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랗게 퍼져 가는 한 숨. 짜증 나는 통화를 방금까지 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휴대폰을 던져두고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씩 옮긴다. 분명히 몸에 힘은 넘치는데도 움직이기가 힘들다. 시간이 지날 수록 어깨 위로 쌓여가는 좌절들 때문일까. 좋아서, 그냥, 잘못 알고 같은 전혀 다른 계기로 시작한 모든 것들. 하지만 지금까지 멋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밤하늘에 얽히고설켜 있는, 그물처럼 펼쳐진 별들. 창을 열어 펼쳐진 밤 그물을 눈에 담는다. 코로 들이키는 습하고 무거운 공기. 조금은 찝찝하고 건강하지 않을 것 같은 공기. 하지만 숨을 들이키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오늘 낮 동안 잔뜩 뛰어버린 심장에 연료를 넣어줘야 하니까. 머리를 어지럽히는 오늘 하루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비슷한 날들 중 하나였던 오늘. 평소처럼 친한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고, 수업을 듣고, 식사를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귀찮은 연락을 받는 그런 날들. 하지만 조금 달랐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제와 그제와 같은 그런 비슷한 날들을 평소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아침에 건네받았던 인사도, 수업시간에 졸다 실수로 잡았던 손도, 점심시간 옥상에서 서로 기대 눈을 감을 때도, 하교할 때 노을을 등진 채 작별 인사를 건넬 때도 전부 평소와는 다르게 받아 들였다. 소리치지 않아도 됐던 사람에게 소리쳤고, 나를 걱정해서 전화 한 사람에게 짜증 냈고, 눈앞의 많은 사람들에게 내 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왜 그런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에 맞춰 기분도 변화 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세 글자. 한없이 무거운 세 글자. 이상한 물음을 던진 사람의 세 글자. 그것이 귀를 관통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내 심장이 왜 오늘을 평소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는지 확신 할 수 있었다.

도망치고 싶고, 숨어버리고 싶고, 밀어버리고 싶고, 안아버리고 싶은 그런 기분. 그냥 하염없이 넋을 놓으면서 바라만 보게 되는, 그러다 조금이라도 살결이 닿으면 일부러 다른 곳을 보게 되는 그런 행동.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

 

“음... 있지.”

 

“그럼 누가 널 좋아해 본 적은?”

 

“음... 그건 모르겠어. 남이 날 좋아하는 건 고백을 안 하면 모르잖아.”

 

“아...”

 

“알았어도 별로 신경을 쓰진 않았겠지만.”

 

“왜?”

 

“그냥... 그때는 별로 누구를 사랑하고 싶지도 누구에게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을 때였거든.”

 

“지금은?”

 

“지금? 지금은...”

 

“?”

 

“알아서 뭐하게!”

 

“갑자기 왜 그래!”


“민망해서 그래!”

 

“?”


“...”


“왜 민망한데?”


“그냥... 그런 이야기 하기 껄끄러워...”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반쯤은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 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운동장 위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 멀리 지평선을 가린 건물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던 걸까, 정말 몰라서 태평했던 걸까.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의기소침해져 있었지만, 그는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평소처럼 제 멋대로 굴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죽이고, 찢고,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기 위해서 정말 온갖 생각을 다 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평소처럼 새근새근 잠을 잘 뿐이었다.

오늘을 떠올리며 조금 외로워진 밤. 코끝이 찡해지고 팔이 서늘해지는 그런 밤이 되었기에 나는 담요를 가져와 어깨에 두른다. 나는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 달을 바라본다. 내 몸에 한껏 흡수된 달빛은 온갖 망상들을 머릿속에 만들어 낸다. 그래, 지금이라도 그 사람을 불러내서 모난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

 

 

“...”

 

 

아니, 그러진 말아야겠다. 그냥 평생 오늘처럼 아니, 그전처럼 그와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그가 내 심장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뭔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는 걸까? 그가 먼저 말을 내뱉고,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서 서로의 감정을 잔뜩 내뿜으며 탁하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헤집으며 최선을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그냥 아까 생각한 것처럼 지금 그를 불러내 버릴까.

잊혀 지지 못할 밤이 깊어간다. 노래도, 영화도, 책에도 기대치 않은 채로. 그저 머리에만 의지 한 채 시간을 갉아먹는다.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괴롭지만 가끔 떠오르는 좋은 것들. 함께 있는 모습, 함께 웃는 모습 같은 것들이 허기를 부르고 시간을 좀 더 빠르게 갉아먹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하나 착각하는 게 있다면 그것들 모두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 아닌 평소에 두 사람이 하는 것들이다.





거울 앞에선 난호는 머리를 만지고 있다. 평소처럼 대충 드라이를 하고 가도 되긴 하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준비를 늦게 하는 난호가 아직 자고 있을까 걱정된 순이 난호의 방문을 연다.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난호는 괜히 창피해져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머리에서 손을 뗀다. 딴청을 피우는 난호. 순은 그런 난호가 조금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너무 늦게 내려오지는 말라고 말하고 방문을 닫는 순. 방문 너머로 드라이기 소리가 들려온다.

평소보다 따듯한 햇살이 거리를 수놓고 있다. 슬슬 봄기운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난호는 여름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이번 여름은 전보다 더 싫어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 사귄 아니, 다시 친해진 이도를 방학에도 계속 만날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방학이 되면 무술 수련을 위해 몇 주씩 해외로 나가는 자신과 연습생인 이도가 여름 방학에 과연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난호는 얼굴을 찡그리다 이내 그 생각을 멀리 던져버린다. 여름 방학이 되려면 아직은 꽤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탄 난호. 무언가 이상하다. 오늘따라 버스 안에 사람이 너무 없다. 그냥, 오늘따라 다들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는 걸까?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난호. 어쩌면 자신이 너무 빠른 버스를 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 속 캘린더를 본다. 시간도 날짜도 이상이 없다. 난호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무언가 조금씩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는 난호. 머릿속에 기왕 이상하다면 아예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이상한 하루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흘린다. 당연히 좋은 쪽으로.



 

 

가장 뜨거운 색으로 낮 동안 달아오른 세상을 식히는 중인 노을. 자신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퍼져나가 세상을 진정시킨다. 반장과 함께 먼저 가버린 효진 없이 둘이서 하교 중인 난호와 이도. 오늘따라 기분이 많이 좋은 건지 계속 떠들며 걷는 난호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인 건지 멍한 눈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도.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난호가 멍한 채로 한 참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이도를 부른다. 정신을 차린 이도가 자리에 멈춰 선다. 제법 민망한 듯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미소를 짓는 난호를 이도는 잠시 말없이 바라본다. 갑자기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 이도. 얼마 전과 비교하면 조금 더워진 날씨는 맞지만 그건 한낮이나 오후 일 때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저녁이 코앞인 시간이 손부채질을 할 정도로 더울 리가 없다. 분명 무언가 이도의 심장을 뜨겁게 달군 것이다. 무엇이 이도의 심장을 이렇게 뜨겁게 만든 걸까. 이도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난호는 머뭇거리다 말을 꺼낸다.

 

 

“너 오늘 이상해.”

 

“내가?”

 

“응.”

 

“어디가...?”

 

“그냥, 전부?”

 

“전부?”

 

“응, 평소보다 말이 없어지고, 눈은 자꾸만 멍하게 변하고, 엄청나게 정적이고...”

 

“...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뭔데? 중요한 거야?”

 

“어, 엄청나게 중요한 거.”

 

“나한테는 못 말해줘?”

 

“...”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아마도...”

 

“그럼 내가 말 걸지 말까?”

 

“아니.”

 

“나 오늘 하루 동안 이도 너한테 엄청 방해 됐겠다.”

 

“아니야.”

 

“...?”

 

“그 정도는 아니라고. 네가 방해됐으면 내 성격에 말을 했겠지.”

 

“아, 하긴 그랬었겠다.”

 

“그냥, 좀 깊이 생각하고 싶어서. 왜 그런 날도 있잖아. 생각 하나에 몰두해서 무겁게 살아가는 날.”

 

“무겁게 살아가는 날... 정말 그런가 보네?”

 

“이해가 가? 나도 이해가 안...”

 

“평소의 네가 쓸 것 같지는 않은 말이라서.”

 

“...”

 

“그래서 뭔데! 그냥 나한테 말해. 내가 듣고 답해주고 잊어버릴 테니까!”

 

“... 그래?”

 

“응.”

 

“저녁 뭐 먹어야 될까?”

 

 

무표정한 얼굴로 난호를 향해 물음을 던진 이도. 난호는 잠깐 어이가 없다는 듯 이도를 바라봤지만 곧 눈을 감고, 인상을 찡그린다. 깊이 고민하는 모습의 난호. 이도는 그런 난호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짓는다. 노을이 이도를 따듯하게 비춘다. 난호가 눈을 뜬다.

 

 

“같이 먹을래?”

 

“?”

 

“저녁.”

 

“...”

 

“메뉴가 뭐든 같이 먹어야 좋잖아!”

 

“아니.”

 

“어?”

 

“오늘은 싫어.”

 

“...”

 

“이상하게 굴어서 미안.”

 

“그래, 사과는 받아줄게. 근데, 사람이 기껏 생각해줬더니...”

 

“아, 미안. 진짜 미안.”

 

“너 오늘 진짜, 정말 이상해. 평소에 이도 네가 나보고 이런 기분을 느낀 거야?”

 

“몰라? 너 나랑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확신할 수 있어?”

 

“확신은...”

 

“그럼 조금 다른 기분일걸?”

 

“... 진짜 이상해.”

 

“그냥, 나도 가끔은 이런 날이 있어.”

 

“그래... 뭐...”

 

“그래도 고마워.”

 

“뭐가?”

 

“너한테 거짓말 한 거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가 줬잖아.”

 

“...”

 

“아니야? 모르는 척 하는 거 맞잖아.”

 

“... 이도 너, 아까부터 캐물어주길 원하는 눈치야.”

 

“응, 좀 그런 거 같지?”

 

“근데 말 안 해줄 거잖아.”

 

“응, 안 해줄 거야.”

 

“진짜 이상해. 너 이도 맞아?”

 

 

웃기 시작하는 이도. 난호는 그런 이도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이도의 웃음소리가 섞여간다. 언제 갔는지 난호는 이도보다 한 참 앞선 곳에 있다. 이도가 미안하다고 외치면서 난호를 따라잡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시원하다고 생각될 공기가 이도를 감싼다. 여전히 뜨거운 이도의 심장은 겨우 그 정도로 식을 수 없다. 오히려 차가운 공기가 닿을 때마다 이도의 심장은 더욱 더 불을 뿜어내듯 자신의 온도를 높인다.



“아, 이난호. 미안하다고! 난 웃지도 못하냐?”

 

“뭔가 기분이 나쁘잖아. 너 그 웃음 뒤에서 무슨 생각하는데?”

 

“그건... 말 못하지!”

 

“그럼, 나는 너랑 같이 안 갈래.”

 

“난 네 옆에 있을 건데?”

 

“그래도 너랑 나는 따로 가는 거야.”

 

“난호야, 넌 정말 신기해.”

 

“그러는 너도 이상해, 이난호.”



난호가 자신의 옆에서 발을 맞추는 이도의 어깨를 밀어보지만 이도는 전혀 밀려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난호가 지친 표정을 짓는다. 이도는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계속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버스가 스쳐 지나간다. 난호의 손을 잡고 깍지를 낀 이도. 난호가 자신의 손과 깍지 낀 이도의 손을 바라보다 이도의 얼굴을 바라본다.

 

 

“가자. 버스 놓치기 싫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난호. 이도가 뛰기 시작한다. 그에 맞춰 난호도 뛰기 시작한다. 언젠가 봤었던 모습 같지만 뭔가 조금 바뀐 듯하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고민했었던. 자신이 외면하고 싶었던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린 걸까? 이도의 모습은 한껏 자유롭고 편안하며 뚜렷해 보인다. 참 웃긴 일이다. 난호 때문에 시작한 고민을 난호 덕분에 결론을 내린 것 같은 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언제나 난호 덕분 이었던 것 같다. 이도가 많은 일에 결론을 내리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뛰면서 난호에게 말을 흘리는 이도.

 

 

“넌 꿈을 한 번에 여러 개 꿔도 된다고 생각해?”

 

“뭐라고?”

 

“난 안된다고 생각했어.”

 

“목소리 좀 더 높여 봐.”

 

“아니, 애초에 생각했던 거, 상상했던 거, 그런 거 다 못 이룰 거 같았거든.”

 

“잘 안 들린다고!”

 

“내 인생은 전부 방해꾼들 아니면 안 좋은 결말 또, 그게 아니면 구렁텅이 뿐이었으니까.”

 

“뭐라는 거야!”

 

“근데 꼭 그런 건 아니더라. 생각보다 내 인생에 좋고, 희망찬 것들이 많았더라고.”

 

“???”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뭐?”

 

“아니다. 곧 말해줄게.”

 

“뭘 말해?”

 

“버스 놓치겠다고!”

 

“어, 어!”



?

아마도 다음 주가 '그 찰나에 널 알 수는 없어.'의 마지막 화가 될 것 같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쉬어가는 작품으로 가볍게 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역시 머리를 싸매고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쓰고 그러고 있었네요 ㅎㅎ

독자분들이 좋아하셨으면 해서 그런 거였는데 마음에 드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오타 지적이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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