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망암시 주의



*



 토니 스타크는 절망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절망에게 사랑받는 남자였다. 한 순간도 절망을 사랑한 적 없음에도.

 절망은 언제나 그의 발자국 아래 들러붙어 있었다. 옮기는 걸음마다 발바닥 밑에서 길게 늘어나는 덩어리들. 바닥과 제 사이에 단단히 들러붙은 채, 종종 헛발질을 하게 만들고, 잊을 만하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천천히 몸을 붙들어 매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질 때면 함께 날을 새던 유일한 존재가 있었다. 곁을 채우던 사람이 떠나가면 빈자리를 당연하게 채우는 이. 누군가 머물렀던 자욱을 밟으며 다가오는 이가, 어느 순간 절망에 익숙해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돌아 왔노라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바퀴로 흘러내리던 날이면 눈을 감았다. 오랜 악우가 다시 저를 떠나갈 날만을 기다리며.



*



 그렇지만 이건 절망이 아니지. 이건 그냥... 재앙이잖아.

 토니는 눈을 꽉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까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밝아지고, 흐려진 시선이 천천히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보이는 광경은 여전했다. 제 오랜 친구가 기백명은 들러붙어야 만들어 낼 수 있을 법한, 그런 광경.

 ...헤이, 키드. 피터... 입 밖으로 겨우 흘려보낸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마냥 낯설었다. 아니, 이런 걸 목소리라고 할 수는 있나. 닳아빠진 손톱으로 바닥을 북북 긁어내면 이런 소리가 날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끓여 냄비바닥에 죄 눌어붙은 것들과도 닮았다. 인간의 목에서 났다고 믿기에는 어려운 소음이었다.

 다시 한 번 입을 달싹이자 이번에는 목으로 온통 그륵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도대체 목이 왜 이 모양이람.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짜증스레 혀를 차자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얼핏 서툴게 부는 휘파람 소리와도 닮았다. 다만 당연히 나야할 곳에서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문득 깨달았다. 사랑하는 이의 뒤를 가득 메운 금속덩어리와, 제 시야 아래에 얼핏 보이는 검은 무언가가 동일한 물체라는 사실도 함께. ....철 지난 공포영화 속에서나 볼 법 한 연출이네.

 허나 그럼에도 현실이다. 토니는 제 머리 위에 있는 얼굴을 보며 팔을 천천히 움직였다. 끼기긱,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느리게나마 위로 올라가나 싶던 팔은 이내 바닥으로 추락했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얼굴 옆으로 먼지가 풀썩 일었다. 어깨로 둔한 통증이 일었다. 분명 부러지거나, 하다못해 금이라도 간 것이 분명한 감각.

 프라이데이. 반사적으로 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니, 부를 수가 없었다. 토니는 공포영화 효과음 같은 소리를 다시 한 번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입 안에서 침인지 뭔지 모를 것이 새었다. 완전히 엉망이 되기 전에 아머를 벗어야하는데, 과연.



 “...토니. 괜찮, 괜찮아요?”



지금 이 상태로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토니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떴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짧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공기 새는 소리가 가득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숨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토니, 제발... 절박하게 떨어지는 울음 속으로 호흡을 넣어줄 수 있다면.



 “토니, 토니... 많이 아파요? 아니야, 대답하지 마세요. 목이...”



 아프냐고? 목? 입을 벌리자 목소리 대신 더운 숨만 터졌다. 목울대가 제멋대로 울컥이면서 숨통을 조여 왔다. 목인지 어깨인지 모를 곳부터 시작되는 뻐근한 고통. 꽤나 드물 정도의 고통이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토니는 다시 한 번 목울대가 꿀렁이는 것을 느꼈다. 굳이 A.I의 설명이 없더라도 당연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젠장, 이럴 때만큼은 좀 멍청하게 굴어도 좋을 것을. 생전 처음으로 비상한 머리의 무쓸모를 실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 안으로 뜨끈한 느낌이 퍼지는 걸 보면 입술이 터지기라도 한 모양인데 어째 비린 맛은 나지 않았다.

 아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 토니는 제 주변에 가득한 붉은 색을 보았다. 너와, 나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것에서 근간했을 색이 시야를 타고 흘렀다. 짧은 침묵 속에서 휘파람 소리가 새었다.



 “울어요? 왜, 왜... 아픈 거죠, 토니. 괜찮아요. 괜찮을, 거니까...”



 제발. 덧붙이는 목소리가 절박했다. 제발. 토니는 입가로 같은 말을 곱씹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연인은 언제나 그랬다. 말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만을 귀신같이 잡아내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그는 시야 옆으로 짚은 팔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크리액터 사이로 파고드는 색을 보았다. 서로에게서 근간한 색이 섞이는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울렁이는 것도.

 또 원치 않은 절망이 찾아오겠구나. 제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랜 친구와의 만남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즐거울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상황이 조금 더 암울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토니는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입 안에 고인 피를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피터, 핕... 연인의 이름을 닮은 파음이 입가로 뚝뚝 새었다. 엉망으로 얼룩진 숨 조각에도 그저 기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네, 토니. 군데군데 생채기가 난 목소리. 입가로 피거품이 이는 것이 보였다. 뺨 위로 뚝뚝 떨어지는 낯선 감각에 그는 눈을 깜빡였다. 아주 뜨겁고, 또 아주 차가운.



 “...괜찮아요.”



 후들거리던 팔이 바닥을 완전히 짚었다. 비린 냄새 사이로 익숙한 향이 풍겼다. 저를 감싸고 있는 등 뒤로 기울어지는 것들이 보였다. 그래,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있는 것도 나름의 결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제 앞의 사랑을 보았다. 색색이는 숨소리. 천천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한 뼘은 떨어져있던 얼굴이 어느 새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고, 뺨을 타고 흐르는, 괜찮으니까, 울지 말라 속삭이는...

 어쩜 이리 빠짐없이 사랑스러울까. 또한 전부 재앙이다. 재앙이란 무릇 부서지는 별에서 기원했다는 노래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아니지, 노래가 아니었던가.

 허나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부서지는 별 속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을 아는데. 그저 네 시작도 끝도 나라는 것에서 위안을 삼자. 그렇게 생각하며 절망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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