해질까.

“커피 마실래요? 좋아할 것 같아요.”
“커피가 뭔데.”
“까맣고 쓴 거. 그런 게 있어요.”

홍차를 마실 줄 알면서 커피를 모르는 남자. 카게야마는 어린시절 주말 아침이면 부모님이 커피를 마셨던 과거를 떠올렸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어머니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직접 타본 적은 없어서 저도 잘은 몰라요. 대충 원두를 어떻게 갈아서 마셨던 것 같은데…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흐리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원두 앞에서 멈춰 섰다. 아무거나 타줘도 상관 없겠지. 카게야마는 오랫동안 방치했던 그라인더를 꺼냈다.

찻잔에 커피를 담자 남자는 경악했다. 토비오, 이거 독약이지? 날 죽일셈이야? 끔찍하고 잔인해. 하지만 난 독약으로는 죽지 않아. 

“커피라고 했죠.”

마왕은 물끄러미 까만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잘생겼군.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고 머리를 쓸어넘기자 카게야마가 한심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 배구 볼 동안 이거 마시고 있어요.”

카게야마가 다시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마왕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조금 마시고 입안에 머금했다. 과하지 않은 쓴맛 사이로 과일에서 나는 산미가 혀에 퍼졌다. 남자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맛을 음미했다. 


한 시간 뒤, 남자가 올라왔다. 남자는 커피가 마음에 들었는지 침대에 앉거나 엎드려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입은 쉬지 않고 말했다. 커피란 거 말이야, 토비오. 괜찮은 것 같아. 

마왕의 커피 감상문은 둘째 치고, 카게야마는 이제 스트레칭을 해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남자에게 아까 자신이 쓰던 패드를 빌려주었다. 어제 보던 영화 볼래요?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본 남자는 그 다음으로 오만과 편견을 마저 볼 차례였다. 처음 영화를 본 남자는 인간들이 되게 웃기다고 했다. 잔뜩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가 집중해서 영화에 빨려들어갈 듯이 보는 걸 알았기에 바로 추천 목록에 뜨는 비슷해보이는 영화를 눌러 그에게 보여주었다. 난 남자를 좋아하는데 넌 왜 자꾸 여자가 나오는 걸 보여줘? 모르죠. 난 영화에 관심 없어요. 그리고 여기 써있잖아요.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본 카게야마 토비오 님, 이 영화는 어떠세요?’ 얜, 뭔데 네 이름을 알아? 제 아이디라서 그래요. 아이디가 뭔데? 이름 같은 거요. 네 이름은 카게야마 토비오잖아. 

네 살 아이와 대화를 하면 딱 이정도 수준일 것 같았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턱을 괴고 심각하게 영화를 보던 남자는 알려준대로 패드를 한번 터치한 후 이상한 짓을 하는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저게 뭐라더라. 스트레칭? 왜 저런 힘든 짓을 일부러 하는지 모르겠다. 꼭 이와쨩이 토비오 어릴 때 알려준 것 같네. 그럼 난 쟤한테도 활 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하나. 

“토비오.”

“…네.”

카게야마는 조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왜요. 영화 재밌어요?”

“재미없어. 나 커피 또 줘.”

이럴 줄 알았다. 아깐 왜 먹냐고 하더니.

“오이카와 씨, 그러다 잠 못잡니다.”

저는 책임 안 져요. 카게야마는 그냥 커피 타는 법을 배우라며 오이카와를 이끌고 다시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라인더를 꺼내서 여기 안에 원두를 넣어요. 싫어. 커피 먹기 싫어요? 아니. 그럼 해요. 카게야마의 강압적인 말에 마지못해 남자가 원두를 쏟아부었다. 그렇게 많이 넣으면 어떡해요! 넣으라고 했잖아! 남자의 말을 듣고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카게야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다시 남자에게 커피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내일 장 볼 땐 커피 믹스를 꼭 사와야겠다.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남자를 노려보자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튕겼다. 치워주면 되잖아. 순식간에 말끔하게 부엌이 정리되고 남자는 뻔뻔하게 커피를 홀짝 마셨다. 맛은 그닥인가보네. 자신이 직접 탄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자는 인상을 썼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마왕은 밤 열두시가 지나도록 눈을 감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벽을 보며 뒤척이다 다시 책상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평소엔 벽에 기대거나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잤는데, 오늘은 눈을 반짝 빛내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커피를 한 사발 마시니까 그렇지. 카게야마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눈을 마주치면 자지 못하게 못살게 굴 것 같아서 서둘러 눈을 감았더니 남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왕은 한참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지마.”

“왜요.”

“네가 눈 감는 게 싫으니까”

“잠 안 자면 죽어요.”

“그럼 자.”

“안녕히 주무세요.”

“…….”

“왜 나한텐 잘 자라고 안 해요?”

“잘 자.”

남자는 카게야마가 잠에 들 때까지 주위를 서성였다. 자기 전에 몸을 건드리면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에 들었다. 이런 건 똑같네. 작게 중얼거린 마왕은 달빛이 쏟아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무런 미동이 없다. 조금 더 손을 뻗어 볼을 살짝 꼬집자 카게야마는 베개에 더 얼굴을 파묻었다. 살짝 벌어지는 잇새가 귀여웠다. 마왕은 카게야마의 곁에 누워 그를 한품에 끌어안았다. 

밤이 영원하기를. 마왕은 제 곁에 있는 아이가 영영 심장이 뛰는 밤을 바랐다.


*


오늘 그거하는 날이지. 남자는 방 한가운데 놓인 카게야마의 스포츠백과 공을 바라보았다. 그거가 아니라 배구예요. 그럼 배구 안 가, 토비오? 안 가요. 오늘은. 다른 일이 있으니까. 일주일 중에 하루도 배구를 하지 못하면 아깝다고 생각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대신 그는 다갈색 체크무늬 목도리를 둘러매고 부드러운 섬유에 잠시 코를 묻었다. 

“오늘은 따라오지 마세요.”

“싫어.”

“따라오지 마세요. 그냥 누구 좀 보고 올 거예요.”

“알겠어.”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고, 카게야마가 나가자마자 그의 뒤를 쫓았다. 모르는 건지 모른척 해주는 건지 카게야마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직선으로 걸었다. 카게야마는 버스로 갈 거리도 곧잘 걸어다녔다.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가로수길을 걸어가는 카게야마를 보며, 마왕은 떡갈나무의 무성한 잎을 밟지 못한 채 문득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했다. 제자리에 서자 초록빛을 잃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활의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아 남자는 하마터면 카게야마를 놓칠 뻔 했다. 그는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카게야마를 힘겹게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카게야마는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소란스러운 병원의 내부에 눈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무거운 노크 소리가 병실 복도를 울리고, 카게야마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익숙한 듯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흰 환자복을 입고 누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먹을 말아쥐어 허벅지를 문질렀다. 자꾸만 미끄러졌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그를 보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이카와 씨, 저는 언제쯤 당신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지난 날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잘 가동되던 가습기의 전원이 꺼지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요.”

네가 울고 있었으니까. 

마왕은 지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져요. 당신은 당신이고, 오이카와 씨는 오이카와 씨라는 사실이.”

건조한 카게야마의 말이 화살처럼 마왕의 심장에 꽂혔다. 

“나는 다 너야.”

“…….”

“숨을 쉴 때마다 네가 그리워서 나는 견딜 수 없었어.”

마왕의 기억은 인간인 카게야마가 겪은 시간보다 뚜렷했다. 사랑으로 남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늘 제자리에 맴돌았다. 칼로 찢기고 화살에 꽂히는 아픔보다 괴로웠기에, 마왕은 더 이상 마왕성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몇백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면 그리움은 더 깊게 마왕을 덮쳤다. 먼지가 사라진 빈 공간이 생겼으므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샹들리에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왕은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꾸만 그리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므로. 

“네가 보고 싶었다.”

“…….”

“나는 확신하면서 의심했지. 분명 어떤 세상의 너를 보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겠지만, 그게 나의 너는 아닐테니 사랑할 리 없다고.”

남자는 음영진 카게야마의 눈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법처럼 또 너에게 사랑에 빠져버린 나는,”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좋겠니, 토비오.

어느 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내던 마왕은 제 연인을 잃고 백년이 지났을 때, 똑같은 사람을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후회할 거야. 수정구슬을 문지르던 시미즈는 남자를 말렸다. 후회해도 좋아. 그 아이라면 나는 후회하고 싶어. 내 마음을 알아? 모를 거야. 이건 마족이 평생 몰라야 할 감정이었다. 

“그를 사랑해?”

“네.”

카게야마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게 사랑한다고 해.”

“싫어요.”

마왕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싫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를 살리고 사라져줄테니까. 너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

손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아이는 여전히 주먹을 말고 있다. 그러면 너의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행여 깊게 나진 않을까. 토비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그를 살리고 싶으면 거짓이라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해. 카게야마는 남자의 말에 입을 다물고 다시 침실 위에 누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남자는 눈을 감았다. 껌껌하고 괴로운 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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