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이 관린의 집에 도착해보니 집안이 온통 어두웠다. 지훈이 조심히 관린아 하고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특별히 야근할 일도 없었는데 아직 집에 오지 않았나 싶어 급하게 전화를 하니 집안에서 전화 벨이 울렸다. 그제야 집 안을 좀더 살펴보았다. 관린은 대휘랑 통화했던 그 날처럼 쇼파 위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술을 마셨던 건지 쇼파 앞엔 다마신 소주 병과 술이 담긴 소주잔이 놓여있었다. 지훈은 조심히 걸어 관린의 반대편 바닥에 앉았다. 관린이 고개를 들어 지훈을 바라봤다.


"왜, 돌아왔어요? 집에 가는거 아니였어요? 아, 짐 챙겨야하는건가?"

"관린아."

"사과하지 말아요. 사과, 안 받아줄거예요."


지훈을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가 사라졌다. 눈을 감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거칠게 가라앉은 관린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내려앉았다. 지훈은 입술만 잘근거리며 씹었다. 관린이 한참을 창밖만 보다 관자노리를 꾹 누르고 고개를 털었다. 깊은 함숨과 함께 쇼파에서 일어났다. 

지훈이 다급해졌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소주잔을 덥썩 잡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 가득히 알코올이 쓸고 지나갔다. 콧김에서도 알코올 냄새가 났다. 지훈이 몸을 한번 부르르 떨더니 금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한참 바닥에 앉아있어 살짝 저린 다리를 겨우 움직여 관린이 앞에 섰다. 지훈의 시선 앞에 관린의 입술이 바로 닿았다. 지훈이 관린의 티셔츠 앞섬을 잡고 발뒷꿈치를 올렸다. 

관린의 눈이 당황에 커졌다. 눈앞에 두 눈을 꼭 감은 지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알코올탓인지 촉촉하고 뜨거운 입술이 관린의 입술에 닿았다. 관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닿았던 입술이 살짝 떨어지고 꼭 감았던 지훈의 눈이 떠졌다. 지훈도 숨을 참고 있었던지 갑작스레 알콜향이 가득한 지훈의 숨이 관린의 얼굴 바로 앞에서 부서졌다. 티셔츠 앞섬을 잡고 있던 지훈의 손이 관린의 목에 둘러졌다. 지훈은 관린의 까만 동공을 보며 입술을 다시 맞댔다. 이번엔 혀를 내밀어 관린의 입술을 햝고 닫힌 입술을 갈라 치아를 햝았다. 

자신의 입안에 밀려들어오는 낯선 감각에 관린은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지훈의 어깨를 잡아 때어내려했지만 겨우 붙어있는 입술만 떼어냈다. 지훈이 관린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주었다. 


"뭐 하는거예요?"

"나, 지금 너 유혹하는 중이야. 흔들어줘. 저울 추가 너에게 기울수 있게."


지훈의 입술이 다시 관린에게 다가왔다. 관린이 손으로 다가오는 지훈의 입술을 막으려했다. 하지만 너무 가까웠던 탓인지, 너무 급박했던 탓인지 힘조절이 부족했다. 제법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관린의 손과 지훈의 얼굴이 부딪혔다. 그제야 관린의 목에 둘러져있던 팔이 떨어지며 지훈의 자신의 입쪽을 부여잡고 주저 앉았다. 


"괘, 괜찮아요?"


지훈이 주저앉자 관린이 뒷걸음 치던 몸을 다시 당겨 지훈의 앞에 앉았다. 제법 세게 맞은 탓인지 지훈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미안해요. 어디봐요."


관린이 지훈 앞에서 어쩔줄 모르고 있자 지훈이 팔을 들어 관린을 안았다. 고개를 관린의 어깨에 묻었다. 어깨가 조금씩 젖어가고 안고있는 지훈의 몸이 흔들리는 걸보니 울고있었다. 그제야 관린의 팔을들어 지훈의 등에 둘렀다. 토닥토닥 두드려주자 억눌린 울음소리가 세었다. 관린은 불안정하게 쪼그리고 앉은 몸을 바닥에 붙이고 앉아 지훈을 더 당겨 안았다. 그리고 머리도 쓰다듬고 등도 토닥거렸다. 


"울지말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니가 뭘."

"그냥 다요. 울지만 말아요."

"......"

"그 저울 빨리 나한테 돌려요. 내가 안 울게 해줄게요."

"정말?"

"네."

"약속하는거야?"

"예, 약속해요."


관린의 입술이 지훈의 머리에 살짝 붙었다 쪽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지훈의 울음소리를 잦아들었지만 지훈도 관린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날 이후 급하게 연차를 쓰고 부산 본가로 내려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정리가 필요하다 였고 솔직히는 도망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질투를, 상실감을 인정할수 없었다. 연애를 시작할때 거절하는 지훈을 설득했던 건 더 좋아하는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쿨하게 헤어지자 였었다.


'불같이 연애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너나 나나 지금은 당장 서로 밖에 파트너가 없잖아. 그리고 대휘한테 들었는데 너 연애도 해보고 싶고, 동거도 해보고 싶다며. 그래서 나랑 하자고 연애도, 동거도. 너 아무것도 몰라서 괜히 나쁜 놈한테 걸려서 울고불고하면, 그래도 우리가 섹파로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찝찝할거 같거든. 그러니까 일단 나랑 먼저 해봐. 대신에 서로 더 좋아하는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우리 쿨하게 헤어져주는 거지. 그냥 연습 같은거라고 생각해. 이 형님이 언제 너한테 나쁜거 권하는거 봤어? 우리 섹스할때도 좋았잖아. 안그래? 난 오히려 니가 걱정이야. 나한테 홀딱 반해서 안해져주면 어쩌냐.'


다니엘은 연애를 시작하기 전 질펀한 섹스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지훈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그때 지훈은 사귀자는 말을 이따위로 멋없게 하는데 자신이 사겨줘야 하냐며 타박을 했었다. 하지만 곧 다니엘의 입술에 버드키스를 하며 알겠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랑 새로 시작하는 것 보다는 다니엘이 좋아 라고 했었다. 다니엘은 그때 지훈의 말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관계는 귀찮았고, 익숙해진 몸이 편했고, 섹스는 만족스러웠으니까. 둘이 사귀기로 했다고 동거할거라며 대휘에게 지훈이 말했을때 대휘는 절대 안된다고 했었다.


'미쳤어? 너, 저놈 말고 다른 남자는 만나본적도 없으면서 사귄다고? 사랑도 아니라며. 근데, 굳이, 왜? 너 내가 장담하는데 100% 후회할거야. 너 저놈한테 느끼는거 그거 사랑아냐. 첫남자, 첫섹스에 대한 각인현상 같은거야. 알에서 깨어난 오리가 젤 처음 보는 걸 엄마라고 생각하는거랑 같은거라고. 아니, 다니엘 너도 미쳤지. 왜 순진한 애를 꼬셔서 그렇게 해. 내가 절대 섹파말고는 안된다고 했지? 넌 연애에 적합하지 않아. 누굴 눈 돌아가게 사랑해본 적이 없잖아. 넌 그냥 드라마에 많이 나오잖아. 나에게 이렇게까지 한 여자는 처음이야. 머 그런거라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20살때부터 여기에 앉아서 고민상담해준것만 해도 몇명인데 내가 모를거 같아? 너넨 아냐. 진짜. 나중에 나 붙잡고 왜 안말렸냐고 하지말고. 그냥 지금 관궈.'


그땐 대휘의 말을 이해할수 없었다. 적어도 지훈을 보면 가슴이 뛰었고, 지훈을 안고 있을때는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그것이 자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제가 내뱉은 말을 기억했다. 어린놈한테 갈걸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내것을 어린놈이 빼앗아간다고. 말을 내뱉고 나니 무언가 다름을 느꼈다. 다니엘은 지훈이 떠나가는게 싫은것이 아니었다. 지훈을 뺏기는 것이 싫었다. 자신의 질투는 다른 사람을 보기 시작하는 지훈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는 어린 놈에게 있었다.

다니엘은 그제야 자신이 사귈때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할때가 왔음을 알았다. 


"헤어지자, 박지훈.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헤어져주기로 했잖아."


결심하고 나니 다시 슬펐다. 

다니엘은 맥주캔 몇개를 들고 광안리 해안가로 향했다. 검은 바다 위에 반짝이는 광안대교의 불빛이 외로워보였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저 풍경을 보러와서 보지않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고 불빛을 봐주는 건 자신 혼자 뿐이것만 같았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앉아 있었다. 


"뭐 이렇게 청승떨고 앉았노."

"아, 우진이가."

"귀찮쿠로 와 광안리까지 부르노. 아무데서나 마시면 되지."

"왜, 이쁘잖아."

"이쁘긴. 서울말 쓰지마라. 안어울린다. 니 그때 같이 내려왔던 이쁘장한 서울아는 어쨌노."

"지훈이? 갸 서울아 아이다. 마산아다."

"엑?"

"그리고 헤어질거다. 그러니 닌 오늘 내랑 술이나 묵자."


다니엘의 말에 우진이 비닐봉지 안에 들은 맥주를 꺼내 따고 말없이 부딪혔다. 몇캔 사오지 않은 맥주캔은 금세 동이났고 우진인 술을 더 마셔야 겠다며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운좋게 사람이 막 나온 창가자리에 앉을수 있었다.


"와, 이 자리 앉기 힘든데. 하늘이 도왔는 갑다. 으건아. 먹고싶은거 다 시키라. 오늘은 햄이 쏜다."

"아, 다니엘. 으건이 아니라고. 닌 언제까지 으건이라고 부를건데. 그럴거면 의건이라고 하든가."

"닌 그냥 으건이다. 다니엘이 머꼬. 이름이."


둘은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며 잔을 나눴다. 문열린 창가에서 습기가 가득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더이상 지훈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몇잔의 술이 넘어가며 되려 성우가 생각났다. 고마운 사람. 어떻게든 갚아야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성우였다.


-다니엘, 내일 몇시 기차야? 내가 데리러 갈게.

"머고? 뭘 보고 그렇게 웃노?"

"어?"

"이쁘장한 서울아가 안 헤어진다드나? 니 완전 흐뭇하게 웃는데?"

"내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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