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데이트계획만짬 




“데이트하고 싶은데.”

무슨 바람이 불었나. 벨벳 소파 위에서 커다란 담요 뭉치를 품에 끌어안고서 상체를 가만 뒤로 젖힌 채인 놈이 지껄이는 말에는 앞뒤 다 잘라먹은 토막이라도 벌써 넌더리가 난다. 헛소리에는 대꾸하지 않는 것이 좋은데. 무심결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 유리 위로 올려두며 하이고야 하는 추임새를 넣자 다자이의 시선이 널찍한 TV 패널에 박혀 있다가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제게로 쏠렸다. 반응했다는 것은 빌어먹을 요구에 응할 의사를 은근하게 내비친 것으로 훗날 벌어질 참극에 관한 책임이 모두 나카하라에게 있다는 의미와 같았기에 한 번 더 허이구야 하는 추임새가 입술에서 샌다. 미친, 젠장. 이루 말할 수 없는 갑갑함에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 올리며 나카하라가 물었다.

“갑자기 개소리야. 어디서 나온 개소리야.”

“갑자기 생각났어. 머리통에서 나온 소리지.” 놈은 대꾸하고 마른 입을 침으로 축이며 헛기침을 얹는다. 

"데려가 줘." 곧바로 놈이 텅 빈 입안을 보이며 소리 없이 지껄였다. 어디를, 하고 묻듯 시선만 슬쩍 내던지니 얇고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시뻘건 극세사 뭉치에서 소리 없이 기어 나와 패널을 가리킨다. 대꾸하지 않는 놈을 시야 한구석에 처박아둔 채 나카하라의 고개가 틀어졌다. 언젯적 물건인지, 회색 조로 이루어진 화상에는 느긋하게 움직이는 관람차나 허연색 불빛을 띄우는 회전목마, 뭘 그렇게나 기다리고 있는지 부스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 따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챙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나폴 나폴 기다란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정장을 쭉 빼입고 촌스러운 나비 타이를 모가지에 단 남성같이 거의 소품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나카하라는 답잖다고 야유하듯 코웃음을 쳤다. 폐허에서 벌거벗고 미친 개새끼처럼 날뛰는 모양새나 어울릴 놈이, 꼴같잖게 데이트다운 데이트라며 주둥이를 놀리는 모양이라니. 고개를 까딱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뚝 끊어내고 무산시킬 수도 있었으나, 기왕 시작한 헛소리 어디까지 가나 들어나 보자 하는 심보였다. 또 다자이의 하얀 거죽이 다시 시뻘건 천 쪼가리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모컨을 쥐어 꺼낸 놈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제 돈인 듯 숨 쉬듯 자연스럽게 결제하는 꼬락서니는 퍽 답다. 그래도 그 모자란 꼬락서니를 나카하라는 묵묵히 용인했다.

"여기도."

"구간 외우고 있냐?" 

오프닝 영상도 건너뛰고 빨리 감기를 죽 누르고 있더라니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랫폼에 남녀 한 쌍이 마주 보고 있다. 갓 기차를 타고 온 듯 보이는 그들은 커다란 트렁크 하나씩을 손에 쥐고 있었다. 눈깔 녹겠다. 과하게 클로즈업되는 남성의 시퍼런 눈깔이 꿀 처바른 듯 진득하게 여성이 있는 방향을 응시한다. 면박을 주듯 저는 비위 상한 듯 얼굴을 일그린 채 패널을 주시했다. 영 답잖다. 이 미친 새끼가 원하는 게 뭔지 영 알 턱이 없다. 소파에 기대서 빨리 감기와 여기, 여기, 여기, 하고 지껄이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있노라니 벌써 골이 당긴다. 역사, 놀이동산, 레스토랑, 술집, 번화가…… 끝도 없이 결제창을 띄워 손가락질만 하고 홱 꺼 버린다. 여섯 편 정도 중간에 버려지는 일이 반복되고 나서야 나카하라의 손이 다자이의 손목을 붙든다. 수락과 허용보다 해탈함에 가까운 수락이었다. 역사며 놀이동산, 레스토랑, 술집, 번화가 따위를 하루 만에 모두 돌기란 생각보다도 힘이 많이 빠지는 일일 터였다. 나카하라는 금일부터 다음 날까지 휴가를 냈고 다자이는 근 이틀 정도 못 가진 장난감 사진을 띄워놓고 사지를 펄럭이는 애새끼처럼 철없이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지갑의 역할을 자처하고 그 어떤 좆같은 지랄에도 좆 같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겨우겨우 달래긴 했지만. 애새끼 기르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엎드린 다자이가 몸을 한 바퀴 뒤척인다. 들고 있던 펜을 나카하라가 있는 쪽으로 내던지며 다 적었다며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지랄맞게 날아온 것을 주워 테이블 위로 올려둔 놈이 손을 뻗는다. 이리 줘 봐. 손에 쥐어진 종이쪼가리를 가만 훑어보던 나카하라의 입술 끝이 깨닫기 이전에 완전히 비틀어졌다. 놀이동산, 레스토랑, 번화가, 밥 먹고 놀고 차 마시고 술 마시고 잠자자고. 정갈하게 죽 늘어진 글씨체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놈이 손에 들린 것을 구겨 내던졌다. 가지가지 한다. 못마땅한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 듯 담요를 여전히 뒤집어쓴 다자이에게 박혀있는 채였다.

"안 돼."

보통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일인데. 야. 네가 너랑 솔직히 그런 사이냐? 그렇게 지껄여 면박이라도 주려던 것을 다시 토라지는 꼴을 보고 슥 삼킨다. 이런 상황엔 뭐라도 들먹여 보는 것보다 에둘러 설명하고 달래는 게 훨씬 안전하고 덜 번거로운 방법이겠거니 했다. 너무 많다고 지껄이면서 다음 날까지밖에 못 어울려. 이거 다 하면 정신없어서 데이트고 자시고 즐기지도 못할걸. 하고 덧붙였다. 다자이 오사무의 역린은 맹독과도 같아서 자주 삶을 파탄의 낭떠러지로 밀어냈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살살 잘 달래고 있노라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불퉁 튀어나와 영 들어가질 않는다. 펜 달라며 손을 까딱이고 받아서 종이 위에 끄적댄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 걸 괜히 공들여 적어내고 다시 들이밀었다. 

"이렇게 해." 다자이의 코스가 이틀을 꼬박 새워서 구경 가능할 지경이었다고 한다면 나카하라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몸이며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놈은 종이를 받아들고 퍽 오랜 시간 들여다본다.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단순한 과정. 데이트라고 일컫기에는 다소 소소하게 보이는 행위들의 나열을 눈으로 입으로 귀로 읽다가 휙 종이를 내던졌다. 바닥에 엎드린 채 제 팔 위로 얼굴을 묻고 있다가 슬그머니 든다.

"놀이동산도 데려가 줘.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놀이동산 가. 그리고 저녁도 먹을 거야. 침대 위나 바닥 위나 다를 것 없이 3초 컷이면 쪽팔려서 어떻게 살아?" 펜을 건네받아서 적어내린다. 놀이동산도. 저녁도. 이 정도도 못하는 저질 체력의 츄야는 필요 없어. 뼈밖에 없는 인간 둘을 그려놓고 그 위로 또 끄적댄다. 나카하라는 그 모습을 물끄럼 내려다보고 있다가 담배를 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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