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 Voice mail

찌니님 :)

어려운 남자 S2

04





   아미는 버스에서 내려 신난 발걸음을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층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지하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올라온다. 문이 열리면 익숙한 모습이 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썼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지민이었다.



"딱 맞춰 왔네?"

"응, 이건 뭐야?"

"막걸리. 누나가 지금 전 부치고 있대."

"아, 그래? 찰떡궁합이겠네."



   지민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미 표정도 꽤 밝았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별다른 말없이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지민은 기분이 좋은 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언니! 저희 왔어요!"

"어어, 왔어?"

"와, 냄새 대박이다."

"누나! 저희 왔어요!"

"언니~ 귀염둥이 왔어요~ 와. 냄새 대박이다."

"막걸리 사 왔냐?"



   부엌에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는 건지 여주는 나오지도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지민이 사 온 막걸리를 테이블에 벌려놓고 세팅한다. 세팅이 다 끝나도 여주는 나오지 않고 탄내도 나기 시작했다.



"...탄내 난다. 쟤 도대체 뭐 만드는 거야."

"내가 가볼까?"

"앉아있어. 내가 갈게."



   아미가 여주를 도와주기 위해 일어서려고 하면, 지민이 아미를 앉히고 부엌으로 향한다. 순전히 여주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행동이라는걸 알면서도, 아미는 단 1퍼센트 정도는 저를 위한 배려가 아닐까 희망을 걸어본다. 아닌걸 잘 알지만서도.




"술쟁아. 너 술 어제도 먹었지?"

"..아니거든? 나 어제 안 먹었거든?"

"그럼 그저께는."

"..."

"거봐. 전여주나 너나 똑같아. 술은 너~무 좋아해요."



   맞는 말이라서 반박 불가. 예전에 술 취하면 늘 정국이 데리러 와줬기 때문에, 아미는 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미의 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되겠네. 줘봐. 내가 갔다 올게."



   여주가 부침개가 담긴 접시를 들고 현관 가까운 곳에서 정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 둘의 대화를 들어보면 잘생긴 옆집 남자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친절한 여주 언니를 뭐로 보고. 아미가 여주의 편을 들었다. 여주는 이때다 싶어 뜨끈한 전을 접시에 담아 재빠르게 집을 빠져나간다.



"...전여주 저게 진짜,"



   정국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아미는 무슨 상황인지 백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주가 일부러 옆집에 가려고 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눈치챘다. 그렇다면 지민은...




"..."



   뭐가 불안한 건지 손으로 입술을 뜯고 있었다. 아미는 손을 올려 지민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 피 나. 뜯지 마."

"...아,"

"내가 립밤 준 거는?"

"...아, 챙겼지. 바를게."



   지민이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펴 바른다. 아미는 제가 준 립밤을 지민이 품에 가지고 다닌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지민의 시선은 여전히 현관이었지만.







"언니, 방송국은 어때요? 일 안 힘드세요?"

"으응, 뭐. 그럭저럭. 배울 거 천지라 힘들 틈도 없어."

"아, 그래도 부럽다아. 언니는 좋아하는 일 하시잖아요."



   왜. 겸둥이. 고민이 많아? 여주가 물었다. 

   아미는 아직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지민이도, 정국이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는데 뭐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미의 말에 여주가 웃으며 말한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을 거라고. 아미가 울컥하는 마음에 여주의 옷 끝을 만지작대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별말 안 했는데……."

"아뇨. 진짜 힘 나요. 언니는 진짜 좋은 사람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언니니까 당연히 좋아할 수 밖에 없겠죠."

"응?"

"아. 편의점 다 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보다도 더 예쁘고 멋있는 사람이니까. 지민은 여주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아미는 마음속에 있던 말을 내뱉고 되묻는 여주를 피해 편의점으로 도망갔다.





"괜찮으세요?"



   편의점으로 뛰어가던 아미는 막 나오려던 남자와 부딪힐 뻔했다. 죄송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얼른 편의점으로 들어가 막걸리 두 병을 양손에 쥐고 나오면 그 남자와 여주가 얘기 중이었다. 아는 사이인가...? 팀 메인작가라는 말에 둘 사이에 끼어있기도 뭐하고 해서 아미는 편하게 말씀 나누시라고 하고 먼저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왜 너 혼자 와? 전여주는?"

"아, 언니는..."



   대답하려고 하면 복도에서 여주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아미의 답을 들을 틈도 없이 지민이 바로 현관을 열고 나가며 여주를 부른다. 아미는 손에 들린 막걸리를 터질 듯 쥐었다.



"줘. 그러다 막걸리 터지겠다."

"..."



   정국이 아미의 손에 들린 막걸리를 뺏어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여주와 금방 들어올 줄 알았던 지민이 현관문을 활짝 연 채로 들어오지 않았다. 밤이라 쌀쌀한 바람이 들어오면 정국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복도로 나간다. 계속해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의아해서 아미도 밖으로 나가보면 좀 전에 만났던 그 메인작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아, 옆집 산다는 남자가 이 분이셨구나. 깨달은 아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니까. 전여주 옆집 남자 얼굴 보려고 나갔던 거."

"근데 아까 언니가 팀 메인작가님이라고 그러던데?"

"아, 그래?"

"응. 옆집 남자인 건 모르는 거 같았는데…."

"그럼 그게 다 우연인가. 신기하네."



   정국의 말에 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와 지민은 복도에서 더 얘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집 안으로 들어온다. 어쩐지 여주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미야, 나랑 같이 택시 타고 가."

"괜찮은데. 나 버스 타도돼!"

"그냥 타고 가. 너 내리고 나 내리면 돼."



   지민이 말했다. 사실 오늘은 별로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지민과 함께 여주를 만나는 날은 꼭 기분이 이랬다. 싱숭생숭했다. 여러 감정이 겹쳐왔다. 지민을 봐도 두근거림보다는 씁쓸함이 가득했고,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너도 그 작가님이랑 같이 일해?"

"아, 응. 누나가 하는 프로그램 메인작가니까. 같이 일하지."

"그 작가님이 너 봤잖아. 오해하시면 어떡해?"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지민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미가 말없이 지민의 표정을 살폈다. 누나가 곤란한가? 어떡하지? 지민의 표정은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아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싫은 표정이 아닌데."

"티 나?"

"엄청."

"역시 아미는 나에 대해서 다 안다."



   엄지를 치켜드는 지민의 손가락을 고이 접어주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엄지까지 치켜드는 걸까. 지민과는 반대로 아미의 기분은 아래로 추락했다. 아미는 지민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근데 진짜로... 누나가 작가님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응?"

"...나야 모르지."

"그냥 뭔가 찜찜한데."

"..."

"아까 너도 봤잖아. 옆집에 전 갖다주려고 했던 거. 누나가 전 갖다준 걸로 작가님이 착각하거나 막 그러면 안 되는데."

"..."

"아, 그럼 진짜 곤란한데."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그분이 언니한테 사적인 감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거든."



   여주언니가 감정을 가진 거면 몰라도. 아미가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나왔을 때, 그 남자를 쳐다보던 여주의 표정을 떠올렸다. 분명 호감이 있어 보였던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미는 지민에게 이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금 저렇게 들떠 보이는 지민의 기분을 추락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이 택시 안에서 아미 하나면 됐다.



"나 여기서 내릴게. 여기 앞에서 세워주세요."

"야, 지금 밤늦었어. 집 앞까지 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주세요."

"..."



   문을 열려던 아미는 지민의 말에 열려던 손을 멈췄다. 



"너희 집 앞 골목 너무 어두워. 그냥 타고 가."

"...아까 언니랑 술 사러 나갈 때는, 나보고 얼굴이 무기라며."



   뭐야아, 김아미 삐졌어? 지민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미의 팔을 쿡쿡 찌른다.



"...언니만 걱정했으면서."



   결국 서운함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순간적으로 나온 서운함에 아미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는데. 아미가 지민의 표정을 살폈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서운해한 거 알아차렸으면 어떡하지. 아미가 아랫입술을 씹었다.



"...아, 아닌데."

"..."

"나는 누나랑 너랑 똑같이 걱정해."

"..."




"아미 너도 여자잖아. 밤길 위험한 건 똑같아."



   그럼 아미는 지민의 그 웃음에 또 헷갈릴 뻔한다.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니까."

"..."

"아, 다 왔다."




   ...아, 친구. 그래. 아미가 지민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택시가 원래 목적지인 아미의 집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선다. 아미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내린다. 지민이 창문을 스륵 내리며 환하게 웃는다. 손을 흔들면서.



"집 들어가면 카톡해!"

"...어, 너도. 조심해서 가, 지민아."

"나는 남자잖아! 걱정 마. 나도 집 들어가면 연락할게!"



   집에 들어가면 연락하라는 말. 친구 사이에서 걱정되니까 할 수 있는 말일 테지만 아미에겐 너무나도 다르게 다가왔다. 

   너의 다정한 걱정들, 아무 뜻도 없었을 그 웃음들. 나를 헷갈리게 만든 데에는 네 책임도 있었다. 차라리 열일곱, 감정이 예민했던 나를 그렇게 흔들지나 말지. 네가 원래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어렸던 내가 알았더라면, 너의 그 모든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텐데. 설레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전부 다, 너 때문이다.



"..."



   지민이 탄 택시가 골목 끝을 돌아 벗어나면 아미가 가방을 뒤져 열쇠를 꺼낸다. 오늘따라 열쇠 구멍에 열쇠가 잘 안 맞는다. 나중에 도어락으로 바꾸든가 해야지. 지민이 아미의 마음을 들쑤신 것처럼, 괜히 열쇠 구멍을 들쑤셨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열린 문. 쾅,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그대로 현관 앞에 주저앉는다.



"바보냐…. 김아미……."



   괜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본다. 스스로 목소리라도 듣고 좀 깨달으라고. 길이 어두워서 걱정된다는 거, 그냥 그건 여자라는 성별 때문에 여주와 아미를 똑같이 걱정한다는 거였다. 

   애초에 출발선상이 다른 걸 왜 모르냐. 아끼는 친구라잖아. 언니는 좋아하는 여자고, 나는 좋아하는 친구라잖아. 그만 좀 좋아하자. 나 봐주지도 않는 사람, 다른 사람 좋다고 웃는 사람 그만 좀 좋아하자. 

   입술 사이로 짠맛이 느껴졌다. 주저앉은 채로 흐른 눈물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술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을 마신 것처럼 어지러웠다. 술 때문이 아니고 박지민 너 때문에. 그만 좋아하고 싶어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네가 다른 사람에게 잘해줘도, 네가 나를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아도, 나는 그런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을 보는 너를 보며 가슴이 아파도, 너만 보는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아서, 네가 미친 듯이 싫어졌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정해지는 너의 모습에, 너를 좋아해야 할 이유가 다시 생겨버려서. 

   그래서 나는 너를 계속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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